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32)
32화 핏빛 성채 (3)
드르륵.
레이븐이 벽면에 돌 하나를 안쪽으로 밀어 넣자, 석실의 촛불들이 일제히 켜지며 장내가 밝아졌다.
“오, 이런 건 또 어떻게 알았나?”
“책은 지식을 대물림해 주는 보물이니까요.”
거, 그냥 책에서 읽었다 하면 될 것을.
“어디 보자, 아! 여기 또 있네요.”
레이븐이 추가로 벽돌 하나를 더 밀어 넣자, 기계장치 소리가 나며 책 한 권이 천장에서 떨어진다.
네크로노미콘.
흑마법이 담긴 마법서로, 상점에 꽤 비싼 값에 팔리는 물건이다.
…젠장.
“제 능력으로 발견한 물건이니 약속대로 이건 제가 갖겠습니다.”
“그러게나. 어차피 왜곡 마법이 없으면 우린 갖고 나갈 수도 없는 물건이니.”
“하하하…….”
레이븐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지도 알고 있겠지.
네크로노미콘은 아이템 취급을 받아서 왜곡 마법이 없어도 밖에 가지고 나갈 수 있다는걸.
“이것 좀 배낭에 넣어 주시겠어요?”
“예, 레이븐 님.”
속이 쓰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법사가 전리품을 혼자 꿀꺽 삼키는 걸 바라보는 것뿐.
후, 이건 나중에 혼자 수거할라 했는데…….
대체 왜 이런 건 알면서 조각상 아래에 숨겨져 있는 건 모르지?
“그럼 가실까요?”
10m는 됨직한 넓은 폭의 일자형 통로를 걷고 있자니, 머지않아 거대한 악마 조형물과 함께 양갈래 길이 나왔다.
“레이븐 양?”
“어느 쪽을 택하던 상관없어요. 어차피 몬스터는 전부 잡을 거잖아요?”
우리들은 ‘ㅁ’ 자 구조의 악마숭배실은 한 바퀴 돌며 차근차근 몬스터들을 사냥해 나갔다.
출현하는 개체는 가고일 석상, 데스핀드, 키메라 울프, 본 나이트.
“시체골렘의 정수가 나온 것도 모자라, 갈망 타입이라니 여러모로 운이 따르네요.”
나답지 않게 자꾸 운이 이어지고 있다.
증오, 슬픔, 갈망.
7등급 몬스터인 ‘본 나이트’는 랜덤으로 셋 중 하나의 속성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쉬우면서 보상도 좋은 타입에 걸렸다.
“갈망 타입은 타격 시 생명력을 회복하는 ‘생기 흡수’ 능력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건 제 ‘재생 저지’ 마법으로 간단하게 무효화 시킬 수 있죠.”
레이븐이 위풍당당하게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녀가 있든 없든 갈망 타입이 제일 쉽다.
정신 착란을 유발하는 안개를 내뿜는 슬픔 타입은 게임에서도 몹시 성가신 능력이었다.
뭐, 증오 타입에 비할바는 아니겠다마는.
난쟁이놈이 툭하고 말을 뱉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마는, 듣기로 증오 타입이 가장 약하다고 들었네만?”
지랄.
증오의 기사는 ‘영혼 베기’를 쓴다.
대미지는 없지만 극악의 확률로 레벨을 다운시켜 버리는 미친 스킬.
[동료A가 영혼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레벨이 하락합니다.]일단 터지기만 하면 HP나 방어력, 마법 저항력과 무관하게 이러한 전투 로그가 뜬다.
그리고 이 로그가 뜨면 차라리 새로 키우는 편이 속 편하다.
포탈 개방 노가다로 경험치를 복구하는 것보단 그게 훨씬 더 쉬우니까.
“…영혼의 격이 하락하다니, 정말이지 무서운 놈이로군.”
나를 대신한 레이븐의 설명에 난쟁이놈이 몸서리치며 안도의 숨을 뱉었다.
다만 이 마법사 아가씨는 지식을 자랑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꿋꿋이 설명을 이어 갔다.
“아, 만약 영혼이 허락하는 만큼 정수를 소지한 상태라면, 무작위로 하나가 소실된다고 해요. 아마 이건 다른 탐험가들도 잘 모르는 얘기일 거예요.”
마법사답게 틀린 정보는 없었다.
다만, 고인물로서 한 가지를 추가하자면…….
‘영혼베기’는 레벨이 낮을수록 더 잘 터진다.
그리고 지금 내 레벨은 고작 2.
심지어 운까지 나쁜 팔자를 지녔으니, 증오의 기사를 만나지 않은 건 정말이지 행운인 일—
“정수군.”
씨바, 드디어 내 팔자도 좀 피려는 건가?
몇 마리 잡지도 않았는데 정수가 튀어나왔다.
다름 아닌 7등급 몬스터 본 나이트의 것이다.
뭐야, 이거.
앞에선 시체골렘 정수를 뱉더니…….
이게 소위 말하는 ‘축방’이라는 건가?
“마치 신께서 자네들을 보우하시는 것 같군. 흐하하핫!”
“동감이에요. 어쩌면 이러다 정말 수호자에게서 정수가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제각기 축하인지 모를 한마디를 뱉으며 내게 시선을 보낸다.
나와 아이나르.
둘 중 누가 먹을 거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잠시 고민한 나는 어렵사리 답을 내렸다.
“아이나르, 이건 네가 가져라.”
“그, 그래도 되는가?”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일 거다.
사실상 이제 수호자만이 남은 상황이었고, 추가로 정수가 나올지 안 나올지는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다만…….
“강해지고 싶다고 했지 않나. 이건 네가 가져라.”
플레이어의 시선으로 보자면, 역시 나보다는 아이나르가 취하는 게 합리적이다.
‘생기 흡수’는 도검류에 잘 어울리는 데다가, 나는 언젠가 무기를 버려야 하는 입장.
무엇보다, 아이나르는 믿을 만하다.
우직한 성격으로 보건대, 어지간해선 나를 떠나지 않고 옆에서 조력해 줄 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하기보다는, 강해진 아이나르를 이용해 내게 더 알맞은 정수를 취하는 편이 효율적이겠지.
“고, 고맙다! 비요른! 역시 네가 최고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나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정수를 취했다.
변화는 극적이었으며, 즉시 찾아왔다.
“뭐, 뭔가! 갑자기 너희들이 커졌다!”
“네가 작아진 거다. 아이나르.”
“뭐, 뭣?! 그게 정말인가!”
2m 언저리던 아이나르의 키가 줄어들었다.
순식간에, 한 170대 후반 정도로.
“본 나이트의 정수가 가진 기본 효과예요. 골밀도가 대폭 상승하는 대신, 그만큼 신장이 줄어들죠.”
설명을 좋아하는 레이븐은 이 세계의 표준 정보까지 줄줄 읊어 주었다.
(상), (중), (하) 따위가 아니라 정확한 수치로 표기하자면 이렇겠지만.
[본 나이트]절삭력+12 골밀도+55 민첩성+15 지구력+15 유연성-7 신장-25
(P) 방부제 — 모든 상처 악화 효과(독, 출혈, 부패 등등)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A) 생기 흡수 — 생명체를 타격 시 일시적으로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걱정 마세요. 키가 작아졌다고 근력이 줄어들거나 하진 않았을—”
“나, 나는 망했다! 이래서야 누구도 나를 전사로 보지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여자라서 다들 우습게 보았는데!”
…여자라서 우습게 보다니?
혼자만 갖고 있던 콤플렉스인가?
“그나저나… 굉장히 예뻐지셨네요.”
아이나르의 절규를 지켜보던 레이븐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얼굴 골격이 작아져서 그런가? 어쩌면 귀족들에게 미용 목적으로 팔 수 있을지도—”
“그, 그건 전사답지 못해졌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까지 질색팔색 할 줄은 몰랐던 나는 서둘러 수습했다.
“아니다. 아이나르, 네가 훌륭한 전사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 상체의 문신만 빼면 단지 키 큰 인간 여성으로도 보일 지경이지만…….
“키가 조금 작아진 게 뭐 어떤가!”
“이건, 조금이 아니지 않나!!”
“…하지만 너는 훨씬 더 강해졌다!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나라도 위로를 해야 했다.
나머지는 남의 불행에도 자기 할 말만 하기 바쁜 소시오패스들이었으니까.
“하하핫! 신기한 정수로군. 나 같은 드워프가 먹으면 보이지도 않게 될 걸세!”
“흐음, 재밌는 발상이네요. 신장 감소 효과가 비례식인지, 절대값인지는 한번 돌아가서 사례들을 찾아볼 필요가 있겠어요.”
“나는 망했다!!”
“하하핫! 바바리안이라 그런가? 키가 작아져도 목소리는 아주 우렁차구먼!”
“아이나르 씨, 혹시 괜찮다면 도시로 돌아가서 제가 정밀 검사를 해 볼 수 있을까요?”
“나는 망했다아아아!”
제발 다들 그만 좀 조용해 줬으면 좋겠다.
귀가 아파서 머리가 아파 오려 하니까.
***
“데스핀드다!”
멀리서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몬스터 덕분에 소란은 겨우 잦아들었다.
다만 정수를 흡수한 아이나르의 변화가 궁금했는지, 다들 한 걸음 물러서 관전 의사를 표시했다.
“베헬라…….”
아이나르가 성의 없는 기합 소리를 내며 대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서걱!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저 검을 쓰면서 처음으로 ‘쾅!’이 아니라 베는 소리가 났다.
…절삭력+12가 이 정도였나?
“아이나르 머리를 노려봐라!”
“어, 어… 알겠다!”
스스로의 변화에 당황하던 아이나르가 높게 점프하더니 그대로 대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서걱!
둘이서 수십 번 내리쳐야 잡을 수 있었던 데스핀드가 칼질 한 방에 절명했다.
그 단단한 두개골을 베고 뇌까지 닿은 것이다.
“봐라! 훨씬 강해졌지 않나!”
“그럼, 나는 아직 전사인 것인가……?”
“그럴 리가 있나.”
“……?”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 이제 너는 그냥 전사가 아니다! 더 강한 전사다!!”
“베헬—라아아아아!!”
다행이다. 기운을 차려서.
아직은 줄어든 몸집이 어색하겠지만, 적응되면 아이나르는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않나?”
“동감이에요.”
레이븐과 난쟁이놈의 대화는 대충 무시하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놈들을 조용히 시키려면 몬스터와의 전투밖에 답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탓이다.
“어서 가자! 비요른! 너도 이걸 먹으면 나처럼 더 강한 전사가 될 수 있다!”
의욕을 되찾은 아이나르는 정말이지 열과 성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퍼억! 퍽 콰앙-! 서걱!
애석하게도 숭배실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을 사냥했음에도 정수는 추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아직 균열의 꽃, 수호자가 남았으니까.
이 정도로 운이 따르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행운을 바라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스치던 때였다.
“자네들과 나름 즐거웠네만, 이제 슬슬 끝이군.”
난쟁이놈이 플래그 같은 대사를 읊는다.
레이븐도 매한가지다.
“뭔가 아쉽네요. 미궁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왜 선배들이 탐험가 일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아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내 삶에서 이렇게 술술 풀렸던 적이 있던가?
음, 찾아보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항상 그 끝에 뭔가가 터져서 그렇지.
한껏 풀어진 머릿속 나사가 단번에 꽉 조여지는 한편,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엄습한다.
“그럼 들어가 보겠네.”
대체 뭐가 문제지?
만약, 지금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과연 그게 무엇이지?
내분?
글쎄, 이건 아닌 거 같다.
전리품 분배도 조율이 된 마당일뿐더러, 그건 수호자가 죽은 다음에나 벌어질 일일 터.
끼이이익.
난쟁이놈이 석실 문을 여는 순간에도 나는 주변을 관찰했다.
분명히 무언가 사건이 벌어진다 확신한 채.
눈에 보이는 작은 것들 하나하나까지 면밀이 살폈다.
또한 내가 아는 게임 속 ‘핏빛 성채’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시 한번 검토했다.
그렇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문! 문을 닫아라!”
“그게 무슨 소리—”
제기랄, 이미 늦었나.
드드드드드드드!
문이 열림과 동시.
지면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넓은 석실 중심부에서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로브를 벗으며 허여멀건한 얼굴을 드러낸다.
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건 마법사인 레이븐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균열의 수호자가 바뀌었다.
원래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데스 나이트’가 아니라…….
「핏빛 성채의 주인이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단독 활동을 하는 ‘보스’ 몬스터.
그럼에도 5등급의 난이도가 매겨진 몬스터.
육탄전은 물론이고, 흑마법에도 능통한 진정한 하이브리드 몬스터.
원래라면 6층이 넘어서야 희미한 확률로나마 만나 보는 게 가능했을 몬스터.
“뱀파이어…….”
심지어 일반 뱀파이어도 아닌 상위 변이종.
쉽게 말해, 지성이 존재하며, 이름이 있고, 역사를 지닌 네임드 몬스터.
나는 저놈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생명체로군.”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
“자네들은 대체 어디서 왔나?”
얼어붙은 무리를 대표해 나는 입을 열었다.
“튀어라.”
씨바,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게임에선 그렇게 나와라 나와라 노래를 불러도 안 나타나더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