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59)
제 999화
236화. 멸망의 불, 잔인한 과거(3)
폭발은 순식간에 진과 무라칸의 모습을 가렸다.
진과 무라칸은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엘로나가 멈춘 지금, 두 사람이 무리하게 켈리악에게 파고든다는 건 곧 진마계의 멸망을 뜻했다.
진마계가 인세를 침공한 건 사실이나, 그건 켈리악의 세뇌로 인한 거대한 비극이었다.
지토가 없는 진마계는 인세처럼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수십억 마족들의 터전이며, 지하에 존재하는 한 세계였다.
그런 진마계가 사라지는 걸 방관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폭발을 제대로 막지 않으면 전장 바깥에 있을 아군들까지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터였다.
발레리아 쪽은 물론이고, 이제 막 지옥에 도착했을 인세의 함대들도 모조리 파괴될 것이다.
지금 켈리악이 터뜨린 잔기는 적어도 인류의 역사 동안엔 유례가 없는 대폭발이었다. 또한 그건 단순한 폭발이 아니라, 그의 권능으로 변형된 화염신의 마법이기도 했다.
멸망의 불, 근원석을 만들기 이전, 쉬누가 다른 신들을 압도하기 위해 오랜 세월 집착한 궁극의 권능.
그 불이 지금 진과 무라칸을 불사르려 하고 있었다. 오직 켈리악과 엘로나 사이의 작은 공간만이 불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안, 안 돼…….”
켈리악이 서서히 엘로나 쪽으로 하강했다. 엘로나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질을 쳤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엘로나의 머리칼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백발, 순혈 지플을 상징하는 긴 머리칼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가슴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격정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치기도 했다. 날카로운 단편처럼 솟구치는 천 년 전의 기억들, 어둠 속의 끔찍한 실험, 빛을 갈망하던 나날, 그리고 저 월계관을 어서 머리에 쓰고 싶은 강렬한 욕망.
그런 것들이 엘로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방금까지 진을 만나 떠올린 옛 시절과 깨달은 존재 의의는, 저 월계관을 향한 본능엔 비할 수도 없이 초라한 감정이었다.
켈리악이 엘로나의 앞에 섰다.
엘로나는 그래도 어떻게든 본능에 저항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마력을 일으켜 켈리악을 공격하려 했고, 두 다리를 움직여 그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마력은 꺼진 동력원처럼 반응이 없으며 그녀는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멍한 눈, 느리고 답답한 호흡, 엘로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딱하군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삶이란. 애써 얻은 진실은 모두 거짓이며, 자신을 찾기 위해 부여한 수많은 의미 또한 전부 허황한 집착에 불과하니…… 당신은 불행한 존재입니다, 엘로나.”
듣지 마라, 켈리악이 무슨 말을 하든 듣지 마!
간혹, 무라칸의 먼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진은 이미 멸망의 불을 틀어막느라 두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였고, 초가 지날 때마다 계속 밀려나는 중이었다.
엘로나는 그 목소리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동굴 속에 몰아치는 바람의 메아리를 듣는 듯 몽롱할 뿐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켈리악은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이 진마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진과 무라칸에 의해 이 수여식이 방해될 일은 없다. 창성이 둘이나 있으니 어쩌면 진마계의 완벽한 멸망을 저지하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엘로나까지 구할 수는 없었다.
“저들은 당신을 돕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당신을 돕는 일일까요? 엘로나, 당신의 삶이 불행하고, 파괴와 살육에 회의를 느끼고, 늘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건…… 자신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지. 그리고 저들은 그걸 알려줄 수 없습니다.”
켈리악이 월계관을 엘로나의 머리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이제 그녀의 머리칼은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잠시 자신을 직시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좋겠군요.”
이내 월계관이 엘로나의 머리에 닿았다.
월계관은 마치 뱀처럼 움직이며 엘로나의 머리로 감겨들었다. 그러곤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올라 회전하기 시작했다.
엘로나는 그때 처음으로 다시 눈을 떴다.
눈동자가 부서지고 있었다. 조각난 눈동자의 파편이 백목을 가득 채워 마치 작은 은하수처럼 보였다.
동시에 엘로나는, 자신의 기억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 * *
엘로나 지플, 혹은 그녀의 원형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를 인간이 발견한 건 약 2500년 전이다.
그때는 아직 룬칸델이라는 이름이 존재하기 이전이고, 유달리 신들의 사랑을 받는 지플의 마법사들이 오랜 시간 홀로 세상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
레지날드 지플.
지플의 4대 가주인 그는 루테로 연방의 한 왕국 지하에 감춰진 유적지를 발견하게 된다.
온통 생명의 녹색 빛으로 감도는 땅, 완전마력체에 한해서는 그저 그 땅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질병과 부상도 회복시켜주는 신비한 땅.
그곳에서는 배고픔을 느낄 수도 없고, 아무리 많은 힘을 사용해도 피로감이 엄습하지 않는다.
레지날드는 그 땅의 힘을 느끼자마자 그곳을 지플의 ‘성지’로 지정했다. 그리고 오직 가주와 최측근들만이 성지에 입장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비밀은 오늘날까지 지켜지는 중이다.
“이곳은 기존의 신들이 빚은 땅이 아니다, 비첼린.”
레지날드의 말에 비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첼린은 당시 지플의 부가주로, 멜자이어의 계약자였다.
“가주의 말씀대로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신도 이런 완벽한 땅을 만들 수는 없을 겁니다. 저와 계약한 멜자이어 님은 물론이고, 우리가 주신으로 모시는 쉬누께서도 결코.”
“신들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우린 이상하리만치 신들의 사랑을 받아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지플이 신과 계약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한다는 건 곧 신들의 노예라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는 건 레지날드의 오랜 염원이었다.
그가 세상의 비밀을 찾고자 온갖 유적과 과거의 산물에 집착하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따라서 레지날드가 왕국 지하에서 성지를 발견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며, 당시 지플이 가장 많은 인력과 시간을 투자해 얻은 과실이었다.
성지에선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신들은 이 땅에 개입할 수 없다.
또한 신들은 성지와 관련한 이야기를 한 적도 없으며, 성지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인 경우가 많았다.
그 사실이 레지날드에겐 운명처럼 다가왔다. 이 알 수 없는 유적을 잘 활용하면, 지플은 신의 사랑을 받는 가문이 아니라 신 그 자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에 이곳은, 태초에 있던 어떤 거대한 존재의 흔적이다. 신들의 신, 세상을 창조한 자. 그런 존재의 흔적일 것이 분명해.”
“창조자의 땅이라…….”
“이 땅을 직접 보지 못한 자들이 듣는다면 황당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너와 나는 지금도 느낄 수 있지 않느냐, 비첼린. 이 땅은 보다 초월적인 존재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맞습니다, 오라버니.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린 이 땅을 연구하여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가 될 것이다. 창조자께서 우릴 이끄신 것이야, 우리야말로 신들을 넘어서서 세상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레지날드와 비첼린의 대화.
엘로나가 그들의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녀는, 당시 성지 가운데에 우뚝 선 나무였다.
당시의 그녀는 인간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기억은 할 수 있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긴 고독 속에 있었으니, 뜻을 몰라도 한없이 달콤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것이 엘로나가 처음으로 가진 욕망이었다. 그녀는 매일 레지날드와 비첼린이 성지에 찾아와주기를 기다렸고, 그때부터 기다림은 고통으로 변모했다.
천 년도, 만 년도 넘는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온 그녀에게 하루, 이틀이 힘겨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이것 좀 보십시오, 성수가 반으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성수 속에서 무언가가…… 사, 사람!?”
엘로나에겐 갈망을 현실로 바꿀 힘이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나무보다 활동에 적합한 형태를 찾았고, 그 형태란 매일 기다린 레지날드와 비첼린처럼 사람을 닮아 있었다.
“차, 창조자시여!”
처음에 나무를 빠져나온 그녀는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엘로나 지플의 모습이었다. 더 많은 말을 조잘거린 비첼린과 거의 유사했으나, 머리칼에선 태양처럼 빛이 났고 눈동자 속에는 작은 은하수가 흘렀다.
“창조자시여!”
레지날드와 비첼린은 넙죽 엎드려 엘로나에게 예를 표했다. 그때 엘로나는, 자신이 꿈꿔온 것과 실제로 마주한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나무 바깥으로 나와 처음으로 느낀 인간의 숨결이란.
그들에게서 나는 냄새, 그들의 모습, 그들이 입고 있는 옷, 그들의 태도, 그들의 표정이란, 그녀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우글거리는 통 속의 벌레들을 마주한 듯 엘로나는 몸서리를 쳤다. 엎드린 남매는 그때 엘로나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우…… 으.”
단지 거부감을 드러내며 손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이다.
그러자 성지의 마력이 모여들며 순식간에 날카로운 바람을 형성했고, 비첼린은 흔적도 없이 쓸려서 사라지고 말았다.
비첼린은 가장 먼저 엘로나의 변화를 알아차렸으나, 그녀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비, 비첼린!”
엘로나는 그토록 달콤했던 목소리의 주인이 죽은 것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어서 이 더러운 존재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한 번 더러운 것을 보았으니,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때부터 엘로나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세상의 불쾌한 것들을 모두 제거하는 일.
“이…… 이 무슨. 창조자시여, 우리는 당신을 섬기기로 했나이다! 어째서 이런 짓을!”
엘로나는 대답하지 않고 또 손을 휘저어 레지날드를 죽이려 했다.
다만 레지날드는 비첼린과 달리 황망한 와중에도 방어 태세를 취했고, 당시 그는 인세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었다.
그는 기술과 전투 경험으로 엘로나의 단순하고 무지막지한 공격을 감당하며 자리를 피했다.
성지를 빠져나와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레지날드는 한 팔과 가주의 지팡이를 잃은 채였다. 성지가 발견된 왕국은 멸망했다.
그것이, 엘로나와 지플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