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Eyes Under Black Feet RAW novel - chapter 152
에이가는 단념한 듯 로로를 따라나섰다. 이 늙고 온화한 투로가 없었다면 저 혼자 어떻게 저 뿔난 망아지를 견뎠을지 모르겠다.
***
콜록콜록 세일린이 잔기침을 했다. 릴리는 서둘러 방의 창문을 닫았다. 얼마 전 새로 달아 놓은 유리창에 벌써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릴리는 눈물을 훔치는 세일린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이만 들어가 쉬는 게 어때요? 몸이 영 안 좋아 보이는데요.”
세일린은 손사래를 쳤다.
“폭풍 때문이에요. 그 이후로 먼지가 너무 많아졌어요.”
릴리가 다가와 그녀에게 찻잔을 건넸다. 세일린이 릴리를 위해 가져다 둔 것이었다.
“아가씨 이건….”
“잔말 말고 마셔요. 지금 차가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세일린이잖아요.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저는 누가 돌봐 줘요?”
마지막 문장이 방점을 찍었다. 세일린은 찻잔을 들고 릴리가 향긋한 꽃잎으로 우린 찻물을 따를 동안 얌전히 기다렸다. 릴리는 세일린을 의자에 앉히고 저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더니 세일린이 찻물을 한 모금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입을 뗐다.
“난 우리가 친구였으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저는 늘 아가씨 편이에요.”
세일린은 성실하게 답했다. 그러자 릴리는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거 말고요, 세일린. 주인과 하인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친구 말이에요. 같이 이렇게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고 산책을 할 수 있는 사이요.”
하지만 지금도 담소를 나누고 산책을 한다. 또 이렇게 마주 앉아 차도 마시고 있다. 이것 이외에 또 어떤 것을 함께할 수 있을까.
“서로 농담도 하고 또 고민이 생기면 털어놓기도 하고 슬플 땐 같이 울어 주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같은 방을 쓰는 캐시처럼 대하란 말인가. 거리낌 없이 옷을 벗고 드러누워 농담 따 먹기를 하고 서로를 놀리고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자신이 릴리 아가씨의 근심과 걱정을 들어 주고 그녀의 슬픔에 함께 눈물은 흘릴지언정 자신의 고민과 슬픔을 그녀와 나눌 수는 없다.
그런 관계는 들어 본 적도 없고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러기엔 그녀는 너무나 높고 자신은 너무나 하찮은 존재였다. 땅과 하늘이 같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솔방울과 금이 같지 않듯, 다이아몬드와 조약돌이 같지 않듯.
릴리와 자신의 사이 역시 그렇다. 그러나 릴리에게 감히 그럴 수 없다,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해서 릴리가 낙담한 낯빛을 하면 그 역시 제 탓 같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일린은 침을 한 번 삼키고 겸손히 말했다.
“저는 언제까지나 아가씨의 충실한 친구일 겁니다. 염려 놓으세요.”
그러자 릴리도 찻잔을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세일린이 찻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인지 알리는 음성대신 문 밑으로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의아한 일이었다. 세일린은 문가로 가 종이를 살폈다. 아무런 문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 일어난 릴리가 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고 세일린은 그것을 건네며 수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런 표시가 없어요. 괜찮은 걸까요?”
“글쎄요.”
겉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으니 펴 보는 수밖에 없다. 혹시 방 주인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미심쩍기도 하지만.
꾹꾹 눌러 접어 놓은 것을 반듯하게 펴 들었다. 갈기듯 써 놓은 필기체는 밝은 곳에서도 좀처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릴리는 미간을 구기고 활자에 집중했다.
아마네스 님의 유일한 아이이자 알기어스 왕의 유일한 혈육, 파니릴리 알기어스 양. 오랫동안 우리는 당신을 염원하였습니다. 고귀하신 분께 신의 축복을!
우리 형제들은 당신의 자유를 위해 검을 빼 듭니다. 피로써 한 맹세를 지켜 신에게 당신의 종임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홀로 계십시오. 그때가 어느 때이든 당신을 찾겠나이다.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이자 신봉자 올림.
릴리의 낯빛이 굳자 세일린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
괜찮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내 자유를 위해 싸운다고? 검을 빼 든다고? 활자들이 지렁이처럼 보였다. 현기증이 인 릴리는 세일린이 읽을 수 있도록 밀지를 건네주었다. 마지막 마침표까지 다 읽은 세일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이게 무슨 뜻인가요? 무슨 말이죠?”
“…모르겠어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나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니. 무슨 자유? 내가 갇혀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릴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카르낙 발투만이 저를 강제로 납치해 와 탑에 감금했다고.
그리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얼마의 자의가 섞였든 상관없었다. 만일 저와 카르낙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감정 없이 기록해야 한다면 분명 그렇게 기록될 터였다. 카르낙 발투만이 그라타에서 알기어스의 사생아를 데려와 1년 동안 성탑에 감금시킨 후 성혼식을 올렸다, 라고. 내부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자들 역시 분명 그렇게 알고 있을 터였다.
“추종자들일 거예요. 나를 염원했다고 하니 알기어스의 핏줄을 지키려는 자들일 테죠. 그들은 내가 카르낙 발투만에게 붙들려 강제로 결혼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자유를 들먹이겠죠.”
“성혼식을 방해하려는 걸까요? 반란을 모의하는 중일까요? 이자들이… 이자들이 지금 성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잖아요.”
언뜻 보면 모호한 듯하지만 쓰인 단어들은 정확했다. 신, 알기어스의 혈육, 맹세, 염원, 자유. 이런 자들이 카르낙에게 호의적일 리가 없다. 잠자코 결혼이 성사되는 것을 지켜볼 리도 없다. 카르낙을 죽이든, 아니면 저를 캘던성에서 빼내든 해서 어떻게든 결혼을 못 하도록 만들 것이다.
카르낙은 통치자로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이들을 제거하는 데 썼다. 반란을 잠재우고, 반역자의 목을 치고, 세를 늘리고. 그러면서 캘던성을 지켜 온 것이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관료를 줄이고 예배당과 회의소까지 비워 가면서.
결혼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급박한 시간, 멀지 않은 곳의 믿을 만한 이들만 확인하여 성안으로 들였다. 그럼에도, 그토록 철저하였음에도 수상한 그림자가 숨어들었다. 저를 신봉하는, 그리하여 반역일 수밖에 없는 자들 말이다.
“아가씨. 어쩌면 좋죠? 이 사실을 폐하께 알려야 할까요?”
물론 그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들이 제거하고 싶어 하는 자가 바로 카르낙 발투만일 테니. 그러나 카르낙이 이 사실을 안다면, 그러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무자비하게 모두를 죽이려 하지는 않을까. 무작정 쪽지를 들고 달려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았다.
“세일린.”
“네, 아가씨.”
“조용히 로로를 데려와 주겠어요?”
“네, 아가씨.”
세일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침실 밖으로 나섰다.
로로는 릴리의 밀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도 릴리와 세일린이 그랬듯 몇 번이고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방어에 철저했건만 대체 어떻게 반역자가 숨어들었단 말인가.
“성에 초대된 영주들은 모두 폐하께서 영지를 하사한 자들이거나 그것이 아니면 폐하께서 왕위에 오르실 때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폐하를 돕던 자들입니다.”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면 카르낙은 무자비하게 그를 처단했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의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제왕적 태도 때문이다.
“일련의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 중 폐하를 배신할 만한 자들은 없어요. 감히 그럴 용기가 없을 겁니다.”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선 안 될지도 모르겠어요. 명분보다 실익을 취하는 자들이라면 얼마든지 편을 바꿀 수 있겠죠.”
“실익이라니요?”
“글쎄요. 카르낙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저의 존재가 마음을 바꾸게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편이 더 이득이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로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익에 따라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자라면….
“리오에서 온 상인….”
“뭐라고요? 로로?”
“리오에서 온 상인이 있습니다. 반스 이드위너란 자로 무역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지요. 그자라면 누구보다 실익을 중시할 만하지요. 하지만 그는 리오 상인 길드의 우두머리입니다. 유사시 폐하를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로 분명 맹세를 하였는데….”
“장사치의 맹세는 믿어서는 안 돼요. 그자들은 거짓말을 잘하거든요.”
세일린이 나서서 로로의 말에 반박했다.
“성안에 드나드는 상인들조차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요. 성안에 산다고 바깥세상에 무지한 줄 안다니까요. 이 안에 입과 귀가 몇 갠데…. 어떻게든 등쳐 먹을 생각만 한단 말이죠.”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 릴리는 그런 자들과 가깝게 지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부유하고 힘 있고 욕심 많은 장사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하지만 세일린의 말이 맞을 것이다. 적어도 이 셋 중에 상인들을 가장 많이 겪은 이는 그녀일 테니 그녀의 말을 믿는 것이 좋을 터였다. 그러나 로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스 이드위너를 겪어 본 자라면 분명 그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반스가 어째서 아가씨와 폐하의 성혼을 방해한단 말입니까? 그들은 왕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보아서 알아요. 그 누구보다 알기어스 왕의 치세로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자일 텐데 아가씨를 염원해 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요.”
“그 말도 거짓일지도 모르잖아요.”
세일린이 반박했다.
“형제니 뭐니 하는 것도 다 새빨간 거짓말일지도 몰라요. 아가씨를 떠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아가씨가 폐하와 반목하도록 조장하려는 것일지 누가 알겠어요?”
두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로로는 직접 반스를 겪어 본 자로서 일련의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고 세일린은 상인이란 그의 신분을 의심스러워했다. 로로의 말대로 반스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세일린의 말처럼 모든 게 거짓일 수도 있다.
“그자는 어디 출신이죠? 리오에서 나고 자랐나요?”
“네, 그자가 그렇게 답했습니다. 따로 확인해 보진 않았습니다만.”
로로는 확신 없이 답했다. 릴리는 로로에게서 밀지를 건네받아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했다.
“제가 이자를 따로 만나 봐야겠어요.”
“이자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밀지를 쓴 사람이요. 리오에서 온 이드위너인지 아니면 다른 이인지 확인을 해 봐야지요.”
세일린이 기겁해 손을 저었다.
“안 되어요, 아가씨. 그놈이 누군지 알고 만나 보신단 말씀이세요? 게다가 혼자만 나오라니, 너무 위험해요!”
“내게 해코지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위험을 감수하고 이런 밀지를 전하러 오지 않았을 거예요.”
“차라리 이 밀지를 폐하께 드리세요. 어차피 아셔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면 폐하께서 조치를 취해 주시지 않겠어요?”
카르낙에게? 릴리는 로로를 쳐다보았다. 노인의 눈빛은 그다지 밝지가 않았다.
“제가 이 밀지를 폐하께 드리면 그분은 어떻게 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