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Eyes Under Black Feet RAW novel - chapter 150
“당신의 병사들은 문지방이 닳도록 사창가를 드나드는데도 우리 순진하신 발투만 폐하께서는 평생 한 여자에 대한 정절을 지키시겠다니. 폐하께서는 여전히 넘어야 할 벽이 많네. 일단 그 거지 같은 투로 적 생각에서 벗어나셔야겠어. 왕이라면, 모두가 그랬듯 폐하께서도 아무 여자나 취하셔야지. 그래야 비로소 엘버그의 왕이 되는 게 아니겠어?”
로리의 나긋한 어조에는 냉소적인 농담이 섞여 있었다. 루이스가 잠자코 듣고만 있자 그녀는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사려거든 직접 가게로 찾아오라고 해. 폐하가 아니라면 굳이 내가 움직일 이유가 없잖아?”
“로리아나, 당신을 험하게 대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지금 순순히 일어나지 않으면 강제로 끌어낼 수밖에 없어.”
“왜?”
로리아나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명령이라도 받았어?”
“그래”
“…..”
루이스는 근위대다. 근위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왕뿐이다. 만일 왕이 아니라면….
로리아나는 루이스의 진지한 눈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정말 재미있네. 좋아. 기꺼이 갈게.”
***
로리아나는 루이스를 따라 샛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밤에도 곳곳에는 횃불이 밝혀져 낯선 자가 침입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이쪽이야.”
루이스가 성벽을 따라 걷다가 좁다란 길로 안내했다. 로리아나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원형 계단을 얼마나 빙빙 돌며 올라갔을까, 제법 호사스러운 복도가 나타났다. 아치형 기둥마다 경비병이 서 있었다. 로리아나는 망토를 더 깊게 눌러썼다.
둘은 어느새 복도의 맨 끝 방에 다다랐다. 루이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감에 로리아나도 덩달아 숨을 깊게 내뱉었다.
똑똑똑.
루이스가 세 번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자 달칵, 문이 열렸다. 루이스와 그 뒤에 선 로리아나를 은밀히 훑어본 뒤 곧 여자는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제 주인에게 둘의 방문을 알렸다.
“아가씨. 루이스가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세일린.”
“들어오세요.”
로리아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망토를 벗어 내렸다. 루이스는 공손히 몸을 숙였고 로리아나도 그를 따라 몸을 숙였다. 성에 들어온 것도, 비록 왕은 아니나 그에 비견할 성의 주인을 만나는 것도 그녀로서는 처음이었다.
신분이 높은 이를 대할 때의 예법은 배웠으나 왕족을 대할 때의 예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신분과 태생의 한계였다. 긴장감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어려움, 거기에 왕족에 대한 두려움이 더해져 점점 더 피가 식으며 심장이 펄떡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 이쪽은 마담 로리입니다. 캘던의 유곽에서 ‘부나비’란 업소를 운영 중이지요. 제가 아는 한 가장 똑똑하고 사내를 다루는 데 능숙한 여인이랍니다.”
“마담 로리.”
앳된 미성이 그녀를 불렀다. 로리아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무릎을 더 굽히며 말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리아나라 불러 주십시오.”
“로리아나.”
릴리가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발음했다. 그러고는 약간의 틈을 두고 다시 그녀를 불렀다.
“로리아나, 얼굴을 좀 보여 줄래요?”
“…..”
그제야 로리아나는 얼굴을 들었고 비로소 릴리를 바라보았다.
과연. 알기어스의 핏줄이 살아 있다는 캘던 사람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은백색 머리카락에 눈처럼 하얀 피부다. 정말이다. 투로의 왕 카르낙은 진실로 신의 아이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하찮은 벌레 놈이 결국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 사실에 전율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그녀는 간신히 삼켰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목도하고 나서도 여전히 믿기가 어렵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불편했을 텐데도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왔습니다. 저 같은 계집이 언제 성에 들어와 보겠어요. 큰 영광입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 봐도 될까요?”
루이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이 한 10년은 늙은 듯 피곤해 보였다.
“네, 루이스. 애써 줘서 고마워요. 푹 쉬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고는 릴리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딸깍, 하고 방문이 닫히자 릴리는 조용하게 서 있는 로리아나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호리호리하고 육감적인 몸매는 말할 것도 없고 생김새 역시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그녀는 모든 것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뚝하고 동그란 물방울 모양의 코, 크고 깊은 눈매며 광택이 흐르는 도톰한 광대뼈, 깨끗하고 반듯한 이마. 과연 사내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외형이었다.
“투로의 여인들은 모두 당신처럼 아름다운가요, 로리아나?”
릴리는 진심으로 물었다.
카르낙도 보기 드물게 잘생긴 사내였다. 로로도 늙은이치고는 제법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엘버그의 여성들은 투로를 대상으로 난잡한 욕망을 품고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엘버그의 남성들도 투로의 여성들에게 같은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독 사창가로 잡혀가는 투로의 여성들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투로의 여자들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아가씨만큼은 아닐 겁니다.”
로리아나가 말했다. 인사치레임이 분명한 말에도 진심이 담겨 있는 듯하였다. 역시. 릴리는 그녀가 수완이 좋은 사업가라고 생각했다.
“앉아요, 로리아나.”
릴리는 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로리아나는 그녀의 명령에 따랐다. 곧 세일린이 그녀에게 포도주를 건넸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 모래 폭풍으로 와인 저장고가 폭발했거든요. 덕분에 질 좋은 술을 꽤 많이 잃었죠.”
“아아.” 하고 로리아나가 릴리의 말에 알은체했다.
“그 덕에 저도 아가씨 셋을 잃었어요. 그나마 건물이 무사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런,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아가씨들의 시신은 무사히 수습하였나요?”
“네, 시신을 모두 불에 태워 주었죠.”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버그에서는 시체를 땅에 매장한다 들었는데요.”
“엘버그에 투로를 위한 땅은 없답니다, 아가씨. 누구도 죽은 투로의 시신을 매장할 땅을 내어 주지 않아요. 사막에 버려 독수리 밥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깊은 밤중에 남몰래 아궁이에 불을 지펴 태워 버리는 수밖에 없죠.”
“저런….”
안타까움에 우울한 낯빛을 한 것도 잠시, 릴리는 다시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있잖아요, 로리아나. 그라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거나 아니면 조장을 해요. 육신이 빨리 사라질수록 영혼이 더 빨리 자유를 찾는다고 믿거든요.”
“아, 들어 본 적 있어요. 그라타는 카스티 제도에 있는 아주 작은 농경 국가라고 하던데 아가씨께서는 그곳에 계셨던 건가요?”
“네, 함께 지내던 유모가 죽은 후에는 그곳에서 지냈어요. 유모의 고향이거든요.”
그랬군. 그래서 카르낙이 알기어스들의 씨를 말릴 때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군. 대체 어떻게 혈혈단신 혼자 살아남았을까? 그것도 이토록 튀는 외모와 튀는 머리색을 가지고. 지금껏 무슨 수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카스티의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라타 언어에 아주 능숙하시겠네요.”
“네, 저에겐 엘버그 언어보다 더 익숙해요. 아직까지는요. 아무튼, 그라타에서는 그렇게 믿으니 로리아나의 방법이 나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다른 문화적 관점으로 보자면 망자에 대한 최고의 예의를 보인 거죠.”
애써 저를 위로해 주려는 모양새가 진지하여 로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알기어스의 핏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덕분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네요.”
사막에서는 늘 사람이 죽으면 태웠다. 척박한 사막의 땅에 시체를 묻을 곳은 없었고 그대로 두면 새들에게 파먹힌 채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지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로리아나에게도, 다른 투로의 창녀들에게도 화장은 익숙한 관습이었지만 그녀는 릴리 앞에서 구태여 그런 부연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어쨌든 마음을 써 주는 것이 예쁘니 괜한 사족으로 그녀의 친절함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릴리는 슈미즈 위에 입은 가운을 매만지며 물었다.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나요? 아직 폭풍으로 인한 피해에서 완전히 복구되진 않았을 테죠?”
“구제소에서 먹을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어서 다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는 벗어났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캘던의 돈 많은 귀족 자제들이 자발적으로 구제소를 후원하는 것은 제 평생 처음 봤어요. 무언의 압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저 추측일 뿐이지요.”
“그러게요….”
귀족들도 자발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다니. 그런 이야기는 릴리로서도 처음이었다. 루이스는 알고 있을까. 알고 있었어도 릴리가 궁금해하지 않으니 말하지 않았으리라. 괜스레 더 골치 아파질 거라 생각했겠지.
“이런 때에는 아무리 값비싼 금은보화를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어요. 그것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고통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더군요.”
“맞아요, 로리아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법 말이 잘 통했다. 로리아나가 투로이기 때문일까. 엘버그인이라면 치를 떠는 카르낙이 용케 이 여자를 죽이지 않고 곱게 살려 둔 거로도 모자라 결혼까지 할 정도라면 아마도 릴리는 엘버그인보다 투로에 더 가까운 사고방식을 지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리아나는 와인 잔을 매만지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이곳에 오는 내내 궁금했답니다. 무슨 이유로 이토록 귀하신 분이 나같이 천하디천한 계집을 보자 하셨을까. 지금도 그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러자 릴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제 와인 잔을 들었다. 잠시 와인을 입에 머금으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했다.
“로리아나도 알겠지만 이틀 후에 저는 폐하와 혼인을 해요.”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모를 리가 없다. 캘던뿐 아니라 엘버그 전체가 그 소식으로 들썩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폐하는 원치 않으십니다만 저에게는 후계를 생산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어요.”
그러고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로리아나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있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