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a Munchkin RAW novel - Chapter (127)
먼치킨 길들이기 127화
키네미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에서 경보등이 매섭게 울렸다.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느낌이다. 오른손은 아직 에이얀에게 잡혀 있는 채였다. 긴장감으로 인해 잡힌 손끝이 저려 왔다.
거절의 말은 분명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같이 있고 싶어.’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심정 때문인지, 거절할 만한 수백 가지 이유 속에서 거절하지 않아도 될 몇 가지 이유가 동시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래도 안 돼. 아직은 이르지. 그럼. 벌써 둘 다 성인이긴 해도.’
키네미아가 입을 열었다.
일전부터 깨달았지만, 머리와 따로 노는 마음은 종종 멍청한 대답을 토해 내게 만들었다.
“……좋아.”
이렇게.
그리고 키네미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에 도리어 얼어붙은 쪽은 에이얀이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처음부터 키네미아가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한 말이었으니까.
남자로 의식하고 저어하는 얼굴을 보면, ‘내심 아직 나를 친구로 여기는 건 아닐까.’ 불안이 피어오르는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서.
“…….”
에이얀이 입을 벙긋거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키네미아는 사냥당하기 직전의 초식 동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심장 소리가 귓가로 와닿았다.
차라리 네가 어떤 얼굴인지 읽지 않았다면 고민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 괜찮느냐 되물으면 키네미아는 금세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상황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무마될 터.
그러나 에이얀은 되묻거나 멈추는 대신, 키네미아의 손을 잡은 채로 시트를 짚었다. 단단하게 힘줄이 올라온 팔이 키네미아의 얼굴 옆에 섰다.
‘나는 빌어먹을 나쁜 놈이라-’
긴장한 듯 새파란 눈이 떨리자 아찔한 감각이 뇌리를 자극했다.
‘-지금 멈추고 싶지 않아.’
그는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내렸다. 깍지를 쥔 키네미아의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이얀이 긴장한 키네미아의 손을 엄지로 느릿하게 쓸었다.
이내 그가 목덜미에 입을 맞추자, 키네미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곧이어 입술이 여린 살갗을 빨아들였고 잔뜩 억누른 듯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에 새카만 눈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사락,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가슴께의 리본을 잡아 풀려는 때였다.
돌연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키네미아가 에이얀의 손을 턱 잡은 것이다.
“……겠어.”
“……?”
“안 되겠어. 지금은 낮이라 너무 밝아……!”
그녀가 커다란 창문 너머로 새어드는 노란 태양빛을 가리켰다. 그와 함께 에이얀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거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이 일상이었던 터라 방에는 커튼도 달려 있지 않았다. 때문에 오늘 따라 너무 밝은 태양이 방 안을 환히 비추는 중이었다.
에이얀이 시간을 돌리고 싶은 지난날을 되새기며 창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말고……”
다음에, 잦아드는 목소리가 변명을 주워섬겼다.
순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어?”
“너한테 나쁜 놈은 못 되겠다 싶어서.”
“응?”
“내가 미안.”
에이얀이 키네미아의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커튼이 없어도 태양빛을 가리는 일쯤이야 쉽지만.
커튼도 없는 휑한 방을 돌아보고, 제게 휩쓸렸던 겁에 질린 키네미아를 응시했다.
어쩌면 평생 기억에 남게 될 시간을 얼렁뚱땅 조잡한 곳에서 할 뻔했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그사이 키네미아가 긴장을 푼 듯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하자, 안도감이 차올랐다.
애석하게도 몸은 따라 주지 않았지만.
마른세수를 한 에이얀이 등을 보인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에이얀?”
키네미아가 벌떡 일어나니 에이얀이 다시 부드럽게 어깨를 밀어 눕혔다.
“……?!”
밀려서 다시 침대에 누운 그녀가 데구르륵 눈을 굴렸다.
“미아, 나 잠시만 자리 좀 비울-”
도저히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하려는데, 키네미아의 쭈뼛거리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
“갑자기? 어디 가려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동안, 키네미아는 무슨 생각으로 튀었던 건지 조심스레 말했다.
“방금은 있잖아, 그냥…… 아직 준비가 안 돼서지…… 네가 싫어서는 아니야.”
순간 말문이 막힌 에이얀이 ‘어?’ 하고 얼빠진 물음을 되돌렸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한 게, 제 거절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잠깐.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이 정도에 불쾌해하는 쓰레기 같아?”
“……그게, 상황이 좀……”
그렇게 됐잖아. 키네미아가 눈매를 좁혔다.
그러자 숨을 깊게 내쉰 그가 난감한 기색으로 웃으며 키네미아의 옆에 누웠다. 바다처럼 새파란 눈이 깜빡였다. 그는 다정히 손을 잡고 몸을 빙글 돌려 키네미아의 등을 끌어안았다.
“……!”
제 등과 에이얀의 가슴이 맞닿자 왜 그가 자리를 비우려고 했는지 알아차린 키네미아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도망치려 버둥거리는 키네미아를 품 안으로 깊게 끌어안으며 그가 심술궂게 웃었다.
“그렇게 움직이면 더 곤란해지는데, 괜찮겠어?”
안 괜찮아! 키네미아가 얼음처럼 굳어 삐걱삐걱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애달파하는 목소리를 꾸며 냈다.
“날 그런 쓰레기로 생각할 줄 몰랐어. 서운해.”
“……미안.”
그런데 정말, 이럴 줄은 몰랐어. 키네미아가 자괴감에 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으니, 자리를 비우겠다는 게 나름 알아서 처리하기 위함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군다나.
‘……이런 크기…… 일 줄도 몰랐고.’
안일했다. 먼저 현실적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를 고려했어야 했는데.
키네미아는 제 몸에 닿은 현실감 없는 부피를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내며 한 가지 예감에 사로잡혔다. 에이얀과 나쁜 짓을 할 마음의 준비가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고…….
키네미아가 새로운 고민을 떠안게 된 사이, 그는 키네미아의 몸을 마주 보는 쪽으로 돌려서 거리를 두었다.
모로 누운 채 시선을 맞추자 에이얀이 손을 들었다.
“이제 정말 잘 시간이야, 미아.”
딱-
그가 손을 튕기니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햇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와, 키네미아가 탄성을 내뱉었다가 문득 제 변명이 에이얀에게는 참 부질없는 말이었단 것을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으음.’
키네미아가 콧바람을 내쉬었다.
다정한 에이얀. 급발진하는 에이얀. ……너무 큰 에이얀.
마음속에 에이얀을 하나씩 차곡차곡 쌓다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는 에이얀을 향한 어떤 감정도 돌이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23장 유병장수의 진실
“두 분이 같이 오셨군요.”
쥬디스는 어색한 미소를 꾸며 냈다.
“대공녀 혼자 오셔도 괜찮았는데.”
그녀는 왜 이런 걸 데리고 왔느냐라는 물음을 애써 삼켰다.
기개부 연구실에는 나란히 앉은 금발의 천사와 흑발의 악마가 저마다의 시선으로 쥬디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는 아주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였으나, 옆에 있는 건 아주 가소롭다는 눈빛이었다.
기개부 부원들은 전부 에이얀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이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자신들을 마을 정비에 차출했을 때의 그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그날은 모의 공성전이 끝난 뒤였다.
쾅!
저 악마는 유유히 기개부의 문짝을 폭발시키면서 들어오더니-
“에…… 에이얀 님?”
“나도 반가워.”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으나 뻔뻔하게 말한 에이얀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
그러자 악마가 소름 끼칠 정도로 예쁘게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 죽여야 할 게 여기 있어서.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해.”
하겠냐고!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짙은 그의 마력은, 쥬디스가 ‘키네미아에게 자신이 얼마나 유용한 인간인지’ 장광설을 떠들어 대고 나서야 잦아들었다.
그러자 에이얀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고는.
“그럼 일할 시간이야, 버러지들.”
라면서 다짜고짜 모두를 셰넌벨로 이동시켰다.
오늘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바들바들 떠는데, 웬일인지 오늘의 에이얀 크로츠는 묘하게 순하고 얌전하기까지 한 것처럼 보였다.
무슨 주인 앞에서 내숭이라도 떠는 것처럼…….
역시 그건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자, 전 부원들은 측은한 눈빛을 키네미아에게로 보냈다.
순간 모두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게 된 키네미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또?!’
벤자민도 그렇고, 마법사들이 자신을 안타깝고 측은하게 여긴다는 건 알겠는데, 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