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33)
제 222화
75화. 라니 살로메(3)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마물, 짐승, 혹은 다른 무언가. 어쨌거나 묵직한 발소리엔 상당한 적대감이 묻어났고, 무라칸은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꼬마, 종교쟁이 좀 챙겨.”
무라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두지 않았다.
“알았다. 뭔지는 몰라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
“오냐.”
쿵, 쿵!
라니의 방문 앞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벌컥-!
그리고 무라칸이 먼저 문을 열어젖히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니, 지으려고 했으나…… 그들을 바라본 직후, 일순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발소리의 주인들은 이족보행을 하고 팔다리가 두 개씩 달렸으나 인간이라고도, 마물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힘없고 불행한 인간에 더 가까울 것이다. 또한 예비 기수가 되기 전, 진이 콜론 유적지에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생체 골렘……!?’
불현듯.
무라칸이 수면제로 재웠던 병사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한가로이 경비 근무를 서고 있던 두 사람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
그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었다.
콜론에서 처음 생체 골렘을 마주쳤을 때도 이런 식이었다. 기절시킨 용병들이 난데없이 생체 골렘으로 변화하며 진에게 덤벼든 것이다.
그때 생체 골렘이 된 용병들은 이렇게 말했었다.
제발, 자신을 죽여주라고.
‘지플, 이 미친 새끼들!’
진이 이를 악문 순간.
칼날처럼 예리한 생체 골렘들의 손톱이 무라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콜론 이후 몇 년 동안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인지 빠르고 매서운 일격.
힘을 되찾기 전의 무라칸이었다면 작은 생채기정도는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무라칸에겐 흘러가는 구름만큼이나 느린 속도였다.
샤악!
무라칸이 손을 날처럼 세워 가볍게 휘두르자, 네 개의 팔이 동시에 잘려나갔다.
잘린 팔이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손을 뻗는 무라칸.
콰득!
영기로 검게 물든 그의 두 손이 향한 곳은 생체 골렘들의 단전이었다. 무라칸은 단번에 그들의 핵, ‘심장’이 그곳에 있다는 걸 파악한 것이다.
“칫, 살려줄 수는 없구나.”
무라칸이 가볍게 주먹을 그러쥐자 생체 골렘들의 심장이 터져나갔고,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심장이 깨지자마자 잔뜩 부풀었던 육신이 빠르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검게 변한 거죽만이 남은 그 모습에선 그들이 인간이었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몇 초쯤 말없이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당연하게도,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은 라니였다. 그녀는 잠시간 헛구역질을 하다가,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킨 채 자신의 신분을 떠올리고 있었다.
성왕의 수양딸이고, 교리수호 여명회의 성기사이며, 한 사람의 신민이자 아율라의 딸.
라니가 품속에서 성서를 꺼내 펼치며 그들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아율라시여, 여기 가여운 나의 형제들이 평화를 찾아 당신에게로 향했습니다. 부디 이들의 영혼을 굽어살피사, 억울하고 헛된 죽음을 위로해주시고…….”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샛노란 빛이 시신을 감쌌다.
화르륵…….
빛은 곧 성스러운 아율라의 불꽃이 되어 죽은 이들의 육신을 재로 만들었다. 구토를 억누르고 짧은 추도사를 끝낸 라니는 술기운이 사라진 얼굴.
무라칸이 깨뜨린 심장의 파편들은 사라지지 않고 바닥에 남아있었다.
“하, 생체 골렘이라니.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성국에 어떻게 이딴 게 있을 수 있냐고? 우리가 설마 다른 나라를 잘못 찾아온 건가?”
무라칸이 파편 하나를 집어 들고 살피며 말했다. 진 역시 파편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파편 속에 푸르게 빛나는 오러가 뭉쳐져 있었다.
그래서 소름 돋는 기시감이 일었으나 당장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라니 살로메. 일단 어디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곧 놈들이 사람을 더 보낼 거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라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
휑한 복도를 나서, 라니를 따라 이동한 그들은 동부신전을 벗어나지 않았다.
“놈들이 제가 사라진 걸 알게 된다면, 성국 내엔 어디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차라리 이곳이 가장 안전할 거예요.”
라니가 1층에 중앙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아율라의 거대 석상을 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감히 아율라의 육신을 타고 넘어갔을 거라는 생각은 못할 테니까요. 이 비밀통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기도 하고.”
그녀는 어릴 적부터 숨거나 무언가를 숨기는 일에 능했다. 성왕의 수양딸이 된 이후, 온갖 악질적인 괴롭힘과 부담스러운 시선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레 발전한 능력이었다.
드르륵-!
라니가 있는 힘껏 거대 석상의 목을 돌렸다.
그러자 아율라의 머리가 옆으로 밀려나며 석상 내부의 빈 공간들이 드러났다. 그 속으로 들어가 다시 머리를 제자리로 돌리니 캄캄한 어둠이었다.
석상 내부는 동부신전의 배수로로 향하는 ‘이중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내 몇 분을 걸어 배수로에 닿자, 라니가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하, 하아, 하……!”
그녀는 지금 평생을 쌓아온 자신의 신앙이 전면으로 부정당하는 심정에 짓눌리고 있었다.
아버지, 성왕 미클란은 지플에게 납치되었고 반켈라는 더 이상 ‘성국’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타락했다.
“성국은…… 끝났어요.”
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이로군.’
그녀가 무너진 사실이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었다. 유일한 가족을 잃고, 나라를 잃고, 신앙을 잃어가는 이를 진이 대체 무슨 수로 위로하겠는가.
대신 진은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선택해라, 라니 살로메.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서 복수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여생을 보낼 만한 땅으로 보내주겠다. 평생 안전을 보장하고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도 주도록 하지. 지금 당장 우리와 떠나면 된다.”
이어 진이 라니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신 차리고 당장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 있도록 뭐라도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 적이 얼마나 되는지, 언제부터 성국을 자기들 뜻대로 움켜쥐고 있던 건지, 이 와중 성국 내에 믿을 만한 사람은 있는지 등등.”
“……제가 산텔에서 당신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그걸 빌미로 당신들에게 지금부터 내 아버지를 구해주고, 지플과 함께 싸워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잖습니까.”
“왜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라니.
“나와 성국을 위해서 목숨을 걸겠다고요? 정말로, 룬칸델인 당신이?”
“그래, 난 룬칸델이지. 따라서 지플은 원래 내 적이고, 널 돕겠다는 건 은혜를 갚기 위함도 있지만. 룬칸델로서 성국을 포섭하기 위한 선택이다. 성국을 지플이 지배하게 두는 건 결과적으로 나와 내 가문의 손해라고.”
“어, 음. 꼬마. 맞는 말이긴 한데 좀 차갑지 않냐? 종교쟁이가 지금 얼마나 심란하겠…….”
“그러니까 너도 계산적으로 움직여. 나와 거래를 하자는 말이다. 룬칸델의 후계와, 성왕의 후계로서.”
정적이 흘렀다.
무라칸은 진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진중한 눈빛을 꾸민 채 라니를 바라보았다.
배수로의 물때에서 풍기는 악취가 익숙해질 때쯤, 라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걸 이해해주세요, 진 룬칸델. 좋습니다, 당신의 말에 따르도록 하죠. 룬칸델과 거래하겠어요.”
이 말을 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라니의 내면엔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이 룬칸델 예비 기수는 분명 성국을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자신보다도 진이 훨씬 더 성국의 안녕과 이익을 민감하게 따지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좋아, 내가 취할 것은 성왕을 구출하거나, 성국에서 지플을 몰아낸 뒤 정하도록 하지. 네가 취할 것은 나와 무라칸이라는 지원군이다. 특히 이 녀석은 네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꽤 튼튼해졌으니 마음껏 부려먹어도 된다.”
진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행여 라니가 자포자기해서 떠나자고 했다면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처음부터 알아봐야 했을 것이다.
성국에서 지플을 몰아낸다면 은인도 돕고, 가문으로 돌아가서도 한 번 제대로 생색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제가 파악한 현 상황을 설명해드리죠.”
지플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성국 내의 주요 인사, 단체들을 하나씩 포섭한 상태였다.
그중 가장 먼저 지플의 개가 된 집단이 바로 교리수호 여명회, 라니 살로메가 소속되어있는 성기사단이었다.
“아버지는 그래서 절 교리수호 여명회에 보낸 거예요. 저 말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들 속에 섞여 살펴보라고 하셨죠. 얼마 전까진 아버지도 확신은 없었던 것 같고요.”
“그러면 성왕은 이번 산텔 사건을 네게 보고받은 뒤 확신을 가졌겠군.”
“맞아요. 지플은 제 보고가 끝난 직후 아버지를 납치했습니다. 처음엔 그 가짜로 저까지 속이려고 했었죠. 아버지의 말투, 행동까지 똑같이 따라하는 놈이니까요.”
그러나 성왕의 일부 최측근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성왕은 왼손 검지를 움직이지 못했다. 라니는 성왕의 신성력이 전보다 낮아진 걸 느끼던 와중, 식사를 하다가 가짜가 왼손 검지를 멀쩡히 쓰는 걸 본 것이다.
라니가 그걸 따져 묻자마자 지플은 성왕의 왼손 검지를 잘라 그녀의 방으로 보냈다. 그것도 평소 라니가 믿고 있던 동갑내기의 성기사를 통해서.
라니가 절망에 빠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악취미로군, 변태 같은 자식들.”
“혹시 손가락을 챙겨두었나?”
진이 묻자 라니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확인하자마자 불에 타서 사라졌습니다.”
“불의 인장이로군. 쉬누와 관련된 존재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지. 켈리악 지플, 혹은 카둔의 짓이다.”
즉, 일행의 상대는 지플. 그중에서도 가주 켈리악이었다.
무라칸이 힘을 되찾았다곤 하나 지플 전체와 싸우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
그러나 물리적 전투가 아닌 ‘여론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성왕의 손가락은 사라졌어도 지금 진의 품속엔 생체 골렘의 심장 조각이 남아있었다.
‘생체 골렘, 그리고 변신술. 그게 네놈들의 발목을 옭아맬 것이다.’
진이 심장 조각을 꺼내 보이자 라니가 뜻을 알아챘다.
“그걸 증거로 지플이 성국 병사를 생체 골렘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할 생각인가요?”
“그래.”
“증인은 저 하나뿐입니다.”
“아니, 난 그전에도 지플의 생체 골렘 실험을 훼방한 적이 있거든. 증인도, 그걸 기사화해줄 대大 기자도 한 사람 대기하고 있는 중이지.”
“……뭐라고요?”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지플의 가면을 벗길 만한 확실한 증거가 몇 개는 더 있어야 하고,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려야 한다. 진짜 성왕이 왼손 검지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 누가 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