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74
173화. 여전한 종소리
에피소드 21.
전등이 다 나간 탓에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면서 진예신은 세심하게 벽면을 살폈다.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어두운 사위에 발치를 조심하겠지만, 항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예민한 감응자에게 어둠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낡은 계단이 삐걱거려도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어도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진예신은 성큼성큼 내려가면서 바쁘게 창문의 모양새, 벽지의 문양, 각종 액자와 장식물을 눈으로 담아냈다.
‘벽지나 창문, 액자 틀 같은 전체적인 조화는 맞는데, 걸린 그림이랑 장식물은 전부 웨딩홀과는 영 맞지 않아.’
귀신의 집 같은 공포 테마의 체험관에나 어울릴 법한 그림들과 얼핏 핏자국처럼 보이는 벽지의 얼룩 같은 것들이 보통 결혼식장에 있지는 않잖은가.
결혼은 물론이고 결혼식과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던 진예신이지만, 일반적인 모양새가 어떤지는 잘 알고 있기에 위화감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호승 군은 아직 학생이기도 하고…. 듣자 하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보이던데…. 오늘 크게 실망할지도 모르겠어.’
기분 나쁜 그림이 걸린 계단 아래, 으스스한 공기가 감도는 지하실의 거대한 문 앞에서 진예신이 느릿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굳게 닫힌 철문에는 새빨간 라카로 지저분한 선이 잔뜩 그어져 있었고, 손잡이에도 라카의 얼룩이 튀어 있었다.
척 봐도 들어가서는 안 될 것처럼 생긴 문에는 화룡점정으로 다 무너져 가는 폐가가 그려진 그림 한 점이 액자도 없이 붙어 있었다.
호러물은 싫다며 기겁하던 박호승이 여기에 왔다가는 꼼짝없이 얼어 있었겠구나 싶은 마음에 진예신은 나지막하게 웃고는 거침없이 철문을 열었다.
“오.”
진예신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가 입을 오므렸다. 휙 가볍게 부는 휘파람 속에 작은 흥겨움이 담겼다.
‘제대로 찾은 거 같은데.’
엉망진창으로 쌓인 상자들과 옷걸이에 제멋대로 걸린 채로 방치된 드레스와 턱시도, 여기저기 부서진 가구들, 꽃잎이 듬성듬성 빠지고 먼지가 쌓인 조화로 된 화환까지 온갖 물품이 가득 있다.
전통 혼례식을 위한 한복이 너저분하게 바닥에 떠벌려져 있고, 벽에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부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으며, 지하실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상자는 간간이 홀로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진예신의 시선은 지하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정확히는 한 번 공간을 훑은 직후부터 그 상자에 고정된 상태였다.
‘익숙한 기운이야.’
아이온과는 결이 약간 다른 주술을 다루는 이들만이 가지는 고유의 기운. 진예신은 주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섬세하게 기운을 감지하는 법은 몰랐으나 특별히 몇몇 기운은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오랜 시간 적으로 만났던 풍월주가 직접 내린 저주의 기운이라거나 이따금 견달래가 사용하곤 했던 희미한 변장 주술의 기운, 그리고 일전엔 친구라 불렀던 홍도가 거는 주술의 기운 같은 것을.
‘잘못 기억할 리가 없지. 이건 홍도가 건 주술이야.’
진예신의 눈동자가 선명한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상자를 분해하는 것처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홍도가 건 저주술을 본 적은 까마득하게 예전-몇 번째 삶이었는지도 헤아려봐야 기억할 정도로-이지만, 진예신은 자신이 느낀 게 틀리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것 때문에 저승길에 올랐던 적이 있는데 모르면 큰일이지 않나.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데….’
자물쇠도 걸려 있지 않고, 아무런 무늬도 없는 커다란 상자를 내려다보며 진예신이 고민을 거듭했다. 이것을 과연 지금 이 자리에서 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상자째로 들고 밖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까.
‘어느 쪽이든 앞으로의 일에 영향을 미칠 거야.’
관리인과 안내 직원과의 대화로 추측건대 이곳은 풍월주의 손이 닿았다.
그러니 보물 네 가지를 모으면 균열의 주인이 나타난다는 전제하에 이 상자가 찾아야 할 보물과 관련이 있을 확률은 대략 오 할쯤 된다.
상자에 손을 댄 것이, 혹은 상자 안의 물건에 주술을 부여한 것이 다른 이라면 몰라도 홍도이기 때문이다.
진예신이 아는 홍도라는 인물은 풍월주에게도 협회에도 크게 악감정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만 준다면 제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 그렇다.
‘하지만 그래서 보물과 관련이 없을 확률도 오 할쯤 돼.’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수-설령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더라도-를 두는 진예신과는 반대로 홍도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해서 김요한을 불러오는 걸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람이다.
홍도를 비롯해 사천과 청풍은 세계멸망을 막는다는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진예신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서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기억에 없는 균열에 제아무리 풍월주가 좋은 대가를 치른다고 말했어도 홍도는 일을 거절했을 거다.
홍도도 결국은 김요한을 불러오면서 유해진 면이 있다지만, 근본적인 면은 변치 않았으니 틀림없다.
‘도박은 좋지만, 나 혼자가 아니란 말이지…. 그래도 뭐…, 거슬리기는 해도 불길한 감은 안 드니까 열어봐야겠어.’
진예신이 가볍게 왼손을 튕겨 손등에 금실로 날개 문양이 수놓아진 까만 가죽 장갑을 끼었다.
풍월주가 거는 저주에 대항하기 위해서 오래전에 마련해두었던 특수한 장갑은 보호 능력이 몹시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물건을 만질 때 톡톡히 도움이 됐다.
진예신은 곧장 상자에 손을 뻗었고, 파직. 작은 정전기가 튀면서 손등의 날개가 은은한 빛을 머금었다. 연신 노란 불빛이 튀며 약간의 저항이 일어났지만, 장갑은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고, 진예신은 무사히 상자를 활짝 열었다.
“이게 뭐지? 자물쇠…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진예신이 상자 속에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물건 하나를 꺼내 들고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정교하게 비늘이 새겨진 전통 방식의 물고기 자물쇠. 동그란 눈이 어딘지 멍청한 느낌이 드는 흔히 구할 수 있는 자물쇠가 무려 상자 가득 차 있는 걸 보며 진예신이 미세하게 눈썹을 추켜세웠다.
‘열쇠는 함께 들어있지 않은 거 같고, 아이온으로는…. 역시 반응이 없네.’
가장 위에 있던 자물쇠 하나를 손안에서 굴리며 진예신이 이것저것 실험해봤다. 얇은 막대기로 구멍 안쪽을 쑤셔보기도 했고, 아이온을 듬뿍 쏟아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자물쇠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고, 진예신은 깔끔하게 여는 걸 포기했다. 오기가 생기긴 했는데, 나중에 홍도의 멱살이라도 잡고서 열라고 정중하게 부탁하면 충분히 해결될 일이다.
겸사겸사 요즘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캐낼 수 있겠지. 일거양득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빠르게 합리화를 마친 진예신은 자물쇠를 도로 상자에 넣고선 그대로 마석 보관함으로 이동시켰다. 이번에도 아이온에 반발하여 자그만 불똥이 이리저리 튀었으나 진예신은 무시했다.
‘하나하나 거부 반응 신경 쓰다간 아무것도 못 하지.’
윤혜아가 곁에 있었더라면 제발 꼼꼼하게 확인 좀 하라며 펄펄 뛰었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진예신은 차분하게 지하실의 모든 물건을 한 번씩 다 만져봤다.
홍도의 술법 기운이 담긴 것을 제외하면 지하실의 물건들은 모두 평범한 것들임을 확인한 진예신이 장갑을 벗으려는 순간, 콰앙! 귀가 떨어질 정도의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며 충격에 부서진 천장의 돌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호승 군!”
진예신이 건든 물건에서 나타난 반응이 아니라면 위층을 조사하고 있던 박호승에게 일어난 변고라는 뜻.
김요한에게 절대 친구들이 다칠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진예신이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올랐다.
삐걱거리던 계단이 진예신의 걸음마다 부서졌지만, 그 소리는 다시금 터져 나온 위층의 굉음에 묻혀버렸다.
다급해진 진예신이 겨울의 노을을 비명처럼 불렀고, 그의 충직한 마석은 가장 익숙한 장검의 형태로 나타나며 주인의 부름에 응답했다.
진예신이 아예 천장을 뚫어 위층으로 뛰어오르기 위해 검을 꼬나쥐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위쪽 계단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박호승이 구르듯이 1층으로 내려왔다.
“형!”
“괜찮아요? 큰소리가 나서 바로 올라왔는데, 무슨 일이에요?”
진예신이 황급하게 박호승의 옆으로 달려가 그를 살피며 묻자 박호승이 외투 안주머니를 더듬거리다가 납작한 파일 하나를 꺼냈다.
“제가, 이걸 찾았는데….”
“파일이네요?”
“네, 위층은 전부 식장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딱 한 군데가 단장이 끝난 상태였거든요. 거기가 제일 수상해서 뒤져봤는데, 이게 제일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가지고 왔어요, 왔는데….”
잠시 말끝을 흐린 박호승이 파일을 진예신에게 넘기고 엉망으로 구겨진 바지를 툭툭 털면서 위층을 힐끔댔다.
쿵쿵 네발짐승이 걷는 듯한 소리가 이어지는 천장을 불안하게 올려다보며 박호승이 말을 덧붙였다.
“다른 건 다 멀쩡한데 그, 혼인 서약서하고 같이 있던 반지가 엉망이었거든요~? 서약서는 다 찢겨 있고, 반지는 동강이 났는데, 그걸 또 그 파일에 잘 넣어놨길래 혹시나 해서요.”
“확신하지 못하는 건 이게 보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해서일까요?”
“아, 물론 그것도 있지만요~ 그냥, 뭔가 사랑이 깨진 거잖아요, 그 물건들 보면? 괜히 가장 부서지기 쉬운 게 사랑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박호승이 찡그리는 것처럼 웃고는 어린 학생의 말이니까 흘려넘기라며 더는 말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대로 말을 정말 그만둔 것은 아니었고, 대신 주제를 바꿔서 이 소란이 일어난 일에 관해 설명했다.
“하여간 제가 그 파일 들고 형한테 가려고 나서는데, 갑자기 병풍이 무너지지 뭐예요~?”
“병풍이요?”
“이거 찾은 게 전통 혼례식 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곳이었거든요. 꽤 화려한 병풍이었는데 그게 넘어가더니 벽을 반쯤 부수더라고요~?”
박호승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여기 부실 공사 현장이라고 너스레를 한 번 떨고는 점점 크게 들리는 쿵쿵 소리에 침을 꿀꺽 삼켰다.
명백한 긴장의 표시에 진예신이 검을 좀 더 강하게 움켜쥐었고, 박호승이 슬금슬금 진예신의 옆에 더 가까이 붙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진짜 집채만 한 호랑이가 벽에서부터 튀어나왔는데….”
쿵! 지축이 흔들리며 거대한 하얀 발이 계단을 짓뭉갰다. 그저 내려오기만 하는데 난간과 벽을 몽땅 때려 부수는 크기에 진예신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제가 잠을 깨웠다면서 글쎄, 말을 하더라고요~?”
정말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라버려서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내려오는데, 호랑이가 따라오면서 그 난리가 났습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내뱉어진 박호승의 말이 허공에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