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25
124화. 빗방울의 왈츠 (5)
황당함과 허탈함이 온몸을 지배해서 진짜 바보처럼 마을과 나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평소처럼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멀쩡한 상태였다면 무모한 짓을 손수 벌이지 않았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난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전신의 통증도 짜증 났고, 헛고생하게 만든 이 공간도 짜증 났다. 소리가 안 들리는 것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가까워지지 않는 놀이공원도 모조리 거슬렸다.
그냥 이 통로 자체가 싹 다 마음에 안 든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더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 들어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하….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
될 때까지 달리면 이 공간이 날 포기하든, 내가 지쳐 쓰러지든 결판이 나지 않겠나. 정말이지 무식한 해결 방법을 방법이랍시고 판단하는 내 머리를 보니 어디 하나 나사가 빠진 게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다시 놀이공원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는 얘기다.
눈물이 나도 깜빡이지 않고 대관람차만 노려보며 달렸는데도 도착한 마을에 발을 세게 구르며 화풀이했다가 또 뛰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놈의 공간은 날 다시 나무 앞에 보냈고, 그에 승복하지 못하고 다섯 번 정도 더 언덕과 마을을 오갔다. 노리는 건 계속 놀이공원이었는데 한 발짝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서 가슴이 아파진 나머지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 돼서야 발을 멈췄다.
‘대체 뭔데. 날 여기서 내보낼 생각이 없단 건가? 어느 통로든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반드시 있다고 봄이 그랬었는데, 그걸 자력으로 못 찾게 하려고?’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게임을 하면 첫 번째로 공략을 찾아내고, 추리 소설을 읽을 적에도 범인을 맞추는 데에 틀려본 적이 없고, 친구들과 낯선 곳에 놀러 가도 길 찾기를 담당한 사람이 나인데 이런 수모를 겪게 하다니.
나도 모르게 쌕쌕 소리 내어 입으로 숨을 쉰 바람에 따끔거리는 목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느라 숙였던 허리를 곧게 세웠다.
‘이대로 포기할 줄 알고? 놀이공원으로 못 가면 집부터 샅샅이 조사하면 돼. 그러면 놀이공원으로 통하는 길이든 외부로 나가는 출구든 뭐든 나오겠지.’
움직이지도 않는 관람차를 뚫어지게 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려 가까이에 있는 집을 살폈다. 붉은색이 많이 섞인 주황색 지붕과 화려한 발코니가 인상적인 집이다.
언덕에서 봤을 때는 다 똑같아 보였지만, 집은 저마다 미세하게 외관이 달랐다. 이번에 처음 보는 집의 담장을 짚고 까치발을 들어 안쪽을 슬쩍 살폈다.
마을에서부터 대로를 따라 달리면 도착하게 되는 나무는 늘 똑같았지만, 언덕에서부터 오솔길을 따라 달리면 도착하게 되는 마을과 가장 가까운 집은 매번 달랐기 때문이다.
‘이 집도 나랑 관련된 곳일 텐데 막 들어가려니까 좀 거부감이 드네.’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몰라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걸지도.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잔디만 깔린 정원을 보다가 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호랑이 한 쌍이 마주 보고 있는 문양이 고풍스러운 거대한 철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을 강하게 밀었다. 하지만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는지 덜컹거리기만 하고 열리지 않았다.
계속 흔든다고 열릴 것 같지 않아서 담을 넘기로 했다. 내 키를 넘는 담장도 가볍게 넘는데, 그보다 낮은 건 숨쉬기보다 쉽다.
스트레칭을 간단히 하고 바로 담장 위를 짚고 넘었다. 탁. 잔디 위로 떨어지면서 마당 안쪽에서 대문을 슬쩍 보니까 걸쇠 위로 쇠사슬이 칭칭 둘려서 꽉 닫혀 있었다.
안쪽에서 풀어도 한참 걸릴 듯한 잠금쇠를 뒤로하고 이번엔 현관에 손을 댔다. 이번에도 잠겨 있으면 부술까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 현관은 그냥 바로 열렸다.
‘뭐가 이래? 대문만 잠그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집인가?’
묘하게 허술한 집에 혀를 쯧쯧 차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밖과는 다르게 살짝 더울 정도로 훈훈하게 데워진 공기가 가장 먼저 느껴졌고, 그다음으로는 상큼한 과일 냄새가 코를 찔렀다.
향에 민감한 탓에 최근 유행하는 디퓨저나 양키캔들, 룸스프레이와 같은 물건을 일절 사용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너무 강한 냄새다.
손등으로 코를 막으며 신발을 신은 채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카펫을 밟으니까 그제야 발바닥이 욱신거린다는 걸 깨달았다.
‘슬리퍼를 신고 달렸으니 당연한가.’
어떤 형편 좋은 설정으로 이뤄진 공간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뛰어다녔는데도 슬리퍼는 망가지지 않았고, 그 대신 내 발바닥만 혹사당했다.
아프다는 걸 깨닫고 나니까 더 아픈 기분이 들어서 발을 질질 끌며 거실로 들어섰다. 소파, 테이블, 장식장, 텔레비전까지 거실의 온갖 가구는 큼직큼직했다.
전반적으로 무던한 분위기의 거실에서 유일하게 분위기가 다른 벽난로와 흔들의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다리도 아프겠다 조금 휴식을 취할까 싶어서 흔들의자 쪽으로 가서 앉았는데, 앉자마자 벽난로에 불이 붙으며 장작이 타들어 갔다.
‘좀 더운데….’
벽난로와 가까운 발부터 뜨끈해지니까 다시 열이 오르는 느낌이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긁고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그 순간 팔랑팔랑 무언가가 천장에서부터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떨어지는 걸 손으로 받았다. 나도 모르게 꽉 움켜쥔 손을 펼치자 약간 구겨진 손수건이 드러났다.
“어라.”
삐뚤빼뚤하게 박호승의 이름 석 자가 박힌 얼룩덜룩한 하늘색의 손수건은 내게 몹시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호승의 생일선물로 나와 이세환이 직접 이름을 새기고, 염색해서 만든 손수건이니까.
나와 이세환의 솜씨가 워낙 서툴러서 손수건은 엉망진창인 모양새였고, 박호승은 고맙다고 기뻐했지만 정작 들고 다니지는 않았었다.
‘대충 서랍에 넣어놨겠거니 했었는데 금고에 넣어놨었지, 그 녀석.’
박호승 명의의 재산 목록을 보관하고 있는 개인 금고에 들어가 있던 손수건에 ‘이게 그 안에 어울리는 물건이냐’며 내가 깔깔 웃고, 이세환이 못생긴 손수건을 이렇게나 좋아해 줄 줄은 몰랐다며 수줍어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그때 박호승의 벌게진 얼굴이 일품이었다. 이래저래 변명하다가도 끝내 너희가 줘서 좋다고 말하던 그 시뻘건 얼굴에 괜히 민망해져서 드물게 나와 뜻이 같았던 이세환과 함께 신명 나게 놀려먹었었다.
연이어 떠오르는 즐거운 추억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그 뒤로는 우리 손으로 뭘 만들어서 선물한 적이 없네. 내년에는 한 번 수제작으로 만들어서 줄까.’
뽀송뽀송한 손수건을 챙겨가려고 반으로 접었다. 지금까지 낯선 공간에서 바짝 긴장한 탓에 바닥을 치던 기분이 고작 이 손수건 하나로 훨씬 나아졌다.
무사히 깨어나면 나한테 연락 좀 하라고 쪼아대던 박호승에게 오랜만에 먼저 연락을 해볼 생각까지 들었다.
아마 어쩐 일이냐고 놀라면서도 내 연락을 즐거워하며 휴일이 언제인지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휴일을 자기랑 놀자며 빼곡하게 약속으로 채우겠지.
눈에 훤한 박호승의 모습을 떠올리니까 출구를 찾을 의욕이 팍팍 생겼다.
‘좋아, 힘내볼까.’
손수건을 다시 한번 반으로 접어서 주머니에 넣으려는 찰나, 손에서 스르륵 손수건이 빠져나갔다. 내 손에 힘이 빠진 것이 아니니 저건 다른 이유로 인해 스스로 움직였다는 뜻이다.
화들짝 놀라서 다시 낚아채기 위해 우당탕 달렸다. 진짜 손수건은 박호승의 금고 속에 여전히 있겠지만, 눈앞에 저리 똑같은 것이 있는데 어찌 놓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느릿느릿하게 날아가는 손수건은 이상하게 내 손에 잡혀주지 않아서 결국 현관을 나와 정원의 한중간까지 달려야 했다.
“잡았다…!”
대문과 가까운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낚아채기가 무섭게 덜컹 대문이 흔들렸다. 손수건을 움켜쥐고 다급하게 뒤로 물러서며 대문을 노려봤다.
‘달리는 동안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어. 그러면 내가 이 집에 있는 동안 누가 들어왔다고?’
그것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놀라는 바람에 사고가 튀어서 뒤늦게 인식했는데, 방금 소리가 ‘들렸다’.
타인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이 공간에 변화가 생긴 거다. 그게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 모르니까 언제 마음이 놓였냐는 듯 확 경계심이 돋았다.
당장이라도 뛸 수 있도록 긴장이 풀렸던 근육에 힘을 주면서 담장 쪽을 곁눈질했다.
‘저 문이 열릴 리는 없으니까 저기로 오겠지. 그럼 그 전에 내가 먼저 넘어가서 누군지 보는 것도 나쁘지 않…. 뭐, 뭐야?’
덜컹덜컹. 육중한 문이 연신 흔들리면서 안쪽에 매여 있던 사슬이 저절로 풀려났다. 상식 밖의 모양새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담을 탈 생각도 못 하고 그걸 뚫어져라 보는 새에 기어이 대문 안쪽의 잠금쇠는 전부 풀렸고, 활짝 열렸다.
움찔 어깨를 떨며 반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서는데,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요한 오빠, 찾았다!”
이제는 하나로 묶어도 될 정도로 길어진 갈색 단발에 맑은 하늘을 담은 두 눈동자. 수수한 흰 원피스를 입은 어린애가 대뜸 내게 달려들었고, 얼떨결에 무릎을 꿇고 안았다.
“이진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오빠가 너무 오래 자고 있어서 찾으러 왔어요!”
“오래라고? 그게 무슨….”
내 목을 양팔로 꽉 안고서 한참 눈을 꾹 감고 있던 이진아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서 훌쩍 빠져나갔다. 허전해진 품을 애써 무시하며 이진아와 눈을 맞추자 이진아가 씩씩하게 히히 웃었다.
“지난번에는 오빠가 절 깨우러 와줬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잠꾸러기 요한 오빠를 위해 내가 왔어요.”
“어, 응, 그건 고마운데, 아니지, 위험한 일은 아직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여기를 들어오고 그래.”
“지금은 오빠한테서 잔소리는 안 들을 거예요! 이건 오빠가 먼저 잘못한 일이니까 오히려 잔소리는 나중에 제가 할 거예요.”
허리에 양손을 올린 이진아가 나를 혼내는 것처럼 제법 엄한 얼굴로 종알거렸다. 그리곤 곧 평소처럼 순하게 눈꼬리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도 혼날 일은 하기는 했어요. 오빠 말 잘 듣기로 했는데 하나도 안 듣고 여기에 있으니까….”
“잘 알고 있네.”
“전 원래 잘 알아요, 뭐든지! 그리고 잘못한 일도 제대로 혼날 거예요.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나가요.”
이진아가 내게 손을 쭉 내밀었다. 그 작은 왼쪽 손등에 하늘색 빛이 반짝인다 싶더니 주위가 어둑어둑하게 변했다.
술렁이는 바람에 습기가 찼고, 곧이어 우르릉 소리가 나며 뚝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폭우가 된 빗방울이 따갑게 몸을 두드렸다.
가닥가닥 볼에 붙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이진아가 시원하게 웃었다.
“이 비가 우리를 출구로 안내해줄 거예요.”
이 쏟아지는 비가 오빠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며 이진아가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이진아의 목소리는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깨끗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오빠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나도 모르게 입가를 손바닥으로 살짝 가렸다. 낯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한다고 타박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답지 않게 비를 맞으면서도 킥킥 웃었고, 의심 하나 하지 않고 이진아의 손을 잡았다. 이 작은 안내인을 따라 현실로 나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