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50)
제 222화
77화. 악역(8)
지플은 이제 바멀을 죽여 가문의 위신을 바로잡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이미지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너무 많은 악행이 바멀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바멀을 제거하지 못하면, 세계제일가의 위세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이 정체를 공개하지 않으면 칼의 죽음을 빌미삼아 적당히 넘어가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전 곧 정식 기수가 되니, 그때까지만 잘 숨어있으면 문제없습니다. 확실하게 숨을 만한 곳도 하나 있고요.”
진이 카시미르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지플의 가주 놈, 자기 자식한테 좀 너무하는 것 아니냐? 누명 쓰고 죽으라고 보낸 것도 모자라, 네 정체를 알아내겠다고 암살까지 해? 패륜도 이런 패륜이 없군.”
“어쩌면 부바르 가스톤이 변신시킨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아마 진짜 칼이었을 겁니다, 카시미르 경. 가짜였다면, 심문 도중 그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킨젤로 쪽도 곤란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고, 지플과 적대 관계로 돌아선 마당에 그렇게까지 해줄 이유는 없으니까요.”
비정하고 더러운 마법의 정점.
진은 켈리악 지플을 그렇게 규정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수식들이 있다 할지라도 ‘정점’이었다. 아직은 진이 결코 감당할 수 없고, 시론조차 함부로 치지 않는 상대.
그가 곧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고 생각하니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지플이 건드린 땅이 ‘성국 반켈라’가 아니었다면, 진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간 안전한 땅에 숨기도 전에 켈리악에게 붙잡혀 목이 떨어졌을 테니.
한편으로는 기대되기도 했다.
룬칸델의 예비 기수가 켈리악 지플과의 첫 대결에서 ‘판정승’을 거둔다면 세상이 얼마나 들썩일지 말이다.
* * *
지플은 칼의 죽음 이후 성국에 대해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고 있었다.
라니와 충신, 신민들에겐 나라를 망친 진짜 흉수가 지플이란 걸 알면서도 그들을 벌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차일피일 진상 규명이 늦어지는 가운데, 뜨거웠던 국제 언론의 호기심도 슬슬 가라앉고 있었다.
반면 루테로 마법 연방의 펜대들은 연일 지플에 유리한 기사를 쏟아냈다.
물론 휴페스터의 펜대는 지플을 깎아내리는 기사로 대응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성국이 아니어도 매일 지면에서 전쟁을 벌여왔고, 각자의 땅에서 서로의 가문은 원래도 죽일 놈들로 통해온 것이다.
불꽃같던 외부인들의 관심도 빠르게 꺼져가고 있었다.
특히 각국의 귀족들은 이제 라니와 신민들이 있는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괜히 지플의 눈에 띄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지플이 칼 지플을 죽여 형식적인 대가를 치른 것은, 물론 부조리한 일이다.
그러나 거대 세력들은 부조리한 상황을 더 부조리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나약한 피해자들의 목소리 따윈 얼마든지 지워버릴 수 있고, 은근히 그에 동조한 제3자들까지도 처단할 수 있는 힘이.
중립 여론, 세력은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이제 다시 지플의 눈치를 살피는 형세였다.
또한 중립들의 머릿속엔 이런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 성국 사건은 지플의 큰 흑역사가 될 테지만, 어차피 흠 없는 힘은 없다고.
지플은 결국 잠잠해지면 돈과 사람을 풀어 중립 세력들의 주머니와 입을 달달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말이다.
그냥 외면해라, 그러면 너흴 챙겨주마.
지플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늘 그런 식으로 중립을 달래곤 했다.
반면 룬칸델은 늘 공포 정치만 펼쳤다. 두 가문은 성향이 다른 만큼 세계를 주무르는 방식에도 큰 차이가 있었고, 분명 이번 성국 사건에선 지플의 방식이 더 효과적일 터였다.
금을 잔뜩 실은 지플의 범선들이 성국의 영해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건 칼 지플의 죽음과 별개로, ‘칼 지플을 따르던 자들’이 내정 간섭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보상금의 규모는 상상을 한참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받는다면, 성국이 30년은 걱정 없이 예산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 그러나 라니는 당연히 보상금을 거부했고, 충신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를 갈았다.
“그 개자식들은 성국을, 아니. 인간을 대체 무어라 생각한단 말입니까……!”
신민들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분노를 토했다.
지플은 그런 반응에 아랑곳 않고 묵묵히 성국 항구에 금을 내렸다.
마치 누가 가져가도 상관없다는 듯이, 누구든 이 금을 보고 눈알이 돌아가라는 듯이, 누구든 이 금을 훔쳐달라는 듯이.
그 증거로 지플은 덩그러니 놓인 금괴를 지키는 사람을 단 하나도 두지 않았다.
항구 중앙에 성처럼 쌓인 금괴가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반인들, 아니. 일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을 어마어마한 금괴는 욕망이 아니라 위압감을 불러일으킬 지경이었다.
끝내 성국이 그 금괴를 받지 않더라도, 지플은 다시 회수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돈 지랄을 하는군.”
팔짱을 낀 채 금괴를 살피는 진.
그의 눈엔 보였다. 성국이 저 금괴를 받지 않을 경우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
“금에 환장한 황룡들의 은신처에서도 저만한 금괴는 찾기 어렵겠어. 이야, 저거면 한정 춘화집이 대체 몇 권이냐.”
“미친, 뭐라고? 춘화집?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냥……?”
절레절레, 진이 고개를 저었다.
“어림잡아도 30년, 잘 운용하면 성국의 예산을 50년은 책임질 만한 금이야.”
“그럴 것 같군.”
“그 말은 즉, 이걸 받지 않으면 앞으로 50년은 돈에 허덕이게 만들어주겠다는 뜻이지.”
이걸 받고 이번 사건을 자체적으로 덮어주면, 불편한 진실에서 한 번만 눈을 돌려주면 성국을 부유하게 만들어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철저히 성국의 자금줄을 끊어버릴 것이다.
진의 말대로 항구에 놓인 금괴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었다.
“자존심과 복수심을 버리면 부유한 생활을 하게 해준다. 그러나 끝까지 반한다면, 저 금들은 중립 세력에게로 갈 거야. 지플은 성국의 무역을 방해하면서 이 돈을 받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고.”
지금 당장은 지플을 향한 신민들의 민심이 그야말로 밑바닥을 찍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은 라니나 비투라의 충신들만큼 신념이 강하지 않다.
보편적인 삶이란, 결국 노동과 그 결과물을 통해 생존과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연속적인 나날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가 가난해지면 개인 역시 가난해지는 법.
일을 하면 할수록 봉급이 줄어들고, 노동 강도는 점점 강해지는데 삶의 질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과연 그때도 신민들이 오늘 라니의, 충신들의 선택을 옹호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었다.
신민들의 각박해진 삶에 대한 책임은 결국 지독한 경제 보복을 가한 지플이 아니라, 성국의 수뇌부들이 지게 될 터였다.
그런 순간이 빠르게 찾아오도록 정치적으로도 끊임없이 흔들어댈 것이 분명했다.
라니와 충신들은 뾰족한 수를 찾기 어려울 거고, 결국 폭군이 되거나 무능한 지도층으로 기억될 것이다.
“내가 그런 짜증나는 생각들을 하고 싶지 않아서 춘화집을 떠올린 거다.”
“어련하시겠어.”
물론 룬칸델이 있다. 성국이 그 지경이 될 동안, 룬칸델이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플만큼 많은 돈을 뿌려가며 성국을 안정화시킬 것인가.
명분도 부족했다. 휴페스터 내에도 가난한 땅이 한둘이 아닌데, 그들보다 성국을 먼저 챙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자칫 내부 분열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결국 금전 싸움으로 가면 더 피곤해지는 쪽은 룬칸델이었다.
“가자, 이 개짓거리 막으러.”
* * *
1797년 12월 24일.
라니는 성왕과 생체 골렘 피해자들의 진혼제를 시작하기로 했다.
아직 재판조차 끝나지 않았으나 더 이상 진혼제를 늦출 수가 없었다. 성자들이 신성력으로 유지시킨 가짜 성왕의 시신도 결국 부패가 시작되었고, 효시된 비투라의 시신은 아예 썩어 문드러져버렸다.
또한, 중립 언론들이 다 떠나기 전에 진혼제를 마무리하기도 해야 했다.
성왕 시해에 대한 재판이 끝나지 않은 건, 오히려 진에겐 최소한의 안전 장치이기도 하고 말이다.
진혼제는 세 시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다.
당연히 라니가 직접 그들을 위한 기도문을 읊기로 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라니가 단상 위에 오르며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광장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감았다.
“아율라시여, 당신의 가장 성실한 딸, 라니 살로메가 억울하게 죽은 성왕 미클란과 신민들을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부디 제 기도에 응답하사, 당신의 목소리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마지막을 추억할 수 있으며…….”
성국의 진혼제를 호사가들은 곧잘 ‘은하수 기도’라고 부르곤 했다.
진혼을 위해 모인 이들의 신성력이 하나로 묶여 빛을 발하기 때문이었다.
이때만큼은 기도가 공명하며 신성력이 낮은 자들도 특유의 노란 빛깔을 발산할 수 있었다.
모인 이들의 몸을 밝히는 노란빛의 밝기는, 대표로 기도하는 자의 신성력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과 무라칸은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라니 살로메, 그 독성 가득한 땅에서 무라칸을 보호했으니 신성력이 엄청나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광장 전체가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기도문을 읊는 라니는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수천 명에 이르는 신민들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호사가들의 표현 그대로, 꼭 지상에 은하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기자들은 이것이 성국에서 뽑아갈 수 있는 마지막 특종이라고 생각했다. 근래에 성국에서 이토록 대단한 진혼제가 펼쳐진 적은 없는 것이다.
“……하여, 오늘 아율라의 자녀들은 그들이 무사히 당신의 품으로 찾아갈 수 있기를, 부디 이 빛이 당신께 닿아, 그들의 영생에 축복이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라니가 위태롭게 휘청거리며 단상을 붙잡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진혼제.
그러나 사람들은, 라니의 진혼제가 완벽을 넘어 기적을 일으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미 썩어 문드러져 땅속에 묻힌 비투라의 시신이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사실을.
이는 라니조차 모르는 채, 오직 아율라와 죽은 비투라의 영혼만이 알게 될 비밀이었다.
후우, 후우…….
한참 숨을 고르던 라니가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진혼제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 라니 살로메는 신민 여러분께 그간 성국을 위해 희생한 한 외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신민들이 의아한 듯 라니를 올려다보았다.
진혼제가 끝난 후엔 모여준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단상에서 내려서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기자들은 그 순간 냄새를 맡았다.
바멀이 등장하리라는 냄새를.
“친구여,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신민들이 주위를 살피는 사이, 진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가 후드를 벗자, 황금빛으로 염색된 머리칼이 드러났다. 그리고 진은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진 룬칸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