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50
49화. 장막 아래 경매장 (8)
진한 살구색의 원피스 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허리를 꽉 묶은 리본이 곡선미를 확연하게 살렸다. 심플한 디자인의 원피스는 평소 신여월이 좀처럼 입지 않는 옷이기도 했다.
목 부분에 화려한 무늬가 프린팅된 스카프를 맵시 좋게 매면서 신여월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빈티지 클래식이라는 이클립스의 주제에 맞춰서 옷을 차려입은 신여월은 긴 머리카락을 모아 둘둘 말아 올려서 흰 비단 끈으로 고정하며 드레스룸을 나섰다.
드레스룸과 연결된 응접실에는 신여월과 마찬가지로 주제에 맞춘 정장을 입은 임로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협회장님. 정장이랑 한복 외에 다른 옷을 입으신 건 처음 보는데, 잘 어울리시네요.”
“아부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로진아.”
“들켰나요?”
“원하는 게 있다는 눈을 숨기지도 않으면서 말은 잘하지. 그래, 내 기분을 좋게 해서 가지고 싶은 게 무엇이냐?”
총애하는 후궁에게 재물을 고르게 하는 황제처럼 신여월이 나른하게 하품하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팔걸이를 부드럽게 톡톡 건드리는 손톱은 그 끝이 보석으로 치장되어서 움직일 때마다 화사하게 빛을 뿌렸다. 무의식적으로 그걸 눈으로 좇던 임로진이 멋쩍게 웃었다.
“별 건 아니고요….”
“나에게? 아니면 너에게?”
“그야 협회장님에게 별 게 아닌 거죠. 저한테는 월권이지만요.”
그의 대답에 신여월이 속내를 알았는지 코를 작게 울리며 웃었다. 배부른 맹수의 울음과 닮은 소리에 임로진이 어깨를 흠칫 굳혔다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신여월이 특이한 반응을 한 것도 아닌데 임로진은 괜히 쭈글쭈글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현대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신분의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신여월이라는 사람 앞에서는 누구든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건 S급 감응자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신여월이 본디 몸에 두르고 있는 위엄이 그렇게 만들었다. 화려하게 감응자로 데뷔했던 그 옛날부터 줄곧.
바짝 굳어있는 임로진을 보면서 신여월이 짓궂게 물었다.
“임로운이 가지고 싶은 게냐?”
“아니, 말씀을 왜 그렇게 하세요. 그딴 놈은 줘도 안 가진다고요.”
앉은 자세 그대로 펄쩍 엉덩이를 들었다 떼는 임로진의 모습이 재밌는지 신여월이 킥킥 소리 내어 웃었다. 한껏 묻어 있는 장난기에 임로진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신여월이 개구쟁이 같은 구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크게 반응을 보이는 제 탓이려니 싶었다.
“즉결 처분권이요. 협회장님께는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걸 사용한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지만 말이지.”
“오로지 신여월 협회장만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인 건 아는데요….”
임로진이 슬쩍 신여월의 눈치를 보다가 곧게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마주했다. 계속 장난스럽게 여유를 부리던 신여월이 비로소 흥미가 인다는 표정으로 임로진의 눈을 들여다봤다.
“협회장님께서 절 구해주셨던 날, 기억하세요?”
“잊을 리가 있나.”
“그때 우리 약속한 거 있잖아요. 전 그게 오늘이었으면 좋겠어요.”
황홀할 정도로 짙은 금색의 눈동자가 불을 머금은 것처럼 타올랐다. 신여월이 가장 좋아하는 각오가 깃든 눈동자다. 모든 것을 불살라서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는 자의 눈빛.
긴장한 것처럼 꽉 쥐고 있는 임로진의 양 주먹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등을 무심한 척 훑은 신여월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턱을 괬다.
“로진이, 네가 원한다면야 나는 당연히 들어주고 싶지. 내 이름을 걸고 했던 약속을 어기는 파렴치한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정말 괜찮겠느냐?”
“네?”
“정녕 내게 그날의 일을 말해도 괜찮겠느냐는 뜻이란다.”
사람을 잘 믿지 못해서 늘 벽을 세우고, 결벽적일 정도로 평범한 모습을 보이려 하던 임로진이다.
간혹 감정이 격해지면 까탈스럽게 말하기는 해도 평상시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쾌활하고 발랄한 어조를 유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노력의 화신 같은 사람이 무려 신여월의 앞에서 평정을 잃고서 연신 떨리는 손가락을 움찔거리고 있는데,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제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은 사람들을 아끼는 신여월이 그런 그를 신경 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분명 말했었지. 오랜 시간이 걸려서, 그게 설령 네가 죽는 날이 된다고 해도, 네가 준비되는 날에 이야기를 듣겠다고.”
“네, 그랬죠.”
“이번 이클립스가 절호의 기회라는 건 나도 안단다. 이만한 운이 또 따르기엔 어려울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서 더 걱정되는구나.”
따분한 듯 팔랑거리던 신여월의 속눈썹이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의 마석을 닮아서 한없이 투명한 검은 눈동자가 임로진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았다.
카메라 렌즈에 비춘 것처럼 또렷한 형상에 임로진이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가 보란 듯이 크게 숨을 마시며 가슴을 부풀렸다.
“이십 년이에요. 제가 협회장님과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벌써 그만한 시간이 흘렀어요. 저는 이제 서른넷이나 먹었고, 무엇을 해도 좋을지 몰라서 그저 도와달라고 외쳤던 열넷짜리 꼬마애가 아니죠.”
눈썹을 팔자로 찡그리고,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 미소 같은 것을 지은 임로진이 빵빵하게 차 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지 못하면 영영 없어지는 거잖아요. 제가 그날 그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려고, 신여월 협회장님, 당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를 제발 벗어나게 해주면 뭐든 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신여월은 대꾸 없이 그저 임로진의 말을 들었다. 부드러운 대화를 위해서 적게나마 취하던 작은 손짓도 없이 물끄러미 과묵한 청자가 된 신여월이 오히려 편한 것인지 임로진의 굳은 몸이 다소 풀렸다.
벌써 오래된 기억이지만 언제고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날을 되새김질하며 임로진이 흐릿해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전 제가 강한 줄 알았거든요. 힘을 가지면 불행했던 과거 같은 건 금방 떨쳐내고 멋지게 복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요, 협회장님. A급 감응자가 되고, 그 집안의 치부를 있는 대로 긁어모았는데도 차마 협회장님께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누가 옆에서 당장 쏴버릴 수 있는 총부리를 머리에 들이민 것처럼 입술이 도무지 안 떨어졌어요. 몇 번이고 그랬어요. 협회장님 방 앞에 갔다가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그러다가 깨달았지 뭐예요.”
고해성사처럼 넋두리를 하던 임로진이 힘껏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그리곤 한숨 같기도 하고 속삭임 같기도 한 작은 말을 꺼냈다.
“아, 난 평생 그날의 일을 혼자서는 이겨내지 못하겠구나.”
모든 사람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제아무리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똑같은 경험을 해도 각자 받아들이는 감정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기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늘 자신만만했던 신여월은 임로진에게 대수롭지 않게 힘내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아랫입술을 가만히 문질렀다.
임로진은 허탈하게 웃더니 곧이어 목을 약간 구부정하게 굽히며 신여월을 올려다봤다.
“그래도 나름대로 저 지금 용기라는 걸 낸 상황이거든요. 제 나이 반밖에 안 산 꼬마 부장님이 차려준 밥상, 제대로 먹어보려고.”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듣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겠구나. 다만….”
톡톡 일정한 박자로 무릎을 두드리던 신여월이 언제 심각한 얼굴을 했느냐는 듯 코를 찡긋거리며 짓궂은 미소를 그렸다.
“예전처럼 옛날 일이 생각나서 악몽을 꿨다며 내 집무실로 달려와서 엉엉 울어도 재워주지 않을 거란다.”
“아니, 협회장님, 그게 언젯적 이야기에요!”
“글쎄다…. 아직도 요만했던 꼬맹이가 눈에 훤해서 말이지. 물론 지금은 이렇게 컸지만, 여기는 아니잖니.”
신여월의 고운 손가락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 건드렸다. 그 장난스러운 모습에 임로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제 정신연령이 낮다고 놀리시는 거죠.”
“설마. 그저 조금 어린애 같다는 얘기란다.”
“어휴. 협회장님한테 말로 이기지 못한다는 걸 아는데 왜 이렇게 대들고 싶은지 모르겠다니까요. 하여간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면 좀 받아 주시라고요.”
말대꾸를 하는 임로진의 얼굴이 신여월이 평소 아는 것과 같아졌다. 괜한 트집에 투덜거리고, 입술을 비죽거리면서도 신여월에게 말 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그 어린 날의 얼굴이 그대로 있었다.
신여월은 언제고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를 만족스럽게 보면서 귀담아듣고 있다는 표시로 살짝 상체를 숙여 임로진에게 집중했다. 임로진은 금방 투덜거림을 접고 큼,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협회에 정식으로 등록하기 바로 전날에 있었던 신체검사 기억하시죠?”
“당연히 기억한단다. 네 눈은 특이사항이었으니까.”
“마석을 겉으로 꺼내놓지도, 스스로 아이온을 움직인 것도 아닌데 늘 이랬으니까요. 결과도 특이했죠. 신체적으로 이상이 있는 부분은 없다. 눈은 금색이 됐지만, 아이온이 과다하게 모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감응 이후 신체 변화가 온 특수한 사례로 기록하자.”
자주 생각해 보던 말인지 끊임없이 줄줄 나오는 임로진의 말끝을 신여월이 자연스럽게 받았다.
“당시의 담당자는 이제 협회에 없지만, 기록은 남아 있지. 그땐 합리적인 결론이었단다. 어린 네가 아이온 중독 증상을 보이지도 않았고, 폭주를 하지도 않았으니까.”
“네. 하지만 협회장님. 제가 그때 말씀드리지 못했던 점이 있어요.”
임로진의 왼손이 자신의 왼쪽 눈을 꾹 눌렀다. 선명하게 새겨진 감응자의 문장이 금색으로 빛나며 응접실 전체에 황금빛 모래가 두껍게 깔렸다.
바닥, 벽, 천장 할 것 없이 모래가 움직이며 부딪치는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신여월은 신중히 처리하다 못해 안팎의 소리를 서로 못 듣게 만드는 형태에 눈을 빛냈다.
“저를 구해주셨던 협회장님께서도 제가 단순하게 구석진 별장에 감금되어 있던 학대받는 소년이라고 생각하셨죠.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문장에 두 가지를 추가해야 해요.”
“두 가지?”
“구석진 별장의 ‘실험실’에 감금되어 있던 학대받는 ‘실험체’ 소년.”
임로진의 입에서 나온 문장에 신여월의 눈빛이 돌변했다. 동시에 날카롭게 벼려지는 공기에 임로진이 눈썹을 불쌍하게 모았다.
강한 감응자는 존재 자체만으로 주변의 아이온을 자신에게 끌어당기기 때문에 감정이 요동치면 아이온도 함께 움직인다.
임로진이 듬뿍 아이온을 사용하여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었는데도 신여월의 감정에 동조하여 분위기를 바꾼 것이다.
찌릿찌릿할 정도로 날카로운 기세에 임로진이 진정하라는 듯이 후다닥 말을 덧붙였다. 태평스러운 척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고개를 까딱이기까지 했다.
“그게 세림 그룹이 펼친 일이라는 것도, 그 주체가 임로운과 연관되었다는 것도 더 말하지 않아도 눈치채셨죠?”
“네 입으로 다 말해 놓고 능청 떨기는.”
신여월이 픽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고는 의자 깊숙하게 몸을 기댔다. 순식간에 기운이 가라앉으며 이전과 다름없는 평온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임로진이 어깨를 움츠리며 무섭다고 호들갑을 떨어주고는 경매장까지의 에스코트를 한번 사양했던 신여월을 굳이 해드려야 한다며 찾아온 진짜 이유를 꺼냈다.
“임로운은 세림에 대한 충성심이 어마어마해요. 감응자가 될 확률이 희박했던 주제에 세림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제 감응 실험에 스스로 실험체로 참여한 사람이기도 하고, 기어이 감응에 성공한 사람이기도 해요. 능력도 철저하게 뒷공작에 좋은 걸로 가지고 있죠.”
“어떤 능력인지는 보고서로 받아봤단다. 협회로 왔다면 분명 도움이 됐을 거란 생각을 했었지.”
“네, B등급치고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인간이기도 하니까요. 어쨌든 임로운은 그 능력으로 지금껏 책잡힐 짓은 하지 않았어요. 전부 은폐시키는데 더러운 짓을 했다고 누가 알겠어요. 세림의 회장은 그런 임로운을 높게 평가했는지, 실험체였던 그자를 실험실의 주인으로 앉혔어요. 전 그때 실험체가 됐고, 근 3년간 실패작으로 불렸어요.”
체내 아이온 보유량이 많아서 기대주였는데 감응할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온갖 짓을 다 당했다며 임로진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찡그려진 눈썹 사이에 깊게 골이 파이자 신여월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나이도 계속 드는데 그러다가 금방 노안이 된다는 농을 던지며 그가 감정에 허우적거리지 않게 끌어올렸다.
임로진은 작게 웃으며 보란 듯이 꾹꾹 눈썹 사이를 눌렀다.
“아무튼 이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요. 임로운에 대해 말을 더할게요. 그 사람은 어쨌든 세림에 대해선 입도 뻥긋하지 않을 거예요. 꼬마 부장님이 들쑤신 일로 후계자 자리를 위협받고, 회장님에게 한 소리 듣긴 했겠지만, 그 정도로 흔들릴 충성심이었으면 진작 세림은 없어졌을 거거든요.”
“그래서….”
신여월이 비죽 입꼬리를 올려 송곳니를 드러냈다. 새카만 눈동자에 영롱한 빛이 서리며 섬뜩하게 번뜩였다.
“협회에 구금시켜서 정보를 얻기엔 무리라는 소리더냐?”
“네.”
“알고 있는 게 많은 그자를 떠보지도 않고 즉결 처분할 수는 없단다. 협회의 감옥이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고, 예신이가 일을 잘하는 것도 알잖느냐.”
“알죠. 정말 잘 알아요. 여차하면 강제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도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임로진이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냐는 신여월의 적나라한 표정에 손깍지를 끼며 말을 덧붙였다.
“그 일련의 과정을 전부, 제게 맡겨주셨으면 좋겠어요. 구속도, 감옥 이송도, 심문도, 고문도, 모두요. 즉결 처분권으로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처분권만 있으면, 그치의 머릿속을 전부 꺼내올 자신 있느냐?”
“주제넘은 말이지만, 임로운에 한해서만큼은 제가 예신이보다 확실하게 해낼 수 있어요.”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몇 번 들리고, 숨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게 가라앉은 응접실 내부에서 드디어 신여월이 소리를 냈다. 아주 연약한 한숨은 이내 ‘승낙’의 표현을 담은 말로 이어졌다.
“좋다. 네게 맡겨보마. 처분권까지 굳이 원한다는 건 그자를 결국 없애겠다는 뜻일 테니, 뒷일은 내가 감당해주마.”
“정말…. 감사합니다, 협회장님.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되었다. 내가 널 데려오면서 했던 약속인데 지켜야지, 아무렴. 그러니 어디 마음껏 해보려무나. 하지만 명심하렴. 임로운을 닦달하고 싶어 하는 건 너만 있는 게 아니고 요한이도 있으니까.”
신여월의 말에 임로진이 하하 호쾌하게 웃으며 왼손을 흔들어 깔아놨던 모래를 회수했다. 그러고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협회장님. 꼬마 부장님은 아직도 자고 있나요? 이클립스까지 이제 1시간도 안 남았는데?”
“음? 아이온이 느껴지느냐?”
“누가 S급 아니랄까봐 아이온 개성이 넘쳐흐르는데 어떻게 몰라요. 아직 집무실에서 자는 거 같은데요. 아니, 기절했다고 해야 하려나?”
새벽녘에 협회 본부로 날아왔던 진예신과 그 팔에 안겨 있던 너덜너덜한 김요한을 떠올리며 임로진이 고민했다. 신여월은 그 말에 시원한 미소를 그리며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클립스 동안에 요한이의 일은 전부 예신이가 하겠다고 했으니 문제는 없단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푹 쉬면 좋지. 너희들 말마따나 꼬마인데, 너무 과로하고 있거든.”
걱정이 섞인 말을 하면서도 싱글싱글 웃고 있어서 전혀 호의로 느껴지지 않는 신여월이다.
그런 모습이 익숙한 임로진은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어 신여월을 에스코트했다. 그러면서 퍽 궁금하다는 듯이 김요한이 있을 집무실을 힐끗 올려다보고 말했다.
“꼬마 부장님이 깨어났을 때가 기대되네요. 일어나서 일 끝난 걸 보면 뭐라고 말할까요?”
“글쎄다….”
신여월이 다분히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 다음, 첫마디로 ‘젠장’을 꺼낼 것 같구나.”
“에이, 그게 뭐예요. 예신이를 찾는 거 아니고요?”
“그건 아마 그다음이 될 거란다. 요한이 그 아인, 자신을 먼저 탓하는 아이라서 말이지.”
응접실을 나가서 주차된 차량에 몸을 실으며 신여월이 뒷말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 정말로 무너질 것 같아서 걱정스럽기 짝이 없지….’
계획의 종점을 찍으러 가는 길, 신여월은 시답잖은 고민을 하며 가만히 차창 밖을 내다봤다.
환하던 어제와는 다르게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사람의 울음 정도는 가볍게 먹어 치울 정도의 강한 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