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80)
EP.181)모래 # 6
181 – 바람과 모래 # 6
까만 옷을 입은 여성은 투르키에서 온 여제의 심부름꾼인 듯했다.
그녀가 말하기로 세라자데 여제가 나를 부르고 있으니 시간을 내어 달라나.
감옥에 들린 이후의 오후에는 딱히 큰 스케줄이 없었기에 나는 흔쾌히 그 동행의 요청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앞장서시죠.”
내 대답이 너무 시원했기 때문일까? 까만색의 베일 아래로 드러난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뜨였다.
“…제가 부탁하는 입장이지만. 초면의 제안을 너무 조심성이 없게 받아들이시네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간다니, 그야 이렇게 너무나 조심성 없는 것 아니냐고 타박할 수 있겠지. 그녀는 오히려 나를 더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뭐 자기를 막 어떻게 하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변명 하나 해보자면 교단의 도시는 엄연한 중립지역.
그렇기에 경쟁국가인 투르키의 사절이나 여제라고 하더라도 리스크를 감내하며 꿍꿍이를 꾸며 나를 함정에 빠트리진 않을 터.
머리가 맛 갔던 리즈시절의 아이라라면 몰라도, 그 여우같다는 세라자데가 그런 일을 할 리는 없겠지.
“여기, 이쪽 방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도착하게 된 곳은 이 용사전문 육성기관 아크 내에서도 귀중한 손님들이 머무는 특실이었다.
아직 아이라가 자신의 기숙사를 배정받기 전에 머물렀던 화려한 객실 말이다. 다시 이곳을 향해 돌아오게 될 줄이야.
절컥, 기이익.
굳게 닫힌 문을 열자 시원한 느낌의 새하얀 도료가 칠해진 복도와 빨간 카펫들이 보였다. 마법적인 냉방도구라도 틀어져 있는 건지 시원해서 기분은 좋다.
전체적으로 이곳은 변한 것이 없구나.
그런 느낌으로 고개만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나를 안내 해왔던 까만 옷의 여성이 “그럼 여기서 이 방의 안에서 잠깐 기다리도록 하세요.”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그 결과 나는 방에 혼자 남겨졌다.
바닥에는 호랑이 가죽이 깔려 있고 비로드 이불이 깔린 침대나 곳곳에 놓인 화려한 도자기가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곳곳에 놓인 비단 의복과 구두 등은 이곳이 지체 높은 여성의 방임을 알 수 있게 했다.
킁킁.
내 예민한 반요정의 후각에 제법 달큰한 냄새가 느껴졌다.
내 추리에 의하면 분명 이 방 어딘가에는 님프친화적인 맛을 자랑하는 사탕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침착한 상황 판단!
재능 《침착한 사고》에 의해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모든 직업 경험치 + 5」
그렇군.
어디에 숨겨져 있는 거지? 저기 저 서랍인가?
이리저리 굴러가던 나의 눈에 곧 침대 위에 얹어진 커다란 곰 인형이 하나 보였다.
어린 소녀들이 좋아할 법한 인형이라 이 화려한 방에 어울리지는 않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벌컥, 기이익.
잠겨 있었던 문이 열리고 또각 또각, 높은 굽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몹시 시원해 보이는 비단을 몸에 걸친 여성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도록 만들었구나, 반요정아.”
그녀는 단연 이 방의 임시적 주인이 된 세라자데였다.
그녀의 주변으로는 휘어진 곡도로 무장한 병사들이 서넛 방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투르키의 여제 세라자데는 그들을 향해 손바닥을 휘휘 저으며 가볍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이제 물러가 봐도 좋다.”
━네.
저벅, 저벅, 저벅.
여제의 병사들은 “어떻게 수상한 자와 여제님을 단 둘이 남겨놓는다는 말입니까?”와 같은 의문 따위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채 모두 방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나였다면 아이라와 수상한 자만을 남겨두고 나서지 않았을 터.
물론 아이라의 신변에 위협이 생길 것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아이라의 상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걱정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의미에서 세라자데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듯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타나크 폐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짐짓 과장되었지만 엄숙한 느낌으로 예를 표했다. 고개를 숙이는 내 모습에 슥슥 손바닥을 흔드는 세라자데.
“세라자데 여제님으로 충분하노라. 타나크 폐하는 아무래도 내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말이지. 그리고 잠깐 실례하겠노라.”
슥. 슥, 털썩.
세라자데가 자신의 발에 신고 있던 굽 높은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 팽개치듯 했다.
벗겨진 신발을 보니 굽이 대략 20cm는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게 아니라 완전 타고 다니는 수준 아니냐? 키높이라고 부를 수준이 아니다.
「침착한 상황 판단!
재능 《침착한 사고》에 의해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모든 직업 경험치 + 5」
봐, 상태창도 인정을 하잖아. 나도 반요정이라서 키가 작지만 저렇게까지 높은 굽을 신고다니는 건 좀….
이내 작은 고양이 같은 눈매의 세라자데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후후-웃는다.
“짐이 이렇게 반요정을 부른 까닭은 한 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니라. 좀 더 일찍 시간을 내어보고 싶었는데, 최근 바빠 이제야 겨우 시간이 났노라.”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할 이야기야 많지. 하지만 참으로 심기하구나. 이제 갓 솜털이 날 것 같은 애송이 같은 모습이라니. 어째서 괴물 같은 모습이라 소문이 났던 것이지?”
세라자데는 나에 대한 소문이 기이한 이유에 대해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야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를 싫어하는 궁정의 적들과 민중들이 의도적으로 악의어린 소문을 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인터넷이 발달했던 21세기의 세상에서도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에 대한 유언비어가 가득했으니, 이런 세상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가볍게 답을 해주기로 했다.
“투르키의 선왕 슐레이만 폐하에 대한 소문도 만만치 않습니다. 호랑이 같은 털이 얼굴과 몸에 전부 자라있고, 뾰족한 송곳니로 적들을 물어뜯는다죠?”
“그래, 앙그마르에 퍼진 내 아버지에 대한 소문이 그렇다는 것 정도야 짐도 알고 있었노라. 부친께 호되게 당한 앙그마르의 병사들이 그런 소문을 만들어낸 것이겠지.”
“저에 대한 소문도 대강 그런 것일 겁니다.”
“하지만-.”
슥.
세라자데가 우아하게 손가락을 하나 폈다.
이제 보니 그녀의 손에는 모든 손가락마다 반지가 껴져 있었는데 일부러 멋을 잔뜩 부려 어른처럼 보이려는 학생 같아서 좀 웃기고 귀여웠다.
“하지만 소문이라는 건 아주 근거가 없는 것만도 아니지. 투르키에는 없는 선인장에 그림자가 질 리 없다는 말이 있거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리 없다는 말입니까?”
“그래. 소문이란 만들어지게 되는 근거가 나름 있는 법. 실제로 내 부친인 슐레이만은 전장에서 앙그마르 마왕의 귀를 물어뜯었다고 하니까.”
“그렇군요.”
내가 알기로 세라자데의 아버지인 슐레이만은 투르키의 영웅이다. 숱한 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워 승리했다던가.
앙그마르의 솔로몬, 투르키의 슐레이만. 둘 다 이름의 뜻은 같지만 평가는 극과 극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요정, 요승이라 불리는 네 모든 소문이 거짓일 리가 없다는 걸 짐은 잘 알고 있노라. 그래서 묻겠다-.”
방금까지 가벼운 농담을 하던 것 같은 분위기가 제법 진지해진 것에 나도 긴장하게 됐다.
이 여성은 여러모로 엘가나 아이라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지도자.
또 경건한 여군주인 미르나나 명랑한 나르미와도 다른, 권모술수에 능하고 교묘한 꾐이 가능한 정치가였으니까.
“어떤 걸 물으시려는 겁니까?”
“모든 소문이 거짓일 리는 없겠지. 그래서 묻겠는데.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진실인 것이냐?”
“음…, 그것이….”
이런 질문이 올 것이야 사실 알고 있었다. 누구나 다 나를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미래를 볼 수 있다면서요?”라는 질문이니까.
거기서 더 나아가 “제가 누구와 결혼하게 될 까요?” 혹은 “제 삶이 언제부터 풀리게 될 까요?”라고 운세를 물어오는 자들도 있다.
물론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내가 보는 미래는 어디까지나 원작 소설에 등장했었던 굵직한 사건들뿐이니까.
원작의 스토리에서 크게 엇나간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사건들은 솔직히 별로 도움도 안 된다.
애초에 지금쯤 앙그마르의 내전이 크게 터지고, 장벽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막 죽고 난리가 났어야 했을 타이밍.
그런데 지금 이 아크에서 모두 한가롭게 대화나 나누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아는 스토리는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여기서 어떤 대답이 가장 베스트지?
* * *
정말 미래를 볼 수 있냐-라는 자신의 질문에 반요정이 잠깐 침묵에 잠긴다. 대답을 심사숙고하려는 것이겠지.
생각보다 침착한 남자야.
덕분에 세라자데 역시 잠깐 사고에 빠졌다. 그녀가 가진 고유의 재능 《재빠른 사고》가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라자데는 꽤 젊은 나이에 왕좌에 앉았다.
그의 부친인 슐레이만 대제가 나이와 여러 문제들을 빌미로 궁정의 정치에서 손을 놨기 때문이었다.
동생인 카심과 후계의 자리를 놓고 다툰 끝에 승리한 세라자데에게 이제 꽃길만이 가득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았다.
말하자면 이제 막 세상 문을 열고 나온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세상에는 아직 신경 써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고 세라자데에게는 적들이 많았다.
━여제라고? 왕자 카심이 역시 왕에 더 적합한 거 아냐? 마법의 실력은 카심 쪽이 훨씬 뛰어 나잖아. 아무래도 직접 전장에 나가 군을 이끌 수 있는 자가 지도자가 되어야….
━쉿, 세라자데의 귀는 온 나라에 다 퍼져있어. 이야기에 조심해.
당장 동생을 따르던 무리들의 정리도 되지 않은 상태.
그들도 당장은 선왕인 슐레이만의 의지를 반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와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
‘쉽지가 않구나!’
대리청정하던 공주의 때와 별로 달라질 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리가 달라지니 무게가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세라자데에게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망나니로 소문이 난 이웃 국가의 여왕 타란테라도 하나 남은 왕족이랍시고 왕좌에 앉아 있었으니까. 그보다 뛰어난 자신이 못할 리가 없지.
아니, 애초에 타란테라의 왕가는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게 분명했다.
각기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반란과 민초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러, 머지않아 성난 군중들이 금방이라도 왕궁으로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길어 봐야 1년.
세라자데의 평가로는 그랬다.
그런데 의외로 아이라 여왕의 시대가 길게 이어지며 세라자데는 의문을 느꼈다.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거지?’
그러다가 세라자데가 알아낸 것은 궁정에 요승(妖僧)이라는 자가 있어서, 그가 이리저리 휘두르는 대로 국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래를 보며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과 모반을 꾸미는 자들을 귀신 같이 알아낸다나.
━폐하, 제가 관심법으로 다 본 것입니닷…! 저 자의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 들어,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입니닷…! 어서 추방해야하는 것입니닷…!
물론 세라자데는 그런 소문을 온전히 믿을 만큼 어리석진 않았지만.
그녀가 앙그마르의 궁정에 심어두었던 세작들이나 밀정들이 소리 소문 없이 연락이 끊기거나 사라지는 것을 보면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기는 했다.
한 번 만나보고 싶은데.
그리하여 실제로 마주하게 된 태오 가스펠은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소년이었다. 반요정이라고 하니 실제 나이는 겉모습보다 더 많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무자비했던 소문들과는 다르다.
아둔한 여왕을 뒤에서 조종하는 간신배라는 소문과는 다르게, 어딘가 이지적인 현명함마저 감돌고 있다. 그때서야 세라자데는 단박에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던 앙그마르와 아이라 여왕이 온전히 자리를 버티고 있는 것은 이 남자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재미있는 놈이야. 갖고 싶구만.’
세라자데는 이것저거 모으기를 좋아한다. 특히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신분고하와 출신성분에 막론하고 주변에 두는 편이다.
덕분에 마법실력이 뛰어난 왕자 카심을 짓누르고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니 그녀의 방법과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세라자데는 이 반요정을 빼앗아 자신의 궁정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럼 그 마녀 여왕이 누리고 있는 일말의 행운조차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겠지.
아이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본래 도구란 더 잘 쓸 수 있는 쪽에 가는 편이 보기도 좋잖아?
분명 이 남자도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쪽에 붙고 싶어 할 테니.
또, 그렇지 않더라도 세라자데로서는 이 반요정을 꼬드길 자신이 있었다.
일단 이렇게 둘 만의 만남을 허가한 것 자체가 반쯤 마음이 있다는 소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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