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76)
제 111화
58화. 미트라 대사막의 신기루(5)
진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브라다만테를 사용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검을 썼다면, 스승은 절대 이런 식으로 마력 운용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치밀하고, 방어적인 마법을 구사했겠지.’
그랬다면 발레리아를 상대하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마음먹고 방어적으로 전투에 임하면 지금 몸 상태로는 뚫기 버거웠다.
처음엔 발레리아에 대한 존중으로써 검을 버렸다. 그러나 싸우기로 결정한 다음엔 검을 쓰지 않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단지 진은 발레리아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든 상대를 속이고, 방심하게 만드는. 진은 그것이야말로 스승에게 바치는 진짜 존경이리라 생각했다.
이제 결단이 빛을 볼 시간이었다.
“윽!”
황급히 보호막을 강화시키는 발레리아.
진에게 숨겨둔 수가 정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이런 식의 비수가 아니라, 마법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만큼 진은 정면승부를 표방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 마법의 전부니까, 오직 마법만으로 승부를 하겠다고, 그만큼 당신을 존경한다고 온몸으로 표출해온 것이다.
그 존경심.
자신을 향한 존경심만큼은 거짓이 아닐 거라는 깊은 믿음이 있었기에, 발레리아는 진이 단검을 쏜 순간 헛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진이 영기와 검이라는 패를 꺼낸다면.
불의 사슬에 발목이 잡혔을 때, 테스가 번개창에 당할 때, 역천이 수포로 돌아가 다시 번개창 앞에 맨몸으로 섰을 때…….
그때여야 했건만, 그때 이미 몇 번은 꺼내야 했건만, 지금이라니.
부릅뜬 발레리아의 두 눈에 시커먼 칼날이 비친다. 눈을 껌뻑일 새도 없이, 단검은 이미 보호막에 닿고 있었다.
파창!
엷은 얼음막이 깨지듯, 보호막이 부서졌다. 칼끝이 닿자마자 산산조각이 나서 단검의 궤적을 비틀지도 못했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은소나무지팡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무인이 아닌 마법사, 벼락처럼 날아드는 단검을 쳐낼 만한 신체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대신 번개창이 진의 뒷목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번개창과 단검.
무엇이 먼저 상대에게 닿든, 진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단검은 정확히 발레리아의 목 근처에 조준된 반면, 번개창은 그렇지 않았다.
한 번 빗나가면 다음은 없을 것이다. 번개창을 움직여야 할 발레리아는 이미 숨이 다해가고 있을 테니.
번개창이 진의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푹……!
단검이 박힌 건 쇄골이었다.
그 충격에 일순 발레리아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밀려났다. 쇄골에서 솟구친 시뻘건 피가 아치를 그렸고, 잠시 후.
진과 발레리아, 두 사람이 동시에 모랫바닥으로 나란히 쓰러졌다. 고개를 돌리면 곧장 서로의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은소나무지팡이에 맺힌 마력이 빠르게 꺼졌다. 번개창은 사막의 창백한 하늘을 한참이나 날아가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쓰러진 두 사람이 컥컥 피를 토했다. 어느 쪽도 일어나지는 못했다. 진은 두 다리가 번개창에 관통됐고, 발레리아는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핏덩이를 토하는 것도 버거운 모양새였다.
“……날 너무 믿은 게 당신의 패인입니다. 분명히 말했죠, 당신의 방식으로 싸우겠다고.”
“처음부터, 검을…… 안 쓴 이유가.”
“당신을 잘 아니까요. 이렇게 치명상을 몇 번 각오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속일 수 없었겠지.”
“후, 후…….”
울컥!
발레리아가 고개를 돌려 진을 바라보았다.
“진.”
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신기루라 할지라도, 토나 형제 때와 마찬가지로 진짜로 스승을 베었다는 마음에 가슴이 콱 막혔다.
그러나 더는 나약한 이야기를 해선 안 될 것이다. 발레리아를 쳐다보며 왜 이럴 수밖에 없느냐고, 왜 하필 당신이냐고 물어서도 안 될 것이다.
진은 그저 적을 상대로 싸웠고, 이겼다.
그게 발레리아의 방식이었다.
이내 발레리아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강해졌네, 많이.”
스르르…….
발레리아의 몸이 빛나는 입자로 분해되어 모래바람 속에 쓸려나갔다.
그러자 진의 허벅지에 뚫린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갔다. 찢겨나간 귓불에도 새살이 돋았고, 시커멓게 탄 발목 역시 살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진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가슴 속에선 녹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담담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후우.”
일어선 진이 브라다만테를 찾아 납검했다. 이제 마지막 신기루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 *
세 번째 신기루가 찾아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여전히 지평선 위로 푸르고 날카로운 태양이 걸쳐져 있는, 백야. 놀랍도록 환한 밤하늘 아래, 저 멀리, 한참을 달려가야 닿을 거리에.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그는 한 자루 검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시론 룬칸델, 처음엔 그인 줄 알았다.
그가 아니라면 결코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위압감이 온 사막을 짓밟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모래밭이 검의 숲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함부로 걸음을 떼면 보이지 않는 칼날이 온몸을 유린하리라는 확신이 들 지경.
잠시 걸음을 멈춘 찰나, 바람을 타고 번진 그 기운이 진을 휘감았다.
사내의 위로 뜬 푸른 태양이 그대로 떨어진다 한들, 그를 어쩔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아버지가 아니야…….’
거리가 멀어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진은 얼마 안 가 사내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사후 천년이 흘렀고, 진은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나.
‘테마르 룬칸델.’
룬칸델의 시조, 전설 속의 초대 가주.
그 사람이 분명했다.
‘마지막 시험이로군.’
터무니없이 강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지만, 진은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드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단 일검에 이 사막을 베어버릴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건 시론이 아니라 테마르일 것이라고.
그런 직감에 온몸이 전율로 진동하고 있었다.
‘정녕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건가.’
토나 형제, 발레리아와 달리 테마르는 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순전히 대사막에 숨겨진 솔더렛의 권능을 빌어 잠시 현현한 사자死者다.
그러나 대사막을 압도하고 있는 이 기운은 한 치도 의심할 틈이 없이 참이었다.
진은 이제 그것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수천만 개의 보이지 않는 칼날 속을 맨몸으로 걸어야 했다.
‘발이…….’
떼어지질 않았다.
다가서다간 반드시 죽는다는 확신, 혹은 베일 것 같다는 두려움. 그런 나약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테마르의 기운에 중압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성채에 짓눌린 듯, 몸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기운에 눌려 움직일 수도 없는데.’
당연하게도 테마르는 대답이 없다. 그저 태산처럼 선 채 진을 내려다볼 뿐이다. 이래서는 대사막의 마지막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한참을 못 박힌 듯 가만히 있었다. 기운에 묶인 몸이 움직이지 않아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심해 속에 가라앉은 바위라도 된 기분.
‘가만, 시험?’
내내 고민하던 진이 무언가 떠오른 듯 눈동자를 끔뻑였다.
시험.
내가 지금까지 겪은 것들은 대사막의 시험이다…… 진이 속으로 읊조리며 그간 겪은 신기루를 찬찬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신기루는 토나 형제, 두 번째 신기루는 발레리아.
그것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베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었다. 베겠다는 일념 없이는 그들과 싸울 수도 없었다.’
검으로 무언가를 ‘벨’ 때, 검술의 성취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
베겠다는 마음, 벨 수 있다는 믿음, 베고 지나가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
그것이 없다면 검으로 무언가를 베는 것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루나는 10성 검술을 지니고도 타이뮨을 베지 못했고, 진 역시 각축장의 결승에서 단테를 베지 못했다.
그건 그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상대를 베겠다는 의지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토나 형제를 벨 때 망설였다면 진은 첫 번째 신기루를 지날 수 없었다.
발레리아를 벨 때 망설였다면 두 번째 신기루도 지날 수 없었다.
‘테마르 룬칸델, 당신을 향해 걷는다.’
그런 미적지근한 의지로는 세 번째 시험에 임할 수조차 없었다.
당신을 벤다.
벨 수 있다, 당신이 태양조차 두 쪽 내는 거인이라 할지라도, 나는 당신을 베어야만 한다.
테마르를 베겠다, 주문처럼 그 말을 외자 거짓말처럼 중압이 걷혀나가고 있었다. 돌처럼 굳은 다리가 움직였고 막힌 숨통이 트였다.
뛰어난 무인은 원할 때 언제든지 의지를 일으킬 수 있어야 했다. 물론 진은 뛰어난 무인이므로 그를 베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큭……!”
두 걸음을 떼자마자 무릎이 꺾였다. 차가운 칼날이 쑥 들어온 듯, 소름끼치는 통증까지 이어졌다. 피 한 방울 나지 않건만 공포가 진을 물어뜯고 있었다.
자유자재로 의지를 일으키는 게 뛰어난 무인의 조건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 의지가 꺾이지 않는 게 완성된 무인의 영역이다. 혹은 ‘강자’의 영역이다.
평생 검을 몰랐어도 불굴 그 자체인 사람이 있으며, 평생 검을 쥐었어도 비굴한 인간이 있다.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선 그만한 의지가 필요했다.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완성된 의지가.
‘내게 그런 의지가 없었다면, 다시 태어났어도 난 똑같이 비참했을 거다. 테마르!’
터걱!
악다물어진 입 속에서 어금니가 부러졌다. 일어선 진이 깨진 이빨 조각을 뱉으며 다시 한 걸음을 옮기자, 테마르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쯤 진은 눈을 떠도 앞이 캄캄한 것을 느꼈다. 푸르게 빛나는 백야의 대사막 아래, 어둠 속을 걷는 건 오롯이 진 혼자뿐이었다.
후우웅……!
테마르의 옆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껏 결계 속에 숨어 있던 흑룡, 미샤가 인간으로 변신하며 그의 옆에 선 것이다.
“테마르. 너, 방금…… 미소를 지었어? 테마르, 정신까지 현현한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 다급한 목소리. 테마르가 대답하지 않자, 미샤가 그의 어깨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
그러나 그녀의 손은 허상을 짚은 듯 그대로 테마르의 몸을 통과했다.
털썩,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진 미샤가 한동안 모랫바닥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허탈하고 짧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잘못 본 건가. 아니, 분명 웃었어.’
그녀로서는 천년 만에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본 것이다.
이내 고개를 들어 진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미샤.
테마르를 웃게 만든 그 소년은, 어느새 수십 걸음이나 테마르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이곳에 닿을 것 같아, 그녀는 눈동자에 맺힌 물기를 얼른 털어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