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설상가상 (4)
쿵. 쿵.
“어이, 거기 제대로 좀 붙잡고 있어 봐!”
“네가 해봐! 이거 더럽게 무겁다니까?!”
“여기 오함마랑 대못 가져와!”
“하나, 둘, 셋 하면 드는 겨.”
“하나! 둘! 세엣-!!”
구름 떼처럼 몰려왔던 사도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지금까지 피와 살점을 튀기며 싸웠던 게 마치 허상이었던 것처럼.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캠프원들은 자신들의 허벅지를 꼬집거나 볼을 때렸지만, 본인들의 손이 생각보다 맵다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 당장의 전투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시간을 벌었을 뿐이니,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전투를 대비해야 합니다!
민준이 종탑에 올라 전투가 끝났음을 선포하고 나서야 캠프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철푸덕 드러누웠다.
그들은 그렇게 하루 꼬박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전후 정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망자는 추모를 위한 캠프 내의 묘지로.
그리고 생존자들은 다음 생존을 위해 목책으로.
병철과 학범이 자리를 비웠으나, 부사수인 명 팀장이 있었기에 그의 진두지휘로 작업이 진행될 수 있었다.
명정호가 가장 마지막 기수인 아홉 번째이긴 했으나.
그 기준이란 건 어디까지나 전투력만을 생각하고 세운 것.
과거 가락농수산물시장의 전반적인 시설을 관리하던 기술자이자, 현재 가장 웃어른인 명정호는 전후처리의 책임자를 맡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몸이 좀 찌뿌둥한데….’
명 팀장의 배려에 따라, 가락동을 떠나기 전 머물던 옛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민준은.
캠프원들과 같이 보수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음에 깊은 아쉬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명 팀장님 저도 보수작업을 돕는 게 낫-’
‘아닙니다. 인력 낭비입니다.’
명 팀장은 민준의 말을 무안할 정도로 단칼에 잘라냈다. 이견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태도.
기왕 복구 작업을 하는 것 한 손이라도 더 거들면 좋을 텐데, 그는 민준이 재차 얘기하는 것도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더랬다.
‘어…. 저 이래 보여도 예전에 인력사무소에서 이름 좀 날렸습니다. 미장부터 목공까지 안 해본 게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말씀까지 안 드리려 했지만, 제가 종말 전에는 건축사사무소에서 근무를-’
‘사람에겐 각자의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건축을 하셨다니 이렇게 비교를 해보죠.’
그렇게 운을 띄운 명 팀장은 생수 한잔으로 목을 축이곤 말을 이었다.
‘예전에 일하실 때, 민준 씨 소장님이 화장실 도면을 직접 하나하나 다 그렸었습니까?’
‘….’
‘아니죠? 민준 씨 혹은 그 밑의 직원이 하셨겠죠. 세상엔 다 각자에게 맞는 일이 있는 겁니다. 물론 제가 일의 귀천을 따지자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직전까지 마인들과 싸우셨고. 앞으로도 많은 전투를 하셔야 할 민준 씨가 그 일을 하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이전의 전투를 복기하고, 훈련을 하시든 회복을 하시든. 더 강해지십시오. 그게 저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길입니다.’
명정호 팀장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민준은 군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과연 연륜은 농담 따먹기로 얻은 게 아닌지, 민준이 반박할 수 없는 얘기로 그를 설득해냈기 때문이다.
“이번에 보상으로 얻은 건, 너무 명확해서…. 더 확인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테이블에 앉아있던 민준이 슈퍼싱글 크기의 침대를 바라봤다.
코로롱-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작게 코를 골고 있는 기린 한 마리.
전투 후 다시금 어린 모습으로 변한 린이 민준의 시야에 잡혔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야.’
녀석이 전투에 뛰어든 것으로 기울어가던 전황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기습을 당하기 직전에 이를 막아준 것도 린이었고.
애물단지처럼 잠들어있던 [용살자]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린 덕분이었다.
어디 그뿐만인가, 애초에 이능을 채워주는 능력에 더해 훌륭한 방어능력을 갖추고 있던 녀석에게 번개라는 새로운 힘과 비행 능력까지 갖추어졌으니.
민준은 린 덕분에 나방 마인들과의 공중전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직 완전히 성체가 된 건 아니라지만….’
이번 전투에서 린은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녀석이 어른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던 건. 단지 모아두었던 힘을 개방함으로 인해 발생한 부수적인 효과라고 했다.
지금 깊은 잠에 빠져든 것도 그로 인한 여파인 셈인데.
불완전한 모습으로, 아직 [이무기의 내단]을 다 소화시키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 정도 퍼포먼스를 보일 정도라면.
완전히 성장한다면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는 걸까.
기대 가득한 민준의 시선이 후천적 특성 란에 [Loading…]으로 표시되었던 항목으로 옮겨졌다.
「[영물(靈物)]
이름: 린
종족: 기린(麒麟)
레벨: Lv.22(신체변형 가능)
선천적 특성: [길조(吉兆)], [초뢰(招雷)], [-Lock-]
후천적 특성: [신성한 불], [상갑(上甲)], [기상 조작]」
싸움이 끝나고 얻은 능력이기에 아직 그 성능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무려 성주였던 녀석의 핵을 흡수하고 얻은 능력이다.
그 힘이 약할 리는 없을 터.
‘이능을 충전시켜주는 서포터면서 방어도 가능한 탱커고. 거기에 더해 번개와 기상을 조종하는 능력까지 있다고? …허? 어이가 없네.’
말도 안 되는 다재다능함이다.
기린이라는 종족이 모두 이런 것인지, 아니면 린이 특이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
물론 그 능력이 얼마나 강할지에 따라 효과가 천차만별이긴 하겠지만…. 원래 뭐든 간에 그 정도가 중요한 거 아니겠는가.
‘원래 약하면 잡캐고 강하면 사기캐지. 무엇보다 린은 이 특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1인분은 하는 셈이니까.’
길조(吉兆).
새롭게 얻은 다른 능력들도 훌륭했지만, 민준의 마음속에선 언제나 최고로 자리하고 있는 린의 특성이다.
‘이번에 운이 좋았던 것도 다 저것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린을 만난 후로 동료의 구출부터, 플레임렉 토벌에, 아크티네의 공습을 막아내는 것까지 항상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주인이 돼서 녀석보다도 약하면 안 되겠지. 나도 서둘러 성장해야겠어.’
성장에 대해 생각하니, 어제 벌였던 전투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아마 김 할아버지와 단우가 무사히 별에 도착했기에 놈들이 구역 바깥으로 쫓겨난 거겠지. 이번에 [사도 공양] 스킬도 써보고 싶었는데….’
기껏 잡은 승기를 허무하게 놓쳤으니, 아쉬운 마음이 컸다.
‘이럴 거면 아끼지 말고 스킬도 바로 쓸 걸 그랬네.’
하루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다는 제한조건이 그를 신중하게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지나치게 신중했던 듯했다.
‘아니면 [사도 포식]으로 놈의 은신 능력을 빼앗았어도 좋았을 테고.’
아무리 정신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민준의 감각에서 벗어났던 은신 능력이다.
마치 과거 그가 무기로 얻었던 [그림자 걸음]과 비슷한 느낌의 기술.
심장을 나무와 돌처럼 무감각하게 만든다 하여 이름 붙인 기예 ‘목석심木石心’(상철이 붙였다)과 같이 사용한다면 성주급의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찾을 수 없을 터였다.
‘지금 와서 아쉬워 해봤자 뭐하나. 그래도 우리 중에 그 비슷한 능력을 쓸 수 있는 애가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민준은 순간 자신이 단검을 선물해줬던 사춘기 소년을 떠올렸으나, 이내 보상을 갈무리하는 데에 집중했다.
[‘서브 퀘스트 – 구조’를 완료하셨습니다.] [10,000시간과 ‘히든 퀘스트’의 힌트가 주어집니다.]사실상 이번 퀘스트의 보상은 생존시간이 아니다.
10,000시간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민준이 어느 정도 시간의 압박을 벗어던졌기 때문.
계속 그를 거슬리게 하는 ‘시간 제한자’와 관련된 히든 퀘스트, 그 힌트가 핵심이었다.
그는 로그를 내려 시스템이 전해준 단서를 확인했다.
[해당 퀘스트 수행의 최소 조건 중 하나는 ‘마스터’ 등급 달성입니다.]마스터 등급.
민준은 현재 플레티넘 등급이었다.
그 위로 몇 단계나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마스터’라는 등급이 되려면 무엇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시스템 창에서 말하는 것과 그간의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길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아 보였다.
‘당장 다음 승급 퀘스트도 결코 쉬운 게 아니니까.’
실버 등급이 되기 위해서는 신체 능력치 수치의 총합이 일정 수준을 넘어야 했고.
골드 등급이 되는 데에는 성력 레벨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플래티넘이 되는 데에 업보 수치가 필요했는데.
그 허들이 조금 높았다.
“업보 수치 50은 너무한 거 아니냐고….”
민준이 별을 해방하고 플레티넘 등급에 대한 제한이 풀어내자, 골드 등급을 달성한 모든 이들에게 승급 퀘스트가 떴다.
그리고 이를 확인한 그들은 다들 한숨을 쉬었다.
강해지기 위해서 악인들은 더 많은 악행을 해야 했고, 선인들은 선행을 베풀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점이 그들에겐 무척 까다롭게 다가왔다.
인간이란 애초에 혼돈(混沌)과도 같은 존재니까.
누군가에게는 선한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할 수도 있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 처한 환경에 따라 한여름 날씨처럼 변덕스러워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시스템은 인간을 이분법으로 나누려고 하고 있었다.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건 그래야만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뿐.
아무리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퀘스트라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등급이 높아질수록 난이도도 곱절로 높아지고 있어….’
기실 민준은 숨겨진 방법으로 다른 이들보다 한 등급 앞서 있었기에, 여태껏 수월하게 등급을 올릴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 ‘실버’가 되기 위한 퀘스트를 깨면 그는 한 단계 높은 ‘골드’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승급 퀘스트는 그에게도 상당히 까다로운 축에 속했다.
「[메인 퀘스트 – 승급]
난이도: B+
클리어 조건: 이제는 삶의 기조를 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음’과 ‘양’을 선택해 업보를 충실히 쌓으세요.
① 업보 수치 (+42.9/±50.0)
② 생존시간 (328,150/40,000)
제한시간: 무제한
보상: 스페이스 마켓 회원등급 상승
실패 시: 없음」
‘선업은 다른 사람들의 업보에 비해 잘 오르지도 않는데 말이야.’
승급 퀘스트는 업보 수치를 선업으로 갈음했는데.
선업은 민준이 가진 것 중에서도 가장 그 성장세가 더딘 능력치.
다행히 이번 전투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도와 마인들을 때려잡으며 그나마 오른 게 저 정도였다.
‘무엇보다 권능을 사용할 때마다 선업을 가져가면서…. 너무하네, 정말.’
내실을 다지고, 집중적으로 선업을 올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 전에 타니와 백록에게는 한번 들르긴 해야겠지만.
벌컥.
“민준 씨, 큰일 났습니다!”
그렇게 이번 전투로 얻은 것을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황급히 들어왔다.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머리가 땀으로 젖어있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명 주임.
누가 봐도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려는 게 분명했다.
모든 일이 잘 풀린 이 마당에 무슨 비보란 말인가.
민준은 의아함을 숨기고는, 심호흡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단우가 실종됐답니다!”
본론을 들은 그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