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84
제183화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었다.
대장(大場)이 선 저자처럼 밤낮없이 인파로 복작거리던 창인은 인적이 사라져 거대한 폐가처럼 황량해보였다. 집이든 마을이든 사람이 살지 않으면 같이 활력을 잃는 모양이었다.
창인의 의원(醫院) 노릇을 하던 공 노인의 처소에 이른 진천은 밤톨 크기로 줄어든 심장의 독정을 쌀알만큼 긁어내었다. 공 노인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했다. 피는 제법 많이 뽑았다. 그의 검지 끝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선혈이 굵은 대나무 한 마디보다 약간 작은 옥관을 가득 채웠다.
작업을 마친 진천은 공 노인을 다시 나무족의 숲으로 데려다주었다. 왕복 일백오십 리에 달하는 길이었으나 순수하게 비행한 시간만 따지면 반의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실로 무시무시한 속도였으나 공 노인은 무서워하기는커녕 더 빨리 날 수는 없냐고 보챘다. 진천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진천은 돌아올 날을 기약하지 못했다. 공 노인은 약이 완성된다면 장초를 주안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공 노인에게 독정에 대해 함구해주기를 당부한 진천은 북녘으로 경신을 전개했다. 직선거리만 육천 리가 넘는 장도였으나 쉼 없이 달리면 하루 만에 주파할 수 있을 터였다. 진천은 무리하더라도 다음 날 일몰 전까지 주안에 당도하기로 마음먹었다.
화급을 다투는 사안은 없었지만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리고 심중에 든 궁금증을 한시라도 빨리 해소하고 싶었다.
산정에 오른 진천은 숨을 골랐다.
혹사시킨 주인을 원망하듯 그의 육신이 격렬한 고통을 올려 보냈다. 온 몸의 뼈와 근육들이 아우성을 쳤고 심장과 폐는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진천은 자신의 몸에 사과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정한 시한을 지킬 수 있어서 뿌듯했다. 아직 지평선에 걸쳐 있는 태양이 장엄한 잔광을 아낌없이 뿌리고 있었다. 붉게 물든 서천을 잠시 감상하던 진천은 반대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미 처처에 등이 걸려 다가올 어둠에 대한 대비를 마친 주안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낯익은 도시를 일별한 후 일각가량 운기조식을 취한 진천은 해가 지자 하산했다. 삼보장의 친인들과 재회할 시간이었다.
쏴솨솨.
소슬바람이 대나무 숲을 훑고 지나가며 청량한 소리를 남겼다.
죽림으로 들어간 진천은 권왕이 즐겨 찾는 공터로 향했다. 그의 기운을 감지한 권왕이 마중을 나왔다.
“어떻게 된 게냐? 오늘 낮에 받은 서신에 쓰기를 창인에 간다지 않았더냐? 금성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왕복으로 따지면 일만 리가 훨씬 넘으니 최소한 사나흘은 걸릴 텐데 무슨 수로 이틀 새 다녀왔느냐? 도중에 발을 돌린 게냐? 그건 그렇고 마왕은 대체 어떤 묘수로 따돌린 게냐? 나는 네가 변을 당했을까 싶어 서신이 도착할 때까지 잠도 이루지 못했다. 몇 번이나 마련으로 쳐들어가려다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든 네 행방이 확인될 때까지는 단독으로 행동하지 말라던 당부를 상기하고는 겨우 참았느니라. 그나저나 두 시진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구나. 강 맹주를 볼 수 있었을 터인데.”
바람에 휘청거리는 청죽 위에 선 채 권왕의 질문공세에 답할 틈을 찾고 있던 진천은 처진 눈을 치떴다. 대번에 의문이 풀렸다.
진천은 허탈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왜 몰랐을까.
고량이 그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다만 알지 못할 사유로 외조부의 도착이 늦어진 것뿐이었다. 판도를 완전히 바꿀 기회를 놓쳤으나 어쨌든 외조부는 그의 청에 응해 양자호반으로 날아왔을 터였다.
전후사정을 짐작했으면서도 진천은 권왕에게 굳이 물었다.
“그날 제 외조부께서 쌍룡암에 오셨는지요?”
“이를 말이더냐. 그가 오지 않았더라면 곽 벌주를 쫓아버리고 너와 마왕을 쫓을 수도 없었을 게다.”
웬일인지 권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연유를 추측하기 어려웠기에 진천은 의아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밑에 가서 얘기하자.”
등을 돌린 권왕이 죽림의 공터로 내려갔다. 진천은 그의 뒤를 따랐다.
평소처럼 애용하는 말 바위에 걸터앉지 않고 권왕이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진천은 그의 맞은편에 좌정했다.
“내 얘기부터 해주마. 네가 마왕을 끌고 떠난 후 나는 곽 벌주와 계속 싸워야 했다. 발을 빼서 너를 쫓고 싶었지만 곽 벌주가 허용하지 않더구나.”
진천은 좀 전에 권왕의 낯빛에 그늘이 드리운 까닭을 알았다. 남천도왕과 충돌한 권왕은 무력의 약세를 체감했을 터였다.
권왕의 일자 눈이 축 처졌다.
“네게 무엇을 숨기겠느냐? 나는 초장부터 곽 벌주에게 밀렸다. 해 볼만 한 정도가 아니라 잘 하면 내 몸뚱이에 칼을 박을 수도 있을 거라 여겼는지 꽤나 기세등등하게 나오더구나. 허세가 아니었다. 삼십 초도 지나지 않아 나는 방어에 급급한 처지가 되었으니까. 그의 칼은 강 맹주 못지않게 매섭더구나.”
섣불리 권왕을 위로하려 들지 않고 진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자신의 손자를 신경 쓰지 않았는지요?”
“그래. 오히려 내가 우리의 싸움에 휩쓸려 그놈이 해를 입을까봐 전권을 옮겨야 했다.”
진천은 씁쓸했다. 남천도왕은 곽건이 무인으로서 재기불능이 되었으리라 판단하고는 그를 방치한 것이었다. 실로 냉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열세이긴 했지만 일방적으로 깨진 건 아니다. 네 걱정으로 목전의 상대에게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그럴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님을 깨달은 나는 사생결단을 내기로 작심했다. 저승길에 동반자로 삼고자 하는 내 결의를 알아차렸는지 곽 벌주가 주춤하더구나. 하지만 전과를 올리고자 하는 미련이 남았는지 쉬이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십여 초를 더 치고 박고 있던 중에 별안간 그가 달아나더구나. 일순 어리둥절했지만 금세 도주의 이유를 알았다. 내 뒤에서 그토록 엄청난 기운이 다가오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었지.”
진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기운’의 주인공이 외조부임은 불문가지였다.
“강 맹주의 출현으로 곽 벌주가 놀란 똥개마냥 달아나는 광경을 보면서도 통쾌하기보다는 착잡하더구나. 내 힘이 아니라 남의 위세를 빌어 적을 쫓아낸 꼴이니.”
진천은 의기소침해진 의형이 안쓰러웠다.
“……남천도왕이 손자는 데려갔는지요?”
“그래도 아주 냉혈한은 아닌지 튀면서 챙겨가더구나.”
어쩌면 곽건이 삼보장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진천은 괜히 안도했다.
“그 이후엔 어찌 되었습니까?”
권왕이 말을 잇지 않자 진천이 질문으로써 대화를 재개했다.
평소라면 진천에게 ‘알아맞히기 놀이’를 강요했을 권왕이 맥없이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네가 알려준 여러 상황에서의 대처법에 따라 곽 벌주를 추격해 끝장을 내어야 했을 테지만 당시엔 그럴 경황이 없었다. 나는 곽 벌주가 멀어지기도 전에 강 맹주와 재회 인사도 나누지 않고 너와 마왕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느니라. 경신을 전개하면서 이유를 설명했더니 강 맹주가 깜짝 놀라더구나. 그러더니 나보다 더 서두르더구나.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네가 보았어야 했는데. 누가 핏줄 아니랄까 봐.”
진천은 외조부의 태도가 심히 낯설었다.
“추적 초반에 큰 실수를 했다. 둘 다 발자국을 거의 남기지 않아 애를 먹었느니라. 그렇다고 따라가는 사람들 편하라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간 것도 아니고. 그래도 어찌어찌 네 자취를 더듬어가며 뒤를 쫓는데 강 맹주가 대뜸 나를 비난하지 뭐냐. 가뜩이나 나도 조바심이 나서 마음이 편치 않던 차라 그럴 때가 아님에도 그와 언쟁을 벌이고 말았다. 그러는 댁은 왜 그렇게 늑장을 부렸느냐고 맞받아치면서.”
“…….”
“부끄럽지만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강 맹주였다. 아니, 자신이 정신을 차렸다기보다는 내 정신을 일깨워줬다고 하는 게 옳겠구나. 뭐, 결과적으로는 그러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테지만.”
진천이 처진 눈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모습을 본 권왕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테지, 아우야?”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진천은 권왕의 장난기가 돌아와 반가웠다.
“제 외조부와 말씀을 나누시던 중에 제가 드렸던 말씀이 떠오르신 모양이군요.”
권왕이 모처럼 파안대소했다.
“크하하, 그래. 만약 마왕이 나타나서 네가 나를 두고 달아나는 경우엔 세 가지 도주로 중 하나를 택할 거라고 하지 않았더냐. 강 맹주가 마왕과 곽 벌주의 작당 가능성을 예상했으면서도 아무 대책도 없이 나왔느냐고 힐난하는 순간 퍼뜩 그 말이 생각나지 않았겠느냐. 나는 강 맹주와의 입씨름을 멈추고 얼른 지나온 경로를 되짚어 보았다. 그랬더니……, 쩝.”
진천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다음 경과는 불 보듯 뻔했다. 권왕은 필히 그가 서북 방면의 시무곡(始霧谷)으로 향했으리라 오판했을 터였다.
“차라리 그냥 차근차근 쫓아갔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네가 만상석굴 쪽으로 갔음을 알아차렸을 텐데. 나는 그때까지의 흔적만 보고 네가 당연히 시무곡이 있는 변산(弁山)으로 간 줄 알고 그리로 날아갔지 뭐냐. 강 맹주한테 다 안배를 해놓았다고 큰소리까지 탕탕 치면서 말이다. 나중에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족히 삼사백 리를 가고 나서야 잘못 짚었음을 깨닫고는 망연자실했더랬다. 반 시진 가까이 날려먹었으니 너를 구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고 봐야 하잖느냐. 나와 강 맹주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시무곡의 빌어먹을 안개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진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그의 추측이 틀렸단 말인가. 진천은 마왕으로 하여금 수색을 단념토록 한 것은 권왕과 외조부였으리라고 거의 확신했다. 쌍룡암에서 남천도왕을 쫓아버렸던 상황이 흑사천에서 재현되었으리라고 본 것이었다. 그런데 권왕과 외조부은 시무곡에서 추적을 단념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왕은 어째서…….
권왕의 말이 진천의 사고를 중단시켰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왕이 마련에 다대한 피해를 끼친 너를 곱게 보내줬을 리가 만무하지 않으냐. 머리가 텅 비니까 몸이 저절로 움직이더구나. 나는 처음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냥 주안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부지불식간에 생각했을 테지. 무작정 내가 골짜기 밖으로 달려 나가니까 강 맹주가 따라오면서 무슨 짓이냐고 묻더구나. 나는 한 군데 더 가 봐야 할 곳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니 별안간 만상석굴이 떠오르는 게야. 어째서 나머지 한 곳인 상봉협(上峯陜)은 빼버렸는지 모르겠구나. 그냥 본능적인 선택이었을 게다.”
진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권왕이 포기했다면 뒷일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몰랐다. 십중팔구 그의 은신처를 찾아낸 마왕과 재격돌해야 했을 터였다.
“오양만답에 이르렀을 때 이번엔 제대로 짚었음을 알았다. 평야 한쪽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더구나. 삼척동자라도 너와 마왕이 남긴 흔적임을 알 수 있었을 게다. 거기서 네가 변을 당하지 않았음은 석굴로 이어진 핏자국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에 감사했느니라. 나와 강 맹주는 만상석굴로 들어가지 않고 뒤로 넘어갔다. 네가 그리로 갈 경우엔 뒤편의 하천을 이용할 거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
“만상석굴 위편의 둔덕을 내려가기도 전에 마왕임에 분명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도 당연히 우리의 도래를 알아차렸을 테고. 나나 강 맹주나 기를 갈무리하지 않았으니까. 꽤 거리가 멀었는데 우리 두 사람을 보자마자 곽 벌주와 마찬가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빼더구나. 나와 강 맹주는 그를 쫓지 않고 그가 있던 곳 주위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네가 무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마왕이 거기서 얼쩡거릴 까닭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강 맹주는 오늘 낮에 네 서신이 도착한 후에야 삼보장을 떠났다. 아무튼 이리 멀쩡한 너를 다시 보게 되었으니 이제야 심장이 제대로 뛰는구나. 그저께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아우야.”
진천은 수수께끼가 깔끔하게 풀려 더없이 개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