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152)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153화(152/280)
또 다른 인연 2
이런 씁―
미스터 니콜라스 리게릭이 알려 준 정보를 찾아 스위스의 여름 뮤직 캠프를 찾아 들어갔다.
‘Verbier Festival Academy & Orchestras’
한국의 제법 유명한 기업가가 스폰서를 하고 있다는 게 좀 놀랍기는 했다.
여러 분야 중 오케스트라를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곧 결론을 냈다.
내가 갈 곳이 아니다.
여긴 진지하게 클래식 뮤지션으로의 삶을 살아갈 사람들을 뽑는 곳이다.
전 세계에서 캠퍼를 모집하는 터라 미국 내 한 주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이들조차 합격이 어려운 듯 보였다.
매일매일 4―5시간은 피 터지게 연습해야 합격이 눈에 보일 듯하다.
닉은 한마디로 나와 헤나에게 음악인의 길을 걸어 보라 요구한 것이다.
비행기 표고 뭐고 이건 무시함이 옳다.
다만 미스터 리게릭이 SS1을 통해 내게 개인 장학금을 준 것이라면 작은 성의 정도는 보여야겠지.
물론 미스터 리게릭이 후원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이상하게 미스터 리게릭을 보자마자 후원자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 직감은 확률적으로 맞는 비율이 높다.
영상을 찍어 보내기는 할 거다.
80% 이상의 확률로 떨어지겠지만, 도전은 해 봤다고 변명은 할 수 있을 테니.
사람이 이것저것 욕심내서 다 하려고 들면 안 된다.
그럼 이도 저도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가고자 하는 길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난 뮤지션이 될 마음은 없다.
살면서 클래식을 즐기고, 어디 가서 뽐내면서 한 곡 정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현재의 내 상황에선 내년도 디베이트를 위해 자료를 찾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하지만 헤나의 마음은 달랐나 보다.
한밤중에 문자가 왔다.
― 제이든, 닉이 말한 곳 살펴봤는데 재밌어 보여. 넌 어때? 내년에 원서 넣어 볼 거야?
― 어. 원서는 내 보려고.
― 좋아. 그럼 나도 할래. 같이 캠프 갈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 너 나이 안 돼. 15세 이상이야.
― 내년이면 나도 15살 되거든?
― 아, 미안. 수고.
학년으로는 나보다 한 학년 아래지만 나이로만 치면 같다.
난 7월생이고, 헤나는 같은 연도 11월생이다.
8월 31일로 학년이 잘리기 때문에 나는 현재 9학년이고, 헤나는 8학년인 거다.
내 실제 나이도 있고, 제이콥이나 마크처럼 윗 학년들하고 주로 놀다 보니 나보다 어리면 한참 어리게 보이는 부작용이 있긴 하다.
***
9학년이 끝났다.
락커를 비워야 한다.
짐은 책 몇 권이 다다.
문제는 락커 문짝이다.
캔디는 음식이라 썩을 수도 있고, 설탕이 녹으면서 진물이 나올 수도 있기에 매일매일 떼어 버렸다.
절대 먹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Thank you 쪽지나 하트 스티커 같은 건 귀찮아서 그대로 뒀었다.
그게 지금 문제를 일으킨 거다.
테이프의 끈적한 것이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는 거다.
플라스틱 자를 이용해 살살 긁어냈더니 곧바로 락커에 스크래치가 간다.
할 수 없이 손가락을 세웠다.
손톱을 짧게 자르는 편이라 긁다 보니 손가락 끝이 아려 왔다.
내년부턴 놔두지 말고 바로바로 떼어 버려야겠다.
“뭐하냐?”
“놀래라. 라이언, 이거 진짜 안 떨어진다. 넌 어떻게 뗐어?”
“아, 그거 그냥 놔둬.”
“뭐?”
“어차피 방학 동안 청소하시는 분들이 다 떼 줄 거야. 괜히 손대서 락커 망가뜨리지 말고.”
“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내가 쓰던 건데.”
“그거 떼어 내는 약품 있어. 그거 부어서 싹 쓸어 내는 거니까 괜찮아.”
“…아, 그렇구나. 그건 어떻게 알았냐?”
“스튜던트 워커(Student Worker)가 알려 줬어. 그렇게 한다고.”
“스튜던트 워커? 그게 뭐야?”
“방학 때 일하는 애들. 몰라?”
“그런 게 있어?”
“헐. 가끔 보면 좀 모지리 같을 때가 있다니까.”
“야!”
아니지.
참아야지.
귀한 정보를 주시는데.
“참. 오만 정보 다 알고 있는 거 같으면서 애먼 데서 모른다니까. 잘 들어. 방학이 2달 반이나 되잖아. 그동안 학교 행정 직원들은 안 나와. 대신 누군가는 학교를 지켜야겠지? 그래서 학생들 중에 방학 때 일할 스튜던트 워커를 뽑는 거야. 그리고 이건 엄연한 페이드 잡(Paid Job)이기 때문에 대학원서 쓸 때 경험 칸에 쓸 수도 있어.”
“그래? 진작 알았으면 신청했을 텐데. 아쉽네.”
“아. 9학년은 해당 사항 없어. 뭐. 10학년부터 신청은 할 수 있는데 사실 10학년도 잘 안 뽑는대. 실질적으로 11학년부터 가져간다고 보면 되지. 16세 넘은 애들로.”
“아.”
“페이는 딱 최저 임금이긴 한데 시간이 적지 않아. 방학 2달 풀(Full)로 일하고 나면 다음 학기 내내 쓸 수 있는 용돈이 나온다니까. 할 일도 별로 없대. 가끔 전학 오고 가는 애들 서류 같은 거 받아 두고, 배달 물건 같은 거 받고, 선생님들이나 학생들 전화 요청 오면 받아주고 그런다더라고. 크게 어려운 건 없대. 좀 힘든 건 방학 동안 아무 데도 못가고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거뿐이래.”
“그럼 여러 명을 뽑으면 되지 않아? 2주씩 일하도록 뽑는다던가.”
“업무 인수인계 때문에 그렇게 안 한대. 예전에 그렇게 했다가 중간에 일이 막 꼬이고, 책임 소재 불분명하고. 암튼 그런 일이 좀 있었나 봐. 그렇다고 2달 내내 아예 못 쉬는 건 아니래. 기본적으로 사무직원도 2명, 청소 도우미도 2명, 도서관 관리도 2명… 정원 관리랑 운동장 관리 같은 건 4―5명까지도 뽑는대. 방학마다 대충 20명 정도 뽑는데, 무슨 파트든 2명 이상 뽑는대. 한 명이 아프거나 힘들 때 빠질 수 있게.”
“그거 괜찮네.”
“암튼 스튜던트 워커는 그런 거야. 내년엔 나도 신청해 볼 거고.”
“내년? 진짜?”
라이언 입에서 드디어 향후 계획이 나왔다.
라이언 부모님이 라이언은 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본인들만 이사 가겠다고는 했지만, 라이언의 뜻을 모르니 묻지 못했다.
내 표정이 달라지는 걸 보더니 라이언이 씨익 웃는다.
“너, 나 많이 챙겨 줘야 한다. 나 외로움 많이 타. 알지?”
“뭐래? 나이가 몇 갠데. 알아서 살아.”
“에이잉. 크리스틴이 너 내가 가져도 된다고 했다고.”
“허얼. 이것들이 진짜, 내가 무슨 물건이냐?”
크리스틴과 나의 관계는 이미 전교생에게 다 까발려졌다.
알렉스의 만행을 알게 된 크리스틴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알렉스를 조져(?) 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가 그냥 친구 사이인 것이 밝혀졌고, 내 사물함에는 캔디와 전번이 적힌 쪽지가 빼곡하게 붙어 버렸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나를 라이언에게 팔아 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버릴 거야? 나 그냥 엠마한테 가?”
“엠마? 그, 내가 아는 그 엠마?”
“너 따라다니는 밴드부 엠마 말고, 치어리더 엠마. 너 지금 살짝 쫄았지? 설마 엠마한테 맘 있는 거?”
“그런 거 아니거든? 밴드부 엠마면 축하해 주려고 그랬지.”
“웃기시네. 아무하고도 안 사귀면서 어장 관리 열심히 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어장 관리라니. 난 그런 적 없다. 그나저나 너 여자는 안 사귈 거라며?”
“그러려고 했지. 근데 나 이제 자취생인 거 잊었냐? 자취의 끝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마음껏 내 집을 들락날락하는 거라고. 내 집은 언제든 오픈되어 있단다. 친구야. 물론 난 남자도 안 가려. 언제든 와.”
주접이 길어진다.
쫓아내자.
“…가라.”
“헤헤. 어. 밤에 밥스가든에서 보자.”
“그래. 참, 알렉스랑 오디도 알바 찾던데. 밥 아저씨한테 말 좀 해 주라.”
“오디는 말만 그렇지 진짜 하라고 하면 안 할걸? 이제 10학년 된다고 그 엄마가 캠프 일정 쫘악 잡아 놨다고 하던데.”
“하긴. 그럼 오디는 놔두고 알렉스는 말 좀 해 줘. 알바 필요할 거야.”
“그래. 말해 볼게. 괜찮으면 오늘 저녁부터 바로 부르지, 뭐.”
“그럼 더 좋고.”
라이언이 손을 흔들면서 사라진다.
부모님의 상황으로 봤을 땐 가는 게 맞다고 여기면서도 내심 서운했나 보다.
남는다고 하니 마음이 좋다.
다시 락커에 붙은 테이프 자국들을 떼어 내려고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라이언의 말대로라면 약품으로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건데 괜히 사서 고생할 필요 없다.
아까보다 손가락이 더 아픈 것도 같고.
***
“다녀왔습니다.”
“어서와 아들. 이제 우리 아들도 주니어(Junior)네? 시간 참 빠르다. 그치?”
“그러게요. 어? 그거 결혼식 초청장이에요?”
“어. 예쁘지?”
“네. 깔끔하고 좋네요. 그럼 이제 결혼식 장소는 확실히 정하신 거예요? 엄청 고민하셨잖아요.”
“하하. 사실은 난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어. 난 재혼이지만 샘은 첫 결혼식이라 신경이 좀 쓰였던 건데 샘이 자기는 나와 결혼하는 것이 중요하지 결혼식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이렇게 진행하려고.”
“그래도 나중에 서운하지 않으시겠어요?”
“진. 짜. 안 서운해. 정말이야. 오히려 편하고 좋아. 돈도 아끼고. 하하.”
엄마의 결혼식장은 다름 아닌 우리 집 야드다.
우리 집 야드가 작지는 않지만, 결혼식을 하기에는 좁다.
그럼에도 엄마는 결혼식에 따로 큰돈 들이기 싫다며 야드를 고집했다.
이미 한번 해 봤는데, 결혼식 비용만큼 아까운 게 없더라고.
다만 샘은 처음이라 서운해할까 걱정을 했지만 샘 역시 식에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손님은 그냥 동네 사람들 한정이다.
직장 동료나 교회 사람들도 과감하게 제쳐 버렸다.
“그럼 저희는 연주할게요.”
“진짜? 진짜 해 줄 거야?”
“그럼요. 누구 결혼식인데. 그리고 라이언이 공간 장식을 잘 해요. 엄마만 괜찮으면 저희가 데코하는 거도 도울게요.”
“어우, 그럼 너무 좋지. 메디슨이 돕기는 할 텐데, 이제 배가 너무 나와서 힘든 일은 못 할 거야. 대신 알바비는 확실하게 챙겨 줄게.”
“하하, 네. 라이언이 좋아하겠네요.”
“라이언만 부르지 말고 헤나도 부르고 공부방 애들 다 불러.”
“그러다 결혼식 비용보다 알바비가 더 나올 수도 있어요.”
“하하, 엄마 그 정도 능력 된다, 이제. 알지?”
“하하. 네, 그럴게요.”
엄마는 이제 정식 간호사다.
물론 아직 연봉이 높은 편은 아니다.
큰 도시는 간호사 초급 연봉이 10만 불도 넘는다지만 이곳은 동네가 동네다 보니 5만 불 언저리의 연봉이다.
둘이 살기에 나쁘지 않다.
공부방 놈들에게 부탁을 해야겠다.
이러려고 이제까지 키운 거니 당연히 들어주겠지.
아니나 다를까 모두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사실 며칠 전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엄마와 나, 삼촌까지 모처럼 우리 셋이 뭉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엄마는 삼촌에게 큰돈을 건넸다.
자그마치 5만 불짜리 수표.
― 집값이야.
― 뭐야? 이걸 왜 줘? 이 집은 내가 누나한테 받은 거 갚은 거라고 했잖아. 갑자기 왜 이래?
― 그래서 처음 집 살 때의 반만 넣었어.
― 누나! 빨리 도로 넣어. 나 진짜 화낸다.
― 리암, 넌 내가 널 키웠다고 하지만 나도 너 없었으면 못 살았어. 나만 바라보는 네가 있었으니까 나도 힘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거라고. 너도 그렇잖아. 메디슨이랑 엘리 보면서 힘들어도 꾹 참고 살잖아. 나도 그랬던 거야.
― …….
― 아파트에서 짐 싸서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나 정말 너무너무 좋더라. 살면서 한 번도 내 집을 가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거든. 설레서 잠도 못 잤다니까. 그러니까… 너도 나를 살린 거야. 나랑 제이든을. 그러니까 이건 넣어둬.
― …….
― 너, 이제 애가 둘이야. 악착같이 벌어야지! 얼른!
― 알았어, 알았다고. 받을게. 그래도 약속 하나 해.
― 뭐든지.
― 혹시라도 돈 필요하면 꼭 말해야 돼.
― 하하하. 야! 리암, 이제 나도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는데 왜 너한테 말하냐?
― 아. 진짜! 그럴 거야?
― 농담이야. 내가 너 아니면 누구한테 기대냐? 나중에 귀찮다고 밀어내지나 마라.
― 그럴 일은 절대 없어.
.
.
.
삼촌이 펄쩍 뛰며 난리를 쳤지만 평소 순박한 엄마가 고집 한번 부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
그걸 알기에 받은 거다.
형제지간이라도 두 사람의 우정이 이렇게 돈독하게 유지되는 비결은 자잘한 돈거래를 하지 않는 데에 있다.
상대가 돈이 필요하면 그냥 눈치껏 내게 있는 만큼 줘 버린다.
빌려주고 언제까지 갚으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줄 수 있는 만큼 주고 잊어버리는 거다.
난 단 한 번도 저 두 남매가 돈으로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처음 이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엄마가 생활비의 3/4을 감당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삼촌은 이 집 역시 엄마에게 주고 잊어버렸다.
하지만 엄마에겐 마음의 빚으로 남았던 것 같다.
오랜 숙원을 이룬듯한 표정이었으니까.
우리 엄마.
이제 진짜 시집갈 준비가 다 된 모양이다.
집으로 속속들이 이런저런 물건들이 배달되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낼 준비가 끝나가는 중인 거다.
나는 나대로 공부방 놈들과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엄마의 결혼식
― 딴따라라딴따라라~
6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엄마의 결혼식이 우리 집 뒷마당에서 열렸다.
40대 중반의 적당히 살집이 있는 엄마이기에 사실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감은 전혀 없었다.
6월 말의 화창한 날씨 때문일까?
아님, 라이언과 마크, 알렉스가 며칠 동안 온 힘을 다해 만들어 놓은 결혼식장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 눈에 찬 습기 때문?
가슴이 살짝 파인 웨딩드레스를 입고 버진로드를 걷는 엄마는 정말 꽃처럼 예뻤다.
마커슨의 엄마와 함께 만든 작은 부케를 들고 혼자 걸어 들어가는 엄마.
샘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결국 눈물을 터트린다.
이해한다, 그 마음.
내 눈에도 자꾸 습기가 차니까.
주례는 다니는 교회 목사.
미국에서 결혼식 주례는 대부분 종교인이 담당한다.
교회 사람들에겐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목사가 오니 자연스레 2―3명이 따라왔다.
― 나 사무엘, 이날부로 리사를 내 아내로 맞이하며, 그녀를 사랑하며 존중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의 남은 삶을 리사와 함께 공유하고, 그녀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헌신할 것을….
― 나 리사, 이날부로 사무엘을 나의 남편으로 맞이하며, 그를 사랑하며 존중할 것을 약속합니다. 사무엘과 함께 가난과 부유, 건강과 질병, 기쁨과 슬픔을 모두 나누고….
결혼식 자체는 엄숙하게 치러졌다.
아무리 이혼이 흔한 세상이고, 별거나 동거도 많은 세상이라고 하지만 ‘결혼식’이라는 행위 자체는 무척 신성하게 여기는 미국이다.
결혼식에서 웃고, 떠들고, 춤추며 즐기는 건 무조건 식후의 연회에서다.
본식은 정말 진중하게 치른다.
하객들은 매일 보는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모두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드레스와 양복을 꺼내 입고 참석한 상태다.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 흐트러진 머리에 파자마 차림들만 주로 보다가 저렇게 멀끔하게 차려입은 걸 보니 사람이 달라 보인다.
역시 옷이 날개다.
결혼식에 필요한 모든 음악은 헤나를 주축으로 한 공부방 놈들이 맡았다.
곡 선정과 연습은 미리 끝내 두었다.
지금 나는 하객이 아닌 엄마의 아들로 참석한 것이기에 식장의 맨 앞자리에 삼촌과 숙모, 엘리와 함께 앉아 있었다.
엘리는 드레스를 입고는 유모차에 붙잡혀 있는 중이다.
쪼끄매도 분위기 파악은 하는지 울지 않고 얌전히 잘 있다.
다른 쪽의 앞자리엔 샘의 친한 친구들 몇이 자리를 잡았다.
신부 측의 들러리나 신랑 측의 베스트 맨 같은 것도 없다.
그냥 신부와 신랑만 서 있는 조촐한 결혼식.
목사의 간단한 축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결혼반지를 교환하는 시간.
내 차례다.
품에서 반지를 꺼내 정중하게 사무엘에게 건넸다.
샘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후 반지를 받아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지고, 가벼운 키스와 함께 결혼식 1부가 끝이 났다.
밴드부에 앉아 있던 우리들은 우르르 몰려가 버진로드를 걷어 내고, 테이블들을 설치했다.
라이언의 진두지휘 아래 곧 아름다운 정원이 만들어졌다.
한쪽엔 뷔페식으로 산더미 같은 음식들이 차려졌다.
음식 담당은 클로이다.
헤일리와 클로이의 그 클로이.
헤일리는 대학 2학년의 여름방학에 바로 인턴 생활을 시작했고, 아빠 식당을 물려받을 거라며 대학을 제쳤던 클로이는 이제 정식 셰프가 되었다.
식당 경력 3년 차면 풍월을 읊을 정도는 되는 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음식을 세팅하는 클로이.
직원 몇과 함께 왔는데 3년 동안 제법 고생을 했는지 행동이 능수능란하다.
공부방 놈들이 몰려가 인사를 건넸다.
“헤이. 클로이, 잘 지냈어?”
“우와, 맛있겠다. 이거 직접 만든 거야?”
“당연하지. 니들, 우리 식당에 좀 들르고 그래라. 어째 한번을 안 오냐?”
“헤헤, 거긴 비싸자너.”
“맞아, 우린 가난하다고.”
클로이 아빠가 운영하는 식당은 나름 중급 식당으로 한 번 가면 1인당 50불은 감수해야 한다.
학교 카페테리아 점심이 3―4불이다.
우리가 갈 수 있는 식당이 아니다.
오늘은 특별히 엄마가 부탁해 오게 된 것이다.
아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홀로 나를 키워 온 것을 알기에 이래저래 할인을 많이 해 줬다고.
테이블의 한쪽엔 결혼 선물들이 잔뜩 쌓였다.
집에서 하는 결혼식이라 엄마가 축의금은 일절 받지 않겠다고 했다.
빈손으로 오기 그러니 다들 작은 선물 하나씩 들고 온 것이다.
내 선물도 거기 있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부부의 잠옷이다.
전생의 안목을 활용해 무려 1시간 거리의 백화점에 들러 고르고 고른 잠옷이다.
내가 쇼핑으로 이런 수고를 해 본 적이 없는데.
우리 엄마가 알랑가 모르겠다.
동그란 테이블 5개에 하객들이 둘러앉았다.
먹을 것 많고, 음악 훌륭하고, 날씨 좋고.
모든 것이 좋은 날이다.
연회의 사회자는 삼촌이다.
“자, 그럼 이제 할 거 다 했으니 놀아 볼까요? 그 전에 샘! 우리 누나 구제해 줘서 진짜 진짜 고마워요. 난 사실 우리 누나 평생 제이든만 바라보며 살 줄 알았거든. 근데 시집을 가겠다고 남자를 떡하니 데려와서 얼마나 놀랐던지. 그 남자가 또 너무 괜찮네? 이런 횡재가! 내가 절대 놓치지 말라고 용돈까지 찔러 줬다니까요.”
― 하하하하.
“행복하세요. 두 분은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살다가 무섭거나 힘들고, 또 모르는 거 있으면? 여기 우리 조카 제이든한테 물어보세요. (하하하하) 똑똑하고 현명한 우리 조카가 답을 알려 줄 겁니다.”
― 옳소!
― 제이든이 우리 골목의 보배지.
― 암, 우리 새끼들이 줄 한번 잘 잡았지.
― 으하하하.
삼촌이 너스레를 떨며 자연스럽게 나에게 마이크를 넘긴다.
가족으로서 먼저 축사를 해 주는 거다.
“큼, 제가 어릴 때, 리암 삼촌을 처음 만난 날이었어요. 전 진짜 엄마가 새 아빠 될 사람을 데려온 줄 알았다니까요. 나중에 삼촌이라고 해서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 하하하하.
― 맞아. 그랬어. 리사한테 애를 어떻게 키운 거냐고 막 놀렸었는데.
― 하하하. 그랬어?
“샘, 전 지금처럼 열심히 집안일도 도울 거고, 특별히 손 가는 일 없이 알아서 잘 클 테니까 우리 엄마만 행복하게 해 주세요. 혹시라도 제가 집에 없었으면 하는 날이 있으면 미리 문자 주시고요. 하하. 전 저기 라이언 집에 가서 자면 되거든요.”
― 하하하. 제이든, 야하다!
“고마워요, 샘. 우리한테 와 줘서. 두 분 오랫동안 행복하세요. 축하드려요.”
― 짝짝짝짝.
유머를 곁들인 무겁지 않은 당부들이 이어진다.
이 동네에 산지도 벌써 5년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제는 정말 한 식구 같은 존재들이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워낙 많았기에 더 그런 것 같다.
숙모인 메디슨이 자연스럽게 다음 배턴을 이어 간다.
“리사, 제이든이 우리 엘리 돌보는 거 봤죠? 아들은 준비 끝난 것 같으니 엄마만 힘냅시다!”
― 옳소!
― 찬성입니다!
― 으하하하.
.
.
.
“야, 제이든, 너 진짜 동생 생기는 거 아니냐?”
“뭐, 난 좋지.”
“와, 대박. 진짜? 난 완전 싫을 거 같은데? 나이 차가 도대체 몇이냐?”
“나도 완전 싫어. 이 나이에 동생이라니. 생각만 해도 싫다, 야.”
“얘들아, 아기라는 게 그렇게 쉽게 생기는 게 아냐. 제이든 엄마 나이도 있고, 혹시라도 아기 생기면 무조건 축하만 해 줄 일이지.”
“난 가끔 크리스틴이 저런 말을 하면 이상해. 평소와의 괴리감이 너무 크다고나 할까?”
“콱, 이것들이. 어르신이 좋은 말을 해 주면 귀담아들을 생각을 안 하고. 이 좋은 날 푸닥거리 한판 해?”
“…누가 쟤 좀 말려 봐.”
“지도 인간인데 이런 날 푸닥거릴 하겠냐? 냅둬.”
“와, 놔. 마크, 너 결혼식 끝나고 보자아.”
“어? 잠깐. 그럼 우리 이제 이 집 못 오는 거 아냐?”
“왜 못 와? 이미 샘도 다 알아. 괜찮대. 지금처럼 언제든지 와도 돼.”
“휘유, 다행이다.”
“그러게. 난 이제 여기 공부방 아니면 공부가 안된다고.”
.
.
.
엄마와 샘에게 축사를 건넨 후 난 이미 밴드석에 와 있었다.
사실 엄마 나이가 있으니 동생에 대한 생각은 깊게 해 본 적이 없다.
그냥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오붓하게 살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만약 엄마와 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모르겠다.
초딩 때는 동생이 몇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엄마가 날 키운 것처럼 나도 엄마를 도와 잘 키워 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게 엄마의 사랑에 보답하는 거란 생각도 들었고.
엄마에게 남친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을까?
3년 후면 대학을 가기 위해 집을 나가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1학년은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게 한다.
만약 연휴 때 집에 들어왔는데 나를 제외한 단란한 3식구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 괜찮을까?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을까?
엄마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괜히 심란해진다.
사람 감정이란 게 희한하다.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가족이 늘어나는 것이니까 동생이 생기면 좋은 거지.
난 언제나 그 아이의 편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다짐을 했으면서도 직접 닥치니 스스로의 연민에 갇히려고 한다.
“다음 곡 뭐였지?”
“마이클 버블의 Everything.”
“제이콥, 준비 됐지?”
“후우. 어, 준비됐어.”
“좋아, 가자.”
오늘의 피로연에서 가수는 제이콥이다.
지난 뮤지컬에서 그의 재능을 발견한 후 바로 써먹기로 한 것이다.
― You’re a falling star, you’re the get away car.
You’re the line in the sand when I go too far.
You’re the swimming pool, on an August day.
And you’re the perfect thing to say~
제이콥의 목소리가 연회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어느새 어른들은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다.
결혼식이라는 것만 빼고 보면 어느 순간 마크 집 뒷 야드의 골목 반상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대화의 내용은 동네의 온갖 잡다한 소식을 주고받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 샘, 내가 마커슨 데리고 엄마랑 이 동네 이사 왔을 때는 정말 막막했거든요. 근데 여기 리사가 같이 수다도 떨어 주고 위로도 해 주고, 제이든은 또 어떻고. 내가 이 집에 정말 신세를….
― 우리 제이콥이 원래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녀석이라 학교 상담가면 선생들이 그냥 행복한 아이로 키우라고 그랬거든. 그랬던 놈이 제이든을 만나서 공부를 다 하고…. 다음 컨퍼런스 때 선생님이 우리 제이콥이 공부를 잘한다고. 내가 살면서 그런 소리는 또 처음 들어서 묻고 또 묻고….
― 우리 마크가 지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면 땡깡을 얼마나 피웠던지, 어휴. 몇 년 전엔 이상한 거 본다고 밤에 잠도 안 자고 그러는 걸 제이든이 잡아 줬다니까. 이게 다 리사가 이 동네로 이사 와서 그런 거지. 내가 그때 저놈을 내쫓아야 하나 고민을….
― 우리 리사가 성품이 좋아서 자식을 잘 길러 내니 이리 좋은 남자도 만나고. 그래도 사람 모르는 거야. 리사, 만약 신랑이 고생시키면 제이든 뒤에 숨어. 그리고 제이든이 이혼해라 하면 이혼하고….
― 아이고, 엄마! 그게 신혼부부한테 할 말이야?
― 왜애? 사람 일 모르는 거여! 너도 맨날 니 서방 좋다고 그러다가 술 처먹고 그 행패를 부리다 뒤져 버리고….
― 엄마!
― 난 우리 조나단이 어떻게 컸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침에 학교 갔다가 그대로 공부방에 들러 밥 먹고, 공부하고 놀다가 잘 때만 얼굴 봤다니까요. 여기 공부방 애들이 어찌나 잘 돌봐 주는지…
잘 나가다가 갑자기 마커슨 할머니의 팩폭이 튀어나오고, 마커슨 엄마가 비명을 지르자 조나단 엄마가 급하게 분위기를 전환한다.
다들 아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면 또 하고 또 하는 레퍼토리가 되어 버렸다.
샘은 묵묵히 듣기도 하고, 가끔은 맞장구도 치며 자연스럽게 골목 사람들과 어울렸다.
공부방 놈들 반 이상이 같은 골목에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부모의 관심사는 늘 자식에게 있으니.
엄마가 그 오랜 시간 신중을 기해 만난 사람이다.
지금까지만 보면 제대로 된 사람을 데려온 것 같긴 하다.
엄마가 웃으면서 운다.
골목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나를 칭송해 주니 싱글 맘으로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떠오른 것이겠지.
― 암튼 축하혀. 저렇게 듬직한 아들 봐서라도 잘 살아. 그럼 되는 거제.
지금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나이 많은 어른인 마커슨의 할머니.
우리 공부방 놈들에게 먹을 걸 가장 많이 주시는 분이다.
자고로 먹을 거 주는 사람이 제일 옳은 것이고.
우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콥의 경쾌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자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일어나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엄마는 샘과 함께 블루스를 췄고, 마크의 아빠는 한쪽 기둥을 붙잡았고, 마커슨의 엄마는 와인 잔을 소중하게 들었다.
모두가 흥겨운 6월의 결혼식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고딩들의 여름방학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엄마와 샘은 1주일간의 여행을 떠났다.
샘의 누나가 살고 있다는 독일을 찍고, 나머지 유럽을 여행할 거라고.
아침에 일어나니 아무도 없다.
그동안 학교 다니느라 소홀히 했던 집안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결혼식장의 뒤처리는 이미 끝났지만 그럼에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들을 정리했다.
오랜만에 베이스먼트부터 2층까지 깔끔하게 청소도 하고, 가구 배치도 바꾸고, 이불 빨래도 하고, 거미들도 밖으로 좀 내보내고.
미국 깡촌에서 벌레는 그냥 숙명적으로 같이 사는 친구다.
바퀴벌레가 없는 것이 좀 신기하긴 하지만 나머지 웬만한 벌레들은 모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는 진지하게 벌레 퇴치용으로 고양이나 강아지를 들일까, 고민도 했을 정도다.
3일 치 음식도 해 놨다.
엄마는 그냥 삼촌 집에 가서 먹으라고 하는데, 그 집 음식을 먹느니 내가 하고 만다.
하지만 매번 해 먹기는 또 귀찮으니 한 번에 잔뜩 해 두기로 한 거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6시.
하루가 벌써 다 가 버렸네.
하루 종일 움직였더니 몸이 쑤신다.
잠시 쉬려고 소파에 눕자마자 엄마에게서 화상 통화가 걸려 온다.
화면의 엄마는 찐으로 신난 표정이다.
―제이드은~~~
“엄마, 잘 도착했어요?”
―어. 와, 여기 너무 좋아. 자전거 타고 여러 나라를 돌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니까. 근데 너어무 더워. 에어컨 있는 데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니까.
“그래도 그 동네는 습도가 그리 높진 않으니까 그늘 찾아 잘 다녀 보세요. 다음은 어디로 갈 거예요?”
―이제 스위스 쪽으로 가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알프스는 봐야지.
“알프스 좋죠.”
―안녕, 제이든! 우리 없으니까 집이 너무 썰렁하지?
“하하, 샘. 네, 그래서 오늘 날 잡아서 대청소했습니다. 오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아고, 그 힘든 걸. 혼자 하지 말고 우리 가면 같이하지. 넌 그냥 쉬면 되는 거야.
“네네, 암튼 나이도 있으신데 쉬엄쉬엄 다니시고요. 날 더운데 체력 떨어지면 큰일 나요.”
―와, 너 우리 나이 많다고 멕이는 거야?
“하하하, 부러워서 그럽니다, 부러워서.”
―이런, 같이 올 걸 그랬다.
“아, 뭐래요. 누굴 천하의 눈치 없는 놈으로 만들려고요. 암튼 후회 없이 신나게 놀다 오세요. 아, 차는 조심하시고요. 그 동네 사람들 교통법 잘 안 지킨다 그러던데.”
―하하하, 그래그래. 우리는 걱정 마. 무슨 일 있으면 리암한테 바로 뛰어가고.
“넵! 그럼 전 이만 좀 쉬어야 해서 끊습니다.”
―어, 어.
― 뚝.
아주 행복이 뚝뚝 묻어난다.
저렇게 좋을까?
어?
그러고 보니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5학년 여름방학 때 엄마와 삼촌과 함께 캐나다를 다녀온 후 엄마는 여행을 다녀 본 적이 없구나.
그게 벌써 4년 전의 일인데.
그동안 나는 학교 행사나 캠프 등으로 이곳저곳을 다녀왔고, 삼촌은 결혼을 해서 신혼여행을 다녀왔었다.
하지만 엄마는 일하고, 공부하고, 다시 일만 하느라 여행이란 걸 못 했던 거다.
이런….
내가 아직 학생이라 그저 최대한 엄마 속 안 썩이고, 동네에 자랑할 만한 아들이 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름 효도란 걸 하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얼굴이 발갛게 상기될 정도로 찐으로 신나 하는 걸 보니 좀 미안하네.
사는 게 좀 팍팍하더라도 한 번씩 가까운 데라도 나갔다 올 것을.
뒤늦게 후회가 된다.
앞으론 등을 떠밀어서라도 한 번씩 여행을 다녀오게 해야겠다.
***
이틀 후.
공부방 놈들 중 시간이 남아도는 놈들은 모두 라이언의 집으로 향했다.
오디는 무슨 로보틱스 캠프인가에 끌려갔고, 크리스틴은 가족 여행을 떠났다.
미아는 연락이 없다.
크리스틴 말로는 집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제대로 안 한다고.
좀 무심하긴 했다.
조만간 연락해 봐야겠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 라이언의 집에는 나와 제이콥, 마크와 헤나, 알렉스, 마커슨이 온 상태다.
헤나는 이 방학이 끝나면 9학년이 된다.
즉, 고등학생이 된다는 뜻.
8학년인 조나단이 자신만 아직도 중학생이라며 투덜거렸지만 다들 귀여워하며 어깨를 툭툭 쳐 줄 뿐이다.
우리가 라이언의 집에 몰려온 이유는 오늘이 라이언의 부모님이 떠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딱히 도울 일은 없다.
대부분의 짐들은 그냥 두고 가기 때문이다.
이사할 곳에서의 생활이 여의치 않을 경우 다시 돌아오겠다 마음먹고 가는 거다.
모험은 해 보지만 둘 다 장애가 있으니 현명한 선택이다.
라이언 가족들은 지난 몇 달 동안 틈만 나면 이사할 곳으로 가 집 단장을 했다.
이제 그 준비가 다 끝난 것이다.
마지막 짐들은 트렁크에 들어갈 만큼밖에 안 된다.
저쪽 작은 트럭의 운전석에 앉은 미스터 해밀턴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안녕하세요!”
“왔냐들?”
“우와, 이게 말로만 듣던 장애인용 차예요?”
“어. 이거 봐라. 이렇게 휠체어 탄 상태에서 그대로 차를 타고, 여길 이렇게 고정하는 거야. 그럼 휠체어가 안 밀리거든. 그리고 이렇게 왼발로 까딱까딱. 하하, 어떠냐?”
“와, 신기해요.”
“요즘 기술이 좋네요.”
“그치? 사람이 다 살아날 구멍이 있다니까.”
“연습은 해 보셨어요?”
“하하, 무슨 소리야. 이미 새집에도 몇 번을 왔다 갔는데.”
“라이언이 운전한 거 아니었어요?”
“내가 했지. 하하하, 라이언 운전 실력은 아직 내 발끝에도 못 따라온다고.”
“와, 대단하세요.”
“크흠, 내가 좀 그렇지?”
“하하하, 방금 그거 라이언이 잘난 체할 때랑 완전 똑같아요.”
“야! 마커슨!”
“아, 죄송, 죄송. 근데 진짜 너무 똑같아요.”
― 하하하하.
라이언도 우리도 왜 걱정이 안 되겠나.
단 이미 결정한 사안이니 티를 내지 않을 뿐이다.
라이언의 엄마가 살기엔 지금의 환경이 완벽하다.
두 사람이 참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른인 건가?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건 배워야 할 거 같다.
“아, 라이언도 같이 가는 거죠?”
“올 때 혼자 와야 하는데, 불안해서 어떻게 데려가. 딜런이랑 밥스가든 직원 2명이 같이 가기로 했어.”
“잘됐네요.”
“밥한테 고맙지 뭐.”
“왔니들?”
라이언의 엄마가 지팡이를 짚고 나와 인사를 한다.
처음 보았을 때의 낯가림과 우울함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남편을 위해 없는 용기를 짜내는 건지, 가족이 다 같이 살다 보니 밝아진 건지는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우리의 우렁찬 합창에 깜짝 놀라 하다가 곧 조용히 웃는다.
“그럼 우리 이만 간다. 늦으면 어두워져서 별로야.”
“네, 조심해서 가세요.”
“아들, 힘들면 언제든 전화해. 급한 일 있으면 밥한테 튀어가고.”
“걱정을 말아요. 여기 내 친구 놈들이 이렇게나 많잖아. 엄마 아빠나 건강하고, 힘들면 말하고. 여기 놈들 아무나 2명 붙잡아서 내려갈게.”
“그래그래. 내가 아주 마음이 편해.”
“얼른 가. 이러다 진짜 해 떨어져.”
“어어.”
“안녕히 가세요!”
“조심하세요! 딜런, 운전 조심해요.”
― 부아앙.
라이언의 엄마, 아빠가 먼저 가고, 딜런이 뒤를 따랐다.
우리는 한동안 그대로 서서 그들을 배웅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라이언을 쳐다보았다.
사실 라이언이 울까 봐 모두 살짝 쫄은 상태였다.
라이언은 그런 우리를 보고는 그냥 피식 웃고 만다.
1년 전만 해도 다혈질에 안하무인이던 라이언.
이제는 적당히 감정을 숨길 줄도 알고, 다른 이들을 헤아릴 줄도 안다.
많이 성장했다.
“큼, 들어가자. 전에 ACC 행사 때문에 산 베트남 쌀국수가 너무 많이 남았어. 해치우자!”
“오예~”
“앗싸!”
“난 싫은데….”
“헐. 제이든, 지금 밥투정한 거?”
“헉! 제이든이 밥투정을 해? 이거 실화?”
“제이든, 엄마 신행가서 집에 밥 없지 않아?”
“내가 한 요리 하거든? 알면서.”
“아, 그건 그래. 제이든은 어디 가도 굶어 죽진 않을 거야. 아, 내일부터 다시 공부방 열지?”
“당연하지. 한 명도 빠짐없이 나와라. 한 2주 잘 놀았지? 이제 다시 공부 시작해야지.”
“난 할 거 없다고.”
“제이콥! 네가 할 게 제일 많거든? 12학년이 그게 할 소리냐?”
“나, 나는 진짜 없어.”
“마크야, 너도 11학년이다. 왜 할 게 없어! 아. 다들 AP 테스트 결과 어떻게 됐어. 그거부터 파 볼까?”
“밥, 밥 먹자, 밥. 난 쌀국수가 젤로 맛있더라. 특히 이 사발면은 2개는 먹어야 양이 차. 라이언, 물 끓여라.”
.
.
.
맞다.
오늘은 라이언이 혼자 괜히 울적해하지 않도록 다 같이 몰려온 거다.
부모님과 완전히 동떨어져 혼자 지내는 건 처음일 테니까.
“와. 제이든, 안 먹는다며? 너 2개째인 건 알고 있냐?”
“…맛있네.”
― 으하하하.
갈수록 나의 정신 연령도 이놈들과 동등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우리는 밤새도록 라이언의 집에서 시끄럽게 놀았다.
결국 아침이 되자 라이언은 우리 모두에게 시리얼을 먹인 후 쫓아냈다.
결국 다들 완전 뻗어서 공부방은 다음날로 연기됐다.
***
“제이콥, 시간 지났어.”
“아, 지문이 너무 어려워. 특히 이, 이 단어는 진짜 태어나서 처음 본다니까.”
“그러게 평소에 책 좀 읽고 살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안 되겠다. ACT로 갈아타자. 학교 성적은 잘 나오지?”
“어, 나 나름 우리 학년에서 5% 안에 든다고.”
“우리 학교에서 5% 안에 안 들면 안 되지!”
“…….”
“근데 제이든, 제이콥이 이제까지 SAT 중심으로 공부했는데, ACT로 갈아타기엔 좀 늦지 않아?”
“그럼 8월 시험 점수 보고 점수가 1450점 밑으로 나오면 ACT 한번 보자. 사실 1450점이면 완전 상위권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데는 갈 수 있을 거야.”
“오케이! 아, 아, 나 펄젠(First generation, 가족 구성원 중 누구도 대학 학위가 없는 경우)이야.”
“진짜?”
“어.”
“와, 대박. 완전 좋은데?”
SAT와 ACT는 둘 다 한국의 대학 수학 능력 평가 같은 시험이다.
학생들은 둘 중 아무거나 골라 시험 치면 된다.
둘 다 쳐도 상관없고.
ACT는 수학 과학 쪽이 좀 더 강세로 직접적인 답을 유도하는 편이고, SAT는 영어가 좀 더 강세로 독해력과 추론을 중시한다.
시험 시간은 둘 다 3시간가량으로 ACT는 36점 만점, SAT는 1600점 만점이다.
또한, ACT는 오답에 대한 감점이 없는 반면, SAT는 오답에 대한 감점이 있다.
학교 성적은 좋은데 이상하게 SAT 점수는 안 나오는 학생들이 있다.
그럴 경우 곧바로 ACT로 갈아타는 거다.
또한, 대학을 들어가는 데 있어 펄젠은 아주 큰 가산점을 받는다.
아이비나 톱 사립 대학에선 가족 중 지원 학교 졸업자가 있을 경우 레거시(Legacy) 혜택이란 걸 받는다.
만약 부모가 둘 다 연고대 출신이면 자식이 그 학교에 원서를 낼 때 가산점을 받는 거다.
정말 불공평한 제도 중 하나이지만 사실 학교를 운영하는 데 있어 졸업자들의 기부가 큰 기여를 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매해 엄청나게 큰돈을 기부하지 않는 이상 생각보다는 큰 혜택이 없다고도 하더라.
펄젠은 완전 반대 개념이다.
부모가 대학을 못 갔다고?
근데 그 자식은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 학교에 지원을 했어?
그럼 제대로 서포트를 받았다면 얼마나 더 잘했겠어?
이런 애들은 키워 줘야지.
뭐 이런 제도.
취약 계층의 아이들이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갈수록 끌어올려 주는 거다.
원래는 나도 해당되었는데, 얼마 전 엄마가 커뮤니티 칼리지를 졸업했기에 이제 해당이 안 된다.
생각해 보니 공부방 놈들 절반은 펄젠에 해당이 될 것이다.
제이콥과 마크, 헤나, 마커슨까지.
어쩌면 조나단과 라이언도 포함될지도.
부모님의 직업상 크리스틴과 알렉스는 해당이 안 되고.
오디는 뭐 당연하고.
미아는 모르겠다.
게다가 이놈들 가난하다.
1년 가계 소득이 6만 5천 불에 못 미치는 건 확실하다.
오호.
이거 잘하면 진짜 제이콥을 아이비리그에 밀어 넣을 수도 있겠는데?
의욕이 샘솟는다.
“제이콥! 빨리빨리. 다음 페이지!”
“왜, 왜 그래? 갑자기?”
“헐, 제이든 또 모략 꾸민다.”
“공부해서 남 주냐? 빨리빨리!”
제이콥이 울상을 짓고, 다른 놈들은 몸을 떤다.
다 니들 잘되라고 하는 거다.
미소가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