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897)
제 888화
225화. 원치 않은 재회(3)
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뺨에서 한 줄기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과거의 앤이라면, 지금의 진에게 이런 생채기를 내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 혼돈의 힘을 받아들였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
어이가 없어서 일순 말문이 막혔다. 앤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 과거의 그녀와는 다른 느낌의 광기가 풍겨 나왔다.
이를테면, 침착하게 악한 자의 광기였다.
[어, 씨. 저건 또 뭐야?]한창 시케르를 족치던 무라칸도 화들짝 놀라며 진과 앤 쪽을 쳐다보았다.
‘뭐, 뭐야 저 인간 놈……!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앤을 마냥 인질이라고만 인식하던 시케르도 충격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앤에게서 느껴지는 요상한 기운은 분명 마왕인 자신의 마기를 압도적으로 상회하고 있었다.
“많이 놀란 모양이네? 우리 막내.”
이내 진은 침착하게 상황을 이해했다.
‘형제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틸리아스와 미솔이 이런 얕은 짓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비셉스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던 모양이군.’
비셉스는 첩자를 통해 라갈이 형제들을 확보했다는 사실만 파악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근래 가장 예상치 못한 일이긴 해, 앤. 옛날부터 멍청한 줄만 알았는데, 그런 네가 설마 이런 명연기를 펼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
“아, 그래. 옛날엔 참 멍청했지…… 그래서 어린 널 박살 내지 못했어. 나도 후회하는 부분이야. 너처럼 영리했다면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 텐데. 네가 이렇게 잘 되고, 나는 버러지처럼 살다가 지옥으로 갈 일이 없었다, 이 말이야.”
“글쎄, 네가 조금은 참회를 했나 싶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건 알겠군.”
“하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리가 맑은 상태다.”
앤의 왼손으로 새하얀 기운이 모여들며 새로운 검을 형성하고 있었다. 룬칸델 기수였던 시절, 앤은 쌍검을 사용했었다.
‘앤에게 접근했을 때 예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었는데…… 무기를 저런 식으로 형성하기 때문이었나.’
살기는 어떻게든 감출 수 있으나, 진 같은 무인을 상대로 품속에 숨긴 검의 예기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진이 앤의 본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까닭이었다.
‘게다가 저 기운은, 이질적이긴 하나 분명 마력이다.’
진은 세상에서 마법에 가장 정통한 사람 중 하나지만, 검 같은 ‘물건을 만드는’ 마법에 대해선 들어본 바가 없었다.
물론 오러나 마력 등의 기운으로 검의 형태를 형성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나, 앤이 일으킨 마력은 고대 만년철의 질감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마법의 형식을 보아하니 소환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앤은 방금 마력으로 무기를 만든 것이다.
어쩌면 ‘창조’라고 부를 수도 있는 마법, 그건 분명 로키아로부터 받은 능력일 터였다.
“그건 지켜봐야겠지. 그리고 고작 내게 신경 쓰이는 정도의 존재가 되려고 지옥에서 돌아온 건가? 여전히 나를 꺾을 자신이 없다니, 한심하군.”
“아, 이제는 현실이란 걸 좀 직시할 수 있게 됐거든. 내가 강해지긴 했다지만, 나 혼자서 널 어떻게 죽이겠니? 강해졌어도 앤 룬칸델은 앤 룬칸델인데.”
“앞으로 룬칸델이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마라. 가문의 소가주로서 하는 경고니 엄중하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다.”
“하하, 지금 소가주가 됐다고 내 속을 긁어보려는 건가. 그렇다면, 성공이야. 배알이 꼴려서 미치겠구나. 난 그 자리를 꿈조차 꿔본 적이 없거든. 어쨌거나 무서워서 이제 룬칸델이란 이름은 못 쓰겠네. 뭐 괜찮아, 마침 새로운 성을 얻었으니.”
“새로운 성?”
“나를 이렇게 만들어준 분의 성이지. 아 정확히는 만들어주셨다기보다…… 각성한 덕분에 내 진짜 이름을 깨달았다고 해야 옳겠군.”
불현듯, 진은 과거 단테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흉신전을 끝내고 파들러의 유언을 들은 후, 콰울에 대해 나눈 대화였다.
-천재성이 대단한 양반이긴 하지. 다만 조금 걱정이 된다.
-그 역시 흉신처럼 가네스토의 핏줄이기 때문이오?
-그래, 파들러 경의 유언들이 사실이라면, 콰울 박사 역시 언젠가 가네스토의 꼭두각시가 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어쩌면…… 흉신의 자식들인 우리 기수들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일 수도 있어. 우리 역시 가네스토의 피를 조금은 나누어 받았을 테니.
-끔찍한 이야기긴 하군. 하나 그대와 남은 기수들은 왠지 상관이 없을 것 같소. 만일 로키아 가네스토라는 인물이 그대들의 내면에 개입할 수 있었다면, 흉신전이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테니.
“로키아 가네스토로군.”
앤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확신한 듯 말했다. 앤은 숨길 생각이 없던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 똑똑하단 말이야. 그래, 앤 가네스토. 그게 내 새로운 이름이다. 그리고 나는 어긋난 룬칸델들을 죽이는 존재……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이것이, 본래부터 나의 운명이었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스릉…….
진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덕분에, 여러모로 선명해졌다.”
로키아는 십대기사 시절 이미 가문을 배신했다는 의혹이 있었고, 앤은 방금 전까지 예상치 못한 처참한 모습으로 잠시 진을 찝찝하게 했었다.
그러나 이제 로키아의 배신은 확실해졌고 앤은 그 힘을 통해 전보다 더한 악당이 되었다.
‘아마 지옥에 있다던 다른 형제들도 앤과 비슷한 상태가 되었을 테지, 적이 늘었군.’
앤도 자세를 가다듬으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광폭하면서도 강대한 기운에 주변 잔해들이 어그러지며 사방으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에게 쇄도하며 검을 휘둘렀다. 첫 합에 두 사람이 디딘 땅이 내려앉으며 공간이 비틀리는 충격파가 퍼졌다.
“큭, 무겁네. 내 기억 속 루나 언니의 검보다도. 역시, 절대 못 이겨.”
이어지는 진의 검격에 앤은 곧바로 밀리는 형세가 되었다.
앤이 갑작스레 초인급 전투력을 갖게 된 건 사실이나 진에게 비할 바는 결코 아니다. 그저 진과 공방 비슷한 것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뿐.
진은 마치 시험이라도 해보듯 여유롭게 앤을 상대했다. 십여 초 남짓한 사이에 앤의 몸 곳곳엔 얕은 절상이 생기기 시작했고, 진은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앤은 혼돈에 타락하기 전처럼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른 지원군이 올 것 같지도 않고 혼돈에 타락한 때처럼 초재생 능력도 없군. 그런데도 죽음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태도는, 죽어도 부활할 수 있거나…… 확실하게 도망칠 수단이 있기 때문일 테지.’
이 자리에서 앤을 죽일 수는 없다.
진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진이 가진 가장 특수한 힘인 ‘영원화’에 대해서도 앤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진 암흑도래 같은 무라칸의 궁극기에 대해서도 로키아가 정보를 줬을 터였다.
로키아는 이미 모종의 능력으로 지옥에서 고문받던 앤을 빼내고 각성시켰다. 어떤 형태든, 앤의 죽음이나 소멸에 대한 대비 또한 마련해놨을 것이다. 지옥에 간 진의 형제들을 이렇게 만든 건, 분명 자신의 목적 달성에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일 테니까.
‘오늘이 아니더라도, 방법을 찾은 다음 반드시 처리하면 된다. 앤도, 이렇게 변했을 다른 형제들도, 로키아 가네스토도…….’
“크아아악!”
시케르가 내지른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무라칸은 시케르에게 쏟던 힘을 그대로 앤을 향해 내질렀다.
그는 로키아의 배신에 분노하고 있었다.
[앤!]사납게 떨어지는 흑쇄가 앤의 등허리를 내리찍었다. 앤에겐 진을 감당하느라 흑쇄를 제대로 피하거나 막을 여력이 없었다.
“컥!”
진은 자세가 무너지자마자 더 깊이 파고들어 앤의 허리를 베었다. 앤은 쏟아지려는 장기를 손으로 틀어막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애초에 전력을 다하지 않은 진의 검을 받아내는 것도 버거웠으니, 무라칸이 가세한 순간 끝이나 다름이 없었다.
[말하라, 로키아가 대체 무슨 짓을 벌여온 것인지. 테마르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가문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부터 다른 목적이 있던 것이냐.]“아, 미안합니다, 흑룡 무라칸. 내가 내장이 빠지려는 상황이라 그런 걸 답하기가 어렵네.”
앤은 육신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전혀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그 모습에 무라칸도 앤이 오늘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머리가 차게 식었다.
[동료들을 배신하고, 천년 만에 본색을 드러내며 처음 보낸 인물이 고작 너 따위라니. 로키아가 어떤 흉계를 품고 있든 상황이 처참한 모양이구나. 쯧.]무라칸이 지상으로 착지하며 말했다.
앤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다리를 겨우 지탱해 진과 무라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핏물을 토해내느라 허리가 자꾸 꺾였다.
“후우, 훅……! 말씀이 너무하시네, 천 년 전 아무것도 모른 채 뒤지신 분이. 하긴…… 네놈들이 어떻게 가네스토의 이상을 알겠느냐. 그저 생존과 번영에만 혈안이 된 놈들이!”
순간적으로 앤의 목소리가 변했다. 케이탐의 그림 속에서 들은 적 있는, 로키아의 목소리가 겹쳐진 것 같았다.
앤은 씩씩 거친 숨을 토하더니, 잠시 후 다시 차분해진 얼굴로 진을 쳐다보았다.
“다시 너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땐, 수준이 맞는 놈을 골라 상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지금처럼 허망하게 육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너는, 역시 오라버니의 몫이다. 오라버니는 나보다 훨씬 진한 피와 의지를 이어받았거든. 기대해도 괜찮을 거다, 막내.”
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스스로 말한 걸 벌써 잊었나. 강해졌어도 앤은 앤이고, 조슈아는 조슈아다. 같잖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로키아 가네스토에게 전해라. 나는 네 약점을 알고 있으니 더 설치다간 지금보다 처량한 신세가 될 거라고.”
“후후, 너무 얕은 거짓말을 하네. 어울리지 않게.”
“얼마 전 흑해에서 원정대원들 일부가 복귀를 한 사실은 알고 있을 테지. 아버지께서 그들을 통해 내게 전하신 말씀이 있었다. 가네스토에 대해서지. 로키아에게 보고하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다.”
그 말에 처음으로 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라칸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극히 미세한 떨림이었으나 진은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육체가 붕괴되며 일어난 안구 경련일 수도 있다. 실제로 대화하는 동안 종종 그런 현상이 있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진은 시론과 흑해를 운운하자마자 하필 또 안구 경련이 왔다는 것보다, 앤이 미약하게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는 쪽으로 판단이 기울었다.
‘하여간, 싸움뿐만이 아니라 말로도 이길 수가 없군. 진짜로 흑해와 가네스토의 비사를 알 리는 없을 텐데…….’
앤은 속으로 그렇게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만 헤어질 시간이야. 다음엔 마주치지 말자고, 막내. 내가 잘 피해서 돌아다니도록 하지. 그리고, 형제들에게 안부 전해줘. 이적할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 환영이라고도. 우린 결국 다 한 배에서 태어났으니까.”
프스스스…….
말을 끝낸 앤의 육신이 흰 입자로 빠르게 흩어졌다. 그 또한 이질적인 마력이었고, 이내 마력은 사방으로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로키아 이…… 후우. 야, 꼬마. 그런데 로키아의 약점 운운한 건 대체 뭔 소리냐?”
“당연히 방금 지어낸 헛소리지. 혹시 반응이 있을까 싶어서 앤을 떠본 거야. 흑해 최심부는 지하세계보다도 더 미지의 영역이고, 그곳을 탐사하고 있는 건 아버지시니 가네스토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해도 그럴싸하잖아. 그리고 앤은 숨겼다고 생각할 테지만, 티가 났어. ”
“티가 났다고? 난 몰랐는데.”
“아무래도 너보단 내가 조금 더 예리하지? 허락도 없이 아버지를 판 건 조금 마음에 걸리네. 어쨌거나 앤의 반응을 미루어보면, 로키아에겐 뭔가 약점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흑해와 관련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