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24)
24
올리버 튜더는 첫인상부터 다소 깐깐해 보이는 사내였다.
윤기 나는 흑발을 뒤로 모두 넘겨 잔머리 하나 없이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고, 몸에 딱 맞게 걸친 고급 정장은 작은 구김조차 없었다. 표정도 없었다.
빈민촌이나 대저택에서도 이런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에드릭은 앞으로 이 낯설고도 불편한 사내와 하루 반나절 이상을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이 버겁고 막막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었으므로 감내하리라 열심히 다짐했다.
“공자께서 먼저 해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올리버는 종이를 소리 나지 않게 깔끔히 정리한 후, 에드릭의 책상 위로 내밀었다.
그는 검지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기사인 블리반보다 딱딱하고 경직된 어투였다.
“읽고 뜻을 간단히 적어주시면 됩니다.”
에드릭은 바로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곧 그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백지에 검게 그려진 문자들은 간단한 단어의 나열이었다. 귀족이 아니라도 수도 평민 정도 된다면 어린아이들도 문제없이 풀 수 있는 것들.
하지만 정말 단순한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그는 알아볼 수 없었다.
혼자라면 일생을 바쳐도 도저히 풀지 못할 암호로 보일 뿐이었다.
‘…….’
당황한 눈으로 종이만 내려다보는데, 올리버가 만년필이 오른쪽에 있다며 귀띔해주었다.
첫날부터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어서 에드릭은 만년필부터 손에 쥐었다.
마치 포크라도 잡은 듯한 그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운 자세에 올리버는 눈썹을 휙 올렸다.
하지만 백지와 사투 중인 에드릭은 미처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만년필을 종이에 대보기라도 하려는데, 잉크가 흘러 검은 반점이 생겼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올리버가 나서서 종이를 회수해갔다.
올리버의 매끄러운 안경알 속에 감정이 언뜻 비쳤다.
에드릭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경멸과 무시였다.
“당분간은 철자부터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석판은…… 이걸 배운 뒤에야 읽을 수 있겠지.’
어렵지만 이 단계를 넘어야 할 수 있다. 그러니 꼭 해내리라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올리버는 다소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에드릭에게 철자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긴장한 바람에 쉽게 머릿속에 넣을 수 없었다.
아시겠습니까, 말끝마다 따지는 듯한 어조에 머릿속은 더욱더 경직되었다.
고문 같은 한때를 보낸 후, 마침내 수업을 마치는 4시가 되었다.
올리버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짧게 인사를 하고 나섰다. 그가 남긴 것이라곤 긴장감과 틀린 종이 더미뿐이었다.
곧 앞에서 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갔죠?”
장식함 뒤로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오자 그제야 숨쉬기가 편해졌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로벨이 이 안에 숨어있었다는 사실도 잊었던 것이다.
자신이 바보처럼 군 것을 로벨이 다 듣고 봤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견딜 수 없게 수치스러웠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의 앞에서 또 무력하게 굴어버린 것이다.
에드릭은 기지개를 쭉쭉 켜며 다가오는 로벨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문가로 고개를 휙 돌렸다.
“너도 나가.”
“네? 저요?”
“…….”
“저 도련님이랑 같이 얘기하고 싶어서 계속 안 자고 뒤에서 기다렸는데…….”
거짓말.
또 뒷머리에 까치집이 일어선 걸 다 봤는데.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로벨은 불쌍한 척을 했다.
“계속 있어도 된다고 약속도 해주셨잖아요. 정말 안 돼요?”
네? 네에에? 네에에에에? 하고 염소처럼 울어대기까지 했다.
……시끄러워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원위치로 했다.
그러자 로벨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느덧 로벨은 이미 그의 책상에 턱을 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도련님, 근데요. 옆집에 살던 분들 이름 알아요? 그, 있잖아요. 붉은 벽돌집이요.”
로벨은 자신과 달리 머리도 좋은지, 그 더럽던 동네의 벽돌까지 외운 모양이었다.
그 사실은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에드릭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무심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하고, 옆집에 살았던 사람들이니까.
“전 하나도 몰라요.”
뻔뻔하게 답한 로벨이 헤헤 웃으며 덧붙였다.
“처음엔 다 모르죠. 도련님 마을에 뭐가 있는지, 누가 사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누가 제대로 알려준 다음에야 달라지겠지만.”
“…….”
“그래서, 그분들 이름이 뭐라고요? 도련님이 저한테 친절하게, 그리고 좀 천천히 알려주세요. 전 처음 듣는 건 누가 빨리 말하면 바로 못 알아듣거든요.”
이게 로벨 나름의 위로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에드릭은 그런 위로에 대응하는 방식을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다.
그는 충혈되는 눈시울에 힘을 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집에는 피터 부부와 레이크가 있었어.”
“촌장이랑 비교했을 땐 어땠어요?”
“……둘 다 마음에 안 들어.”
저도 모르게 본심을 중얼거리자, 로벨이 훨씬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듣는 사람까지 기분이 풀리는 유쾌한 소리였다.
그 더러운 빈민촌에 뭐가 그렇게 질문할 게 많은지…….
한동안 그곳에 대해서 이것저것 열심히 물어보던 로벨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오늘 틀린 것이 수두룩하게 적힌 종이들이었다.
“저, 그거 저도 보고 싶어요. 보여주세요.”
싫어!
에드릭은 백 마디 말보다 강한 행동으로 등 뒤에 종이를 빠르게 감췄다. 붉은 사선만 그어진 종이를 보여주기 싫었다.
물론 로벨에게 먹히진 않았다.
주인의 명령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시종답게 날렵한 걸음으로 그의 등 뒤로 가더니, 쉽게 종이를 빼앗았다.
“줘! 달라니까!”
“네네. 자, 여기요.”
순식간에 종이 넉 장을 모두 훑어본 로벨이 그에게 돌려주었다.
분한 눈으로 쏘아봤지만, 로벨은 개의치 않았다.
금세 그의 오른편에 딱 달라붙어선 만년필을 들더니,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만년필이 곧 그의 손바닥 정중앙에 쏙 들어왔다.
“자, 이 정도로, 딱 여기까지만 기울이는 거예요. 쓸 땐 닙에서 긁는 소리가 나면 안 되고요.”
“…….”
……어쩐지 아까 올리버가 있을 때보다 더 집중이 안 되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소리도 의식되었다.
에드릭의 상태가 어떻든 로벨은 그의 만년필 사용법을 제대로 봐주었다.
손을 겹쳐 잡기도 하고, 그가 혼자 쓰는 것을 꼼꼼히 봐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가 은근슬쩍 자신의 손을 두어 번 더듬었으나 모른 척 넘어가 줬다.
에드릭도 근래엔 그게 썩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로벨은 전체적으로 피부가 흠결도 없이 고왔고, 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따뜻해.’
그 후에도 로벨은 그에게 쉽게 익힐 만한 것들을 하나둘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안에 정작 에드릭이 알고 싶은 것은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고심하고 있는 로벨을 향해 가장 알고 싶은 것을 말했다.
* * *
야, 장난해?
나는 올리버인지, 올리브인지 하는 놈의 멱살을 잡아 짤짤 털며 따지고 싶었다.
수업을 엿듣는 내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 걸음마도 못 하는 아기한테 마라톤을 하라고 권하는 광경을 보는 심정이었다.
‘누가 공작부인이 데려온 선생 아니랄까 봐.’
애초에 그는 가르치기 위해 온 자가 아니었다.
우리 도련님 기죽이려고 작정한 것이다.
더 새까만 속내도 숨겨져 있을 것이고.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내가 어떻게든…… 말려야 했나……. 우리 도련님 의외로 소심한데…….’
벽에 기댄 채 뒷머리를 비비며 답답함을 삼켰다.
시간은 참 더럽게도 안 갔다.
듣는 내가 이런데 도련님은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답답함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묻고 이야기해주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얼핏 보았을 때 그래도 몇 가지 철자는 익혀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까먹을 거다.
그렇게 강압적으로 굴었는데 누가 기억해. 당분간 올리브는 입에도 안 댄다.
‘그래도 뭐를 좀 알려주긴 해야 할 텐데…….’
아무것도 모르고 내일 또 수업을 받았다간 기만 더 죽을 것이다.
나는 잠시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보통 단어 배울 때 엄마, 아빠부터 시작하는데……. 이건 좀. 차라리 하늘, 땅, 바람, 별, 이런 걸 알려줄까. 아니면 가장 좋아하는 목발?…….’
여느 때보다 신중히 고민하는데, 도련님이 툭 내뱉듯 물었다.
“로벨.”
“……네?”
“네 이름은 어떻게 쓰는 거야?”
나를 향해 치켜뜬 눈동자에 순수한 호기심이 흘러넘쳤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저 얼굴을 앞두고서 안 알려줄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나는 주먹 쥔 손을 입에 갖다 대고 큼, 헛기침한 후 홀린 듯이 만년필을 움직였다.
“L, o, b, e, l. 로벨이에요.”
그는 내가 쓴 단어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보는 것처럼 뚫어져라 응시했다…….
‘되게 열심히 하네. 조금 더 예쁘게 써줄 걸 그랬나.’
내심 후회하는데, 그가 갑자기 학구열이 팍 솟구쳤는지 만년필을 꽉 쥐며 따라 썼다.
그런데 얼마나 힘을 주는지 종이를 북북 찢을 기세였다.
“도련님, 손에 힘이요. 힘 빼고 쓰셔야 돼요. 그러다 닙 휘어요.”
“……알았어.”
의외로 그는 짜증도 한 번 안 내고 진지하게 임했다.
삐뚤빼뚤하게 쓰인 글자이지만, 알아보기에 문제는 없었다.
도련님은 자신이 쓴 내 애칭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혹여 획 하나 틀렸을까 봐, 내가 쓴 것과 자신이 쓴 것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로벨.”
한 번쯤은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기특하네.
패악질을 부릴 땐 몰랐는데, 우리 도련님은 목소리도 참 예뻤다.
몇 번이나 내 이름을 외우려는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슬쩍 몸을 일으켰다.
어디를 가냐는 듯이 눈으로 묻는 그에게 한 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금방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