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Eyes Under Black Feet RAW novel - chapter 54
“위험합니다!”
그러나 카르낙은 듣지 않았다. 보다 못한 루이스가 제 군마를 몰고 낑낑대며 다가왔다. 카르낙이 쌓인 눈더미를 살살, 쓸었다. 황금색의 실 몇 가닥이 마른 잡초처럼 눈더미 속에서 솟았다.
“…….”
카르낙은 그것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테이먼 테르조, 네놈이구나. 놈을 확인해야만 했다. 네놈을.
“칼!”
멀리서 릴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낙은 걱정스러운 제 아내의 낯빛을 확인하고 나서 무슨 이유에서인가 잠시 그 금빛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테이먼 테르조, 내 아내의 단 하나 남은 혈연.
여기에 두고 가면 네놈은 이대로 죽겠지. 눈 속에 파묻힌 채 하루 정도 지나면 이대로 산송장이 될 것이다. 그 전에 남은 네 부하들이 너를 찾아낸다면? 그때도 과연 네가 살아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다.
게다가 설령 네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에나의 명령을 거역했으니 넌 이 북쪽 땅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체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쫓겨날 거야. 대관식을 치르고 베오르토가 정식 에나가 되고 나면 그는 에나의 군대를 움직여 네놈의 씨를 말리겠지. 넌 끝이야 테이먼 테르조. 내가 너를 구해 주지 않는다면.
카르낙은 눈더미를 긁어 내고 테이먼 테르조의 면부를 확인하고는 맥박을 짚어 생사를 확인했다. 맥박은 아직 뛰고 있었다. 카르낙은 눈을 파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폐하!”
“아직 살아 있어.”
루이스가 말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다가왔다. 대체 그가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루이스는 일단 그를 도와 테이먼 테르조를 같이 눈더미 속에서 빼냈다.
“폐하, 대체 무엇을….”
“놈을 데리고 간다.”
“예?”
카르낙은 테이먼 테르조의 축 늘어진 몸을 오코의 위에 얹었다. 루이스는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를 살려서 데려가신단 말씀이세요?”
루이스에 말에 답하지 않고 그는 말에 올랐다. 대체 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루이스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
이베트는 소식을 듣고 테이먼 테르조의 막사로 뛰어 들어왔다. 그곳에는 눈 더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브리다스와 알레온이 병사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건가요!”
이베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브리다스는 뜨거운 찻물로 몸을 녹이며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 눈이….”
눈사태가 일어난 사실은 알고 있다. 지진도 눈사태도 모두 그녀도 함께 겪었다. 다행인 건, 산등성이에서 조각나 떨어진 눈덩이들은 그녀가 머물던 야영지와는 먼 곳에 떨어져 굴렀단 사실이었다. 모두 혼비백산하였지만 곧 지진은 멎었고 모두 그렇게 안도했다. 그것이 전장을 덮쳤다는 사실은 그녀로서는 추론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었다.
“…카르낙은?”
“…….”
“아버지, 그는요? 그 작자는요!”
브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알레온의 시신은 확인했다. 그렇지만….”
멜타가 기력이 다한 브리다스를 대신해 답했다.
“테르조 경의 시신은….”
“…….”
이베트가 몸을 휘청였다. 죽었어? 설마, 설마 테이먼 테르조가. 신이 점지했다는, 아마네스 여신님의 가호를 받았다던 그 금발 사내가, 그 눈부신 외모의 사내가 죽었어? 이렇게 쉽게? 그것도 제 어미의 눈 더미 속에 파묻혀서?
“하하….”
믿을 수 없어 웃음이 났다. 기가 막혔다. 하하하하 하고 이베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침울한 가운데 그녀의 목소리만 히스테릭하게 메아리쳤다.
“어리석은 짓이었어.”
멜타가 이를 갈았다.
“괜한 짓을 한 덕에, 에나의 미움만 샀어. 카르낙 발투만이 만약 살아서 성소에 당도한다면, 그래서 에나의 즉위식이 제대로 치러진다면, 우린 모두 몰살당할 거요.”
“…카르낙 발투만이 살아있다는 보장은 없소.”
“살아 있소! 브리다스 경! 놈들의 말발굽을 보았지 않나! 그들은, 그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어! 오로지 우리만이! 우리만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어! 우리 군은 전멸했네! 남은 자들이라곤 모두 부녀자와 병든 자들, 그리고 아이들뿐이야!”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돈이 있어요.”
이베트가 눈을 번뜩이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직 브리다스 가문엔 천문학적인 돈이 남아 있죠. 그리고 바르시가 있어요.”
이베트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요. 여기서 빠져나가서 용병을 모집하면 돼요. 그래서 우리의 땅을 되찾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요.”
“무엇을 시작한단 말이야?”
멜타가 물었다. 이베트가 눈을 빛냈다.
“테이먼 테르조는 죽었잖아요.”
“…….”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바르시가 남았어요.”
멜타는 웃었다. 헛웃음을 켰다. 세상에 이처럼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 이야기가 또 있을까.
“정신이 나갔군, 이베트. 바르시는 귀엽고 착한 아이지. 그러나 그 아이는 테이먼 테르조를 대신할 수 없어. 그 아이에게 어떤 적통성이 있단 말이지?”
“테이먼 테르조가 없는 이상, 더는 왕가의 핏줄은 남아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진 거겠지! 이제 남은 핏줄은 카르낙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는 파니릴리 알기어스 하나뿐이니까!”
멜타는 참을 수 없어 이베트를 바라보며 비난을 퍼부었다.
“애초에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밀어붙인 건 너다, 이베트! 네 말도 안 되는 주장 덕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어! 네 아둔한 계획이 모든 것을 망쳤어! 테이먼 테르조 경의 시신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네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자고? 너처럼 아둔한 어미를 둔 그런 놈을,”
노인의 말은 거기서 멈추었다. 이베트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단검으로 노인의 목을 꿰뚫었다. 푹, 하고 살이 찢기고 비어지는 소리, ‘억’ 하고 노인의 혀가 말리는 소리, 그 다음 순간에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멜타는, 테이먼 테르조 진영의 가장 존경받던 원로는 그렇게 앞으로 꼬꾸라져 바닥에서 피를 흘렸다. 뿜어져 나온 피가 이베트의 면부와 가슴팍을 적셨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단도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젠, 우리 바르시가 왕이에요. 그렇죠, 아버지?”
이베트가 광기에 찬 눈을 빛내며 브리다스에게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허한 눈동자였다.
말을 달려 반나절, 가파른 언덕 위, 찌를 듯한 위용을 자랑하는 새하얀 건물이 보였다. 사람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둥근 원형의 건물은 마치 거대한 상아를 깎아 조각한 듯 모든 기둥과 창틀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신이 만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자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파니릴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곳이 이 엘버그 왕국의 시초라 하였다. 이곳에 파니릴리, 저의 시초가 있었다.
아마네스 여신의 첫 번째 아이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그 사실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릴리는 가슴이 뛰었다. 여전히 그 전설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분별할 수 없지만 분명 이 순간 그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더러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 또 더러는 믿지 않을 수 없는 것들도 모두 이곳에서 시작됐을 터였다.
파니릴리는 카르낙을 쳐다보았다. 이곳에서라면 전부 다 알 수 있을까. 나, 그리고 당신을 둘러싼 비밀들을?
대리석 계단 위로, 그들을 마중 나와 있는 베오르토와 사제들이 보였다. 파니릴리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 말에서 내리려 했다. 그러나 카르낙은 말을 탄 채로 계단을 올랐다. 순간적으로 릴리는 핀을 쳐다보았다. 그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극히 카르낙다운 행동이었다. 어차피 그는 신이나, 사제나, 에나 따위를 존중해 줄 마음은 없었다. 그저 제 말을 잘 따르는 아둔하고 겁 많은 에나를 앉히는 것으로 신마저 제 아래에 깔아 눕힐 생각으로 이곳에 왔으니 예의 따위를 갖출 필요가 없겠지.
핀은 어꺠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 저도 카르낙을 따라 말고삐를 움직여 계단을 올랐다. 하는 수 없이 릴리도 말고삐를 잡았다.
“여기 계세요.”
루이스와 나머지 근위대에게 명령하고 릴리도 핀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베오르토는 성문 앞에 서서, 새까만 군마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몇 걸음 뒤로 주춤 물러섰다. 신의 집 앞에 말을 타고 등장한 이는 아마 카르낙 발투만이 최초일 것이다. 저도 모르게 커다란 그를 올려다보는 입장이 된 베오르토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카르낙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를 향해 내리깔렸다.
“…페… 폐하….”
베오르토가 더듬거렸다. 숱이 많은 회백색의 금발을 가진 노인은 하얗고 깡마른 외형을 하고 있었다. 발로 한 대 툭 차면 그대로 부러질 듯 연약했으며 얼굴빛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겁을 잔뜩 먹은 청백색의 눈동자는 노인의 것답게 혼탁하고 희미한 빛을 띠고 있어 전체적으로 옹졸하고 아둔한 인상을 띠었다.
뒤따라 핀과 파니릴리가 성문 앞에 당도했다. 베오르토는 파니릴리를 보자마자 숨을 들이켜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야말로 아마네스 여신의 현신 같은 여자였다.
“왕… 왕비 전하….”
카르낙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베오르토는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카르낙은 제 아내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우며 말했다.
“대관식은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나?”
지진을 염두하고 하는 말이었다. 하기야 전례에 없던 재난이었다, 건국 초기에 몇 번의 지진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역서에 있는 것은 보았으나 살아생전 그것을 겪은 것은 베오르토 역시 처음이었으니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서둘러 대관식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는 게 사제단의 판단입니다.”
에나의 뒤에서 누군가가 나서서 말했다, 카르낙이 그를 보자 사내는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베오르토가 그를 소개했다.
“티옹입니다. 성전의 일곱 사제들 중 한 명입니다.”
“영광입니다. 폐하, 비전하.”
“마을 곳곳이 눈에 파묻혔더군. 복구할 방안은 있나?”
카르낙이 그의 인사를 무시한 채 물었다. 베오르토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일 겁니다.”
속편한 이야기군. 카르낙은 비소했다. 그러고는 제 뒤편을 엄지손가락으로 쿡 찔러 가리키며 말했다.
“오다가 사람을 좀 주웠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 유감이지만 살려두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