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44)
EP.145)# 5
145 – 협공 # 5
칼리라를 바라본 엘가가 묻는다.
“여긴 누구?”
그러고 보니 엘가는 칼리라 영애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둘이 만나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겠지.
상당히 생소한 조합이라 내가 어떻게 서로를 소개시켜주면 좋을지 잠깐 고민할 때였다. 칼리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엘드 오르반스라고 합니다. 아크의 보건의죠.”
엘드 오르반스는 가명이다. 본래 자신이 스콜 남작 가문의 영애인 칼리라라는 것을 숨기기 위한 이름이라고 해야 할까.
“당신은 리오네스 영애 님이시죠? 듣던 대로 아름다움이 넘치는 분이시네요. 그렇게 예쁘게 차려입으시고는,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칼리라가 엘가의 모습을 빠르게 슥슥 훑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오늘 엘가는 생각 이상으로 예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어깨가 오픈되어 있는 하얀 원피스에 꽃모양으로 장식된 유리 구두를 신고 어깨에는 작은 가방을 메고 동그란 챙에 깃털로 장식된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평소의 엘가가 츄리닝에 돌핀팬츠를 입고 다닌다는 걸 고려해보면 상당히 외형에 힘을 준 것이라고 볼 수가 있었다.
“연인과 마실이라도 나가시려는 걸까요?”
“…….”
엘가는 대답하는 것 대신 칼리라 영애를 위부터 아래까지 노골적으로 슥슥 훑었다.
무례할 정도로 노골적이게 행동할 수 있는 까닭은 상대와 자신의 신분 차이가 크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됐고. 그래서 둘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
“별 얘기는 아니었답니다. 그럼, 태오 님. 저는 이만 출근해야겠네요. 다음에 또 봐요.”
칼리라 영애는 후후-하고 여유롭게 웃은 후에 나를 스쳐 지나갔다. 빠져줘야 할 분위기를 잘 읽은 듯하다.
그 뒷모습을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엘가가 묻는다.
“저 여자는 누구냐?”
“아, 저 분은 아크의 보건의입니다. 그런데, 엘가 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흥, 코웃음을 치는 엘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딱 봐도 아무 사이 아닌 것 같아 보이긴 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엘가는 영 못마땅한 느낌이었다.
모처럼 주말의 데이트가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간 여러모로 조진다.
그래서 나는 얼른 방으로 돌아가서 샤워를 하고 깔끔하게 세탁해둔 로브를 걸치고 바깥으로 나섰다.
“그라시아의 중심가로 가주세요.”
나와 엘가는 아크를 벗어나 시내를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엘가와 단 둘이 마주보는 형식으로 앉아있자니, 엘가로부터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것도 같았다.
엘가의 평소 체향은 사과향에 가까웠는데 웬 꽃향기.
혹시 향수라도 뿌린 걸까?
복장도 마실을 나가는 아가씨와 같고 이제 보니 얼굴도 평소답지 않게 반짝이는 분칠이 칠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 엘가가 화장을 했다니.
나는 이 놀라운 일에 충격을 받았다.
금발에 푸른 눈이라는 축복받은 외모의 엘가는 원래 하이틴 스타처럼 빛이 나서 꾸미지 않아도 시선을 끌어 모으기 마련.
그런데 이렇게 화장까지 해서 얌전한 옷을 입혀 놓고 보니 정말 건강하고 활달한 귀족의 아가씨 같았다.
“뭘 봐, 보지 마.”
물론 엘가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맘에 들지 않는 것처럼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려 내 눈을 찍어버릴 것처럼 행동했지만 말이다.
나는 예쁘게 꾸민 엘가를 칭찬해줄 겸 입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 역시 머리라도 만질 걸 그랬네요.”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나는 겉모습을 꾸미는 것에는 재주가 없었다.
평생 해본 적이 없고, 옷과 외향이야 남들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을 정도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런 내가 이렇게 엘가의 앞에 마주앉아 있으니 과연 우리를 누가 연인이라고 생각할까 싶었다.
“엘가 님이 너무 예쁘게 꾸미고 오셔서 이래서야 시종과 아가씨처럼 보이겠어요.
“이제 와서 뭐래. 시종과 아가씨 맞잖아.”
그렇게 말하며 휙 고개를 돌려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는 엘가. 그래도 기분은 꽤 풀려 보이는 게 내 칭찬이 마음에 들은 모양이다.
“…오늘 우리는 시종과 아가씨야. 그러니까 잘 모셔야 해. 알았어?”
“…….”
약간의 어색하고 부끄러운 침묵 속에서.
그렇게 마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 * *
“오늘 너 하는 거 봐서. 널 도와줄지 안 도와줄지 아니면, 널 믿을지 어떨지 결정할 거야. 그러니까 성의를 잘 보여.”
마차에서 내린 엘가가 내게 단단히 일렀다.
번역하자면 오늘 데이트를 잘 성공적으로 이끌어 보라는 뜻이 아닐까.
사실 나도 오늘 데이트를 위해 여러 루트들을 짜오긴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동물원을 갈 거야.”
그런데 엘가의 이야기에 다 뭉뚱그려진다.
나는 계획을 전면 수정할 각오로 물었다.
“동물원요?”
“그래! 들어보니까 얼마 전에 극단에 맹수가 들어왔다더라! 사자일게 분명해.”
엘가는 사자를 볼 생각에 신이 난 것 같았다. 다만 나는 엘가가 걷기 불편한 구두를 신고 있는데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가자.”
엘가는 이미 자기가 계획해둔 것을 실행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결국 엘가의 뒤를 따라 ‘베로페로 극단’이라는 곳으로 향하게 됐다.
유원지나 테마파크처럼 꾸며진 거대한 부지에는 많은 짐승들이 커다란 우리에 갇혀서 한가롭게 잠이나 자고 있다.
갇혀 있는 짐승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자는 거 말고 없을 테니까 이해는 한다.
그런 동물들의 사이로 엘가가 찾는 것은 역시 사자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극단이 들여온 맹수는 사자가 아니라, 사막 국가 투르키에서 들여온 투르키 호랑이라고.
“뭐야, 호랑이잖아.”
엘가는 우리에서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는 호랑이를 보며 몹시도 실망했다.
“호랑이는 싫어하십니까? 사자나 호랑이나 비슷한 거 아닌가요?”
“뭔 소리야? 쟤네는 갈기가 없잖아.”
그렇구만.
엘가는 풍성한 게 좋은 모양이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우리에 갇힌 고양잇과의 맹수를 볼 수 있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실망한 기색을 치우고 눈빛을 빛냈다.
“야, 너 지금 쟤랑 싸우면 이길 수 있냐?”
“제가 호랑이랑요?”
“그래.”
호랑이를 사람이 어떻게 이길까 싶은데, 열심히 발전하고 있는 내 마법의 실력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헤라클레스 말벌들이랑도 싸워 이기고 있는 나니까.
그래도 웬만하면 싸우기 싫다.
“엘가 님은 어떤가요? 엘가 님은 맨 손으로 호랑이를 이길 수 있나요?”
나는 엘가라면 호랑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물론 당연히 이기겠지. 하지만 맨 손이라면 어떨까?
내 물음에 엘가가 나를 바라보더니 미간을 치켜 올린다.
“너, 내가 맨 손으로 사자 잡은 이야기 못 들었냐?”
“아-.”
나는 앙그마르 국내에 있었던 시절 들은 소문을 하나 떠올렸다.
리오네스 가문에서 기르던 까만 사자 한 마리가 탈출해서 이리저리 포악질을 부리며 피해를 입혔다나.
그걸 제압 한 것이 엘가였다고 했다. 맨 손으로 사자의 목을 졸라서 목뼈를 으스러트려 죽였다고 했나.
“그게 진짜인가요?”
“진짜지 그럼.”
역시 엘가는 강력했다. 저번에 광분한 엘가에게 목이 졸렸을 때 내가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 아니었을까.
━컹컹!
그때 무언가 익숙한 짐승이 짖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모두가 알다시피 다람쥐였다.
“야, 저기 개다람쥐 잔뜩 있다.”
엘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개다람쥐이 서너 마리 정도 들어가 있는 유리판 같은 게 보였는데. 녀석들을 보니까 내 방에서 키우고 있는 컹컹이가 생각나서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한 마리 빼고는 다 암컷이네.”
“그걸 어떻게 알죠?”
“몸에 상처가 별로 없잖아. 그에 비해 수컷은 상처가 많아. 저기 저 한 마리 빼고는 다 암컷이야.”
과연. 그렇게 보니 한 마리의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지만 암컷들의 몸은 털의 윤기가 반짝였다.
“왜 이런 차이가 있죠?”
“암컷들이 수컷을 공격하거든. 개다람쥐는 수컷의 수가 적어서 암컷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운단 말이지.”
그런 이유가 있었다니.
실제로 우리 안에 있는 수컷 개다람쥐를 향해 암컷들이 달려들어서 꼬리를 물거나 사방에서 덤벼들거나 했다.
━크르릉…!
수컷이 이리저리 저항해봤지만 암컷에 비해 덩치도 작고 숫자도 적은 수컷으로서는 결국 쥐어뜯기다가 결국 구석에 놓인 집으로 도망치고 만다.
털은 숨풍숨풍 빠지고 겁에 질려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 무척 불쌍해 보였다.
남자가 되어서 여자들에게 잡혀 산다니.
암컷을 많이 거느릴 수 있어서 좋아 보일 수 있어도 저런 삶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다 문득 저 녀석과 내가 별 차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만약 미르나나 엘가 그리고 스텔라와 아이라의 목줄을 잘 쥐지 않으면 나도 저렇게 쥐어뜯길지 모른다.
“야, 저기에 미츄리 떼도 있다. 와 많네.”
생각에 잠겨 있자니 엘가가 나의 등을 밀었다.
* * *
시간이 지나, 점심쯤이 되었다.
엘가와의 동물원 데이트는 평범하게 재미가 있었는데.
내가 엘가를 리드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엘가는 자신이 먼저 보고 싶은 것을 찾아다녀서 나로서는 따라다니기만 하면 됐다.
“저기 앉아서 좀 쉴까?”
그래도 유리 구두를 신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건 힘든 일이었는지 엘가는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미리 등에 메고 왔던 가방에서 돗자리를 펴 나무 밑에 깔았다. 그리고 보온병과 찻잔을 꺼내 엘가의 잔에 따라주었다.
그러자 엘가도 자신의 가방을 슬쩍 만지며 우물쭈물 이야기한다.
“그래서, 계속 돌아다녔는데 너 배는 안 고프냐?”
“배요?”
스륵.
엘가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든다. 그것은 자그마한 상자였다. 까맣게 칠 된 나무에 은박이 입혀져서 장식된 상자.
보석함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보석이 아니고 빵과 치즈, 햄 따위를 이용해 만든 샌드위치였다.
“엘가 님이 직접 만든 겁니까?”
엘가가 요리를 한다니.
내가 물어놓고도 신기했다.
엘가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침묵을 지킬 뿐. 얼른 먹어보라는 소리겠지.
생각보다 맛은 평범했다. 샌드위치는 맛없게 만들기 힘든 법이지.
평범한 맛이지만 그래도 엘가가 처음으로 만든 요리라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
미르나가 내게 도시락을 싸주는 걸 보면서 자기도 한 번 해보고 싶었나보구만.
“맛있네요. 어떤 맛이냐면-.”
내가 맛에 대해 칭찬하려고 하니 엘가가 불쑥 끼어든다.
“그, 그거 다 먹으면, 이제 시내로 가자. 무슨 책도 사야 한다며?”
별로 평가를 듣고 싶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여유로운 식사 시간이 끝나서 나와 엘가는 이제 서점들이 잔뜩 몰려 있는 도심 중앙의 거리로 향했다.
“야, 이거 봐. 이세계 불법체류 사기꾼이래. 책 제목을 왜 이렇게 지어놨을까?”
“괜히 기스나면 사야하니까 다시 꽂아 넣으세요.”
책을 비롯한 필요 물품들을 이것저것 사면서 히히덕거리니 어느덧 시간은 저녁. 외박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엘가와 함께 아크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렇게 논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생각보다 재밌었어.”
엘가는 모처럼의 휴식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그럼 오늘 엘가에게 성의를 표현하기로 한 것은 잘 된 일일까 싶어서 은근히 기대를 하게 됐는데. 차마 그걸 대놓고 물어보기는 좀 그랬다.
그때 엘가가 나를 향해 제안해왔다.
“헤어지기 전에 차나 한 잔 마실래? 이제 슬슬 미르나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을 거 아냐.”
엘가의 머리는 의외로 핑핑 잘 돈다.
나는 엘가와 함께 아크 부지의 카페로 향하게 됐다.
적당히 음료 두 잔을 시켜놓고 테이블에 앉아 있으려니 엘가는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에 테이블 근처에 놓여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을 재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아, 저기 왔네. 야, 여기다.”
“설마-.”
내가 무언가 눈치를 채고 입을 벌리려던 그때.
“리오네스 영애. 제게 할 말이 있다니 대체 무슨 꿍꿍이죠? 그것도 가장 바쁜 토요일의 7시에 약속을 멋대로 잡다니…!”
또랑또랑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내 뒤편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미르나가 저쪽 입구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는 한가한 당신과 다르게 바쁜 몸이랍니-.”
무어라 말하려던 미르나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동그랗게 입을 벌렸다.
“태오 가스펠,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그러는 미르나 님이야 말로….”
그때서야 나는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무언가….
무언가 벌어지려고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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