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48)
EP.149)국면 # 2
149 – 새로운 국면 # 2
일요일 아침.
일요일의 이른 아침에 일어나본 사람들은 대부분 느낄 거다.
유난히 공기가 서늘하게 착 가라앉은 고요함.
늦잠을 자면 알 수 없는 일요일 아침만의 평화로움.
그런 평화로움 속에서 아름다운 선으로 만들어 놓은 그림 같은 것이 이불 사이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새근 새근.
“…….”
그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새들도 울지 않고, 창문 바깥으로는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다.
확실히 예쁘긴 하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이렇게 잠들어 있었을까. 아니, 나는 곧 생각을 바꿨다.
이것은 숲속의 공주보다는 독사과를 먹고 삶을 완성당한 백설 공주에 가까운 것 같았으니.
그야말로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 특유의 오싹함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존재했던 까닭에 나는 무심코 그녀의 오똑한 콧대를 향해 손을 뻗고 말았다.
스륵, 스륵.
손끝에 아기새의 날개 짓처럼 작은 바람결이 느껴진다. 아이라가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다. 아이라는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사라졌을 목숨.
내가 살려 놓은 것이라고 봐도 좋다.
그녀의 운명을 뒤틀고 본래 비참히 죽었어야 했을 목숨을 내가 이어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움의 일부 정도는 내가 소유해도 되지 않을까?
내게도 아이라의 삶에 지분이 좀 있는 게 아닐까-라는 재미난 상상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아이라의 대주주 같은 거지.
“으응.”
스르륵.
아이라가 뒤척이며 몸을 옆으로 돌아누웠다. 덕분에 반쯤 내려간 이불과 까만 블라우스 옆으로 하얗고 뽀얀 가슴의 살결이 드러났다.
여왕이 된 자가 이토록 무방비하다니.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어지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 속에 스멀스멀 피어올라오는 장난기와 성욕을 누를 겸 입술을 작게 열었다.
“아이라 님.”
스르르.
내 말에 아이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까맣고 긴 속눈썹을 몇 번 깜빡인 아이라가 무척 나른하고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꿈이었구나.”
“어떤 꿈을 꾸셨습니까?”
“글쎄. 방금까지 머릿속에 있었는데. 갑자기 떠올리려니 기억이 안나.”
“그렇군요.”
꿈이라는 것은 본디 휘발성이 짙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정신을 흐트러트렸다간 조금씩 말라서 바람에 사그라지듯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스륵.
아이라가 옷매무새를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재미있는 꿈이었어.”
“그거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옷을 갈아입으시겠습니까?”
“그래. 오늘의 색상은 님프 블랙이 좋겠어.”
“님프 블랙이로군요. 알겠습니다.”
슥슥.
아이라는 팔 다리를 쭉 뻗어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이 꼭 어제 봤었던 컹컹이 하품 같아서 약간이지만 정감이 간다.
나는 살짝 잠이 덜 깬 것 같은 아이라의 옷을 얼른 갈아입혀주고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었다.
아이라는 마치 살아있는 인형 같아서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따를 뿐. 옷을 타인에게 갈아입혀지는 게 당연한 삶을 평생 살아왔기 때문이겠지.
엘가도 미르나도 또 스텔라 교수까지 다들 고귀하게 자라났다지만.
아이라의 경우는 정말 온실 속의 화초라는 것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아가씨였다.
이런 아이라가 끝내는 처형대에 몰려 목이 매달렸었다니.
문득 나는 처형 직전의 아이라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원작 이야기의 묘사는 철저하게 주인공인 사냥꾼의 시점으로만 진행되니까.
스스로 스타킹조차 갈아 신지 않는 아이라가 삶의 마지막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지금 당장 아이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걸.
어린 여왕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그런 그녀의 눈에 보이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왜 그렇게 보는 거니?”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라가 내 머리와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슥슥슥.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정이 많은 주인이 자신의 커다란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 같기도 한 손길이었다.
그저 위로부터 내려질 뿐인 관심과 일방향의 애정.
대가나 꿍꿍이가 없는 애정의 행위라고 봐도 좋다.
* * *
나는 아이라와 함께 아크의 부지를 걸었다.
대동하는 시종이라고는 기묘한 반요정 밖에 없고 꽃이 흩뿌려진 레드 카펫도 없었지만. 단지 아이라가 걷는 것만으로 이 낡은 블록 길은 여왕의 행진로가 된다.
─타란테라다.
─산책을 나온 건가?
아침 일찍 거리를 나서고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걸음을 멈추거나 길을 비켜서며 우리들의 행차를 구경했다.
아이라와 함께 다니며 시선이 몰리는 것에 익숙해진 나라도 이렇게 일방적인 시선이 몰리면 괜히 부끄러워지곤 한다.
물론 아이라는 자신에게 쏠리는 관심과 시선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외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스르르.
불어오는 바람이 흔들리는 까만 흑단 머리칼을 살짝 고정하며 아이라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수도에서 전서구가 한 마리 날아왔어.”
“수도에서 날아온 전서구면 라인하르트 경이 보낸 겁니까?”
“그래.”
엘가의 아버지이자 현 왕국을 다스리고 있는 재상이 여왕에게 전서구를 보냈다라.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가 나를 통해 이야기하지 않고 여왕에게 직접적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에서 조금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까?”
“시시한 동향의 보고였어. 국내에 도적떼가 들끓고. 가식어린 귀족들이 앓는 소리를 한다는 따분한 이야기였지.”
너무 따분했기 때문에 편지는 읽고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냥 형식적인 보고였나.
편지 내용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아이라의 말을 듣고 유추 해보면 별 문제없는 것 같았다.
하긴 뭐, 앙그마르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근원이었던 아이라가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나라는 알아서 잘 돌아가겠지.
“그리고 장벽에 병력을 충원하겠다는 보고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
“장벽에 병력을요?”
“장벽을 공격하는 그림자 군단의 공세가 조금 더 강해졌다고 그러더구나. 보르자에서 리오네스의 황금 군대를 투입하겠다는 이야기였지.”
그렇구만.
북쪽의 대수림 위쪽으로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장벽은 야만과 참혹함으로부터 이 문명사회를 지키고 있는 첫 번째 보루다.
아이라의 죽음 이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장벽이 무너져 그림자 군단이 왕국과 온 대륙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었던가.
원래 스토리로 본다면 지금 이 여름쯤에 아이라는 처형을 당했을 운명. 머지않아 장벽이 무너져 세상이 박살나야 했을 소리라는 말이 된다.
원작대로라면 반란과 여기저기 일어나는 사건들로 앙그마르 국내의 병력들이 장벽을 신경 쓸 틈이 없어지고.
덕분에 마왕의 잔재인 그림자 군단으로부터 허를 찔리고 세상이 몰락하는 시나리오였던 건가.
반면.
여타의 반란들을 손쉽게 제압하고 병력들을 그대로 운용할 수 있는 지금. 장벽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온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한 여유가 있다는 게 다행이다.
거기가 무너지면 이 아크를 제외하고는 모두 혼란 속에 잠겨버리니까.
의도하진 않았지만 나는 이미 세상을 한 번 크게 구한 셈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영웅 태오 가스펠.
그런 상상을 머릿속에 할 때즈음 누군가가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실례합니다.”
그는 황금 갑옷을 입은 남자였는데. 손에는 거대한 마상창을 쥐고 멋진 호랑이 투구를 쓰고 있었다. 가슴에 달려 있는 브로치는 백금색. 그 모양은 로마자로 III.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그가 이 아크에서도 서열 3위에 빛나는 최상위 강자라는 말이 된다. 엘가가 5등이고 미르나가 6등이었나 그랬을 텐데.
절그럭.
금빛 갑옷을 입은 서열 3위의 남자가 아이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무척 겸손한 태도로 말을 걸어온다.
“저는 풍차의 기사 베르도나스라고 합니다. 앙그마르의 여왕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르침을 한 수 청하고 싶습니다.”
풍차의 기사 베르도나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 아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석차 10위 이상의 존재들에 대해서는 이미 정보를 받아 읽어본 적이 있었으니까.
개개인이 무용 뛰어난 용자들이기 때문에 워낙 유명해서 조금 생활하다보면 일부러 외면하지 않는 이상 모를 수가 없다.
듣기로 베르도나스는 거대한 마상창을 자유롭게 휘두르며 마물과 적들을 도륙한다고 전해지는 초인이었나. 그리고 성격이 정의로워서 기사 중의 기사라 불린다나 어쩐다나.
나는 아이라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흐응.”
아크 석차 2위의 아이라는 삼석 베르도나스의 이야기에 약간의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아이라가 타인에게 흥미를 느낀다니. 자신의 턱밑에 위치한 강자의 존재기 때문일까?
“좋아. 나도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 그대라면 제법 튼튼하니 어느 정도는 견딜 수가 있을 것 같구나.”
마치 실험쥐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것으로 짧은 시간에 승급전이 성사되었다.
10위 아래 석차의 넘버즈는 원래 한 달에 한 번씩 타 석차와 대결하여 서로의 숫자를 빼앗을 수 있는 게 법칙.
차석과 삼석의 싸움. 흔히 볼 수 없는 대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2위랑 3위의 싸움이라니. 얼마나 강한 지 좀 보자.
━따지고 보면 수석과 차석의 싸움이지. 1위는 공석이잖아.
━그럼 누가 이길까?
━아무래도 7위계의 마법사니까 여왕이 이기지 않을까?
이른 아침답지 않게 상당한 인파였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떠드는 소리가 내 귀를 왕왕 울릴 만큼 시끄러웠다. 그러나 나도 이 싸움에 흥미가 가는 것은 마찬가지.
석차 3위라면 아이라의 실력을 상당히 끌어낼 수 있을 게 확실하다. 아이라가 본 실력을 발휘하면 어느 정도일지 알아두어서 나쁠 게 없는 법.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이 대결이 빠르게 소문이 난 것인지 알록달록한 고깔모자를 쓴 늙은이들이 어느덧 사람들 사이로 나타났다.
그들은 이사회의 현자들로 초고위 마법사인 아이라의 대결 소식을 듣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백색의 마법사 하이낙스가 말했다.
“이번 승급전은 아크 이사회의 의장이자 백마법학회의 의장인 나 하이낙스가 주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뒤로 설명되는 간략한 규칙은 서로 최선을 다하되 죽거나 죽이지 말라는 심플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싱글 넘버즈가 자신들끼리 싸우다 죽거나 크게 부상을 입으면 교단으로서는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그럼 이 불꽃이 피어올랐을 때를 신호로 삼겠습니다.”
화르륵.
하이낙스가 손에 불꽃을 만들어보였다.
그리고는 그것을 하늘로 높이 쏘아 올렸을 때 불꽃은 피르르르-하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팡 하고 터져서 아름다운 꽃을 푸른 하늘에 수놓았다.
꾸우욱.
가슴이 죄이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제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스륵.
먼저 움직인 것은 풍차의 기사 베르도나스였다. 그는 거대한 마상창을 앞으로 겨눈 후에 자세를 낮췄다. 흡사 뿔을 세운 것 같은 돌진자세.
“검은 여왕님, 전력으로 갑니다.”
파밧.
마침내 다리를 박차고 대지를 달렸을 때 그는 세상을 가르는 일점의 황금빛 나선이 되어 아이라를 향해 쇄도했다.
콰아아아아아-.
무거운 철판의 갑옷을 입고 거대한 마상창을 들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에 모두들 숨을 집어삼킬 때.
그 거대한 창의 예리하고 뾰족한 창끝이 마침내 아이라의 배를 향해 치달았다. 저런 무식한 것에 꿰뚫리면 공주 같은 아이라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리라.
그런 생각으로 아찔해졌을 때였다.
스륵.
“아이기스.”
아이라가 허공에 손바닥을 펴자 황금 기사의 움직임은 무언가에 가로 막힌 사람처럼 멈춰버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그의 앞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는 허공의 벽을 밀어내듯 녹슨 깡통처럼 절그럭거리는 것이다.
“그으으. 어째서, 공격이-.”
카가가각.
투구 아래로 고된 신음을 내는 베르도나스.
━저거 봐, 갑자기 멈춰 섰어!
━대체 왜지?
그의 창끝이 허공에서 불똥을 만들어내는 것에 여러 사람들이 숨을 집어삼키며 놀라워 할 때였다.
“마나 배리어로군.”
내 옆에서 이 대결을 지켜보던 하이낙스가 담담하게 평가했다.
“마나를 장벽처럼 고정하거나 설치하는 것이지. 1서클 마법사의 가장 간단한 마법조차 7위계의 손에서는 저렇게나 강력한 마법이 되는 건가.”
하이낙스의 감탄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마나 배리어라면 나도 어느정도 사용할 줄 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마력량으로는 날아오는 돌멩이와 같은 투사체를 막는 것이 전부.
바닥을 파쇄하며 돌진한 기사의 공격을 막는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할 터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라가 지닌 마력의 총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가 있었다.
역시 아직 나랑은 비교가 되지 않는구만.
“후.”
베르도나스는 아이라의 마나 방벽을 뚫기 위해 마구잡이로 창을 내리치거나 찔러봤다.
캉! 캉! 카칭! 캉!
하지만 그럴 때마다 허공에 존재하는 불가시의 벽에 튕겨나가게 될 뿐.
한참 공격하던 베르도나스는 결국 창을 바닥에 깊숙이 콱 꽂아 넣었다.
“졌습니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그로서는 이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싸움을 길게 끌지 않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아이라가 마나 배리어의 뒤에서 준비하고 있던 공격 마법에 맞는다면 그로서는 상당한 고통을 느꼈을 테니까.
“제가 졌습니다.”
베르도나스의 확실한 승복에 주변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너무 일방적인데? 차석과 삼석의 차이가 이렇게 커도 되는 건가?
─일방적으로 공격을 한 쪽이 패배를 선언한다니. 뭐 이런 경기가 다 있어-.
그런 느낌으로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때.
아이라가 허공에 뻗었던 손바닥을 무르려고 하는 순간.
피슝-.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공기를 찢는 소음이 들렸다.
그것은 곧 아이라를 향해 쇄도하여, 무언가 콰직-하고 깨트리는 소리를 내고 만다.
“…….”
실제로 무언가가 공중에 박혀 있는 게 보였다.
자동차의 앞 유리처럼 깨진 배리어를 꿰뚫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길쭉한 투사체 형태의 무기였다.
━화살?
━아니, 저건 석궁용 볼트잖아.
볼트.
누군가의 말처럼 그것은 석궁의 볼트다.
아이라의 마나 배리어를 뚫는 석궁의 화살이라니.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아이라 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황급히 아이라를 향해 다가가며 동시에 눈으로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역으로 쫓았다.
그러자 저 멀리 보이는 나무 위에 불규칙하게 찢어진 검은 망토가 나부끼고 있는 게 보였다.
“흐응.”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라가 긴 콧소리를 낸다.
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용사와 마녀왕.
주인공과 빌런.
이 둘은 결국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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