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639)
639화 정략 (3)
사실 신종 정수들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지하 1층에 머무르던 시절에 끝이 났으나, 그럼에도 나는 갖고 있던 정수들을 전부 레이븐에게 넘겨줬다.
내가 봤을 때 마법사들은 전부 변태였으니까.
미지를 밝혀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건 맞지만, 그들은 연구하는 과정 자체도 즐겁게 여긴다.
왜 껌도 그렇잖아?
단물이 다 빠지면 금방 뱉는 사람도 있지만, 씹는 행위 자체가 좋아 하루 종일 씹어대는 사람이 있다.
따라서…….
“그럼 이건… 제가 최선을 다해 연구해볼게요.”
추가 연구를 통해 뭔가 더 밝혀질 거라 기대하는 것보단, 그냥 레이븐에게 정수 보관을 맡겼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뭐, 그러다 연구 성과가 나오면 좋고 말이다.
바로 이렇게.
“아, 근데 편지에 적혀 있던 말은 뭐였나? 내게 알려줄 게 있다고 했지 않냐.”
“맞다, 내 정신 좀 봐. 아이나르 씨가 탐사 중에 획득했던 히프라마전트의 정수요. 아직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던 체화 이능, 제가 알아낸 거 같아요.”
“오, 그게 정말이냐?”
“도시로 돌아오고 나서 그때 얻은 수치 자료들을 토대로 다른 기존 자료들과 대조를 해보니 비슷한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체화 이능이 뭔데?”
내 물음에 레이븐이 팔짱을 끼며 그래 봤자 작은 어깨를 활짝 폈다.
그리고…….
“3등급 마물, ‘라망시스’라고 아세요?”
한껏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데, 솔직히 말해 이해가 안 됐다. 어떻게 저 작은 키로 나를 내려다볼 수가 있는 거지?
음, 어쩌면 의문의 해답은 한계까지 뒤로 젖혀진 턱에 있는 걸지도 모르—.
“아, 모르시는 것도 당연해요.”
얘는 또 뭐래.
“그야 ‘라망시스’는—.”
“9층 균열에서 나오는 희귀한 마물이니까?”
할 말을 빼앗겨 버린 레이븐이 어깨를 움찔했다.
“…어?”
왠지 아까보다 젖혀져 있던 턱의 각도가 줄어든 것 같기도 했다.
“알고… 계셨네요……?”
암, 알다마다.하는 행동이 귀여워 피식 웃고 있자니, 레이븐이 다시금 원래의 톤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반만 알고 계시네요! 라망시스는 9층 균열에서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찾지 못하거든요.”
“뭐, 그렇겠지? 균열 내에 숨겨진 가브릴리우스의 안배를 이용해야만 마주칠 수 있는 마물이니까?”
사회성 넘치는 바바리안답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을 주고받았다.
한데 이건 또 뭘까.
“…….”
어째선지 말 많던 애가 또 조용해졌다.
한계까지 젖혀졌던 턱의 각도도 훨씬 더 줄어들어 이제는 내려다보는 느낌은 아예 사라진 상태.
그 상태로 레이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얀델 씨는… 그 안배가 뭔지도… 아시는 건가요……?”
“그런데?”
뭘 당연한 걸 묻느냔 뉘앙스로 답하자 레이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 모습을 보며 알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
“설마… 넌 모르는 거냐?”
“…….”
늘 그렇듯 침묵은 대답이 되어주었다.
“허.”
기도 차지 않았다.
뭐야, 그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날 내려다본 거였어?
“그, 그야! 모르는 게 당연하죠! 그런 고급 정보가 책에 남아 있을까 봐요……? 정수 능력에 대한 자료만 해도 얼마나 가치가 있는데! 게다가 이 정수를 가졌던 사람들을 찾아봐도 역사적으로 손에 꼽을 걸… 왜 저를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데요……?”
“흐음…….”
“…….”
뒤늦게 눈치챈 것인데, 어느샌가 우리 둘의 구도가 바뀌어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내려다보고 있고, 레이븐은 어딘가 의기소침한 사람처럼 땅을 내려다보는 구도.
다만, 그 와중에도 레이븐은 애써 힘을 내어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래서…….”
“……?”
“…………그게 그 안배가 뭔데요?”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이 와중에도 그건 궁금한 거구나.
***
9층 균열에 숨겨진 히든피스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레이븐은 그 보답이라는 듯 라망시스의 패시브 스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사실 나로선 이미 아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사회 생활이지.’
이번에는 눈치껏 말을 끊지 않고 레이븐의 설명을 경청했다.
“라망시스의 체화 이능은 [단짝]이에요. 이름만 보면 뭔가 싶겠지만, 살펴보니 굉장히 특이한 능력이더라고요.”
음, 글쎄…….
[단짝]은 특이한 능력이란 말보다 특이한 발동 조건을 가졌다는 표현이 옳을 거 같은데.“일단 우리들의 추측대로 지원 계열의 이능은 맞아요. 주변에 있는 대상 한 명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아주 강력한 축복을 내려주는 능력이거든요.”
“오?”
“다만 이 체화 이능은 자의로 발동시키는 게 불가능해요. 평상시에도 활성화 되어 있지 않고요. 반드시 특수한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하는데…….”
“하는데……?”
“자세한 조건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역대 소유자들의 자료를 보면 남녀끼리 발동되는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았고……. 또 아주 오랜 시간 함께한 사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뭐, 그럴 것이다.
[단짝]이 발동되려면 정수 소유자가 한 명의 대상을 상대로 호감도 MAX를 찍어야 하거든.그래서 나도 이 정수가 나오면 여캐 동료에게 먹이고 매일같이 꽃 같은 걸 사다주면서 호감도를 올렸다.
아, 참고로 플레이어 캐릭터는 못 쓰는 정수였다.
시스템상 플레이어는 NPC를 향해 호감도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었거든.
‘그럼 지금 상태에서는 이 정수도 직접 쓸 수 있게 된 거려나?’
게이머로서의 호기심이 오랜만에 발동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단짝]을 먹을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걸 넣을 자리도 없을뿐더러…….
효율을 따진다면 역시 동료에게 먹이고 호감작을 하는 편이 훨씬 더 이득…….
‘……라고 하니까 너무 쓰레기 같은데?’
아무튼, 패시브 스킬을 알고 나니 계륵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일단 발동되기만 하면 등급 이상의 성능을 내는 좋은 스킬인 건 맞는데…….
‘터트리는 게 가능하긴 하려나……?’
게임 내에서 호감도 100%를 찍는 건 쉽지 않다.
아니, 일단 동성 간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다.
호감도를 올리다 보면 무조건 90%에서 한 번 락이 걸리며, 이후로는 이성 간의 무언가 그런 간질간질한 이벤트들이 있어야지만 천천히 올라간다.
한데…….
‘아이나르가……?’
아이나르가 다른 남성과 그런 관계가 되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날 포함해 정말 남사친들만 가득하다 해야 하나?
“그래서 남녀 간의 연인 사이끼리만 발동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게 제 추측인데……. 아니, 열심히 말하는 중인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그냥 어떻게 해야 그 이능이 발동되려나 싶어서.”
“……그것도 그러네요.”
여러모로 고민이 되는 문제다.
스킬을 버려두긴 아까운데…….
그렇다고 내가 [단짝]을 발동시키기 위해 매일같이 크림빵을 사다주며 플러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건 그냥 없는 스킬이라 생각하는 게 낫겠네.’
따라서 그냥 [단짝]은 머릿속에서 봉인해두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패시브 스킬이 없어도 충분히 좋은 성능을 내고 있는 정수이기도 하고.
“아무튼, 고맙다. 레이븐.”
“고맙긴요. 결국 아무런 도움도 못 됐는데.”
“그래도 뭔가 부정적인 요소가 있는 체화 이능이 아니란 건 알아냈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한결 걱정을 덜었다.”
“음… 사실 그것도 그렇기는 하죠?”
얘는 대체 감사 인사를 듣고 싶은 걸까, 아니면 겸손을 떨고 싶은 걸까.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첫 번째 용건이 끝나고서도 간단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이왕 온 김에 검사나 하고 가란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 예전에 자주 앉았던 그 의자에 앉아서 실험체가 되기도 했고…….
도중에 배가 고파 마탑 구내식당에서 식사도 했다.
“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이미 밖은 어두워졌겠어요.”
“창문이 없어서 못 보지만 말이다. 아, 그나저나 레이븐. 통신용 수정구 좀 잠깐 빌릴 수 있겠나?”
“누구한테 연락하려고요?”
“성지에 연락 좀 하려고. 이따 연락이 되면 네가 좀 대신 말해줘라. 오늘 연구 때문에 너네 실험실에서 자고 여기서 바로 내일 일정을 하러 가겠다고.”
내 부탁에 레이븐이 고개를 갸웃한다.
“……오늘 얀델 씨가 필요한 연구는 없는데요?”
하, 얘도 가만 보면 중요한 부분에서는 눈치가 없다니까.
“그래도 그냥 내 말대로 해줘라.”
“네? 네… 그건 어렵지 않은데…….”
말꼬리를 흐리던 레이븐이 호기심 충만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건데요?”
결혼 이야기를 꺼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던 나는 딱 절반의 진실만을 털어놓았다.
“그냥.”
“……그냥?”
“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에?”
“자고 가게 해줘라.”
굳이 나가서 여관 잡기도 귀찮단 말이야.
***
대충 아무렇게나 깐 모포에서 잠 든 다음 날 아침.
실험실 한편에 있는 침대에서 잤던 레이븐이 먼저 깨어나 나를 발로 툭툭 밀어서 깨웠다.
“…일어나요. 언제까지 자려고요? 이러다 제때 못 가겠어요. 오늘 중요한 일정도 있다면서요?”
“아…….”
“자는 데 불편하진 않았어요?”
“전혀. 방바닥이 뜨듯하니 딱 좋더군. 어? 근데 너 벌써 씻었나?”
“……그럼 아침에 일어났으니 씻지, 더럽게 그냥 그대로 있어요?”
음……. 글쎄, 실험실에서 나올 때면 항상 며칠 씻지 않은 초췌한 몰골이었던 거 같은데…….
군인이 되더니 이런 데 민감해진 건가?
“아무튼, 하룻밤 신세 잘 졌다. 나중에 또 오마.”
“아뇨. 오지 마요. 괜히 피곤하기만 하니까.”
“엥? 피곤하다니? 너도 어제 일찍 잠들었던 거 아니냐?”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연구해야 하니까 얼른 가기나 하시죠?”
레이븐에게 아침부터 등쌀에 떠밀린 나는 내쫓기듯 마탑에서 나왔고, 이후로는 근처 승강장에서 마차를 타고 목적지인 황도 카르논으로 이동했다.
그야 오늘이거든.
인간, 드워프, 요정.
그리고 바바리안, 수인, 용인.
라프도니아라는 거대한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 종족의 리더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종족 회담이 열리는 날이.
‘어쩌다보니 여길 이제야 처음 와보네.’
부족장이 된 지 한참이나 되었으나 지금에서야 참석을 하게 된 종족 회담. 회담이 열리는 건물은 지나가면서도 몇 번이나 봤던 건물이었다.
여섯 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로마 신전을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건물은 아무래도 눈에 확 띄기 마련이니까.
‘…시간이 좀 남네.’
아침 일찍부터 내쫓긴 탓인지 시간이 남아서 근처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카르논에 위치한 식당인지라 밥값이 예상보다 훨씬 비싸 당황하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배고픈데 밥은 먹어야지.
‘식대는 따로 안 주겠지?’
이내 식사를 끝낸 후에는 배를 두드리며 회담이 열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비요른 얀델님, 혼자 오셨습니까?”
“그런데 문제라도?”
“아뇨… 없습니다. 들어가시지요. 다른 분들께서 기다리십니다.”
참고로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들은 모두 다른 종족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어찌 된 게 바바리안만 빠져 있었다.
‘각자 데려온 사병들을 세워 두는 식인 건가?’
음, 그런 건 전대 부족장한테 못 들었는데…….
설마 이런 걸 까먹고 전달 안 했을까 싶지만, 그 아저씨라면 진짜 그랬어도 이상하지 않다.
“수고해라.”
이내 입구에 서 있던 경비들을 격려해준 뒤 안으로 들어가 걷자 어느덧 중심부에 모여 있는 이들이 보였다.
각 여섯 종족을 대표하는 거물들.
다만, 놀라운 건 그들 중에서 익숙한 얼굴이 둘이나 보였다는 것이다.
용인족의 수장인 용아저씨.
그리고…….
‘이번에 수인족에선 적묘족을 대표로 내보냈나 보네.’
적묘족의 적통 순혈 가문.
칼스타인가의 가주이자 미샤의…….
‘엄밀히 말하면 친아빠는 아니지?’
아무튼, 족보상으로 부친 자리에 있는 사내.
“오랜만이군. 그때는 자네를 이런 자리에서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네만.”
“이해한다. 너희들 상상력이 부족한 건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으니.”
“……내게 앙금이 아직 남아 있는가 보군?”
“그럴 리가.”
실제로도 앙금 같은 건 없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없는 애송이였으니까.
뭐, 이제는 이 아저씨가 아무렇게나 반말을 찍찍 쓸 수 없는 위치에 올랐지만.
“사적인 대화는 그만들 하시고,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그대도 이만 앉으시겠소?”
이내 요정족 대표의 말에 나는 천천히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거물들이 모인 자리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몹시도 간단한 이유였다.
‘여기도… 원탁을 쓰네……?’
커다란 원탁이 놓인 회담 장소.
천천히 내 자리로 보이는 빈 자리에 착석한 나는 한 팔로는 턱을 괸 채 검지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비록 이번이 첫 회담이긴 하지만.
툭툭.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솟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