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66
제65화
여상구와 담소를 나누기가 거북스러운지 대웅이 운공을 핑계로 축객령을 내렸다.
진천은 의형과 함께 와옥을 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먹구름이 달을 가린 데다 날이 밝기 직전이라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웠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반딧불만 한 미광으로도 컴컴한 동굴 속을 나아갈 수 있는 안력의 소유자들이기에 거침없이 어둠을 가르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천 년 노송에 이른 의형제는 애용하는 너럭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좀 어떠신지요?”
진천의 물음에 여상구의 이마를 가로지른 주름이 깊어졌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구먼. 흉골이 부러지고 장기도 상한 모양일세. 혈맥도 여러 곳이 터졌고.”
“…….”
“허허,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아우님.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네. 한두 달 고생하면 나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더욱이 몸은 이래도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통쾌하다네. 어쨌거나 화월이 칼을 놓게 만들었으니 꽤 남는 장사 아닌가. 그보다 더 중요한 성과는 내 뇌리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혜령과 주연이 떠나간 거라네. 허전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후련함이 훨씬 크구먼. 앓던 이가 빠진,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심장에 박혀 있던 쐐기가 뽑힌 느낌이랄까.”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다 아우님 덕분일세. 필생의 숙원이 이렇게 해결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공치사를 듣는 게 부담스러워 진천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형님.”
“궁금한 점이라니? 말해 보게나. 아우님에게라면 소싯적에 벌였던 추잡한 짓까지 솔직하게 까발림세.”
진천은 쓰게 웃었다.
“좀 전에 대웅에게 하신 말씀 말입니다. 저에 관해 가장 중요한 사실이 뭔지요?”
여상구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허어, 철곤귀 같은 둔재도 금방 알아듣던데 어찌 아우님 같은 천재가 모른단 말인가. 너무나 쉬워 알려 주기도 민망스럽구먼. 삼보장주나 금강권도 내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하다못해 가린까지 말일세.”
“…….”
“그래도 모르겠는가?”
“죄송합니다.”
“이런, 죄송할 것까지야. 하지만 의외구먼. 아무리 중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지만, 아우님처럼 똑똑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는 바가 있다니.”
진천은 의형이 그만 놀리기를 바랐다. 장난기가 어렸던 여상구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네. 다소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으나 아우님이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일세.”
“아……!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흠, 상투적인 표현으로만 받아들이면 섭섭하네. 가령 지금 아우님이 절멸도로 내 목을 자르려 들어도 나는 수긍할 걸세. 아우님의 행사에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여기고 말일세. 철곤귀나 금강권 등도 마찬가지일 거라 확신하네. 삼보장주는 말할 것도 없고.”
진천은 의형이 드러내는 맹목적인 신뢰감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금석 같은 믿음은 인간관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덕목이었다.
웬일인지 여상구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몇 마디만 더 함세. 아우님에겐 안 된 일이지만 이번 구인결로 용호가 되기는 글렀으니 아예 이참에 우리끼리 사업을 도모하는 게 어떨까 싶네만.”
“사업이라 하심은?”
“문파 창립 말일세. 정파든 사파든 상관없네. 아우님의 뜻이라면 마도(魔道)라도 따를 걸세. 우리는 문을 열자마자 중립 지대에서는 최강을 다투는 세력으로 자리 잡을 걸세. 철곤귀와 하남편봉이 각자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간다고 해도 말일세. 아우님과 나와 가린이 있잖은가. 그리고 아우님이 깃발을 올리면 장담컨대 사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강호를 떠도는 수많은 인재들이 밀물처럼 몰려들 걸세. 앞으로 만수보의 기적이 만천하에 퍼져 나가면 세상 모두가 내일의 태양이 누군지 알게 될 터이니 이는 필연지사일세.”
흥분으로 인해 여상구의 음성이 점점 커졌다.
진천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형님. 하지만 당분간은 무리일 듯싶습니다.”
“어째서 말인가?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 않던가?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는 속담도 있고. 이런 사안은 발상과 동시에 실행에 옮겨야 하네. 일단 틀을 갖추면 내용물은 금방 채워질 걸세. 잡다한 일은 나와 삼보장주에게 맡기고 아우님은 느긋하게 지켜보며 즐기기만 하면 되네.”
진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저는 마령 문가의 종손이 백도방에서 비명횡사한 변고가 돌발적인 사태가 아니었으리라 봅니다. 마령 문가는 일을 꾸미기에 앞서 아마도 정맹 전체의 재가를 받았을 터이고, 나아가 마련과도 사전에 협의를 했을 것입니다. 마련은 백도방에 준하는 대가를 보장받았을 테고요. 정맹과 마련이 각자 백도방만 한 방파를 통째로 집어삼킬 속셈이었다면 사벌과 월교도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들이 다음 먹잇감으로 우리가 세운 문파를 노릴까 봐 염려하는 겐가, 아우님?”
“꼭 우리가 아니더라도 중립 지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늑대들이 살점을 한 번만 뜯고 만족할 리는 없으니까요.”
“이 우형은 아우님의 혜안을 따라잡지 못하겠구먼. 사패가 작당해서 중립 지대를 나눠 먹기라도 할 거라는 말인가? 그리되면 구(舊) 사왕(四王)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이 장차 강호에 불어닥칠 태풍의 전조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물론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간 강호 정세를 살펴볼까 합니다. 길어도 한 달 정도면 제 추측이 그럴듯한지 여부를 실증할 정보들을 얻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파 창립 건은 그때 가서 다시 얘기를 나누지요.”
미련이 남았는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여상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님 뜻대로 하세나. 그런데 만약 아우님의 짐작대로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요. 단순히 중립 지대의 유력한 방파들을 쳐서 이득을 취하려는 수준이라면…….”
대답을 하다 말고 진천이 말을 멈췄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둠을 뚫고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진천은 바위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차소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녀가 전했다.
“고랑(高良)이 깼어요.”
* * *
쌍와옥(雙瓦屋)으로 걸어가는 동안 날이 밝았다.
다시 운공에 들겠다는 여상구와 헤어진 진천은 차소영과 함께 백와옥(白瓦屋)으로 향했다. 일 층 맨 안쪽 방에서 고량이 침상에 누운 채 진천을 맞이했다.
노미현은 보이지 않았다. 차소영에 따르면 그녀는 고량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같이 있겠다며 고집을 부리다가 새벽녘에 갑자기 수마에 빠졌다고 했다. 고흥에서 주안까지 여섯 시진 넘게 마차를 타고 온 데다 고량을 간호하느라 밤을 새운 탓에 고단하기도 할 터였다. 노미현을 안고서 위층 침실에 데려다주고 내려오자마자 고량이 눈을 떴다고 차소영이 진천에게 알려 주었다.
진천이 침상으로 다가가 고량과 눈을 맞추었다. 그가 안부를 묻기도 전에 고량이 입을 열었다.
“면목이 없다.”
“무슨 말이오?”
“나만 패했더구나.”
진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 형은 잘 싸웠소. 상대가 묵월도였잖소?”
고량의 눈빛에 짙은 허탈함이 배어 나왔다.
“하남편봉과 대웅은 각각 적운도와 해일도를 꺾었다지? 그들은 묵월도보다 윗길의 강자들이잖나. 가린은 어떻고. 파혼도라니.”
“…….”
“그들을 시기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을 깎아내리고자 함도 아니고. 묵월도와의 일전에서 최선의 최선을 다했기에 나로서는 한 줌의 여한도 없다. 나는 다만 내 눈으로 보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그 놀라운 대결들을.”
“또 기회가 있을 거요.”
바로 진천의 말을 받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던 고량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자는 정확히 어디쯤에 있을까, 천?”
차소영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진천은 ‘그자’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아들었다. 고량의 살부지수(殺父之讐)인 혈영장(血影掌) 남진일 터였다.
“대웅에게 들은 바로는 적운도나 묵월도 급이겠지만 무력이 상승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소. 장공을 특장기로 하는 자들은 보통 팔십 대가 전성기라 하니. 하지만 그가 여전히 외마(外魔)에 머물러 있다는 걸 보면 파혼도에 비견하긴 어려울 거요. 설령 근간에 무위가 올라갔다고 해도 수라도나 해일도, 혹은 철벽도와 비슷한 수준일 듯싶소.”
이를 가는지 고량이 각진 턱에서 부드득거리는 기음이 나왔다.
“한참 윗줄의 상수로만 알았던 묵월도가 발돋움을 하면 닿을 곳에 있더구나. 비록 패했지만 나는 그와의 일전에서 희망을 보았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머지않은 훗날 ‘그자’의 칼을 받아 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 ‘그자’에게 빚을 받으러 갈 수 있을 거라고. 수십 년 후가 아니라 수 년 이내에.”
“물론이오. 다만 차 소저를 위해서라도 단순히 그자에게 맞설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그자를 능가하는 무력에 도달한 후 결행에 나서기를 바라오.”
“명심하마.”
차소영이 진천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고량을 위해 염두에 둔 선물이 있었지만 진천은 말을 아꼈다.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할 참이라서가 아니라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고도 이틀 동안 몸을 추슬러야 했던 고량은 사흘째 밤에야 운공에 들 수 있었다. 여상구과 대웅은 여전히 하루에 여덟 시진을 운기조식에 써야 했다.
그들 못지않은 중상을 입었지만, 가린은 운신에 별반 지장이 없었다. 큼직한 도끼에 찍힌 듯 끔찍할 정도로 갈라졌던 어깻죽지의 부상도 저절로 오므라들더니 벌써부터 아물고 있었다. 실로 경이로운 회복력이었다.
하수린은 주인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삼보장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녀는 가린을 꼬드겨 매일 후원의 연무장에서 비무 수련을 했다. 둘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가린은 하수린의 채찍에 맞고도 성을 내지 않고 그녀를 잡으면 승리를 선언한 후 얌전히 놓아주었다. 혹시라도 가린이 힘 조절을 잘못해서 불상사가 생길까 봐 불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진천은 다음 날부터는 안심하고 자기 볼일을 봤다.
정문 왼쪽 죽림에 지하 연무장을 만드는 대공사는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돌과 목재를 실은 수십 대의 수레가 수시로 삼보장의 대문을 드나들었고, 사오 백에 달하는 일꾼들이 일출시부터 일몰 때까지 구슬땀을 흘렸다.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전날 백도방과의 오인결 때 무연곡으로 따라갔던 거지패의 털보와 천민 출신인 짝귀는 어엿한 백인공수(百人工首)가 되어 인부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천이 일부러 찾아가 알은체를 하자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하남신룡이 장차 강호들이 득시글거리는 당금 무림을 평정하고 절대지존(絶代至尊)으로 우뚝 설 거라는 소문이 이미 주안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진종일 공사 소음이 너무 심한지라 진천은 고량을 비롯해 정양이 필요한 이들에게 의형의 장원으로 옮기기를 권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권유를 따르지 않았다. 진천이 삼보장에 남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외가로의 출발을 미루고 얼마간 기다렸다. 그러나 마령 문가와의 구인결을 끝내고 삼보장에 돌아온 지 아흐레가 지나도록 그가 예상하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열흘을 채우고 떠나려던 진천의 귀에 마침내 고대(?)하던 풍문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