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205)
205화 찰나 (1)
노아르크 성채 깊숙한 곳에 위치한 어느 대전.
한 남자가 수정구를 통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그 탐험가는 찾아냈나?”
[아직입니다. 성주님.]“그렇군…….”
도시 봉쇄 이후로 받는 첫 정기 보고.
벌써부터 성과가 있을 리 없으나, 성주는 저도 모르게 침음에 잠겼다.
다만, 그런 그에게 비보가 다시금 전해졌다.
[그보다 말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뭔가? 말해 보게.”
[이번 달부터 왕가 측에서 특수하게 제작된 인식표가 탐험가들에게 보급될 거라고 합니다.]“……마도구인가?”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자네라면 이미 알아서 더 알아봤을 거 아닌가.”
이후 성주는 아멜리아를 통해 왕가에서 배포할 예정인 ‘인식표’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암울한 내용이었다.
왕가의 대마법사가 직접 설계한 인식표라니.
“우리 쪽에서 비슷한 걸 만들어 내려면 몇 달은 족히 걸리겠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네. 자네는 이쪽 일엔 신경 쓰지 말고 임무에 집중하게. 다음 달에 보지.”
그 말을 끝으로 연락을 종료한 성주는 눈을 감고 깊게 침잠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아, 왔는가.”
재무관을 불러낸 성주는 우선 노아르크의 재정 상황부터 확인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것을 물었다.
“재무관, 우리가 미궁에 들어가지 않고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지금처럼 지낸다면 세 달입니다.”
지난 전투의 여파로 사정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우리가 그들보다 앞섰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익숙한 일이다.
선조들이 해왔던 것이기도 하고.
“굶주리고 굶주리며 버틴다면? 그럼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최대 일곱 달 정도입니다.”
“그런가…….”
성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엔 보좌관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미궁을 봉쇄하고 어느 누구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라.”
“……반발이 심할 겁니다. 언제까지일지라도 알 수 있을련지요?”
성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왕가에서 만든 인식표를 따라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그 전에 들어가면 개죽음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버티고 버텨서 놈들이 방심하였을 때까지.”
때를 기다리며 인내해야만 한다.
그러면 반드시 올 것이다.
모든 것을 바꿀, 단 한 번의 기회가.
***
「비요른 얀델」
레벨: 5
육체: 516.48/ 정신: 427.56/ 이능: 1657.2(New +720)
아이템 레벨: 3,367(New +769.01)
종합 전투 지수: 3442.99(New +845)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만티코어 – Rank 5
***
닫힌 눈꺼풀 위로 서서히 빛이 깃든다.
느긋하게 눈을 뜨니 오랜만에 화창한 하늘이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이 휘감는 후끈한 도시의 공기.
새삼, 시간의 흐름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벌써 6월인가…….’
비프론에 유배됐던 그날로부터 벌써 여섯 달이 흘렀다.
한국에 비하면 장난 같았던 겨울은 진작에 그 끝을 고했으며, 이제는 짧았던 봄마저 저물어 가고 있는 상황.
‘신기하네.’
이 세계에 왔을 때가 3월이었다.
정말 이곳에 온 지도 1년이 넘은 거구나.
1년 차 세금을 냈을 때도 그랬지만,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여전하다.
솔직히 말해, 이제는 지구에서의 내 생활이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다.
그야 당연하다.
미궁에서 보낸 시간까지 합치면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거의 2년에 달할 테니까.
“이봐, 바로 숙소로 돌아갈 건가?”
“일단은. 씻고 나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돌아왔다아아아아!!”
평소와 다름없는 주변을 확인한 나는 짧았던 상념을 흘려냈다.
‘이번에도 별일 없었구나.’
혹시 다른 층계는 어떨까 싶었는데, 주변 반응을 보니 역시 별다른 사건 사고는 없었던 듯하다.
거, 괜히 불안해지게.
솨아아아아.
나는 고개를 내려 손목을 확인했다.
도시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손목에 문신처럼 새겨 넣은 인식표가 빛이 되어 흩뿌려지고 있었다.
매번 들어갈 때마다 새로 받아야 하는 수고가 있지만, 빼앗으면 그만이던 예전 인식표와는 그 성능부터가 다르다.
공교롭게도, 이게 나온 시기부터 지하도시 새끼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지만.
‘……슬슬 나타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구와 이곳은 엄연히 생태계가 다르다.
흐르는 강물도, 농사를 지을 비옥한 땅도 없는 세계.
노아르크도 라프도니아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미궁에서 나온 마석으로 식량을 창조해야 한다.
‘근데 벌써 6달째 감감무소식이라…….’
지난달 원탁에서 여우에게 대형 클랜들이 노아르크의 기습을 대비해 연합을 꾸렸단 말을 들었기에 괜스레 더 불안해진다.
얘네는 다 어디로 숨어 버린 걸까?
마석 외에 식량을 수급할 방법이 생긴 것도 아닐진대.
“얀델 씨! 왜 이렇게 늦었어요!”
산책이라도 하듯 생각을 정리하며 걷고 있자니 멀리서 레이븐이 손을 흔들었다.
항상 지각하던 곰아저씨조차 먼저 와 있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흠, 그런 건 여기 와서 줄을 서는 동안 하셔도 됐을 텐데…….”
쩝, 효율만 따지기는.
아무튼, 지각한 건 내가 맞기에 순순히 사과를 하고서 줄을 섰다.
줄이 다 줄어드는 데는 몇 분이면 충분했다.
그야, 여긴 5등급 검문소거든.
“5등급 팀 애플 나라크, 맞습니까?”
지난 여섯 달 동안 있었던 많은 변화들 중 하나다. 나, 아이나르, 그리고 미샤가 5등급으로 승급하며 팀 등급도 한 단계 상승했다.
5등급이 되려면 길드 의뢰를 깨야 했기에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세 달 전에 다 같이 의뢰를 깼다.
등급이 낮으면 얕보일 수밖에 없고, 얕보이면 더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게 이쪽 업계라는 판단.
“와, 여긴 사탕도 주넹. 비요른, 너는 알았냥?”
“몰랐다.”
나는 미샤가 까서 건네준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빨아먹었다.
“달군.”
약자에게 한없이 비정한 도시 라프도니아.
이제 슬슬 여기서도 어딜 가나 대접받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그럼 정산은 내일 하실 거죠?”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나?”
“오오! 그럼 어서 가자! 집으로!!!”
간단하게 마석만 환전한 뒤 도시로 나왔다.
정산은 5등급 검문소부터는 편의를 위해 목욕 시설도 있지만, 이번에도 역시 쓰지 않았다.
집에 가서 씻으면 되는데 굳이?
“그럼 내일 거기서 보지. 여보, 내가 왔소!”
미아 방지겸 곰아저씨의 주점 앞에서 해산한 우리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상업 도시 컴멜비와 고작 10분 정도 떨어진 7구역 내곽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
1층 2층은 우리가 쓰고, 3층 4층은 다른 탐험가 부부가 쓰고 있다.
입구가 달라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마는.
“으아, 집이다아앙!”
단칸방 살림이던 이전 숙소와 달리, 모든 부분에서 월등한 새로운 집.
사실 이사를 오게 된 건 두 달밖에 안 됐다.
정말 마음에 드는 매물이었는데, 전에 살던 사람이 그때 나간다고 했던 게 그 이유.
아, 당연히 월세로 들어왔다.
매매는 가격이 미쳤거든.
“우린 씻는데 오래 걸리니까, 배고프면 알아서 먼저 먹어랑!”
아이나르와 미샤가 욕조가 있는 1층 욕실로 들어갔고, 나는 2층에 있는 작은 욕실에서 몸을 씻었다.
작다고는 했지만, 전에 있던 숙소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
비누로 몸을 칠하던 나는 피식 웃었다.
‘어쩌면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일지도.’
주방이 딸린 넓은 집.
양산품 비누가 아니라 공방에서 파는 비누.
큰맘 먹고 구매한 고가의 침대까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아득바득 한 푼이라도 아끼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의 삶의 질도 개선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걸 비효율적인 행동이라 여기고 싶진 않다.
앞으로 여기서 몇 년이 걸릴지.
아니, 창세보구도 없어졌다는 마당에 돌아가는 게 가능하기는 한지도 이젠 잘 모르겠으니까.
‘애초에……. 꼭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나약한 의지를 털어내듯 수건으로 머리에 물기를 닦아내며 욕실에서 나왔다.
촤아아아아아-!
보아하니 아래는 아직도 씻고 있는 것 같고.
배가 고프긴 하지만, 미샤가 해 준 밥이 훨씬 맛있기에 그냥 소파에 앉아 잠시 졸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 잘 일어났당. 어서 와서 먹어랑.”
식욕이 돋는 냄새에 주방 쪽을 보니 식탁에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다. 바바리안이 두 명이니만큼 대부분이 고기로 이뤄진 밥상.
식사를 하면서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아, 맞다. 장비는 오늘 맡길 거냥?”
“그래야지. 관리를 잘 해야 오래 쓰니까. 이따 다 먹고 모아서 줘라. 나 혼자 다녀오겠다.”
“응. 근데 대장간은 이번에도 히쿠로드네로?”
“우리라도 자주 이용해야지 않겠냐. 무구 점검에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르며 난쟁이놈도 대장간을 오픈했다.
이제 세 달쯤 됐는데, 원래 단골 장사가 기본인 업종이라 그런지 적자를 면치 못하는 듯하다.
뭐, 점점 나아지고 있는 거 같긴 하다마는.
“근데 히쿠로드 말이당……. 가게가 망하면 다시 탐험가를 하러 돌아오겠지?”
“그 말…… 그 녀석 앞에서는 하지 마라.”
“에이, 미쳤냐 내가? 나도 생각이란 게 있는 사람이당. 그냥 조금 걱정이 돼서 그렇지.”
“후후, 미샤 너는 뭘 그리 걱정하냐. 망하면 우리 집사로 쓰면 되지 않나!”
“집사……?”
“히쿠로드는 재미있지 않냐!”
얘는 집사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모르겠지만, 바바리안이 한 말을 진지하게 받는 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일 터.
그런 것도 재밌을 거 같다며,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우리는 한참 동안 키득거렸다.
“그럼 나는 대장간에 다녀올 테니, 먼저들 자고 있어라.”
“같이 가줄까?”
“됐다. 뭐 대단한 거라도 하러 간다고.”
애들은 먼저 낮잠을 재워둔 뒤 정리한 장비를 챙겨 난쟁이놈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점검 및 수리를 맡긴 뒤 나도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무려 35만 스톤이나 주고 구매한 특대형 침대.
‘그래, 이거거든.’
변함없는 푹신함에 흡족하며 눈을 감았다.
왠지 옛날 생각이 났다.
막차가 끊겨서 미샤와 컴멜비에서 묵었을 때였나? 그땐 언제쯤 매일 이런 침대에서 잘 수 있을까, 갈 길이 멀다며 한숨을 내쉬었는데…….
“…….”
이 도시에 온 지도 어언 1년이 넘은 시기.
더 이상 몸에 피가 튀어도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피가 묻지 않은 나날이 더욱 어색하게 느껴지며,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을 해치고서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게 된 이 시기.
잠들기 전에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사람답게 살 게 된 걸까?
***
다음 날 아침까지 쭉 이어진 낮잠은 미샤의 방문으로 끝이 났다.
“이따가 나간다며? 일어나야지!”
“아, 고맙다.”
“식사는? 챙겨줄까?”
“아니, 만나서 같이 먹기로 했다.”
“아, 그랬었낭?”
간단하게 몸을 한 번 더 씻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자니, 1층에서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
아이나르는 아직 자고 있는 모양.
아, 참고로 미샤와 나는 2층에 있는 방을 하나씩 쓰고 있다.
1층에도 방이 두 개이긴 하지만…….
드르르르르렁-!
얘는 나보다 코고는 소리가 심하거든.
1층에 남은 방 하나는 그냥 공용 창고로 쓰는 중이다.
“그럼 이따가 주점에서 보자.”
“응, 잘 다녀와랑!”
미샤에게 인사만 하고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마차가 아니라 걸어서 10분 거리의 컴멜비로 향했다.
성문을 넘고서 한 30분쯤 더 걸으니 만나기로 한 공용 승강장이 나타났다.
레이븐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늦었어요. 마차에서 내린 지가 언젠데.”
“……오늘은 그냥 네가 일찍 온 거 같은데?”
“눈치만 빨라서. 자, 어서 가요. 아주 배고파 죽겠으니까.”
레이븐과 합류한 이후에는 자주 가던 가게에서 식사부터 끝낸 뒤, 잡화점 및 거래소를 돌며 지난 탐사에 벌어들인 전리품을 처분했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짭짤했다.
밀라로든을 잡고 들어간 거울 속 이면세계에서 5등급 정수가 나와준 덕분.
“판매될 때까지 좀 걸리긴 할 거 같은데, 일단 제 돈으로 분배하고 나중에 받는 거로 할게요.”
“그럼 우리야 좋은데, 너는 괜찮은 건가?”
“안 괜찮을 게 뭐 있어요? 팔릴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모여서 나누면 괜히 번거롭기만 한데.”
그건 그렇지만, 우리들은 지금까지는 계속 그 방식을 고집해 왔다.
그게 가장 문제 될 여지가 적다는 판단.
“……뭐예요. 그 눈빛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네 착각이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고 보면 얘도 참 많이 변한 거 같다.
아직 솔직하지 못한 건 여전하지만.
“예상보다 빨리 끝났네요. 먼저 주점에 가 있죠.”
전리품 판매를 끝마친 우리는 약속 장소인 주점으로 향했다.
역시나 아직 아무도 도착해 있지 않은 상황.
“차라리 잘 됐네요. 지난번엔 정리할 시간도 없었는데.”
음료만 주문한 레이븐은 종이를 꺼내더니, 거기에 오늘 정산할 내용을 미리 적어두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맨날 물어볼 땐 별거 아니라고 하더니.
“고맙다.”
“……음, 갑자기?”
“항상 우리 팀을 대신해서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주고 있지 않냐.”
“저 말고 이런 걸 할 사람이 딱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안 했겠죠? 돈이라도 주고 그런 말을 하시던가요.”
“좋아, 주지. 얼마면 되냐? 아마 다들 흔쾌히 그러자고 할 거다.”
“……됐어요. 그 돈 받아서 부자라도 될까 봐?”
얘도 참, 툴툴거리는 저 말투만 아니면 훨씬 더 인기가 많을 거 같은데.
“오, 내가 가장 늦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자 곰아저씨가 도착했고, 머지않아 근딜 자매도 왔다.
그렇게 시작된 정산의 시간.
“인당 850만 스톤이네요.”
밀라로든이 거울을 뱉어줬던 만큼 목돈이 손에 쥐어졌다. 이미 빚은 두 달 전에 다 갚았기에 이 소득 전부가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상황.
“그럼 이제 다른 일 얘기나 해보죠.”
정산을 끝마친 후에는 편하게 술과 음식을 먹으며 다음 탐사 계획을 세웠다.
음, 정확히는 공지했다는 게 옳으려나?
“이제 지옥불 협곡은 가지 않을 생각이다.”
“네? 왜요?”
우리는 반년 동안 지옥불 협곡에서 사냥을 하며 거울을 통해 총 세 번 이면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에는 공략하지 못한 ‘잿빛산맥’과 ‘용암호수’의 탐사를 끝마쳤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화염 피해를 막아주는 ‘불의 보주’에다가, 우리 전투력도 처음 그곳에 입장했을 때보다 훨씬 상승한 상태였으니까.
“우리랑 가장 상성이 좋은 곳을 내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갈 이유가 있을까요?”
지옥불 협곡에서 재미를 보고 있던지라, 레이븐이 내 결정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
“언제까지 5층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이제 다른 곳도 탐사할 차례다.”
지옥불 협곡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얻었다.
그러니 슬슬 다음 챕터로 향할 차례.
“그래서 어디로 가려는 건데요?”
“서리 협곡이다.”
“어, 서리 협곡이라면…….”
미샤가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힐긋했다.
지옥불 협곡과 달리 본인에게 기회가 될 수 있는 필드임을 아는 것이다.
뭐, 틀린 추측은 아니다.
서리 협곡에서는 얼음 속성인 미샤와 시너지가 좋은 정수가 여럿 드롭되니까.
실제로 내가 노리는 것도 그중에 하나이고.
‘그 정수만 먹으면 서리 협곡은 끝.’
그다음엔 ‘대마경’의 남은 두 필드에서 경험치만 수급한 뒤 6층으로 가는 길을 뚫을 계획이다.
뭐, 거기까지 가는 데만 1년은 더 걸릴 테지만.
‘그래도 많이 왔어.’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다.
솨아아아-!
손에 끼고 있던 덩굴 반지에서 빛이 뿜어졌다.
“비요른, 그거 설마…….”
첫 번째와 달리, 나는 애써 부정하며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다. 다시 이어붙이겠다며 침을 묻혀 덩굴을 꼬듯이 비비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래 봤자 변하는 건 없을 테니까.
「별의 가호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용살자와 관련된 데드 플래그를 막아 주던 두 번째 덩굴이 끊어졌다.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