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783)
제 777화
193화. 무녀(2)
셀 수 없이 많은 켈리악 지플이 테이아 평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모습만 켈리악 지플일 뿐, 그저 혼기로 빚어진 공허한 마물에 불과하다.
진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저들이 모두 진짜 켈리악이라면 지플은 이미 세상을 정복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히, 그냥 막 죽여도 상관없는 놈들이 가득하네.”
진이 라프라로사에서 복귀해 미트라 대사막으로 처음 빠져나온 날과 같았다. 일행은 몰려드는 마물들을 손쉽게 쳐내며 상황을 파악했다.
“발레리아, 기록 마법은 어때?”
“혼기가 짙어서 방해가 커. 사건이 시작된 탑과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고. 좀 더 안쪽으로 진입해야 할 것 같아.”
“전부 다 처리하면서 진입해야겠군. 은신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오울 님. 어쩐지 베라딘은…… 제가 올 줄 알고 여길 그냥 내버려두고 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단지 직감적인 느낌만은 아니었다.
지금 거대 세력들은 세상에 남은 혼돈 오염 구역을 처리하느라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 자신들의 심장인 이야기의 탑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지플이 이토록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궁금한 걸 보게 해줄 테니, 문제는 네가 해결해라. 베라딘이 그런 의도로 이 지역을 방치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혼기가 짙다고는 하나, 지플의 능력으로 해결되지 않을 수준은 아닙니다. 켈리악의 모습을 한 마물들도 전투력이 낮고.”
모두가 처음에 죽은 마물처럼 약한 건 아니었다.
개중에 때때로 상당한 수준의 마법을 구사하는 개체가 있었다. 모두 진짜 켈리악 지플이 쓰던 마법이 약화된 형태였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이야기의 탑 인근을 지플이 방치할 이유는 없다. 오울과 일행은 진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지플도 이곳이 이 지경이 된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군.”
“예, 시리스 님. 가서 기록을 살펴보면 그에 관해서도 무언가 단서가 나올 겁니다.”
[그어어…….]스악-!
일행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물들이 입자로 흩어졌다.
그러나 가만히 지켜보니, 입자는 그냥 증발하는 게 아니라 평원 각지에 불처럼 타오르는 혼기로 수렴했다.
그러고는 검은 불꽃 속에서 다시금 켈리악의 모습으로 태어나 일행을 노렸다. 위협이 되지는 않았으나, 그건 곧 ‘근본적인 정화’가 없이는 이 땅을 다시 쓸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일행은 거침없이 탑을 향해 전진했다.
적지를 허락도 없이 찾아올 수 있던 명분이 더욱 확실해졌기 때문이었다. 현재 테이아 평원은 지플이 ‘또 다른 흉신을 탄생시키려다 실패했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는 모습인 것이다.
진은 이동하는 동안 전장을 유심히 살폈다.
‘30리. 아니, 이 정도 혼기라면 적어도 이야기의 탑 바깥 50리까지도 문제가 생긴 수준이다.’
이곳에서 얼마나 격한 전투가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평원 곳곳엔 용들의 발톱 자국과 온갖 대마법이 펼쳐진 흔적도 가득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아직까지 깨끗한 물을 품고 있는 웅덩이와, 하늘 높이 치솟은 기둥 형태의 바위들이었다.
물과 땅에 관한 최고위 권능을 가진 존재들이 참전했었다는 뜻.
곧장 떠오르는 건 이텔미온과 릭타의 용, 투얀과 피니아였다. 마침 발레리아의 기록창에 첫 번째로 서술된 문장은 그 둘이 참전했다는 사실이었다.
“투얀과 피니아가 참전했으니 베라딘이 직접 나섰다는 의미인데, 얼마 전 카둔이 빠진 연방 통합 회의에 그 녀석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지.”
그간 지플이 자행한 여러 실험과 마신석은 베라딘의 무위를 대폭 상승시켰으나, 진이 보기에 자신과 맞상대가 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탑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이 드러나는 전투의 흔적들은, 진이라 할지라도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규모였다.
전투 당시 사용된 마법이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공간이 있을 정도였다.
어느새 탑에 절반쯤 다다른 시점, 일행은 평원 한가운데 느닷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화염옥을 마주했다.
다소 형태를 잃기는 했으나 그 화염옥은 분명 마황 리올 지플이 유산으로 남긴 마법이었다.
“멸살암천화염옥 마황 2형…….”
화염옥 인근엔 당시 그것과 힘을 겨뤘을 마법들이 펼쳐져 있었다. 청화의 마안을 비롯한 온갖 지플 비전 마법의 흔적들이었다.
마법이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술자가 살아 있다는 뜻이다.
기록 마법은 그 화염옥의 주인을 켈리악 지플이라 알리고 있었다.
일행의 시선이 기록창에 닿았다.
설명을 읽고 다시 살펴보니 켈리악의 모습을 한 마물들이 손을 뻗어 화염옥으로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넣듯이 말이다.
“베라딘에게 대항하고자 펼친 마법이라, 퍼즐이 거의 맞춰지는군. 전투의 중심은 켈리악과 화룡 카둔, 그리고 베라딘이었어.”
“저것들이 켈리악의 원념이라는 대목도 묘하네. 베라딘이 먼저 켈리악을 배신했다는 뜻인가?”
진과 발레리아가 말했다.
“켈리악이 폭주를 했다면 애초에 혼기로 인한 원한이나 증오, 광기에 사로잡힌 상태였을 수도 있지.”
중요한 건 아직 살아 있음이 분명한 켈리악이 어떻게 되었는가다.
“베라딘이 이 화염옥을 없애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둔 이유는 분명한 것 같군. 이걸 통해 켈리악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거야. 따라서 전투 도중 켈리악이 도주했을 가능성이 높아. 켈리악이 폭주를 일으킨 건 분명한데…….”
진은 잠시 말을 멈추며 폭주의 ‘조건’을 생각했다. 진이 알고 있는 폭주의 조건은 총 두 가지였다.
첫째는 혼돈이 더 거대한 혼돈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폭주하는 것. 과거 요나와 아멜라 같은 이들의 폭주가 대표적이다.
둘째는 혼돈의 힘을 다루는 누군가의 종용과 계략을 통한 폭주.
로사가 예언자를 통해 혼돈을 받아들여 흉신이 된 경우가 이에 속했다. 후자라면, 켈리악도 예언자 같은 존재의 조력을 받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어느 쪽이든 자칫하면 세상에 큰 위험이 찾아올 수 있는 문제였다. 일행은 화염옥을 지나쳐 계속 이야기의 탑을 향해 나아갔다. 쉴 새 없이 켈리악의 사념들이 달려들었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이.
마침내 이야기의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플의 마탑 중, 가장 압도적으로 높고 거대한 탑. 그 탑은 상부가 완전히 박살이 났음에도 위압감을 전혀 잃지 않고 있었다.
이제 일행과 탑의 거리는 겨우 1리 남짓.
이 정도 거리라면 이미 탑에 배치된 병력이 마법을 난사해야 했다. 오울의 은신 능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탑은 텅 빈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버려진 듯 보일 지경이었고, 인근엔 켈리악의 사념이 우글거렸다.
그리고 탑 근처에 모인 사념들은 더 이상 일행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예 일행이 근처에 가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모두 탑을 향해 엎드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탑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사람을 향해서.
“사람?”
이미 켈리악의 모습을 한 마물들이 튀어나올 때부터 줄곧 그랬으나, 유독 더 기괴한 풍경이었다. 마물들은 마치 신을 숭배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직 일행이 근처에 도달한 걸 느끼지 못한 듯 탑의 입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저 여자, 기도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히, 어떻게. 죽일까?”
“아뇨, 누님. 알아봐야 할 인물입니다.”
일행은 여인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기운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베일의 권능처럼 금빛 기운이 은은하게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명백히, 태양신의 기운이었다.
엎드린 켈리악의 사념들을 지나쳐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일행이 바로 등 뒤에 올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요나가 손을 대려 하자 입을 열었다.
“손님들께선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제 기도가 끝날 때까지.”
일행은 그 말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요나가 살금살금 가서 손가락으로 등을 찌르려는 걸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최소 10성은 되어야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는 게 지금의 요나였다. 그러나 여인에게선 무인으로서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진은 여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지금껏 알려진 적 없는 인물이니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대신 발레리아가 기록창을 열었다. 바로 옆에서 기록 마법을 펼치는 건 방해가 되지 않는 건지, 여인은 따로 멈춰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마탑과 가까워졌기 때문에 기록창엔 아까보다 수월하게 그날의 기록들이 서술되고 있었다.
기록창을 바라보는 일행의 눈동자가 커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바로는 켈리악이 흉신으로 변모하고자 한 정황이 강했다.
잠시 기록이 끊겼다.
다시 집중하기 시작한 발레리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기록창에 떠올라야 할 한 개의 문장이 서술되지 않으며 애를 먹이고 있었다.
흥미로운 기록들이 조각난 문장으로 나타나는 와중.
여인이 기도를 멈췄다.
그리고 동시에, 발레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기록창과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자가 기도를 끝내자마자, 갑자기 이렇게 쉽게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했으나 발레리아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여인의 기도가, 기록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여인은 뒤돌아 몸을 일으키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죄송합니다, 기도를 끝마치느라 무례한 모습을 보였군요. 저는 태양의 무녀, 산나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