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58)
제 999화
236화. 멸망의 불, 잔인한 과거(2)
“오랜만이오, 켈리악 지플. 하지만 그다지 반갑지는 않군. 순리대로 시체였을 경을 만났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전장을 살폈다.
영기와 화염, 두 기운이 독마성의 하늘을 나누고 있었다. 다만 화염이 훨씬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건 무라칸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까닭이었다.
‘……무라칸은 켈리악과 싸우다가 빠진 모양이군. 기운을 자세히 읽으니 전장 바깥쪽에서 무라칸의 영기가 느껴진다.’
지금 하늘에 남은 영기는 암흑도래가 펼쳐진 흔적이었다. 진의 예상대로 무라칸은 베라딘을 지키고, 베티를 찾기 위해 켈리악을 묶어둔 후 잠시 전장을 이탈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무라칸은 곧 돌아올 것이다. 녀석도 아마 지금쯤 내 기운을 읽었겠지.’
다소 지친 상태라고는 하나 진과 더불어 엘로나 지플이 있고, 곧 무라칸이 돌아온다.
온전하진 않더라도 창성급 전력이 셋이나 되는 것이다. 제아무리 켈리악이 쉬누와 융합해 대단한 권능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셋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켈리악이 제대로 싸워줄 때의 이야기지만…….’
켈리악은 담담한 얼굴로 진과 엘로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은 그가 아무런 대비 없이 자신들을 맞이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지토와 인공태양의 잔기가 켈리악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켈리악은 그 힘들을 자신에게 직접 귀속시키지 않고 머리 위에 구체 형태로 모으고 있었다.
어차피 힘을 더 얻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는 최상위 신의 권능을 얻었으니, 지토와 인공태양의 잔기를 흡수해봤자 몸속에 불순물만 늘어나는 셈이었다.
켈리악은 지토와 인공태양의 힘을 다른 곳에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진은, 그 의도를 알 것 같아서 기운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순리대로라……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참 재미있군.”
“재미있을 것 있소?”
“44년.”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뜬금없는 대답이다. 그러나 진은 켈리악이 44년이란 말을 언급하자마자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슈아가 타이뮨 마리우스를 시켜 네놈에게 저주를 사주했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무려 44년이 걸렸지.
-제바알, 카아악. 안, 됏…….
-내게는 지금의 너처럼 애원할 기회조차 없었어. 키다드, 그때의 나는 고작 한 살이었다. 네 하찮은 80년이 감히 내 44년의 보상이 될 수는 없지만, 역류의 서는 잘 써주마.
키다드 홀을 죽이며 했던 말.
진은 반응하지 않고 켈리악을 쳐다보았다.
“키다드에게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줄곧 궁금했다네. 자네는 왜 44년이라고 말했을까…… 결국 내가 다다른 결론은 이것이었지. 자네는 한 번 미래를 경험한 인간이 아닐까?”
“지옥. 진마계의 존재를 알게 된 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 아마도 지옥엔 그간 내가 죽인 악인들이 있을 것이라고. 키다드 홀, 그 흉칙한 벌레를 손에 넣어 앤 룬칸델처럼 부활시킨 모양이군.”
“내 질문에 대답해주게. 무척 궁금했거든.”
“키다드가 무어라 지껄였든 내 알 바는 아닌 것 같소. 그래도 대답을 해주자면, 뒤지기 전에 감각이 무뎌져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가…… 아무튼, 내가 보기에 이 세상에 자네보다 순리를 벗어난 존재는 없어. 자네는 솔더렛과 계약해 그 힘을 사용하지만 솔더렛은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지. 이 사실만으로도 자네는 기형이란 말일세.”
“솔더렛이 이 세상에 없다는 건, 쉬누의 감각을 얻어 알게 된 사실인가?”
“그렇긴 하나, 꼭 그 덕분만은 아닐세. 우리 지플은 마신석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시간 솔더렛을 추적했지. 하지만 자네가 계약자가 된 이후부터, 솔더렛은 한 번도 실체를 드러낸 적이 없으니 말이야. 아마도, 그는 나처럼 자네와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자네를 위해 무언가 대가를 치렀거나.”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그보다 켈리악, 당신은 지금 꽤 짜증이 나는 상황일 것 같군. 베라딘을 유인해서 죽이려 한 것 같은데, 내 수호룡에게 가로막혀 실패했잖소?”
진이 엘로나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엘로나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창성의 감각으로 저 멀리 떨어진 베라딘의 기운을 읽은 것이다. 진이 장담한 대로 베라딘은 정말 살아있었다.
“묘한 일이지. 나는 저기 있는 비셉스들을 찾기 위해 무라칸을 보냈는데, 그는 우연히 베라딘을 구했고 비셉스들은 지금 이 자리에 있소. 마치 세상이 나를 돕고 있는 것 같군.”
세상이 나를 돕는 것 같다.
진이 별 생각 없이 한 말이 켈리악의 속을 긁었다. 진이 가진 ‘존재의 힘’은 창성의 무력보다도 훨씬 꺼림칙한 요소였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가 말해주겠소, 켈리악. 당신은 아마 지토와 인공태양의 힘을 이용해서 진마계를 완전히 파멸시킬 계획이겠지.”
“호오. 하여간 그 비상한 머리는 알아줘야겠군. 그렇다네, 나는 자네가 지토를 벤 덕에 막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여긴 내게 필요치 않고, 마녀도 딱히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파괴하는 게 여러모로 낫다네. 지토에게 세뇌되어 추악한 일들을 저지른 마족들에게도, 차라리 그게 더 나은 결말이지.”
피식, 진이 가소로운 듯 웃음을 뱉었다.
“지금 우리와 싸울 자신은 없고, 그래서 겨우 선택한 게 지옥 전체를 파괴해서 도망칠 시간을 버는 것이라니. 온 세상이 비웃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오. 심지어, 네놈의 계획은 이번에도 실패할 것이다. 켈리악 지플.”
진이 시그문드를 뽑자 황금빛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무라칸이 남긴 영기도 그 힘에 공명하며 금빛으로 물들었다.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쉬누의 힘을 얻으니 정말로 신이 된 것 같은가, 켈리악? 지토와 인공태양의 잔기를 터뜨려봐라. 우린 그 폭발을 막아내고, 나아가 네놈의 목까지 떨굴 것이니.”
엘로나도 지팡이를 치켜들며 마력을 증폭시켰다. 전장 곳곳에 거대한 마력의 입방체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켈리악 지플, 나는 천 년 전 지플의 최고 마법사이자 현 지플의 원로장으로서. 당신이 감히 가주를 해하려 한 죄를 엄중히 벌할 것입니다.”
엘로나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두 사람의 뒤쪽 하늘이 어둡게 물들고 있었다.
무라칸의 두 쌍 날개에서 번지는 영기였다.
[꼬마! 어, 옆에는 엘로나 지플인데? 뭐야, 우리 편이 된 건가?]무라칸 역시 내내 아군을 보호하며 켈리악과 싸우느라 많은 힘을 소진했으나, 그 위용에 흠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맞아. 우리 편이 되셨다. 왔군, 무라칸.”
[오, 어떻게 된 건지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애들은 다 무사하다. 라갈인가 뭔가 하는 짜증 나는 새끼가 남긴 했는데, 무불멸이가 있으니 괜찮아. 황금빛 기운이 잠시 지옥 전체에 퍼졌을 때 꼬마 네놈이 나 없이 지토를 잘 조졌다고 확신은 했다. 엘로나가 도와주기도 했겠군.]“오랜만이군요, 무라칸. 그대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그래, 그래. 나도 궁금한 거 엄청 많다, 엘로나. 우선은 켈리악을 족쳐야겠지만 말이지.]무라칸도 단번에 상황을 알아보았다. 켈리악이 지토와 인공태양의 잔기를 이용해 시간을 벌어 도망치리라는 것을 말이다.
‘흠. 저것들이 한꺼번에 터지면 빡세긴 하겠네. 하지만 나와 엘로나가 폭발이 진마계 바깥으로 퍼지지 못하도록 막고, 꼬마가 진입해서 켈리악을 붙잡으면. 그럭저럭 그림 나오겠는데.’
진과 엘로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은 가장 지쳤다고는 하나 여전히 근접전에선 셋 중 가장 강하고, 대량의 폭발을 감당하기엔 무라칸과 엘로나가 훨씬 상성이 좋았다.
“이런, 꺾어버리기 미안할 정도로 기세등등한 모습들이군…….”
켈리악이 말했다.
진 일행은 먼저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지토와 인공태양의 잔기를 폭발시킨 다음에 움직여야 포지션이 어긋나지 않을 터였다.
이내 켈리악이 엘로나와 눈을 맞췄다.
“엘로나 지플. 지플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하다고 알려진 마법사. 천 년 전에는 최고 마법사였고, 지금은 원로장을 맡고 있으나, 룬칸델의 편에 서기로 했다라…… 길 잃은 선조께는 참 다양한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진실을 깨닫게 되었을 뿐이라고 해두죠.”
“진실? 또 재미있는 말을 듣게 되는군요. 어떤 진실을 깨달았습니까?”
“나는 그저 지플과, 지플이 행할 파괴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지금 제 아들을 구하려고 지옥을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요. 베라딘은 지금 지플의 가주이니, 선조께선 지플을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이 됩니다.”
“가주는, 아니. 베라딘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앞으로 가주가 아니게 되더라도, 지플을 버리게 되더라도 나는 가주를 위해 언제나 목숨을 바칠 겁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죠.”
“사람, 엘로나 경. 경께선 마치 자신이 사람인 듯 얘기를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하나 더 묻겠습니다. 경은, 경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기억합니까?”
엘로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군요. 그렇다면 당신이 어디서 길러졌는지는? 당신이 자아를 갖게 된 후 최초의 기억이 무엇인지는? 하다못해, 당신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는 기억합니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문제였다. 의식의 한 부분이 막힌 듯, 엘로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것들을 기억한 적이 없었다.
엘로나가 띄운 마력의 입방체들이 불안정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지 못하는데 진실을 깨달았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으니, 저로서는 당신이 참 안타깝군요. 엘로나 경, 지금부터 제가 진짜 진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켈리악이 말을 끝맺으며 하늘에 모아둔 지토와 인공태양의 잔기를 폭발시켰다.
진은 즉시 켈리악과 거리를 좁히려는 태세를 취했고, 무라칸은 암흑도래를 펼치며 폭발이 번지는 걸 막으려 했다.
그러나 함께 움직여야 할 엘로나는 못처럼 제자리에 박힌 모습이었다. 그녀가 빠지면 진은 켈리악에게 파고들 수 없다.
[엘로나, 뭐하냐!]엘로나에겐 무라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잔기가 폭발하며 순식간에 일행을 뒤덮은 와중, 엘로나는 홀린 듯이 켈리악이 꺼낸 한 물건을 바라보았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렬한 끌림이 엘로나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
“이 월계관처럼 생긴 빛나는 물건은,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혹은, 당신의 원형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