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87)
제 222화
90화. 과거의 조각 – 실더레이(1)
머나먼 과거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것도 이토록 생생하게…….
다시 주위를 둘러보아도 온통 영기로 이루어진 소용돌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전생과 현생을 합쳐 도합 47년, 진은 그간 여러 신비로운 일을 경험했으나 지금처럼 충격적인 순간은 없었다.
천 년 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현실감이 없건만.
솔더렛은 마치 이미 그 시절에 ‘천 년 후’를 예견한 듯 말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누군가 머릿속에 손을 넣어 뇌를 헤집는 것 같아, 하마터면 구역질을 내뱉을 뻔했다.
도저히 제3자의 짓궂은 장난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담는 마법 따윈 들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설령 그런 게 존재한다 한들. 대체 누가 솔더렛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의 장난이나 함정일 리는 없어. 싸움이 끝난 후 내가 미친 것도 아니야. 이건 솔더렛이 내게 남긴 메시지가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 기괴한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즈즈즉, 즉……!
짚단을 짓이기는 것 같은 작은 소음이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집중이 흐트러지자 목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침착해야 한다. 침착하게, 우선은 목소리를 다 들어야 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소용돌이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하는 진.
그러자 다시 천 년 전의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단지 들려오는 것을 넘어서서.
진은 영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온통 공허한 어둠이었다.
아공간 속의 또 다른 아공간.
방금까지 서 있던 풍경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깊은 어둠이 사방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칠흑 속에서, 이상하게도 진은 온전한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땅히 낯설어야 할 이 기묘한 아공간이 진은 왠지 익숙하게 여겨졌다.
전생에 솔더렛과 처음 계약했을 때도 잠시 이런 공간에 빠진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솔더렛과 계약했던 그날과 비슷하군.’
이런 아공간을 겪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음에도, 진은 당시 별달리 괴리감을 느끼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림자의 계약자로서 본능적으로 안정감을 느꼈었다. 발을 딛자마자 이곳은 그림자에 속한 자가 아니면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지금도 똑같았다. 진은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이제 과거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봐, 솔더렛. 왜 대답이 없어. 괜히 찝찝하네?
이봐, 솔더렛. 왜 대답이 없어. 괜히…….
이봐, 솔더렛. 왜 대답이…….
테마르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 앞을 따라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다시 살펴보니 저 멀리 잿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구체가 보였다.
구체에 다다르자 진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천 년 전, 솔더렛과 테마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두 사람은 잿빛 구체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구체 표면이 흐릿해서 모든 걸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사람과 사물의 대략적인 형상은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온통 진한 회색으로 물들어있어 색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마치 빛바래고 삭은 그림처럼.
이를테면 진은 ‘관찰자’로서 천 년 전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탁자에 앉아있는 저자가 테마르인가…… 그래. 대사막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군.’
솔더렛은 인간 모습으로 현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뒷모습만 보였다. 전생에서도 그가 현현한 것을 본 적은 없어 얼굴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진이 잿빛 구체에 바짝 눈을 붙였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풍경이 묘하게 익숙하게 다가왔는데,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폭풍성 중앙 홀이다. 그때도 저런 모습이었나.’
폭풍성 중앙 홀은 최근과 비교해도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글쎄, 난 너도 알다시피 검과 그림자의 신이다. 아즈 밀처럼 확실한 미래는 볼 수 없어.
뭐? 그런 녀석이 어떻게 천 년 후의 계약자를 벌써 정해놨어?
그건 미래와 별개의 문제니까. 신으로서 미리 점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두지.
철컥, 드드득-!
중앙 홀의 대문이 열렸다.
새로 나타난 인물은 다름 아닌 실더레이 룬칸델이었다. 그는 방금까지 진과 싸운 모습 그대로, 갑옷을 입은 채 어깨에 거대한 대검을 걸치고 있었다.
실더레이, 실내에서 꼭 그렇게 위압적인 대검을 들고 다녀야 되겠나?
실더레이는 테마르의 핀잔을 가볍게 무시하며 솔더렛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실더레이 룬칸델, 가문의 수호신을 뵙습니다.
가주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군. 하, 참. 이봐, 실더레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뭘 말입니까? 가주.
솔더렛이 우리가 지플에 승리할지 패배할지 모르겠다잖아. 천 년 후의 계약자까지 정해놨으면서, 당장 코앞의 일은 모르겠다며 잡아떼는 중이라고.
가주.
왜.
불안합니까?
테마르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실더레이와 눈을 맞췄다.
솔더렛의 의견이 궁금해서 그래.
모두가 가주 하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주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파급력을 지녔는지 모릅니까? 행여 다른 식솔들 앞에선 수호신께 그런 실없는 질문 던지지 마십시오.
테마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난 불안해. 실더레이, 너도 그렇잖아?
전 불안하지 않습니다.
거짓말만 느는군. 창성에 오른 나조차 지플과 싸우는 일이 두려운데, 너나 다른 녀석들은 얼마나 두려울까?
룬칸델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강입니다, 가주.
어쨌든, 두려움은 죄가 아니야. 두려운데도 도망치지 않는 건 자랑스러워할 일이고.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렇지, 네 생각은 다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룬칸델에선 내 말이 곧 법이고 진리거든. 요즘 너 말이다, 식솔들이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이면 크게 혼을 낸다며. 그거 아주 잘못된 거다. 사람이 좀 무서울 수도 있지. 유례없이 큰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딱히 위압적이지 않은 말투였다.
그러나 그 부드럽고 장난스러운 테마르의 목소리엔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배어있었다.
너도 두려우니까 식솔들이나 나한테 괜히 더 날카롭게 구는 것 아니냐? 자신을 속이지 마라, 실더레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통제를 해. 그 흉악한 대검을 상시 소지하는 것도 두려움의 또 다른 표출일 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런데 넌 왜 온 거냐?
아, 최근 지플 1마탑에서 심상찮은 기류가 감지되어서 보고하려고 왔습니다.
1마탑이라면, 이야기의 탑이로군.
예, 가주. 1마탑에 갑자기 삼백 이상의 용이 모이고 있어서, 사라 룬칸델이 마검사 다섯을 이끌고 상황을 살피러 갔습니다.
그 정도면 들켜도 문제없이 빠져나올 수 있겠네. 아니지, 말 나온 김에 나도 한 번 가볼까. 용을 삼백 마리나 모아서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하군. 준비해, 실더레이.
예.
솔더렛, 나 금방 다녀올…….
즈즈즉, 지이이익-!
별안간 잿빛 구체가 일그러졌다.
‘뭐지?’
진이 움찔하며 구체를 살폈다.
일그러진 구체 속에 계속 화면이 이어지고는 있었는데,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모습이었다. 말소리 역시 기괴하게 뒤섞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꼭 누군가 의도적으로 책의 일부를 잘라낸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이 특이한 형태의 ‘기록 장치’에 대해 진은 아는 것이 단 하나도 없으니, 달리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손을 댔다간 상황이 더 나빠질지도 몰랐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오.”
한참이 지나 다시 잿빛 구체가 정상으로 돌아온 순간, 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잿빛 구체는 다시금 천 년 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시점이 달라졌다.
잿빛 구체가 보여주는 장면은 이제 솔더렛과 테마르, 실더레이가 있던 폭풍성의 중앙 홀이 아니었다.
테마르가 실더레이와 함께 ‘사라 룬칸델’을 지원하러 가는 장면도 아니었다.
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천 년 전의 어느 치료실이었다. 병상 앞에 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남자도 보였는데 그건 실더레이였다.
한 차례 일그러진 후, 구체 속은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실더레이의 얼굴에 가득한 수염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체가 보여준 두 시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진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가주, 모두가 당신 하나만을 바라보았단 말입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것은 테마르였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으나 그는 잔뜩 야윈 채, 거의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실더레이는 연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원망스러운 듯 병상과 천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모두가 가주를…… 젠장! 솔더렛, 이 개 같은 배신자 새끼! 약속을 지키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단 말이냐! 나와, 모습을 드러내라, 이 빌어먹을……!
실더레이가 울부짖자 바깥에 있던 한 무리의 기사들이 황급히 병실로 들어섰다. 그들은 실더레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괴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실더레이 경! 경마저 이러시면 다른 식솔들은 어찌하란 말씀이십니까. 고정하십시오, 제발!
수호신께서 가주님을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잖습니까.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실더레이 경.
솔더렛이 아니면 누가 가주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냐? 가주가 당할 때, 그 무능한 신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냔 말이다!
수호신께 그 무슨 망발이냐, 실더레이!
뒤늦게 들어온 한 여인이 실더레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실더레이와 마찬가지로 십대기사 중 한 사람이었다.
망발?
가주의 마지막 명을 듣지 못한 것이냐? 절대로 수호신을 원망하지 말고, 수호신과 맺은 약속을 이행하라고.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당부하셨단 말이다.
그러자 실더레이가 기가 막힌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이애나, 넌 가주의 이 모습을 보고도 솔더렛을 믿는단 말이냐……?
내가 믿고, 믿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이것 봐라, 너도 솔더렛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있잖나! 너도 나와 같은 심정이잖나, 다이애나. 내가 널 모르겠어?
내 심정 또한 중요하지 않다. 실더레이, 중요한 건. 그것이…… 가주의 명이라는 사실이다. 가주의 명은 절대적이다, 룬칸델의 법도를 만든 것은 바로 우리란 말이다! 계속 추한 모습을 보인다면, 아무리 너라 할지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하.
가주의 명을 받들어라.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의무이자 희망은 그것 하나뿐이다.
다이애나가 손짓하자 실더레이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이 모두 병상을 떠났다.
그녀는 한참 동안, 어린애처럼 흐느끼는 괴력의 사내를 안아주었다.
지이이익-!
지직……, 프스스…….
또다시 잿빛 구체가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번엔 처음처럼 불안정하게 뒤틀렸다가 다시 돌아올 모양새가 아니었다.
잿빛 구체를 이루고 있던 영기들이 입자로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공간도 영기 입자로 부서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진은 두 겹의 아공간을 빠져나와, 안즈 대평원 바올라이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무라칸과 함께 ‘열쇠’를 발동시킨 바로 그 지점이었다.
한 차례 길게 숨을 고르고,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찰나.
진의 눈앞에 두 개의 낯선 사물이 보였다.
그건 영기로 이루어진 검은 구슬과, 천 년 전 실더레이 룬칸델이 사용했던 대검의 한 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