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638)
638화 정략 (2)
결코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내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야기 속 영웅처럼 늘 정답을 찾아가며, 모든 역경을 멋지게 이겨냈다는 뜻은 아니다.
항상 최선을 다했으나, 후회할 거리는 늘 남았다.
나는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절대로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하아…….”
오늘만큼은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회주의 제안을 듣고 어째서 여러 명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린 걸까?
‘진짜 내가 미친 건가?’
나도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참 동안 이불 속에 틀어박혀 생각을 해봤다.
‘미샤 칼스타인.’
뭐, 얘는 떠오르는 게 당연한 거 같다.
이 세상에 와서 그 누구에게도 벽을 넘고 다가가지 못하던 때 처음으로 정을 주고받은 사람이니.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다만 에르웬의 경우엔 미샤와 조금 다르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이 남아 있지만, 그 감정은 남녀 간의 그것과는 명백히 다르달까.
단지 얘가 나한테 가진 감정을 알기 때문에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때 떠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왜 가끔 그런 사람도 있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선호하는.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참 아이러니하게도, 약탈자 시절에 적으로 처음 만났던 아멜리아는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통틀어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든든하고 의지가 된달까.
그런 주제에 솔직히 말해 귀여운 모습도 있고.
다만, 문제는…….
‘왜 얘네 셋이 끝이 아닌 건데.’
레이븐, 현별이, 라그나.
그리고 아이나르—.
‘아니, 얘는 그냥 친구지.’
앞선 셋에 비하면 한참 짧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얘네들도 잠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친절하게 웃어만 줘도 손주 이름까지 상상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그들 하나하나와의 결혼 생활을 추상화처럼 그렸다.
놀랍게도, 그 어느 누구와 이어져도 즐거운 생활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 같았다.
‘……미친놈인가 진짜?’
나도 나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야 난 그들 모두와 이어지고 싶단 생각이 없다.
귀족이 되었기에 제도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가 그러고 싶지 않다.
한데, 그럼에도 그때는 어째서 여러 명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른 걸까.
오랜 시간 고민에 잠겨 있던 나는 제일 정답에 근접한 듯한 답을 찾아냈다.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아직 나는 그 누구에게도 확실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미샤와의 일이 있은 후, 이런 쪽의 감정은 최대한 억누르고 묻어두었으니까.
그런 상황에 갑자기 결혼 얘기를 꺼내면 일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떠올리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 주변에 여자라고 하면 얘네가 전부잖아?
‘암, 내가 이상한 게 아니지.’
타인의 눈으로 본다면 합리화에 불과할지 몰라도, 일단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다.
따라서…….
드르렁! 드르러러렁!
나도 모르게 잠에 들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아무도 모르게 부족장 천막이 있던 곳에 세워진 건물(신축)을 몰래 빠져나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군.”
어…….
“하하, 산책 좀 할까 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쓱 훑어보고 있자 아멜리아가 실소를 내뱉었다.
“걱정 마라. 다른 애들은 근처에 없으니까. 너를 기다리겠다는 걸 잘 설득해 다 돌려보냈다.”
“어어… 그러냐……?”
“언젠가 제대로 대답은 해야 할 거다. 모두가 네가 어떤 결정을 할지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아멜리아는 그 말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 끝나자마자 쿨하게 등을 돌렸다.
아, 쿨하게는 아닌가?
“그리고… 오늘 어디를 가려는진 모르겠지만, 너무 늦지 않게는 돌아와라. 외박을 할 거면 미리 연락을 주고.”
시크하게 돌아가다가도 잠시 걸음을 멈춰 세우고 저런 말을 하는 게, 마치 잔소리하는 엄마 같다.
뭐, 이것도 얘의 매력 중 하나일 테지만.
‘하… 결혼 얘기를 어쩌다 식탁에서 꺼내서…….’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입조심을 해야 한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단 말은, 그 반대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었으니.
“부족장이다!!”
“부족장이 도시로 나간다!!”
“개문하라!!”
그냥 산책이나 하고 갈까 싶었는데, 어쩌다 성문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는 바람에 7구역으로 이동했다.
아직 재건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못한 탓에 폐허나 다름없는 7구역.
무너진 집 앞에서 모포를 덮고 부랑자처럼 누워 있던 주민들이 날 보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거인……! 거인이다!”
“뭐? 남작님께서 오셨다고?”
“얀델 남작님……!!”
영웅이라는 명성 때문일까?
일반적인 귀족의 행차라면 겁이 나서 자리를 피하기 급급한 주민들이 나에게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물론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며 감사 인사나 축복의 말을 전하고 그런 건 좋지만,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제, 제발! 저희 가족 좀 도와주십시오! 가게가 전부 무너져서 이대로면 내년 세금이……!”
애원을 하거나, 동정을 바라는 건 그나마 낫지만.
“남작님! 남작님! 저희 7구역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비프론은! 저 비프론은 어떻게 된 거고요!”
“왕가에서 7구역을 버릴 거라는 소문도 있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따지듯이 묻는다거나.
“뭐라 말 좀 해주십시오!!”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찾듯 내가 대답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들도 사정이 좋지 않아 하루하루가 힘들고, 그런 와중에 제대로 된 소식도 듣지 못하니 갑갑할 터.
“남작님!”
“헛소문은 믿지 마라. 7구역은 곧 재건 공사가 시작될 거다.”
“남작님!”
“일단 이걸 받고 조금만 버텨라. 구호 물자가 더 많이 올 수 있도록 내가 힘써 보겠다.”
“남작님!”
“비프론의 결계? 그게 뭐가 그리 무섭나? 다들 걱정 마라! 이 도시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화를 낸다거나 하기보다는 격려의 말, 그리고 그들이 바라고 있었을 대답을 해주며 거리를 나아간다.
그리고 얼마나 더 걸었을까.
‘……있으려나?’
여기까지 온 김에 마탑에도 방문했다.
안 그래도 벌써 성지에 편지가 몇 통이나 와 있었으니까.
이번 탐사가 끝나고 왕가에서 특별 휴가를 길게 내준 덕분에 마탑의 연구실에서 개인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고, 빠른 시일 내에 방문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편지들이었는데…….
‘난공불락은 무슨.’
이내 마탑에 도착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긴 역사 동안 한 차례도 침입자들에 의해 정복된 적 없다고 하던데, 그 기록이 요 몇 년 사이 두 번이나 깨졌다.
한 번은 나.
그리고 이번엔 노아르크.
‘사실 난공불락이라기보다는 그냥 정치를 잘했을 뿐이란 거겠지.’
뭐, 그래도 입구부터 시작해 외관이 처참해진 것과 다르게 내부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다고 듣기는 했다.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결계로 시간을 번 다음, 자료와 연구 설비들을 통째로 다 챙기고서 7구역의 고위 인사, 지역 유지들과 함께 순간 이동 마법진을 타고 구역을 떴다던가?
‘순간 이동 마법진이 박살난 것 외에는 멀쩡하다고 그랬지…….’
노아르크 쪽에서도 다 챙기고 떠난 것을 알았는지, 왕가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마법진만 부수고서 더 건들지 않았다고 들었—.
“왜 문 앞에서 그러고 있어요? 왔으면 그냥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지.”
그때 연구실에 도착한 내 뒤에서 레이븐이 나타났다.
“거, 인기척 좀 내고 다녀라.”
“…뭐래.”
“어허, 남작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지? 키도 쪼그마한 게.”
“아니, 왜 보자마자 시비예요? 오면서 뭐 짜증나는 일이라도 있었어요?”
“…….”
“뭐야, 진짜 있었던 건가?”
“없었다.”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짜증이 난다기보다는 내게 관심을 보내는 주민들 때문에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에 가까웠으니.
***
“일단 들어와요. 안에서 얘기하게.”
“근데 너는 어디 갔다 온 거냐? 하도 바쁘다 해서 당연히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멀리 간 건 아니고, 아는 분에게 잠깐 뭐 좀 빌리러 갔어요.”
“뭐를?”
“실험 도구인데, 자세히 말해줘요?”
“아니, 됐다.”
이내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서 대충 자리잡고 앉자 레이븐의 연구실도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게 보인다.
“난장판이죠? 이번 일 때문에 마탑 전체가 정신이 없어요. 제가 없는 동안에 스승님께서 다 챙겨서 나오긴 했는데, 찾아보면 없어진 것도 꽤 있고요.”
“그렇군.”
“뭐, 애초에 카르논에 있는 연구실로 이것저것 가져갔다보니 남아 있는 것도 많이 없었지만요. 마실 거라도 내다줄까요? 그래도 남작님인데.”
“물로 줘라.”
이후로는 레이븐의 연구실 플라스크(1.8L)에 담겨진 물이나 벌컥벌컥 마시며 근황 애기를 나눴다.
그야 지하 1층에서 나온 뒤에도 벌써 한참이나 시일이 흐른 데다가, 그사이에 굵직한 일도 하나 껴 있었으니까.
“얀델 씨는 어떻게 돌아오자마자 그런 일이 바로 생기는 거예요?”
도시로 돌아와서 겪은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레이븐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경청하다가도, 중간중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가만 보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 사고에는 항상 껴있는 거 같다니까요?”
슬픈 말이지만, 도무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내가 겪은 일들을 거의 다 알고 있는 만큼, 부정을 한다고 납득할 거 같지도 않고.
‘진짜 왜 온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거 같지?’
정말로 한수라는 이름에 마가 꼈나?
그 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였다.
“그나저나… 많이 아쉽게 됐네요.”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레이븐이 말을 이었다.
“왜, 지하 1층 탐사 중에 얻은 정수들을 전부 다 일반 탐험가들한테 줘버렸다면서요. 그것들을 연구만 해도 최소 몇 년 동안은 올해의 학술상을 독점할 수 있었을 텐데.”
“아, 그거…….”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얀델 씨를 탓하려거나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저는 솔직히 말해서 그 결정을 듣고 얀델 씨답다고 생각했거든요.”
“…응? 나답다니?”
순간 이 정보만으로 사건의 진상까지 파악한 건가 싶기도 했지만, 결과만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다.
“얀델 씨는 도시, 그리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거잖아요? 현명하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레이븐이 쑥쓰럽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 개인적으로… 멋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함께하며 레이븐에게서는 처음 겪어보는 타입의 눈빛이었다.
존경심 비슷한 게 눈에서 느껴진다 해야 하나?
“어… 그, 그러냐?”
“네.”
“근데… 그 있잖냐.”
“……?”
레이븐이 너무 진지한 표정이이었던지라, 나는 평소처럼 장난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바로 정보를 정정했다.
“그…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라.”
“네. 그래야죠. 대의를 위해서 그런 건데. 제 사리사욕을 채운다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얀델 씨 입장에서는 조금 한심해 보일 수 있—.”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는 레이븐을 보며 나는 그냥 남자답게 고백했다.
“사실…….”
“네, 사실은요?”
“쓸 만한 건 이미 전부 따로 챙겨뒀거든.”
“………네?”
한참이나 텀을 두고서 돌아온 되물음.
“챙겨… 뒀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다. 정수를 막 뿌려 대면 왕가에서도 재고 조사를 제대로 못할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영리한 계책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자찬하고 있자니, 레이븐이 현실 부정을 하는 사람처럼 뚝뚝 끊어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왕가의 전리품에 손을 댔다고?”
“그런데?”
“제정신이세요?”
충분히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새삼스럽게 왜 그러는 거냐?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우리들은 이미 지하 1층에서 뒷주머니를 찬 경험이 있다.
그래, 그러니까…….
“심지어 너도 그때 좋아했지 않냐? ‘고뇌의 화관’이란 멋진 이름까지 지어주면서.”
“그, 그, 그건 이거랑은 다르죠……! 아니, 애초에 그런 짓을 해놓고 왜 나한테는 다 솔직히 말하는 건데요!!”
어허, 어디서 발을 빼려고.
이런 태도가 조금 서운했지만, 다행히 나는 마법사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야 나는 너한테 뭔가 숨기고 싶지 않으-.”
“이제 그거 안 통해요!”
“…그러냐?”
공부를 많이 하던 애라 그런지 배우는 게 빠르네.
“아무튼,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어차피 그거나 이거나 들키면 처형당하는 건 똑같지 않나?”
“아뇨! 아니거든요! 그건 우리 둘만 입을 다물면 끝이지만, 이건 너무 규모가 크다고요!”
음… 확실히 그건 그렇긴 하지.
“근데 그래서.”
“……?”
“연구 안 할 거냐?”
“그, 그건……!”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하던 레이븐이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긴 해야죠.”
그래, 그럴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