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1
제20화
거리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처처에서 올라오는 함성에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진천은 어미를 따라 장터에 첫 구경을 나온 꼬마처럼 상기된 얼굴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이 주위만 해도 수만 명은 되겠습니다.”
온갖 정보에 밝은 상인답게 노덕이 바로 설명에 들어갔다.
“중원 중남부의 요처 중 한 곳이긴 하나 원래 포성의 인구는 십만을 넘지 않는다네. 평소엔 대략 팔만 어림으로 알고 있네. 하지만 무림 대회 기간 중에는 외지에서 그 두 배에 달하는 인파가 몰려온다더구먼.”
“그러면 지금 적어도 이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있겠군요.”
“내 짐작으로는 거기서 다시 이십만을 더해도 될 듯싶네. 왜 그런지 알겠는가?”
노덕의 시험에 진천이 멋쩍게 웃었다.
“그녀 때문이군요.”
노덕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네. 지난번 대회에서 온 무림의 주목을 받은 놀라운 신성이 출현했으니 강호의 기대치가 한껏 높아졌을 걸세. 먼젓번에 그랬다고 이번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지만 사람 심리가 어디 그런가. 실제로 하남편봉의 등장에 자극받은 재야의 강자들이 대거 참여할 가능성이 충분하네. 그들을 보러 배전의 인파가 몰려들 것임은 불문가지일세. 전설이 시작되는 현장에 있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은 얼마든지 있다네.”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엿새 전 오창을 떠난 노소는 남북으로 육백 리를 뻗은 오륜산맥의 오른쪽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노덕이 택한 경로에는 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포성은 지금 무림 대회가 한창이었다.
격년으로 이월마다 열리는 포성 무림 대회는 팔십사 년의 전통에 더해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큰 규모 덕에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실적도 여타 무림 대회에 비해 월등한 편이었다. 역대 우승자 중 훗날 사벌(邪閥)의 사령에 든 이들이 넷이나 나왔고 정맹의 용호와 마련의 백마(百魔)에도 각각 두 명씩 들어갔다. 그런 연유로 대륙에 산재한 중소 방파나 지역 무관 출신의 신진들은 포성 대회를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등용문으로 여겼다.
“그나저나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묵을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진천의 걱정에 노덕은 괜히 미안해졌다.
북상함에 따라 날씨가 점점 추워졌다. 오창에서 솜옷을 구해 입었지만 노덕은 내공 덕분에 기온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진천과 달리 노숙을 버거워했다.
“어떻게든 될 걸세. 무림 대회 중의 장사로 일 년을 난다는 포성이니 먹고 잘 곳이 널려 있다네. 찬 바람을 막을 숙소야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 염려하지 말게. 우선 대회의 진행 상황도 알아볼 겸 근처 객잔에 들어 요기라도 함세. 지금쯤이면 예선전이 막바지일 걸세.”
진천은 여느 때처럼 노덕의 권유에 군말 없이 따랐다.
미시(未時) 말이라 식사를 하기엔 애매한 시간인 데다 사람들이 비무를 보러 밖으로만 도는 탓인지 객잔은 의외로 한산했다.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탁자들 너머로 겨우 세 무리의 객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노덕이 바가지를 씌우려 드는 주인과 줄다리기를 하더니 적절한 가격에 타협을 보았다. 그렇더라도 다른 도시라면 소면 열 그릇은 시킬 수 있는 값이었다. 객잔 주인은 무려 다섯 배나 폭리를 취한 셈이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지 선불로 요구한 식대를 받자마자 바로 주방에서 그릇 두 개를 내와 던지듯 탁자에 내려놓고 휑하니 돌아서는 주인의 등에 대고 노덕이 혀를 찼다.
“쯧쯧, 기본이 안 된 사람이구먼. 뜨내기라 할지라도 손님을 대함에 있어서는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하거늘.”
진천이 심사가 편치 않은 노덕을 달랬다.
“하하, 그래도 단골에게도 퉁명스럽기 이를 데 없는 장 아저씨보다는 친절한데요.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시지요.”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못했지만 퉁퉁 불어 터진 면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노덕은 식욕이 싹 달아났다. 그래도 기다리고 있는 진천을 위해 마지못해 젓가락을 집었다. 진천은 마치 진미를 맛보듯 행복한 표정을 하고는 소면을 먹었다. 순식간에 그릇을 깨끗이 비운 진천을 바라보며 노덕이 자기 몫을 내밀었다.
“나는 생각이 없으니 이것도 들게나.”
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걸로 충분합니다. 구경을 다니려면 힘이 나야 하니 대인도 배를 채우셔야지요.”
거짓이 아닌 데다 틀린 말도 아니기에 노덕은 억지로 소면을 입에 집어넣었다.
창인에 머무는 동안 노덕은 일일일식(一日一食)이 그곳의 풍습임을 알게 되었다.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노덕은 어렵지 않게 두 가지 이유를 추론해 냈다. 하나는 식량 자체가 극히 부족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 년 내내 여름만 지속되는 탓에 음식이 쉽게 상한다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창인에서 아사자가 사라진 건 ‘허 노야’가 온 이후부터라고 했다. 그전에는 먹을거리를 둘러싸고 아귀다툼이 끊이지 않았다고, 짧은 기간 친분을 쌓은 의방의 공 노인이 귀띔해 주었다.
소국(小國)이나 다름없는 마령 문가의 운영을 총괄하던 조인상의 수완이라면 창인 정도의 작은 마을을 건사하는 것쯤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렇더라도 창인에 평화가 정착된 데는 어린 진천의 공이 지대했음을 노덕은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창인의 번성은 조인상의 경륜과 진천의 무력이 낳은 합작품이었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일정이 내 예상보다 빠르구먼. 오늘쯤 예선이 끝나고 모레부터나 본선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벌써 십육강전이라니. 우리도 빨리 나감세. 신시(申時)에 시작된다니 서두르는 게 좋겠네.”
객잔에서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노덕이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건너편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객 중 한 명이 참견하고 나섰다.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오십 대 후반의 초로였다.
“늦었소, 노인장. 보아하니 이제야 포성에 당도한 모양인데 지금 나가 봤자 관전은 고사하고 밟혀 죽기 십상이지. 괜한 고생하지 말고 여기서 느긋하게 함성이나 감상하는 게 나을 거요.”
노덕이 콧수염과 말을 섞었다.
“그렇구려. 이번에는 어떻소? 지난번 하남편봉처럼 두각을 나타낸 신성이 나왔소?”
콧수염이 콧방귀를 꼈다.
“흥,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 죽치고 있을 턱이 있겠소?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몇 날 며칠 비무대 주변에서 노숙했지만 말짱 헛수고였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더니 딱 그 짝이오. 하남편봉은커녕 금번에 본선에 오른 무인들은 재작년 대회의 다른 출전자들보다 못하다는 게 중론이오. 내 참, 후대에 전해 줄 생생한 목격담을 건지자고 가업도 팽개치고 하양(河陽)에서 구백 리나 달려왔거늘 이렇게 시시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런데 노인장은 어디서 왔소?”
“나는 주안 사람이라네.”
“허, 나보다 훨씬 먼 데서 왔군. 그런데 혹시 기념품이 필요하지 않소? 나한테 아주 좋은 물건이 있는데.”
콧수염이 보따리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여인들이 사용하는 장신구였다.
“이걸로 말할 것 같으면 하양 특산의 조개껍질로 만든 패물이오. 이곳의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요놈들만 남았는데 이것도 인연이라 노인장에게 헐값에 넘길 테니 가져가는 게 어떻소? 처첩이든 기루의 계집들이든 보는 순간 오줌을 질질 쌀 거외다. 진품임을 보장하니…….”
노덕이 콧수염의 사설을 끊었다.
“미안하지만 보다시피 넉넉지 못한 처지라네.”
노덕의 초라한 행색을 훑어보면서도 콧수염이 미련을 보였다.
“그래도 이 먼 곳까지 왔으면 최소한의 경비는 마련했을 거 아뇨? 거저 주는 셈 치고 진짜 재료값의 반의반만 받을 터이니 잘 생각해 보쇼. 노인장은 횡재한 거요. 주안에 가져가 되팔기만 해도 수십 배는 남을 테니까. 노인장이 남 같지 않아서 시혜를 베푸는 거요. 몇 년 전 홍수에 휩쓸려 돌아가신 내 큰형과 너무 닮아서 말이오.”
콧수염의 일행이 ‘자네는 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운운하며 추임새를 넣자 노덕이 눙쳤다.
“그렇다면 당장은 돈이 없으니 외상으로 주지 않으려는가? 나중에…….”
콧수염은 관심을 접었다.
“이런 제길, 아까운 입심만 낭비했군. 꺼져, 거지들아.”
제집인 양 축객령을 내리는 콧수염을 힐끗 쳐다본 진천이 노덕을 재촉했다.
“가시지요, 대인.”
진천을 따라 객잔을 나가는 노덕에게 ‘꼴에 대인이래.’라는 콧수염의 흉이 달라붙었다.
콧수염의 말은 사실이었다.
십육강전이 열리는 장소마다 수만 군중이 수십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통에 비무대(比武臺)로의 접근이 불가능했다. 수백 수천의 새까만 머리통들이 철벽처럼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자네 혼자라면 어떻게든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걸세. 나는 아까 그 객잔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들어갔다 오게나.”
노덕의 제안에 진천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아닙니다, 대인. 같이 봐야지요.”
진천이 대안을 제시했다.
“차라리 뒤로 돌아가 저 사람들처럼 지붕 위에서 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을 돌린 노덕이 즉각 찬성의 뜻을 밝혔다.
“그게 낫겠구먼. 내 부족한 안력은 자네의 설명으로 메우면 될 터이니.”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간 진천이 노덕을 안고 담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이 층 와옥의 지붕으로 건너갔다. 그들 말고도 선객들이 여럿 와 있었다. 편평(扁平)한 명당자리는 이미 그들이 차지한 터였기에 노소는 약간 기울어진 아래편에 나란히 섰다. 삼사십 장이나 떨어진 탓에 한 변의 길이가 칠팔 장에 달하는 거대한 비무대가 바둑판 크기로 보였다. 노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비무대 위에 삼각형을 이루고 선, 바둑알처럼 작아 보이는 세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서리에서 마주 보는 둘은 비무를 할 무사들일 테고 가운데는 참관인이겠구먼.”
잠시 후 신시를 알리는 징이 울렸다.
진천이 노덕에겐 모기 소리보다 작게 들리는 참관인의 말을 전해 주었다.
“왼쪽은 출원(出原) 삼도방(三刀幇)의 곽찬(郭贊)이란 사람이고 오른쪽은 보명(保明) 자하무관(紫霞武館) 출신의 송구(宋九)랍니다. 곽찬은 칼을 찼고 송구는 깃발 종류인 번(幡)을 들었습니다. 둘 모두 삼십 대 중반으로 보입니다.”
“보명의 자하무관은 금시초문이지만 출원 삼도방은 나름 알아주는 방파인데. 자네가 보기엔 누가 이길 것 같은가?”
“하하,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말해 보게나. 고수들은 척 보면 안다던데. 아마 저 둘의 승부를 두고 어마어마한 판돈이 걸려 있을 걸세. 자네도 재미 삼아 예측해 보게나.”
“너무 멀어서 기운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대인. 얼핏 번을 든 쪽이 더 강해 보이긴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허허, 그런가?”
주의 사항을 알리는 참관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노덕이 때아닌 감상에 잠겼다.
“가는 길에 포성 무림 대회를 보자고 한 건 하남편봉과의 조우 때문만은 아닐세. 나의 의형이 강호에 첫선을 보인 게 바로 여기였네. 당시 주안 표국의 일개 표사였던 의형은 사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세기 가까이 지났구먼.”
“인연이 깊으시군요. 실은 저도 이곳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왕객잔의 장 아저씨도 포성 무림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수년이나 구슬땀을 흘렸다고 하더군요. ‘거사’를 치르느라 결국 포기해야 했지만 만약 나가기만 했으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고 큰소리치곤 했습니다.”
노덕은 창인을 떠나는 날까지 매일 고주망태로 취해 있는 바람에 변변한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었던 털보가 떠올랐다. 그의 무력이라면 허풍만은 아닐 터였다.
이윽고 비무 개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노덕은 한껏 안력을 돋우었다. 그러나 떨어져 있던 바둑돌 두 알이 붙었다는 것만 알아볼 뿐 비무의 양상에 관해서는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진천에게 고개를 돌린 노덕은 그가 비무대가 아니라 엉뚱한 곳을 보고 있음을 알고는 흠칫했다. 진천의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흑의를 입은 자가 굵은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그를, 아니 진천을 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노덕은 놀라서 경사진 지붕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흑의괴인이 발했음에 분명한 음성이 고막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이게 웬 월척이지. 만난 기념으로 눈알 하나를 뽑아 주마, 하남신룡.”
꽤 먼 거리였으나 바로 앞에서 말한 듯 또렷하게 들렸다. 한데 주변의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흑의괴인이 소리를 단속했다는 의미였다. 노덕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