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of the Fox RAW novel - Chapter 41
41화
“우욱…….”
도통 정신이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인지, 요즘 컨디션이 난조해서인지, 평소보다 많은 양을 마신 것도 아닌데 물먹은 스펀지처럼 축 늘어진 몸은 이미 나의 통제 밖이었다. 집까지 가는 도중, 몇 번이나 내려 속을 게워냈는데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현웅 선배가 옆에서 무어라 말하는데, 웅웅대는 스피커처럼 목소리가 여러 겹으로 울려서 들리는 것 같다.
이 와중에도 무사하게 집까지는 가겠다고 집주소를 부르고, 감겨오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차창 밖 풍경을 보며, 우리 집으로 제대로 가고 있나를 감시하던 중, 드디어 집에 도착했는지 뺑뺑 돌며 길을 헤매던 현웅 선배의 차가 집 앞에 멈췄다.
“여운아, 여기 맞아? 내릴 수 있겠어?”
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문을 열어젖혔다. 한손엔 백, 한손엔 휴대폰을 들고 차문에 의지해서 발을 내딛었는데 그 순간, 오른발이 옆으로 쑥 미끄러지며 무릎이 땅에 세게 부딪혔다.
“아아―!”
발목부터 정강이, 무릎을 타고 오는 통증에 입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뼈에 금이 간 건지, 삐끗한 건지 오른쪽 발은 움직이지 않았고 뼈가 아리는 고통에 힘겹게 눈을 떠 발목을 바라보면 오늘 온종일 신고 다닌 힐로 인해 퉁퉁 부운 발에 아슬아슬 매달리듯 걸려있는 하이힐의 높은 굽은 두 동강이 난 상태였다.
“여운아, 괜찮아?”
현웅 선배가 운전석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차문을 열자마자 땅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나를 부축하던 선배는 뭐가 재밌는지 실실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빠네 집에 가자니까…….”
“아아―”
발목에 시큰거리는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나는 아무런 말도 이을 수 없이 간간히 신음만 내질렀다.
하필 내가 왜 하이힐을 신었을까. 아, 오늘은 면접 보는 날이었지. 그런데 면접은 망했고, 난 언제 취업할 수 있는 거지. 등등, 이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발목이 아픈데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한동안 잠잠하던 속은 부대끼며 오바이트가 올라오려고 했다.
“아이고, 발이 많이 부었네. 오빠네 집 가서 찜질해야겠다. 자, 내 목에 팔 둘러봐.”
발이 많이 붓고 다쳤으면 병원엘 가야지, 왜 너네 집에 가니.
이 와중에도 현웅 선배의 시커먼 속내가 보이는 것 같아 난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난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건만, 온몸의 힘이 빠진 터라 그것이 그에게는 그저 앙탈부리듯 보인 모양이었다.
“아, 너 취하니까 진짜 귀엽다…….”
위험상황. 조현웅의 얼굴이 점점 내 얼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들어 선배의 머리를 내려쳐보지만, 생각과 다르게 가방은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부러질 듯한 발목의 통증에도 아악 소리조차 힘 있게 내지르지 못하는 내가 다가오는 조현웅의 얼굴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천천히 내 입술에 닿은 조현웅의 입술에 순간 겁이 나면서 그의 입술을 있는 힘을 다해 깨물었다.
“아악―!”
온힘을 쥐어짜내 깨문 보람이 있게, 그는 내게서 순식간에 떨어졌고,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미친, 이거 개년 아니야?!”
피가 나는 입술을 한손으로 막으며,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조현웅. 잠시 잊고 있었다. 아무리 분위기에 몰렸어도, 아무리 내 신세가 구질구질했어도 이런 사람과 둘이서 술을 마시는 건 위험했다. 그것도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내가 자신의 입술을 깨물자 본능적으로 내 머리를 때린 듯했지만, 남자는 남자인지라 힘이 실린 손바닥에 내 얼굴은 그대로 차의 옆면에 부딪혔다.
“아아…….”
자동차 같은 무쇠덩어리에 얼굴을 빗겨 부딪친 게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오지도 않는 신음을 삼키며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보지만, 떨리고 있는 손 사이로 눈물이 새어나오는 그때, 불쑥 내 손목을 세게 잡아끄는 힘에 절로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그 순간, 오른 발목에 가해지는 어마어마한 통증에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아아악―!!”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비명. 조현웅의 비명이 한적한 골목길을 크게 울렸다. 뿌옇게 흐린 시야로 보이는 광경은, 모자를 눌러쓴 키 큰 남자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현웅 선배를 무차별하게 발로 차고 있는,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술이 확 깨는 것 같다.
“아악……아, 항복…… 그만! 살려주세요!”
조금이나마 반격하려는 듯 움직이던 현웅 선배는 헛발을 내딛으며 애써보더니, 결국 두 손을 머리위로 올리며 명백한 항복신호를 내보였다. 그제야 발길질을 멈춘 녀석은 물끄러미 조현웅을 내려다보다가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 난데없이 뒤를 돌아 멀어져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가운데, 어두운 골목길 커다란 폐기물들이 쌓여있는 전봇대 뒤로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누군가의 팔목을 잡았다.
“죄…… 죄송합니다!”
어두운 골목길, 전봇대 뒤에 숨어있던 누군가의 팔목을 끌고 나오던 남자를 향해 겁먹은 목소리로 외치는 사람. 그 사람의 손에 들려있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모자 쓴 남자에 의해서 땅으로 곤두박질쳐진 것은 커다란 카메라였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것 같은 적막함이 골목길을 에워쌌다. 현웅 선배는 두려운 듯 슬슬 뒷걸음치고 있었고,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남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신고할 테면 해봐.”
캡모자를 고쳐 쓴 남자의 낮고 딱딱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남자가 원지호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근데 뒷감당은 각오하고 해라.”
그의 눈치를 살피던 현웅 선배가 주섬주섬 옷을 챙기더니 운전석에 올라탔다. 문만 간신히 닫은 차는 이내 골목을 후진으로 빠르게 빠져나갔고, 카메라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던 기자 역시 커다란 카메라 가방에 부품들을 주섬주섬 담자마자 줄행랑을 치듯 이곳에서 사라졌다.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오른쪽 발목 때문에 서있을 수 없었던 나는 간신히 담벼락에 몸을 기댄 상태였고, 골목길 한가운데 서있던 원지호가 내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넌 대체……!”
그가 크게 소릴 내질렀다. 무언가에 크게 화가 난 듯, 크게 흔들리는 눈으로 날 한참 바라보던 녀석이 이내 시선을 피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대문 앞 계단근처 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여있는 담배꽁초들을 보고 말았다. 다 피운 지 얼마 안 된 듯, 여전히 연기가 조금씩 피어나고 있는 꽁초도 보였다.
“…….”
재신이는 흡연자가 아니다. 나 역시 비흡연자이기에 쓰레기통에서 저렇게 많은 담배꽁초들이 나올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원지호가 한때 즐겨 피웠던 그 담배의 꽁초들이.
나의 시선이 담배꽁초들이 쌓여있는 쓰레기통에 꽂힌 걸 알았는지, 말이 없던 원지호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짜증나. 담배 끊었었는데…….”
“…….”
“너 때문에 다시 손대버렸어.”
그 말에 왜인지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녀석에게 그 눈물을 들키기가 싫어서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자.”
어떻게 네가 여기 있는 건지. 지금 이 순간 네가 오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됐을지. 그보다도, 지금이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래왔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이 가빠졌다.
원지호가 뒤를 돌더니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발목을 다친 걸 모르는 모양인지, 한참을 혼자 걷던 그가 다시 뒤를 돌아 그 자리 그대로에 기대고 있는 나를 바라봤다. 나는 녀석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입술을 꽉 깨물며 천천히 힘을 줘서 걷기 시작했다. 내가 움직이자 그제서야 다시 뒤를 돌아 우리 집 대문을 여는 원지호였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대문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이미 오른 발목은 내 발목이 아닌 것 같고, 아무런 감각도 없이 쑤시기만 했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될 것 같았다. 너에게로 얼른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간신히 대문 안으로 몸을 들여놓았고, 대문을 닫으며 그 문에 기대섰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이제 발이 너무 아파서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고, 신음을 내지 않으려 꽉 깨문 입술에선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못 걷겠어.”
한계에 다다른 내 몸에선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도저히 발목이 아파서 앞으로 걸어갈 수가 없었다. 내 말에 원지호가 걸음을 멈췄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저벅저벅 나를 향해 걸어오는 녀석의 흐릿한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내가 다친 걸 알았는지, 내 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고개를 숙여 발목을 확인하던 녀석이 낮게 욕을 읊조렸다.
간신히 참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몸을 일으킨 그가 나를 화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하자 다시 입을 꾹 다물며 얼굴을 돌려버리는 원지호였다. 그리고 몇 번을 입을 뗐다, 닫았다를 반복하던 녀석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늦게 다니지 말랬잖아요.”
순간이었다.
늦게 다니지 마세요. 4년 전, 녀석이 내게 했던 말.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들렸을지도 모르는 그 말에 난 왜 이렇게 화가 치미는 건지. 왜 이렇게 눈물이 터지는 건지.
“……뭐?”
그리고 난 헛웃음이 나왔다. 죽을 것같이 아픈 발목의 통증도 다 잊을 만큼,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네가 뭔데?”
내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늦게 다니지 말라고? 네가 뭔데. 네가 내 오빠야? 동생이야? 남자 친구라도 돼? 내가 늦게 다니든, 내가 지금 이런 일이 생기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화를 내는데?!”
왜 이토록 화가 나는 걸까. 왜 이토록 가슴이 아픈 걸까.
나조차도 나를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걸까.
“말해봐!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네가 뭔데 자꾸 이래라저래라 간섭인데! 갑자기 4년만에 나타나서…… 지금 나한테 뭐하자는 건데!! 네가 무슨 권리로 이러는 건데?!!”
내 술버릇은, 누군가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고치려 했지만, 도무지 고쳐지지 않던 내 술버릇을 핑계 삼아 난 녀석에게 참아왔던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원지호가 날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모자의 그늘에 가려진 녀석의 눈이 온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
“말해봐. 무슨 상관이냐구!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왜 날 자꾸 이렇게 흔들어대는 거냐구!! 네 마음이 도대체 뭔데!!”
좋아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러다가 또 사랑하게 된다.
“몰라서 묻냐?”
순간이었다.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나의 눈을 지그시 마주하던 녀석이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너 좋아하잖아.”
순간, 내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너 좋아하니까.”
그때의 그 기분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아직도 너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4년 전, 재신이의 사고소식을 들었을 때 가졌던 느낌과 같은 것이었다. 나에겐 상상되지 않는 일. 재신이가 재활 치료를 받는 걸 지켜보면서도, 그때까지도 실감나지 않았던 일. 재활 치료도중에도 너무 아프다고, 너무 힘들다고, 다 포기하고 싶다고 혼자 울분을 터트리는 재신이를 보는 그 순간조차도, 나는 재신이가 수영을 못하게 되었다는 게 현실 같지 않았다.
원지호가 피곤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래서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는 널 안 보려고 했는데…….”
“…….”
“훈이 생일날 네가 왔고, 너를 봐버렸고. 그러니까 또 보고 싶고.”
“…….”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네가 여전히 좋고. 나도 이런 날 어떻게 할 수가 없고.”
“…….”
“네가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다른 남자 옆에 있는 널 보는 게 엿같고. 그래서 미치겠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힘없이 웃었다.
“……이게 내 마음이야.”
꿈같은 현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늘 그렇듯이, 한 여름 밤의 꿈.
“근데 어떡해.”
“…….”
“좋아해도 옆에 있어줄 수 없어서 좋아한다는 말도 못 하는데.”
“…….”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해야지.”
“…….”
“업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있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원지호가 등을 내보이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그 널찍한 등을 보는 나의 가슴은 뜨거워지면서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용암처럼 터져 나왔다.
“내가 언제 너한테 뭐 해 달라 그랬어?”
크게 소릴 지른 나의 말에도 원지호는 미동이 없었다. 여전히 몸을 숙인 채, 나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었다.
“네가 옆에 있어줄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한테 보내주는 거? 그게 어떻게 나를 위한 거야?”
“…….”
“왜 말 못 해?”
“…….”
“기다려달라고, 널 좋아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할 생각은 왜 안 하는데?”
이렇게 좋아하는데. 난 아직도 널 이렇게 많이 좋아하고 있는데. 왜 다른 사람한테 나를 보내주는 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만드는 일이라고 넌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널 떠날 것 같았어?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외로워서 먼저 너를 버릴 것 같았니?”
“…….”
“말해주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네가 기다리란 말을 하지 않았어도, 여전히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국은, 원지호에 대한 내 사랑이 부족해보였던 탓이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기다리고, 또 기대하고.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혹시, 오늘은. 이렇게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나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쉼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와서 더 이상 어떤 말을 해도 발음이 뭉개지는 탓이었다. 난 원래 남 앞에서 우는 걸 싫어하는데, 어째서 이 남자 앞에서는 이렇게 무방비상태가 되어버리는 건지.
“고개 들어봐.”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원지호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왜.”
“화장 번졌어…….”
오늘 아침, 면접날이라고 공들여 했던 메이크업은 이미 다 무너진 뒤일 것이다. 이런 몰골로 눈물어린 사랑 고백을 하게 되다니……. 뒤늦은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괜찮으니까 들어봐.”
“왜……!”
고갤 들면, 원지호와 눈이 마주쳤다. 보일 듯 말 듯 작게 피식 웃은 녀석이 손을 들어 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니, 눈 밑의 눈물을 닦아줬다. 마스카라를 떡칠한 탓에 검은 눈물을 흘렸던 건지, 녀석의 손가락에 묻어나는 눈물은 흐릿한 회색이었다.
부끄러움에 다시 고개를 숙이려는데, 내가 고개를 못 숙이게 한쪽 손으로 단단히 내 얼굴을 고정시킨 녀석이 이번에는 소매로 터진 입술을 살살 닦아내고 있었다. 갓난아기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고 따뜻한 손길로.
“다정하게 굴지 마.”
이런다고 누가…….
“너 짜증나.”
“…….”
“너 미워죽겠어.”
많이 미운데. 정말 이렇게 미워죽겠는데, 이래도 네가 왜 좋은 걸까.
눈 주변을 다 닦아냈는지, 원지호가 내 눈을 쳐다봤다. 그와 눈을 마주하자, 또 울컥 차오르는 이 울렁거리는 마음은 언제쯤 잠잠해질까.
“미안해.”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울려서.”
“…….”
“혼자 남겨둬서.”
4년 전, 정동진에서 원지호가 한 말이었다. 함께 새벽을 지새우고, 아침해가 떠오르는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네가 했던 말.
변한 게 있다면, 4년 전과 많이 달라진 현실. 지금의 너와 나. 그리고,
“너무 늦게 와서.”
서울이 39도 역대 최고치의 폭염을 갱신했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열대야에 달이 밝았던 그 날. 사는 게 구질구질하고, 앞날이 깜깜해서 내 자신이 바닥같이 느껴지던 내 나이 스물다섯, 그 여름.
너무 오래 돌아왔고, 많은 게 달라진 뒤였지만.
우린, 그러니까 너와 나는 그 여름에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