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637)
637화 정략 (1)
혼사를 치르고 후사를 보아라.
그 조건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평정이 깨졌지만, 생각해 보면 회주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충분히 꺼낼 수 있을 만한 조건이었다.
“얀델 남작이 몇 년간 이뤄낸 것은 그 어느 영웅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대단한 것이라오. 그건 나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소.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회주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지.”
얀델 남작가에는 아직 후계자가 없다.
쉽게 말해, 내가 죽는 순간 우리 남작가는 몰락 귀족가로 전락한다.
내가 듣기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야 나는 자식은 물론 친인척조차 없으니까.
“만약 지금 남작이 잘못된다면, 얀델 남작가는 그날부로 사라질 것이외다. 남작이 소유한 대부분의 것들이 국고로 환수되겠지.”
나를 본격적으로 밀어줄 계획을 구상 중인 회주 할아버지로서는 아무래도 가장 우려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최소한의 리스크 관리라 해야 하나?
내가 잘못된 순간 모든 계획이 크게 어그러지는 건 틀림없을 테지만, 그래도 남작가만 유지할 수 있다면 소속 가문의 숫자가 중요한 멜베스 입장에선 그나마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것인데…….
“……당장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하면 아쉽게도 이 제안은 보류해야 할 것이외다. 이 정도의 조건조차 성립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다른 가문들을 설득하는 것은 무리니.”
슬쩍 찔러나 봤는데 예상보다 강경한 답변이 즉시 돌아온다.
밀고 당기기를 하는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하나 그럼에도 우리 웰베이트 자작가는 남작을 지원할 것이오. 하나… 조금 전에도 말했듯 멜베스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한참 나중 일이 되겠지.”
“…그렇군.”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회주 할아버지가 어르고 달래듯 말을 덧붙였다.
“또한 후계자는 바바리안이 아니어도 상관없소. 멜베스의 특성상 되도록 인족은 아니었음 하지만……. 그것까지 강제할 생각은 없소이다. 남작가 전체가 왕가로 넘어가는 일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해석을 하자면, 내가 정할 결혼 상대는 바바리안이 아니어도 좋다는 뜻.
“아, 물론 동족의 여인을 배필로 맞이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기는 하외다. 첫 아이가 피를 제대로 물려받아야 후사를 여럿 뒀을 때, 후계 다툼이 적을 터이니.”
머리가 히끗해질 때까지 귀족계에서 살아온 할아버지란 걸 알아서일까?
이런 말을 듣고도 오지랖을 부린다거나 하는 생각보단 정말 이성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피어난다.
하지만…….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단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는 것이오?”
“생각은 해보겠다는 뜻이었다.”
언제든 도망칠 구석이 가득한, 바바리안답지 않은 회피형 화법.
“그렇구려.”
다만 회주 할아버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상대가 없는 거라면 우리 가문의 손녀를—.”
거, 이 할아버지가 어디서 또.
“됐다.”
“수인족이 별로라면 다른 가문의 여식을 알아다 봐 줄 수도 있소이만…….”
“그러니까 됐다고 하지 않냐.”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하자, 회주 할아버지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기대와 다른 답변에 실망한 눈빛과는 달랐다.
“상대가 있는 거구려? 제안을 들었을 때, 이미 마음속으로 생각해둔.”
이내 회주 할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것이면 충분하외다.”
……역시 연륜은 무시할 게 못 되는구나.
***
결혼 이야기가 일단락 지어진 후.
하나의 주제가 마무리 될 때를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며 사용인이 차를 내왔고, 우리는 차를 마시며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남작, 혹시 7구역에 건축 중이던 얀델 남작가의 상태는 확인해 보셨소?”
“……봤다.”
다시 떠올려봐도 아주 끔찍한 현장이었다.
지붕까지 멋들어지게 올라간 게 한눈에 봐도 완공되기 직전이었거든.
처참히 박살 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어쩌다 보니 입주일이 또 밀린 셈인가…….’
대체 우리 얀델 남작가는 언제쯤 완성이 될까?
왠지 또 까마득해지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첫 설계대로 완공됐다면 지금 상태에선 굉장히 비좁았을 테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근처 부지를 좀 더 사는 편이 좋겠구려. 의도치 않게 식구도 늘었으니.”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근데 애초에 아까도 내게 부지가 필요한 걸 알아서 땅을 사주겠단 약속을 꺼낸 거 아니었나?”
“허허, 얀델 남작의 생각은 읽는 게 쉽지 않아서 말이오. 확실하게 듣고 싶었소이다.”
“다음부터는 그냥 속 시원하게 물어봐라. 그러면 서로 편하니까.”
“오, 그렇다면야. 부지는 얼마나 넓기를 바라시오? 이 시국이라면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부지를 매입할 수 있을 듯하오만.”
이후로는 잡담을 나누듯 사소한 사항들을 의논하고 조율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되면 최대한 빨리 전해주시오. 성대히 혼사를 올리려면 준비할 것들이 많으니.”
회주 할아버지와의 독대를 끝마치고 나와 마차를 타고 성지로 돌아가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결혼이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였다.
아니, 정확히는 몇 번인가 생각은 해보았지만 내 주제에 가당키냐 하냐며 생각을 끝냈던 주제였다.
물론 언젠가 딱 한 번, 정말 진심으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끝내 마무리는 좋지 못했다.
“하아…….”
머리가 복잡하다.
가슴이 답답한 건 아닌데, 어째선지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언젠가 넘어야 할 큰 산을 눈앞에 둔 것 같달까.
결혼, 결혼, 결혼.
뜬금없는 타이밍에 회주가 내게 남기고 간 그 두 글자의 단어가 자꾸만 뇌리에 맴돈다.
덜컹.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도.
“부족장이다! 부족장이 돌아왔다!”
전사들의 환대를 받으며 돌아온 성지에서도.
“…………해서 비프론 주민들은 잘 정착했고, 아직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 많은 노동력을 놀게 두는 건 낭비인 거 같아서 내일부터는 성지 내 각종 작업들에 동원할까 생각 중인데 괜찮을까요?”
사무실에서 행정사무총장의 업무 보고를 듣는 동안에도.
그리고…….
“헤헤, 아저씨. 이것도 더 드셔보세요.”
“고맙다.”
“…어때? 오늘은 레몬즙을 평소보다 좀 더 많이 넣어봤는데, 입에는 좀 맞아?”
“맛있다.”
“표정이 좋지 않군. 그곳에서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없었다.”
동료들과 모여 식사를 하던 그 와중에도.
자꾸만 그 두 글자가 목에 박힌 가시처럼 걸린 나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혼이라…….”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
정략혼을 한다든가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
“……?!!”
“……??”
어차피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 계속 남아 살아갈 생각이라면.
결국 나도 언젠가 누군가와 결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식도 보고, 손주도 보고. 오순도순 평생을 그렇게 살면—.’
음, 역시 그런 것도.
“…나쁘진 않으려나.”
나도 모르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때였다.
불현듯 정신을 차려보니, 어째선지 실내에는 이질적인 정적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
“…….”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진 않았다.
누군가는 멍하니 숟가락을 쥔 채로 굳어 있었고, 누군가는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히끅!”
또한 누군가는 사레가 들린 듯 딸꾹질을 뱉기도 하였으며—.
“………오?”
그 와중에도 음식물을 열심히 오물거리던 누군가가 목 안으로 꿀꺽 삼키고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비요른 얀델.”
“응?”
“…조금 전에 뭐라고 했지?”
재생 버튼을 누른 듯 잠시간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간다.
“겨, 결혼! 결혼이라고 해, 했당?!”
어느새 내게 모인 시선 속엔 의문이 가득했다.
“나, 나쁘지 않다고도 했어요!”
뒤늦게 혼잣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나는 뭐라 답할지 할 말을 잃었고, 그때 옆에 있던 아우옌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확실히 짝을 찾으실 때이시기는 하시지요. 아니, 오히려 도시 모든 사람들이 왜 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입니다. 한데…….”
“한데?”
“갑자기 그런 얘기를 꺼내심은… 혹시 사모님 되실 분이 생기신 건지요?”
총대를 메는 듯한 직접적인 질문에 같은 식탁에 앉아 있던 모든 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뭐, 이해 못할 건 아니다.
세상 일이 어떻게 될진 몰라도, 지금 당장 우리들은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는 관계였으니.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겠지.’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놨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가다듬은 뒤, 멜베스에서 들은 제안을 얘기했다.
사실 별로 길게 얘기할 것도 없었다.
혼사를 치르고 얼른 후사를 보아라.
그럼 멜베스 전체를 동원해 얀델 남작가를 도와주겠다.
혼인 상대는 바바리안이 아니어도 괜찮다.
이렇게 겨우 몇 줄로도 정리가 가능한 제안.
다만, 이를 들은 동료들의 반응을 정리하는 것은 수십 줄로도 모자랐다.
“아… 그, 그래서 그, 그랬구낭?”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을 뿐인 이야기군.”
“그, 그래서요? 아저씨는 어쩌시려고요? 어쩔 수 없이 상대가 필요한 거라면…….”
“오오! 비요른의 아들이라니! 분명 엄청난 자질을 갖고 있을 테지! 내가 훌륭한 전사로 키워 주겠다!”
“아이나르, 그게 무슨 뜻이지?”
“네. 그냥 흘려들을 수 없네요. 아이나르 씨가 아저씨의 아들을 키우겠다니요?”
“응? 대체 뭐가 문제냐? 비요른의 아들이면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데.”
“아니, 그러니까……!”
“그, 그만들 해랑! 아무래도 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거 같으니까!”
“하아…….”
혼란스럽다는 말로도 모자란 상황.
다만 그 상황은 전혀 의외의 곳에서 진정됐다.
음… 엄밀히 말하면 진정이 아니라 잠시 소강 상태에 돌입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 제안을 승낙한 거냐……?”
아멜리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순간 장내가 조용해진다.
“…….”
“…….”
“…….”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익숙한 레크레이션 강사라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할 만큼 밀도 높은 집중.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번에도 솔직히 답했다.
“일단 생각은 해보기로 했다.”
“……새, 새, 생각만?”
“어, 그래 생각만.”
“……근데 왜? 왜 생각만 하려는 건뎅?”
다시 생각해도 참 괴상한 질문이었다.
거, 바바리안이 자웅동체인 것도 아니고.
“그야…….”
“……그야?”
“상대방의 동의도 필요할 거 아니냐!”
그냥 홧김에 내지르듯 한 말에 한 번 더 식탁 위에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1초, 2초, 3초.
그 침묵이 얼마나 더 이어졌을까.
“그… 그러면 앞으로 동의를 구하시겠다는 뜻인 겁니까……?”
“어…….”
“그… 제, 제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만!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이… 마치 정해둔 상대방이 있다는 것처럼 들렸던지—.”
아우옌의 질문을 받음과 동시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게, 전사로서의 삶이 내게 알려 주었다.
영리한 전사는 싸울 장소를 스스로 택해야 한다.
따라서…….
“배가 부르니 잠이 오는군!”
“…예?”
“나는 이만 자러 가보겠다!!”
바바리안식으로 안전한 내 방으로 돌진.
이후 곧장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누워 이불로 몸을 둘둘 감싸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동료들에게 헐레벌떡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조금 창피하기는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역경이라도 헤쳐 나가는 것이 전사이고.
아무리 솔직함이 미덕인 바바리안이라고 한들.
유교 정신을 영혼에 새긴 K-바바리안으로서 어찌 말하겠는가.
[상대가 있는 거구려? 제안을 들었을 때, 이미 마음속으로 생각해둔.]암, 이건 절대 아무한테도 못 말한다.
‘정신 차리자, 한수야…….’
떠오른 게 한 명이 아니었다고는.
Any updates? I know it’s on a break but still some more chapters r 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