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75)
EP.176)모래 # 1
176 – 바람과 모래 # 1
엘가와 나는 평소처럼 생활했다.
새벽에 일어나 아크 부지를 돌고 가볍게 몸을 푸는 것이 이제 우리의 당연한 일과.
요 며칠 엘가의 지도를 받은 덕분에 나의 체력은 눈에 띄게 좋아져서, 이제 아크 부지를 돌고도 시간이 충분히 남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잘 하네. 거 봐, 하면 되잖아.”
엘가가 오랜만에 나를 칭찬해왔다. 칭찬이라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그래서 나는 엘가의 툭 내던진 듯한 말에도 몹시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수건으로 얼굴과 목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을 때 엘가가 나의 머리에 손바닥을 슥 대 보았다.
“왜 그러시죠?”
“아니,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너 키도 좀 큰 것 같지 않아?”
“키요?”
이제 와서 키가 큰다고?
나는 설마 했지만 엘가는 최근 내 키가 한 1~2cm 정도 큰 것 같다고 평가했다. 눈썰미 좋은 엘가의 이야기니까 그 말이 사실일 확률이 높다.
나의 몸은 아직 성장기였나.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이제 이 놀라운 반요정의 몸이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엘가님은 좀 어떠세요? 몸은 괜찮습니까?”
“뭐, 그냥 똑같지.”
실제로 엘가의 몸은 평소랑 똑같아 보였다.
저 츄리닝 안쪽의 얇은 면 티 너머 아랫배에 내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면, 문득 엘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머릿속에 솟구쳤다.
━응애, 나 아기 태오, 맘마 줘.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하지만 멋대로 그런 행동을 보였다간 엘가가 깜짝 놀라 화를 내겠지. 그래서 그냥 의욕은 의욕으로만 냅두기로 했다.
“…….”
“…….”
엘가와 나는 서로 말 없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쭉쭉 풀었다. 검진 이후, 우리 둘 사이에는 종종 이런 대화의 공백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이 썩 불편하지는 않고 오히려 서로 말이 없어도 하나의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안정감이 느껴지는 정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유치할 지도 모르지만, 어린 아이들이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 것처럼. ‘엘가는 이제 나의 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생겨났다고 해야 하나.
진짜 가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나는 오늘 할 일 많아서, 이만 간다. 나중에 또 봐.”
슥슥.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저 멀리 뛰어서 사라지는 엘가. 나는 엘가의 등이 모퉁이를 돌아 없어질 때까지 그녀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나중에 또 보자는 말은 제법 따뜻하게 들렸던 것 같은데.
* * *
엘가의 말대로 내 키는 더도 말고 딱 2cm 자라 있었다.
마지막으로 키를 측정해본 것이 아크의 입학 때였으니까 짧은 시간에 꽤 크게 자라났다고 볼 수 있으리라.
“요정의 신비로구나.”
키가 자라났다는 내 이야기에 아이라가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위와 같이 말했다.
“갑자기 커다랗게 자라는 님프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바가 있지. 어린 아이 같은 님프들도, 어느 날을 기점으로 어른처럼 자라나는 경우가 있다더구나.”
“그게 진짜입니까?”
“그래, 이 책에서 읽었어.”
아이라는 자신이 읽고 있는 소설 ‘이세계 불법체류 사기꾼’을 가리켰다. 소설 내용에 어른처럼 다 자란 님프들이 종종 등장한다나.
“그건 소설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님프들이 어른처럼 자라난다니. 도무지 믿겨지지 않네요.”
“흐응, 그럴까나.”
스륵, 탁.
읽고 있던 소설에 깃털 책갈피를 끼워 넣은 뒤 소리가 나도록 덮는 아이라. 그녀가 하품과 기지개를 켠 후에 방에 놓인 달력을 바라봤다.
“결투 재판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구나. 재미있는 경기가 되겠지. 그래서 나의 대전사를 구하는 건 잘 되어가고 있니?”
“그게-.”
사실 계획이 조금 공중으로 붕 떠 있었다. 스텔라는 벨호크 가문에 의해 어디론가 납치되듯이 끌려간 상태.
그리고 엘가는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위험한 일을 하면 내가 더 불안해지고. 미르나나 나르미 자매는 최근 새롭게 만든 이런저런 규칙들로 토의와 토론을 거치느라 시간이 없었다.
아니, 드레이코 자매는 애초에 타란테라 여왕의 대전사가 될 확률이 없긴 하지. 사이 안 좋잖아.
그럼 이제 누가 좋으려나. 떠오르는 얼굴들이야 많다. 여왕이 대전사를 필요로 한다는 소문이 난 것인지 명예와 부를 누리기 위해 내게 지원서를 내밀어오는 용자들도 많고.
하지만 그들 모두 탐탁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고, 쉽게 선택을 하기가 그랬다. 덕분에 잠깐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아이라가 답을 주듯이 말했다.
“정 선택하는 것이 힘들다면 태오, 네가 날 위해 싸워주어도 좋아.”
“제가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렇게 일축하고 싶었지만 아이라의 이야기를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라는 은근히 내가 결투재판에 나가길 원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태오, 너라면 분명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 줄 거야.”
“그야….”
그야 내가 싸우는 걸 구경하는 것은 아이라에게 더 없는 유희거리겠지. 내게는 큰 비극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주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 것도 아닐 것 같았다.
최근 성장이 더뎌지긴 했지만 나는 4.5 위계에 달하는 마법사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나보다 강한 마법사는 세상에 열 명 정도밖에 없다는 소리다.
은둔하고 있는 은거 마법사들까지 포함하면 대충 스무 명 되겠지. 스무 명이면 좀 많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스무 명이면 적은 것이다.
나도 나름 상위 1퍼센트 안에 들어가는 마법사라는 소리.
이 정도면 사냥꾼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대결이 어느 정도 합을 주고받는 싸움처럼 보일 정도의 수준은 될 것이다.
그때 아이라가 책상 위에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봤다.
“태오, 요즘 자라는 게 멈춰있지 않니?”
“방금 2센치 컸다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아니, 키 말고. 네 마나의 성장 말이야. 좀처럼 5위계로 늘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야. 요즘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게 분명해.”
“매너리즘요?”
“그래. 요새 엘가와 운동을 한다지? 엘가도 말이야. 태오 네 기록과 체력을 늘리기 위해 무게를 늘리거나. 시간을 줄인다거나 하지?”
“그건 그렇죠.”
근력과 민첩성의 성장을 위해 엘가는 내 단련의 강도를 갈수록 올렸다.
몸이라는 것은 저항과 무게에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거기에 안주했다간 이내 성장이 더뎌지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마나의 길도 똑같아. 갈수록 자극적인 계기가 필요하지. 태오, 너는 이제 인근 주변의 던전을 도는 것으로는 자극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거야.”
아이라의 이야기는 정확했다. 자신 스스로가 7위계에 달한 대마법사기 때문에 내 성장이 더뎌지고 정체되어 있는 구간을 정확하게 판단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아이라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할 만큼 바보도 아니었다. 나는 아이라가 하려는 이야기를 요약해 물었다.
“이번 결투가 제 성장의 계기가 될 것이라 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생사를 오가는 마나의 부딪힘이야말로 성장의 길이지. 전부 여기 소설에 나와 있는 이야기야.”
뭐야, 소설 속 내용을 보고 내게 말해주는 것이었구나.
아까 전 님프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이라는 요즘 글 읽는 재미에 푹 빠져서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라를 향해 가볍게 충고했다.
“아이라 님, 소설 속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지어낸 이야기들이잖아요. 설마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다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죠?”
“지어낸 이야기라. 그런 것도 분명 있지. 하지만 전부 다 거짓말인 것도 아냐. 진짜라고 믿으면. 진짜가 될 수 있어. 간절히 바라면 세상이 도와주는 법이니까.”
간절히 바라면 세상이 도와준다니. 소설 대사 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만. 그런데 생각해보면 소설 대사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난 지금 내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소설 속으로 들어와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이야기도 진짜가 될 수 있는 법이었다.
“태오야, 또 내가 아주 지어낸 이야기만도 아니야. 대마법사였던 솔로몬은 결투의 나날들을 보내며 실력을 높였다고 하니까.”
“대마법사 솔로몬이면, 앙그마르 마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이라의 입에서 마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그래서 내가 살짝 의아함과 신선함을 느끼자니 아이라가 검지 하나를 허공에 폈다.
“대마법사 솔로몬과 마왕은 같으면서도 달라. 둘이 구분해줄 필요가 있지.”
“그렇군요.”
타락하기 전과 후의 사람은 별개의 인물이라 이것이로구만.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솔로몬이 결투의 나날을 보내며 마법 실력을 올렸다고 하니까 굉장히 뭐가 있어보였다. 나도 막 결투를 해야 하나-같은 기분이 드는 느낌.
실제로 마왕의 심복이었던 발란 교수도 결투나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통해 마법의 성장판을 자극시킬 필요가 있다고 얘기했었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혹시 아이라 님께서도 결투를 하거나 하셔서 마법의 실력을 올리신 겁니까?”
“아니. 내게는 그런 것이 필요가 없다.”
“그렇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럼 아이라 여왕님께서 솔로몬보다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글쎄. 하지만 그보다는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죽은 자를 살리겠다는 불가능한 일에는 매달리지 않으니까.”
“솔로몬의 님프를 말하는 것이로군요.”
“그래. 솔로몬은 죽은 님프를 되살리기 위해 온갖 마도에 정진하다, 결국 그 광기 자체에 먹혀버렸지. 태오야, 이걸 잊지 말거라. 마법은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하다는 걸.”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이라 여왕님께서는 죽은 자를 부활하는 마법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까?”
잠깐의 정적이 생겨났다. 갑자기 분위기가 막 싸해지는 느낌. 하지만 아이라는 이내 후후-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그게 내가 솔로몬보다 현명한 이유지.”
아이라의 대답은 단호했다. 과연 현명한 여왕님이구만.
“아, 그리고 이제 점점 시끄러워질지도 모르겠구나. 오늘 이런 편지를 받았거든.”
슥.
아이라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그것은 금가루를 입혀 놓은 포장지에 금빛 실링이 반짝이는 호화로운 종이였다. 진짜 금 같은데. 누가 이렇게 돈 낭비를 하지.
그러다가 찍혀 있는 문양을 발견한 순간 나는 이해하게 됐다.
실링의 문양은 호랑이였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이 용맹한 호랑이를 가문의 인장으로 사용하는 곳은 하나밖에 없다.
“타나크 가문의-, 카심 왕자가 보낸 것이로군요.”
“아니, 이제는 카심 왕제지. 선왕이 죽고 그 후계가 뒤를 이었으니 말이야. 대관식이 끝나고 교단과의 협약을 위해 이 모나크 시티를 방문한다더구나.”
카심 왕자, 아니 이제 왕의 동생인 왕제인가. 그의 만남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라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남자였으니까.
이 아크에서 당연히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만남이 늦은 감이 있었다. 본국인 투르키에서 대관식이 있었던 모양이구만.
예전에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간 것 같지만 투르키는 앙그마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약소국이다.
하지만 앙그마르와 맞대고 있는 약소국이라는 말은, 반대로 앙그마르에게 흡수당하지 않을 정도로 나름의 저력이 있는 나라라는 말이었다.
작지만 쏘아 버리는 전갈이나 말벌 같은 나라.
실제로 그들은 마왕 솔로몬의 몇 차례나 되는 침공을 막아냈다나.
그 덕에 투르키의 국민들은 오만함에 가까울 정도로 자부심이 넘쳤고, 그 왕자인 카심은 한 술 더 떠서 앙그마르의 여왕인 아이라를 향해 구혼을 해올 정도였다.
물론 아이라는 질색했지만 말이다.
“카심, 그 놈이 편지에 뭐라고 적어 놨는지 읽어 보도록 하렴. 나는 글씨로도 그 놈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실링을 뜯어내고 화려한 편지를 읽어 내렸다. 편지에 적혀 있는 내용은 아이라를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와 구구절절한 찬미가.
“아이라 여왕님과 만나고 싶다네요.”
“흥.”
와락 인상을 찌푸리는 아이라. 그러다가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카심은 5위계의 마법사로 나와 위계 차이가 그리 얼마 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카심과 먼저 대결을 하면 나의 마법 실력도 상승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아이라를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이 만남. 주선해주실 수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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