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146)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147화(146/280)
디베이트 주 대항전에서 2
결과는 예상대로다.
오디는 예선 탈락, 나와 아리아는 준준결승 진출.
사실 이게 맞다.
9학년부터 12학년이 다 모이는 판이다.
9학년이 주 대회에 올라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견한 거다.
이제부터 붙을 상대편에 9학년은 아예 없다고 가정하고 임해야 한다.
준준결승의 토론 시간은 75분이다.
말이 75분이지 이 시간 내내 상대의 말에 집중하며 내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스포츠만 이겼을 때의 짜릿함을 선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논리와 증거를 앞세워 말로 상대를 눌렀을 때의 짜릿함 역시 상당히 크다.
아침 7시부터 시작된 쿼터파이널.
이 쿼터파이널과 세미파이널을 모두 통과하고, 파이널리스트가 되면 수상이 확정된다.
진짜들의 싸움이 시작됐다.
공기 중을 떠도는 신경전이 장난 아니다.
내게 배당된 강의실을 향해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상대 선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도인치고는 제법 하얀 피부를 가졌다.
오디보다 살짝 더 옅은 것이 상류 계급일 확률이 높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는 척을 한다.
“와, 이름 보고 설마 했는데. 널 여기서 또 보네?”
“날 알아?”
“한섬 컴퍼니 체스 대회에 나도 나갔었거든. 좀 일찍 떨어져서 넌 날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너랑 대립했던 애가 내 친구야.”
“아, 맞다. 걔 그때 프린스턴에 수시 접수했댔는데. 결과 어떻게 됐어? 수시 쓰고 얼마 안 됐을 때인데도 쉬지도 않고 체스 대회 나와서 놀랐었지. 실력도 수준급이었고.”
“…별걸 다 기억하네. 걔는 수시는 떨어졌고, 이번에 스탠포드 됐어.”
“오, 스탠포드. 멋지네. 축하한다고 전해 줘.”
“그래….”
분명 기선을 제압하려고 시비조로 말을 걸었는데, 발끈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게 대응하자 뻘쭘해한다.
어쩐지 예선전에서 너무 쉽게 올라왔다, 했다.
그때 그 아이와 친구라면 얘도 12학년이란 소린데.
너는 어떤 대학에 붙었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이상하게 아주 좋은 곳에 붙었을 것 같아서 말 꺼내기가 싫었다.
12학년이 지금 이 자리에 오려면 엄청나게 시간을 쪼개 썼다는 말이 된다.
9월부터 여기저기 대학에 원서를 쓰고, 그 와중에 맡은 클럽이나 봉사 단체에서 임원도 해야 했을 거고, 성적 관리도 해야 한다.
대입 원서를 쓰는 시기에 수상을 하게 되면 본인 이력서에 한 줄 더 첨부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입시가 끝난 시점.
이제는 거의 추가 발표만 남은 시점일 텐데 주 대회에까지 참가해 예선까지 통과했다면 보통 내공은 아닌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성적이 제법 좋을 것이다.
현재 12학년들은 아벤처럼 남은 학기, 학점 관리나 하면서 놀이 삼아 따라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렇게 의지를 불태우니 나도 응해 줘야지.
신사답게.
“재밌게 잘해 보자. 굿 럭이다.”
“그래, 너도.”
“아, 근데 난 스탠포드 붙고 프린스턴 떨어졌다.”
“…축하한다.”
“고맙다.”
궁금하지 않았는데 굳이 알려 주네.
쩝.
교실 문을 열었다.
대기하고 있던 심사 위원이 우리 둘이 함께 들어오자 좋아한다.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이번 게임에선 나는 링컨 역, 상대는 더글라스 역이다.
여차저차 설명이 이어진 후.
“링컨, 모두 발언하세요.”
“네.”
잠시 숨을 고른 후 준비한 자료를 읊기 시작했다.
“‘정부는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 기본 소득을 제공해야 하는가?’에 대한 찬성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기본 소득을 제공하는 데에 있어 어떤 장점이 있는지를 나열하겠습니다. 첫째, 사회적 안전망이 강화될 것입니다. 시민들은 기본 소득을 받음으로써 경제적 안정성을 향상시킬 수 있고, 이는 곧 사회적 안전성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는 많은 폭동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는 거대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빈부격차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를 볼 수 있고…(중략)…실제로 현재 알래스카 주에서 제공되고 있는 지원금이 이에 해당하는데, 주민들은 이 자금으로 인해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되며…(중략)…또한 2017년부터 2018년까지 2년 동안 핀란드에서는 2,000명을 무작위로 선택, 기본 소득을 제공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나, 시민들의 경제적 안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되었으며, 케냐에서 진행된 실험에서는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면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밖에도 사회 복지 체제를 간소화할 수 있고, 어린 자녀가 있는 여성들에게 경제적 유연성을 제공하며…(중략)…이에 정부는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 기본 소득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띠띠띠띠.
모두 발언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알람 소리.
연습을 많이 하긴 했지만 사실 발표 시간을 늘 정확히 지키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내 발표는 늘 제시간에 끝이 난다.
발표는 깔끔했다.
게임마다 내가 맡은 역할에 따라 찬성과 반대를 넘나들어야 하니 가끔 헷갈리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준비한 자료들은 제대로 읽어 냈다.
특히 이번 주제를 준비하면서 나는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을 소환해 볼 수 있었다.
전생에선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자로 살아봤고,
이생에선 기초 수급자로도 살아 봤다.
지금은 엄마의 연봉이 그래도 6만 불을 넘어가면서 기초 수급자는 탈피한 상태다.
이제는 병원에 가도 20―30불씩 코페이(Copay, 기본 진료비)도 내야 한다.
처음 코페이를 지불했을 때 보았던 엄마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이제 본인도 미국 시민으로서 의무를 행하는 것 같다나?
엄마는 그 순간 이제 남에게 얻어먹고만 사는 인생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꼈던 거 같다.
물론 금액이 확 늘어나면 또 다른 불만이 생기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사실 나도 조금 감격스러웠다.
그래서 이번 주제를 준비할 때, 찬성과 반대 입장을 모두 이해하고, 설명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더글라스 측 모두 발언하세요.”
“네.”
상대측의 발언이 이어졌다.
“‘정부는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 기본 소득을 제공해야 하는가?’에 대해 반대합니다. 이는 자칫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평등과 맞닿아 있으며 이를 차용했던 나라들의 전례로 보아 실패의…(하략).”
역시 9학년 때부터 4년 동안 디베이트 대회에 다니면서 쌓아 온 내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상대는 12학년의 저력을 마음껏 뽐내었고, 우리는 꽤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깊이 있는 발언들이 쏟아지고, 이는 심사 위원에게도 깊은 인상을 준 듯했다.
― 띠띠띠띠.
“수고 많았어요. 두 사람 모두 준비를 아주 많이 했네요.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번 게임에선 좀 더 증거를 많이 모은 쪽으로 1점을 더 주겠습니다.”
이겼다.
증거는 내 쪽이 조금 더 많았다.
인터넷을 이 잡듯 뒤져 논문과 사례들을 모았고, 사람들의 관심도를 측정할 수 있는 클릭 수와 댓글까지 긁어 왔다.
그리고 상대의 반론에 아낌없이 투척했다.
밖으로 나왔다.
세미파이널까지 30분의 시간이 남았다.
“체스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너 9학년이라고 얕잡아 봤다. 수고했다.”
“너도. 좋은 게임이었어.”
“그래,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크게 성과를 내고 싶었는데 역시 난 좀 운이 없어. 꼭 우승해라.”
“고맙다.”
카페테리아로 가니 아리아와 오디, 아벤이 기다리고 있다.
“와, 너 상대가 아준이었다며? 어땠어?”
“힘들었어.”
“걔가 좀 집요하지. 그래도 이겼지?”
“아마도? 너는?”
“완전 박살을 내고 왔지. 개새끼. 아주 통쾌해!”
“…혹시 상대가 네 약혼자였냐?”
“어떻게 알았어?”
“진짜?”
“어. 으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어떻게 꾸역꾸역 여기까지 올라왔지만 날 이길 순 없지.”
“…무섭네.”
“그치? 난 일찍 떨어지길 잘 한 듯.”
“오디, 그래도 그건 아니지. 너도 올라갔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아벤, 넌 도대체 왜 따라온 거야?”
“뭐래, 당연히 우리 디베이트 클럽의 프레지던트로서 의무를 다하고자 온 거지. 너희들 격려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주고 하려고.”
“맛있는 거?”
“내일 내려갈 때 맛있는 거 사 줄게. 오늘은 나갈 시간 없을 거고.”
“오케이!”
오디가 젤 좋아한다.
사실 주 대회에 참가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력서에 한 줄 적을 수 있다.
9학년에 이 정도면 훌륭한 거지.
세미파이널에서도 나는 링컨 역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앞 번 상대보다 노련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결국 나와 아리아는 나란히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총 6명의 파이널리스트(Finalist, 결승전).
수상은 당연히 하는 것이고 이제 등수 싸움이다.
내 상대는 지난해에도 파이널리스트였다는 ‘앤드류’라는 남학생.
복도에서 마주쳤다.
나를 보고는 피식 웃는다.
“야, 너 9학년이라며? 어느 캠프 다녔냐?”
“캠프?”
“신기하네. 9학년이 설렉티드 캠프(Selected camp, 시험 쳐서 들어가는 여름 단기 캠프)를 갔을 리가 없는데. 집에 돈이 많은가? 누구한테 과외받았냐?”
“…….”
“괜찮아, 말해도 돼. 이 바닥 뻔해. 난 여기 심사 위원인 미스터 켄텔이랑 미세스 앨리스한테 1주일에 한 번씩 온라인 수강하거든.”
“…넌 11학년이지? 작년에도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고 했고. 그럼 10학년 때부터 과외받은 건가?”
“오호, 날 알아?”
“들었어. 위로 올라갈수록 대충 서로 다 알잖아.”
“그렇지. 신기하네. 난 왜 널 몰랐지?”
“캠프 간 적 없어. 따로 과외도 안 받고, 그냥 학교에서 클럽 활동만 해.”
“…뭐, 그렇다고 치자. 잘해 보자.”
“그래, 잘해 보자.”
― 드르륵.
심사 위원이 3명으로 늘어나 있다.
쿼터파이널까진 1명, 세미파이널에선 2명, 이제 파이널에선 3명이다.
심사 위원들이 매긴 점수를 합산해서 등수가 매겨진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링컨 역이다.
오늘은 모든 게임마다 링컨 역이다.
운이 아주 좋은 편이다.
하나의 입장에 몰두할 수 있으니까.
게임이 시작되었다.
.
.
.
― 띠띠띠띠.
시간을 맞춘 알람이 울리고,
― 사각. 사각. 사각.
심사위원들의 채점도 끝이 났다.
“수고했습니다. 수상은 내일 오전 7시에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파이널까지 올라온 사람답게 우리는 정중하게 심사 위원들과 악수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리아가 저쪽에서 손을 흔든다.
격전을 치렀는지 제법 지쳐 보인다.
“야, 자자.”
“어, 잘 자라.”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지쳤다는 뜻이다.
하루 종일 머리를 굴리며 토론을 한다는 건 의외로 체력이 많이 소비된다.
빡센 하루였다.
저녁도 먹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
다음 날 아침 6시.
오디가 흔들어 깨운다.
하루 동안 온전히 체력을 비축한 오디와 아벤은 이미 짐까지 다 싼 상태.
깨끗하게 샤워한 후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와이셔츠도 처음 이틀은 같은 걸 입었지만 오늘은 갈아입었다.
2개 가지고 오길 잘했다.
정각 7시.
강당에 모였다.
디베이트의 파트 수가 19개나 된다.
파트별로 결승자만 4에서 6명까지 된다.
거기에 주 대회라 그런지 준준결승자(Quarter―finalist), 준결승자(Semi―finalist), 결승자(Finalist) 모두가 상패를 받는다.
1등(First Place)은 작은 트로피를 줘서 차별화를 줄 뿐이다.
물론 상패와 트로피에는 어떤 상을 받았는지 적혀 있다.
그러니 상을 받는 사람만도 엄청 많은 거다.
수상만 2시간 정도 된다.
부문별로 준준결승자들 올라가서 일괄적으로 상 받고, 다음 준결승자들 올라가서 받고, 마지막 결승자들 올라가서 받는다.
사진 찍고 자시고 할 시간 없다.
호명하면 한 손으로 상 받고, 그대로 내려가는 거다.
그럼에도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첫날보다 많이 줄어 있었다.
일찌감치 모든 부문에서 떨어진 학교들은 이미 짐을 싸서 다 돌아간 탓이다.
“수상자를 호명하겠습니다. 우선 폴리시디베이트 부문은….”
머지않아 우리 부문 수상이 시작되었다.
“링컨 더글라스 부문 파이널리스트들 올라오세요.”
우리 6명이 올라갔다.
“우승자는 센트럴 팍스 하이스쿨의 제이든 패터슨입니다. 축하합니다. 나머지 수상자는 아리아, 앤드류….”
― 와아아아아아!!!
― 제이든! 최고다!
― 센트럴 팍스!
오디와 아벤, 미스터 크롭스키가 한 몸이 되어 뒹군다.
뭐…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라 딱히 튀지는 않는다.
미스터 크롭스키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나 혼자, 아리아 혼자.
나와 아리아가 함께.
그리고 참여자 모두 다 함께.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이번엔 다른 때보다 쉽게 1등을 거머쥐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
뭐.
운도 실력이라면 실력이다.
상을 받으니 좋긴 하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다.
일요일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점.
학생들이 테니스부터 필드하키 등등 여기저기 모여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널싱홈 봉사는 마크가 책임지고 공부방 놈들을 이끌고 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숙모였다.
뒷자리 카시트에 앉아 있던 엘리가 나를 보고는 방긋 웃으며 두 팔을 벌린다.
안아 달라는 뜻.
너무 귀엽지만 그건 안 될 말.
“엘리, 집에 가서 안아 줄게. 지금은 카시트에 타고 있어야 해.”
― *&^%$$^*.
“근데 어떻게 숙모가 오셨어요? 엄마는요?”
“엘리가 자꾸 나가자고 졸라서 그냥 내가 왔어. 사실 낮잠 잘 시간이라 차 타면 잘 줄 알았는데 안자네, 하하.”
“하하. 우리 엘리, 그랬어요? 오빠 보고 싶어서 안 잤구나?”
― *&^%$$2.
이제 8개월에 접어들면서 기어 다니는 재미에 빠진 엘리.
학교 때문에 자주 보진 못하지만 나만 보면 방긋방긋 웃으며 안아 달라고 짤막한 팔을 내민다.
요즘엔 위아래 앞니가 2개씩 나서 정말 너무 귀엽다.
할 수만 있다면 주머니에 넣고 학교에 다니고 싶을 정도.
― 똑똑.
숙모가 막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오디가 창문을 두드린다.
“안녕하세요. 메디슨, 엘리. 저도 타도 돼요?”
“어? 오디. 당연히 타도 되지만… 엄마는 안 오셨니?”
“갈아입을 옷 주고 갔어요. 전 이제부터 이틀간 제이든 집에서 학교 다닐 거거든요. 제이든, 그래도 되지?”
“니 집 놔두고 왜 우리 집에서 다녀? 무슨 일인데?”
“할아재들 시간 남아돌아서 화요일이나 집에 갈 거래. 형은 이미 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도망갔고, 마히타야 여자애고 까탈스러우니까 잠깐 축하해 주고 끝인 거지. 나는? 잡히면 3일 동안 귀에서 피날 때까지 할아재들 이야기 들어 줘야 한다고. 오늘쯤 돌아갈 줄 알았는데, 망했어.”
“…고생이 많다.”
“그니까. 재워 줄 거지?”
“뭐, 삼촌 쓰던 방 쓰면 되니까 상관은 없는데. 진짜 그래도 괜찮아?”
“엄마가 옷 주고 갔다니까.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안 가냐?”
“가자.”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어. 헤헤.”
운전을 하는 숙모의 얼굴이 심각하다.
저 표정은 분명 오디가 학대를 받고 있다 생각하는 걸 거다.
오디가 빠르게 양손을 휘젓는다.
“워워, 메디슨, 진짜 어른들 수다 듣기 싫어서 피하는 거예요. 제가 제일 만만해서 진짜 오만 이야기를 다 하거든요. 처음엔 공부 열심히 해라, 뭐, 그런 이야기 하다가 나중엔 사회 경제 역사까지. 전 세계 역사까지 한 바퀴 다 돌다가 결국엔 종교까지 나온다고요. 마무리는 항상 신에 대한 찬양과 인도의 위대함으로 끝이 나죠.”
“하하. 그런 거면 다행이고. 어후, 난 또.”
“암튼 어엄청 귀찮아요.”
이제까지 오해했다.
그러니까 오디는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 아니라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었던 거다.
오디의 아빠는 확실히 오디를 찬밥 취급하는 것 같지만 친척들은 아니다.
다른 두 형제는 너무 똑똑해 거리감을 느끼니 적당히 똑똑한 오디를 중심으로 할아재들이 뭉친다는 거잖아.
그들의 과한 사랑에 오디가 괴로워하니, 오디의 엄마가 알아서 피신시켜 주는 거고.
― 탁.
어느새 집이다.
“고마워요, 숙모. 엘리는 우리랑 놀다가 밤에 데려다줄게요. 엘리 용품들은 우리 집에도 많으니까 따로 안 가져다주셔도 되고요.”
“그래, 고맙다. 그럼 부탁할게. 모처럼 리암이랑 데이트나 해야겠다.”
“네! 좋은 시간 되세요.”
― 꺄야야야.
카시트에서 꺼내 주니 엘리가 좋아서 손뼉을 치며 비명을 지른다.
2박 3일간의 빡빡한 일정이 엘리의 웃음 소리 한 방에 날아간다.
“야, 누가 보면 네가 진짜 아빤 줄 알겠다.”
“하하. 옛날 같으면 아빠 해도 될 나이지, 뭐.”
“미쳤냐?”
“문 열어라.”
“네, 네.”
“미세스 패터슨, 우리 왔어요!”
오디가 엄마를 부른다.
아주 지네 집이지.
“어서 와라, 오디, 제이든. 에구에구, 우리 엘리도 왔어요? 배고프지?”
“네!”
오늘 점심 메뉴는 치킨에 샐러드.
엄마는 차려 주기만 하고 먹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화장도 곱게 했고…. 냄새가 나네.
오디는 어른들을 많이 접해서 그런지 확실히 리액션이 좋았다.
엄마의 말에 맞장구도 잘 쳐 주고, 디베이트에서 있었던 썰들도 잘 풀어 낸다.
이런 쪽으론 알렉스가 최고봉인 줄 알았는데 어른들과의 대화에선 오디가 더 나은 것도 같다.
여러 할아재들 덕분에 쌓인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신기하네.
오디가 삼촌 방에 짐을 풀러 간 사이 엄마가 할 말이 있는 듯 자꾸 내 눈치를 본다.
“엄마, 일 있으면 나가셔도 돼요. 좀 이따 다른 애들도 올 거고요.”
“저기 제이든, 혹시…. 음…. 샘이 너한테 무슨 말 했니?”
“아, 네. 엄마가 Yes면 저도 무조건 Yes라고 했어요. 엄마 마음은 어떤데요?”
“그, 제이든, 내가 샘과 결혼을 한다고 해서 너를 덜 사랑한다든가 하는 건 아니라는 거 알지? 샘이 혹시라도 너한테 잘못하기라도 하면 난 언제든지 샘을 버릴 수 있어. 나한텐 언제나 네가 1순위이고….”
“하하. 엄마, 그래서 ‘Yes’ 하셨어요?”
“아니, 아직. 아무래도 오늘 물어볼 거 같아서. 후우,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는데…. 네 의견도 중요하니까….”
“제가 옛날부터 그랬잖아요. 좋은 사람 나타나면 꼭 잡으라고요. 전 진심으로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난 지금도 행복해.”
“알아요. 저도 엄마가 내 엄마라서 행복해요. 그래도 엄마가 나만 보면서 혼자 늙어 가는 건 싫어요. 그리고 음, 뭘 하려거든 되도록 일찍 하세요. 그래야 저도 샘하고 시간을 더 보내고, 정도 쌓고 그러죠.”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후, 사실 너 대회 가기 전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괜히 나 때문에 대회 망칠까 봐 못 물어보겠더라고. 그런 데서 1등도 하고, 정말 장하다, 내 아들. 난 옛날에 그런 데서 1등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일까, 진짜 궁금했거든? 근데 그게 내 아들이었어, 하하. 아까는 오디가 있어서 말을 못 했는데 정말 자랑스럽다, 아들. 트로피도 정말 근사하고, 헤헤.”
엄마의 말이 많아진다.
안도했다는 뜻.
“근데 엄마, 약속이 몇 시예요?”
“어? 아, 20분 후에 데리러 오기로 했어.”
“뭐 하세요? 얼른 예쁘게 꾸미셔야죠.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여기는 걱정 말고요.”
“아, 고마워. 그럼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좀 봐 줘.”
“네네, 마마 님.”
“어우야.”
엄마를 보내고 몇 개 되지 않는 그릇들을 씻기 시작했다.
설거지라고 별거 없다.
대충 물로 헹궈서 식기 세척기 안에 넣으면 된다.
샘이 좋은 사람이면 좋겠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괜찮아 보이지만 사실 사람 속을 누가 알겠나.
그 사이 엄마가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몸매가 팍팍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나이가 들면 저런 무늬를 좋아하게 되는 걸까?
내 눈에는 평소 모습이 조금 더 나아 보이긴 하지만 힘 빡 주고 꾸몄는데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주 푹 파인 가슴팍이 많이 거슬린다.
급기야 엄마가 한 바퀴 돈다.
“나 어때?”
“음, 예뻐요. 근데… 겉에 얇은 카디건 하나 걸칠 거죠?”
“에이, 이건 그냥 이렇게 입어야….”
“카디건이요.”
“…무슨 색? 검은색?”
“네, 검은색.”
잠시 후 얇은 검은색 카디건을 걸치고 온 엄마.
“훨씬 나아요. 덥다고 절대 벗지 마세요.”
“하하, 알았어. 우리 아들 센스를 믿어야지.”
― 딩동딩동.
샘이다.
문을 여니 꽃다발부터 들이민다.
수줍게 웃으며 받아드는 엄마.
아무리 둘이 좋으면 됐다지만….
이건 뭐, 물가에 내놓은 딸내미도 아니고.
딸내미?
잠깐.
엘리…!
그러고 보니 엘리 소리가 안 들린 지 10분 정도 된 거 같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느낌이다.
“어서 가세요. 천천히 들어오시고요. 오늘 안 들어오셔도 돼요.”
엄마가 문제가 아니다.
엄마를 후다닥 등 떠밀어 샘에게 보내 버리고, 엘리를 찾아 나섰다.
식탁 아래 내 가방 옆.
밥 먹기 전에 대충 옷만 갈아입고 가방은 그대로 내팽개쳐 뒀었는데 그 앞에서 엘리가 뭔가에 엄청 열중하고 있다.
아까 엄마에게 트로피를 보여 주기 위해 가방을 연 후 닫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 바스락, 바스락.
“엘리!”
― 제드으….
엘리가 행복하게 웃는다.
작은 이빨에 캔디 껍질을 끼우고서.
조막만 한 양손엔 반쯤 껍질이 벗겨진 캔디들을 가득 쥐고 있다.
락커에 붙어 있던 캔디들은 물론이고, 디베이트에서 당 필요하면 먹으라고 받았던 캔디들이 바닥에 다 나와 널브러져 있다.
망했다!
“엘리, 안돼애!”
― 노오노오오.
처음 맛보는 환상의 맛이겠지.
두 손 가득 쥔 캔디를 절대 뺏기지 않으려는 엘리와 뺏으려는 나.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오디가 씻고 내려오다가 그 모습에 깜짝 놀란다.
“으아악. 제이든, 너 지금 엘리랑 싸우는 거?”
“오디, 도와줘.”
“뭔데, 허얼. 캐, 캔디를.”
“내가 준 거 아냐. 진짜 잠깐 한눈판 사이에… 어쩌지?”
“뭘 어째? 엘리 벌써 8개월이잖아. 캔디 먹을 때 됐지.”
“되긴 뭘 돼. 18개월이라도 안 되는데. 으아악, 어떻게 해! 엘리, 안 된다고.”
결국 손에 든 모든 캔디를 뺏었다.
― 으애애애앵.
결국 울음보를 터트리는 엘리.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눈물 콧물 다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순간 베이스먼트 문이 열리며, 공부방 놈들이 쳐들어왔다.
엘리의 울음소리에 후다닥 튀어오는 놈들.
마커슨과 알렉스, 마크와 헤나다.
“엘리, 왜 울어?”
“오디! 왜 엘리를 울리고 그래?”
“와, 억울. 헤나야! 나 아니거든?”
“너 아니면… 설마 제이든이 그랬겠냐?”
“어, 제이든이 그랬어.”
“…….”
“…….”
“으하하하하. 야, 제이든, 너 그 캔디. 아하하하, 무슨 일인지 딱 알겠네. 그러게 평소 캔디 관리 좀 잘 하지 그랬냐. 안 그렇게 생겨 가지고 맨날 입에 넣고 오물거리더라니.”
“허얼, 내가 언제?”
“너 그랬어.”
“맞아. 말로는 엘리 줄 수 없어서 혼자 먹는다고 하더만. 그냥 버리지 그랬어.”
“됐고, 얘들아…. 이 상황 좀 어떻게 해 봐.”
― 으애애애애애앵.
“그냥 줘라.”
“그래. 하나만 줘.”
“이 썩어!”
“그럼 저렇게 울게 놔둬?”
엘리를 안았다.
캔디의 설탕과 침으로 범벅된 엘리의 두 손바닥이 내 얼굴로 날아든다.
“으악, 엘리.”
― 캐캐디.
보다 못한 알렉스가 바닥에 떨어진 막대 사탕 중 하나를 주워 엘리한테 건네준다.
곧바로 입에 들어가는 막대 사탕.
― 으헤헤헤.
그제야 울음을 뚝 그치는 엘리.
눈물과 콧물로 더러워진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헤나가 물티슈를 뽑아 내게 안겨 있는 엘리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 낸다.
“엘리, 맛있어?”
― 마쪄.
“일 났네. 난 이제 숙모한테 죽었다.”
“음. 제이든, 내가 볼 땐 엘리는 이미 이 맛을 알아.”
“무슨 소리야? 알렉스?”
“잘 봐 봐. 먹는 법을 알잖아. 이미 누군가가 엘리에게 캔디를 줬다고. 아까 못 들었냐? ‘캔디’ 그러는 거?”
“…그랬어?”
“어, 그랬어.”
그 순간 엘리가 내 품에서 먹고 있던 사탕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입이 짧은가?
살짝 내려 줬더니 우다다다― 기어다니기 시작한다.
우헤헤헤 웃으며 다니는 게, 속도도 엄청 빠르다.
“엘리, 하이퍼(hyper) 된 거 같은데?”
그랬다.
사탕의 강한 단맛으로 인해 뇌의 도파민이 급격히 분비되어 버린 엘리.
“안되겠다. 아기 띠 어딨지?”
“왜?”
“재워야지. 아까 숙모가 엘리 낮잠 잘 시간도 지났다고 했거든. 거기에 사탕까지 먹었으니. 어우, 자다가 경기 일으킬까 봐 무섭다.”
“그건 안 되지. 엘리 잡아!”
“엘리이!”
“오디, 넌 엘리 치약 좀 챙겨 봐.”
“어어. 저기 있지?”
“어.”
내가 후다닥 아기 띠를 매는 사이 나머지는 엘리를 쫓았다.
겨우 붙잡힌 엘리.
버둥거리는 걸 꽉 잡아 아기 띠 속에 묻어 버렸다.
그리곤 잠시 후….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오디가 가져온 치약을 손가락 칫솔에 묻혀 자는 엘리의 이를 닦았다.
아기 띠를 맨 채로 소파에 널브러졌다.
쌔근거리며 내 가슴팍에서 잠든 엘리를 보고 있자니 귀여우면서도 한숨이 절로 난다.
“하아…. 애 키우기 힘드네.”
“제이든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줄이야.”
― 하하하하.
― 깔깔깔깔.
.
.
.
화창한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