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00)
제 111화
34화. 진실의 공명
1796년 2월 1일.
우중충한 하늘 아래, 비가 쏟아지는 흑해 한복판을 묵묵히 걷고 있는 한 남자. 수호 기사 칸은 언제나처럼 품속에 편지 한 장을 품고 있었다.
“왔느냐.”
“예, 가주님.”
이제는 시론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편지부터 꺼내 드는 칸.
칸이 공손히 편지를 내밀자 시론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네가 생각하기엔 어떨 것 같나.”
“도련님과 단테 하이란의 승부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단테의 승리가 당연합니다. 진 도련님은 두 가지 힘이 봉인된 상태니까요. 그러나 그간 진 도련님의 행보를 미루어 보면…… 이번에도 이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스걱.
편지를 개봉한 시론은 실로 오랜만에 살짝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발신자 : 카시미르
수신자 : 시론 룬칸델
보고 사항 : 진 룬칸델이 단테 하이란을 꺾고 코스모스의 각축장에서 우승하였음.
비고 : 진 룬칸델은 검술 6성에 이르렀음.
네 줄.
이번 카시미르의 편지는 그게 전부였다. 평소처럼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인사라든가, 잡설 같은 건 단 한 문장도 섞여 있지 않았다.
깔끔 그 자체. 그러나 편지를 읽은 시론은 묘한 마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짧게 쓰라고 전하라 했더니 이렇게 보낸 것인가?’
물론 칸의 말대로 막내가 이변을 일으킨 건 아주 흡족한 부분이지만.
어쩐지 농락당한 것 같은 이 기분은 대체…….
“가주님, 혹 막내 도련님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겁니까?”
시론의 굳은 표정을 살펴본 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녀석은 단테를 꺾었어.”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다. 돌아가거든 카시미르에게 조만간 술 한잔하자고 전해라. 아무래도 그 친구 얼굴을 한 번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 * *
흠칫.
“방금 뭔가 한기가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한기라뇨, 카시미르 경. 난로가 이렇게 활활 타고 있는데요.”
진이 벽난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곁에 있던 엔야와 유리아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고, 알리사도 어깨를 으쓱하며 카시미르를 쳐다보았다.
“저번엔 1월 함박눈이 쏟아지는데 더위를 먹었다고 하시더니…….”
“자기 왜 그래? 요즘 몸이 좀 허한가.”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착각인 것 같아.”
“보약이라도 하나 해 드려야겠군요.”
카시미르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지금 진의 방에 모여 잡담을 하고 있었다.
진은 막 개인 수련을 끝낸 참이었고, 알리사는 퇴근을 했으며, 카시미르도 업무를 끝내고 그냥 온 것이다.
엔야와 유리아는 그냥 진에게 놀아 달라고 찾아온 것인데, 막 무라칸과 길리가 유리아를 위해 퍼즐을 꺼낸 참이었다.
“야야, 얼음과자. 너는 이거나 갖고 놀아.”
“싫어, 고양이 변신해줘.”
“싫어.”
“해줘.”
“싫어. 음…… 그래, 이 퍼즐을 다 맞추면 해 주마.”
“약속했어.”
천 조각짜리 퍼즐을 이제 여섯 살이 된 소녀가 맞추는 건 꽤 어려운 일이지만.
유리아는 놀랍도록 빠르게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조각을 맞춰 볼 필요도 없이, 손에 잡히는 족족 빈칸을 정확히 채우는 모습이 꼭 퍼즐을 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무라칸 님, 제 딸은 아즈 밀의 계약자라 퍼즐 같은 건 소용이 없습니다.”
“아! 맞다. 젠장, 당했군.”
“당하긴 뭘 당해, 네가 제안해 놓고. 실은 그냥 놀아 주고 싶었잖아. 괜히 투덜거리긴.”
“시끄러, 꼬마. 고양이 변신은 룬칸델에 있을 때 지겹도록 했는데. 에잉.”
펑!
변신한 무라칸이 냥냥, 울음소릴 내자 방긋방긋 웃는 유리아.
“히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무라칸은 빨리 유리아를 지치게 만들어 얼른 보내 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꽤나 열성적으로 놀아 주는 모습을 보였다.
‘애들 체력 빼기엔 술래잡기만 한 게 없지.’
휙, 휙!
무라칸이 바닥과 탁자를 오가며 이리저리 뛰어다니자, 유리아가 홀린 사람처럼 그를 쫓기 시작했다.
“하여간 말은 저렇게 해도 늘 다정한 분이라니까요. 안 그래요? 도련님.”
유리아는 좀체 무라칸을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했다. 반면 무라칸은 오히려 그것에 재미를 붙였는지, 점점 더 아슬아슬 잡혀 줄 듯 유리아를 약 올리는 모습.
“우으으!”
결국 5분쯤 무라칸을 뒤쫓던 유리아가 무라칸이 있는 탁자 위로 온 힘을 다해 도약을 시도했다.
폴짝!
탁자는 유리아가 한 번에 뛰어 올라가기엔 너무 높았다.
“어!”
“유리아!”
콰당!
결국 탁자에 부딪친 유리아가 뒤쪽으로 넘어지며 짧은 술래잡기는 막을 내렸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으나, 야옹거리며 뛰어다닌 무라칸에게 모두의 눈총이 향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멍청한 흑룡이, 애 다치면 어쩌려고?”
“냐앙…….”
급격히 시무룩해진 무라칸의 귀가 처진 사이.
팔랑…….
탁자 서랍에서 빠져나온 종이 한 장이 유리아의 앞에 낙엽처럼 떨어졌다.
“옹?”
모두가 유리아에게 붙어 괜찮은지 물어보는 와중.
정작 유리아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고, 앞에 떨어진 종이에 자연스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오와! 보물 지도다!”
그리고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그렇게 소리친 유리아.
그건 진이 코스모스의 각축장에서 우승하고 받아 온 보물 지도였다.
진은 돌아오자마자 상패만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 두고,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보물 지도는 서랍에 넣어 둔 채 잊은 지 오래된 상태였다.
해적단 따위가 우승 상품이랍시고 준비한 지도가 가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코스모스는 우승자가 금화 일천 대신 보물 상자를 가져가길 기대했었는데, 그는 언젠가 한 무역선을 약탈하고 얻은 그 보물 지도가 아무 의미 없는 낙서에 불과하다고 판단했었다.
이를 테면 ‘꽝’ 상품이었던 셈.
진이 돈과 보물 상자를 모두 챙긴 덕에, 코스모스는 시상식을 날로 해 먹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다음부턴 조심해서 놀아 줘. 애 다치면 네가 책임질 거냐?”
“맞아요, 무라칸 님. 그래도 유리아 양이 씩씩하네요. 꽤 세게 넘어진 것 같…….”
“여기 중요한 게 있어!”
돌연 유리아가 벌떡 일어서 지도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뭔가, 뭔가 중요한 게 있어요!”
그렇게 소리친 유리아의 눈빛이 확신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른 꼬마가 소리치고 있다면, 그저 어린애들의 흔한 상상으로 치부하며 웃고 넘길 테지만.
유리아는 퍼즐이 천 조각이 아니라 만 조각이어도 단번에 간파할 수 있고, 모든 사물과 현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절대안을 소유한 아즈 밀의 계약자.
즉, 그 지도는 진짜로 보물 지도였던 것이다.
엉성하게 그려진 땅 한쪽에 X표시가 있고, 여백에 고어가 쓰인 지도.
‘그 고어는 무라칸과 퀴칸텔도 전혀 알아보지 못해서, 그냥 누군가의 장난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무라칸쯤 되는 용이 알아보지 못할 고어는 별로 없다. 읽진 못하더라도, 문자의 형태를 보면 대략 어느 시기에 사용되었던 언어인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이 묻혀 있다니? 유리아, 자세히 얘기해 줄래?”
진이 질문을 던진 순간.
방금까지 초롱초롱 빛나며 호기심을 드러내던 유리아의 두 눈망울에, 급격히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내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유리아.
“으아앙! 너무…… 슬퍼요!”
유리아는 지금 아즈 밀의 권능이 발동된 채,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었다.
어딘가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보물.
그리고 그 보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의 현장.
“……아무래도 아즈 밀의 권능이 발현되고 있는 것 같군. 일단 안정시켜야 돼, 미물! 어서 라트리를 불러와!”
어린 계약자에게 자의와 상관없이 권능이 발동되는 건 대부분 좋지 않다. 특히 아즈 밀의 능력은 미래, 진실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이럴 땐 수호룡의 도움이 필요했다.
“예, 옛!”
카시미르가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고, 알리사는 유리아를 품에 안으며 능숙하게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어요. 아무래도 딸아이는 보통의 아이가 아니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라트리가 도착했다.
“유리아는요!”
“여기!”
곧장 라트리가 유리아의 곁에 정좌해 눈을 감자, 푸른 기운이 흘러나와 두 사람을 휘감기 시작했다.
‘공명’이었다.
이제 권능으로 떠오른 장면 중, 슬프고 우울한 것은 계약자인 유리아 대신 진실의 용인 라트리가 대신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유리아가 차츰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반면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라트리는, 눈을 감은 채 때때로 미간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뭔가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 있는 듯 말이다.
그렇게 공명이 시작되고 10분쯤 흘렀을까.
유리아는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고, 라트리는 뻘뻘 땀을 쏟으며 한숨을 내쉬는 모습.
“후우……!”
무라칸이 다가가자 라트리가 일어서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라트리는 무라칸의 전성기 땐 태어나지도 않았으나 그를 무척 경외하고 있었다.
“아, 무라칸 님. 경황이 없어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인사치레는 됐어, 얼음과자가 대체 뭘 본 거야?”
“그게…… 미래가 아니라 과거입니다.”
“과거? 아즈 밀의 계약자가 과거를 보는 경우는 그것밖에 없잖아?”
“예, 뿌리 깊은 원한이나 집념…… 그런 것이 묻어 있는 사물을 만지거나 장소에 가서 원념을 느꼈을 때뿐이죠. 후우,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할 뻔했습니다. 어찌나 참혹하던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오백 년을 넘게 살아온 진실의 용.
라트리는 방금 유리아를 대신해 본 것을 떠올리며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흐음,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여서 그냥 별것 아니라고 치부했는데. 아무래도 꽤나 한이 서린 물건이었나 보군, 이 지도. 그래, 어떤 게 보였냐?”
“원시적인 풍경의 땅…… 그곳에서 살아가는 토착민처럼 보이는 무리들. 그리고 그들이 숭배하는 제단…….”
다시 방금 본 것을 떠올린 라트리가 호흡을 골랐다.
“그들을 찾아온…… 다른 인간들. 아무래도 마법사들인 것 같습니다. 열 명 정도. 마법사들은 처음엔 그들의 숭배 의식 같은 것에 동참했고요.”
“그다음은?”
“한 마법사가 토착민의 아이 하나를 죽였습니다. 아주 어린 인간이에요, 유리아보다도 어린…… 그것도 산 채로…….”
마저 충격적인 설명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라트리의 젖은 눈망울을 본 엔야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 그건…… 토착민들이 숭배하는 신물인 것 같았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순간, 진은 곧장 떠오르는 일화가 하나 있었다.
“라트리 님, 혹시 그 신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릴 수 있겠습니까?”
“아, 잠깐만.”
펜과 종이를 받아 든 라트리는 금방 신물의 형태를 그렸다. 둥근 원판과 비슷한 형태였다.
“이 원판에서 계속 빛이 흘러나왔는데, 빛이 나오지 않을 땐 평범한 은거울처럼 보였습니다.”
콜론 유적지.
보물 지도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콜론 유적지의 아티팩트, ‘거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