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220)
EP.221)# 1
221 – 발각 # 1
내 입으로 말하긴 우습지만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사방에 깔린 슬픈 결말의 지뢰지대를 피하지 못하고 폭사했겠지.
그러나.
인간의 머리라는 것은 역시 한계가 있기 마련.
덕분에 나는 읽었던 소설의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천천히 시간에 따라 복기하며 어딘가에 적어내려 갔었다. 말하자면 원작 ‘빌런 사냥꾼’의 스토리, 타임라인이라고 봐도 좋겠지.
자잘한 것부터 세상을 뒤바꿀 정도로 커다랗고 굵직한 에피소드까지.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것은 일종의 예언서라고 불러도 될 터였다.
당연히 그 두루마리를 누가 보면 안 되었기에 나만의 비밀금고에 꽁꽁 숨겨 놓았었는데. 또, 앙그마르 왕국을 벗어나며 분명 소각시켜서 잿더미로 흩날리는 것까지 확인했었는데.
“태오야, 여기에 적혀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 말해보도록 하렴.”
어째서 그것이 아이라의 손에 쥐어져서 그럴싸한 양장본으로까지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떠한 경위에선지는 몰라도 아이라는 내가 불태운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다.
아니,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방법이나 이유 따위가 아니야. 일단 내가 가장 크게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이 자리를 모면하는 것이어야 한다.
「침착한 상황 판단!
재능 《침착한 사고》에 의해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모든 직업 경험치 + 5」
좋아.
침착한 사고가 기동하자 머릿속에 쿨러가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이 환기된다. 일단 아이라를 향해 능숙하게 연기를 선보이기로 했다.
“아이라 님, 그것을 제가 좀 읽어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 얼마든지.”
아이라는 흔쾌히 내게 책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페이지를 넘겨보자 과연 익숙한 글씨체와 익숙한 내용들이 페이지마다 적혀 있는 게 보인다.
인정하겠다.
이건 내 예언서가 맞군.
아이라가 말했다.
“기록을 태우려면 조금 더 높은 온도로 소각시키는 게 좋아. 손 글씨에는 의지가 담기지. 중요한 내용을 적은 기록이라면 더더욱. 그것을 복원하는 건 어렵지 않고.”
“제가 이 기록을 적고, 또 태웠다는 것까지 이미 알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나는 여왕이야. 앙그마르 작은 마을의 돌멩이 하나하나까지 알고 있을 권리와 의무가 있지. 그런 내가 태오, 너의 수상한 보물창고를 모를 리가 없었지 않니?”
그렇구만.
아이라는 내가 지하실에 숨겨 둔 창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듯했다.
대체 언제 어떻게 알아낸 거지? 혹시 아이라가 내 집에 놀러왔을 때인가? 그때 말고는 딱히 짚이는 부분이 없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이건 제 기록이 맞습니다. 포장이 좀 더 화려해졌지만 말입니다.”
“…오.”
아이라는 동그랗게 입술을 벌렸다.
“그렇게 곧바로 인정할 줄은 몰랐구나.”
“제가 감히 누구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라 님께서 이 기록에 대해 제게 궁금하신 점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
내가 당당하게 나갈 것을 예상치 못했는지 아이라는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촤르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머리칼이 마치 검은 폭포 같다.
아니, 이런 와중에도 외모에 대한 감상이나 하고 자빠졌다니-. 아마도 아이라가 지니고 있는 직업 《절세미인》 때문이려나. 과연 강력한 직업효과다.
스륵.
내게서 책을 받아 든 아이라가 단정한 손끝으로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태오야. 여기에 적힌 ‘5월 혁명’이라는 것은 무엇이지?”
5월 혁명.
역시 그것에 대해서 물어 오는구만.
나는 침착히 아이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설명했다.
“그건 5월에 일어났어야 했을 혁명입니다. 초기에 진압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거나. 진압 자체를 못했다면 성난 민의가 모나크 시티의 궁전으로 쇄도했을 겁니다.”
“혁명이라. 좋지 못한 울림이구나.”
“하지만, 실패했으니 반란이겠죠.”
“흐응…, 그 결과 내가 작은 줄 하나에 매달려 죽었을 것이고? 여기에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그렇지 않니?”
“…그렇긴 합니다만, 이미 시기적으로 지난 일이니 다 쓸모없는 기록일 뿐입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이야. 이렇게 중요한 예지를 하였음에도 나에게 비밀로 한 것은 어째서니?”
“그야….”
그야, 그걸 사실대로 말했다간 당시의 네가 어떻게 날뛸지 알 수가 없어서지.
또 미래를 발설하는 것으로 사건 자체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손을 벗어나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는 건 최악 중의 최악.
“하지만 태오야. 네가 잘 알고 있겠지만 이런 음모와 사건에 대하여 네 여왕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거짓말을 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어.”
그렇게 나오겠다 이건가.
“그리고, 이렇게나 중요한 것을 적어놓았던 것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이를 테면 왕가의 전복을 꿈꾸는 옛 왕당파의 손에 들어갔다면 어쩔 생각이었니?”
“결과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래. 하지만, 또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일이 없어. 만약, 너와 같은 자가 왕가의 위협이 되는 자에게 넘어가게 된다면 나와 세상에 있어서는 큰 불행이겠지.”
나는 아이라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러한 이유들로 제 퇴직을 반려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는 말이지. 태오야, 벨모트의 반란 때 네가 말했지 않니? 위험한 것은 더욱 가까이 두고 지켜보는 게 좋다고.”
완전히 자승자박이로군.
맞는 말이었다.
아이라의 입장에서 나와 같이 변수 많은 자를 그만두게 만드는 것은 커다란 위험을 내포한 행위다. 어리석은 여왕이 그걸 파악하여 나의 핵심을 꿰뚫으려 할 줄이야.
지뢰밭은 아직 끝이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이것이 마왕으로 각성하며 발현된 비극적 카르마?
그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운명이 끝도 없이 나를 연단하려는 모양이구만. 달궈진 쇠도 이 만큼 망치질을 맞았으면 부러지겠어.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고난과 시련을 거쳐 왔던 내 안에는 일종의 담대함이라고 말할 만한 것. 승부사 기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크게 맥동하고 있었다.
이 위기. 지금 이 절체절명의 순간이야말로 오히려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 딱 좋은 순간이라는 걸 녀석이 귀띔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한 달의 휴가라도 주세요.”
“휴가?”
“그렇습니다. 이번 여름 축제가 끝나면, 아크에서는 방학이라는 걸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방학 동안에, 한 달 정도 휴가를 갖고 싶습니다.”
“흐응….”
스르르.
가느다란 눈을 뜬 채 팔짱을 끼는 아이라. 어디 더 말해보라는 태도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남자답게 포부를 밝히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없었다면 아이라 님께서는 큰 곤혹을 치르셨을 겁니다. 이번에 벌어졌던 혼수(昏睡)사건도 그렇구요.”
“…….”
“그러니, 그에 합당한 보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제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라는 마치 아이스크림 먹은 고양이처럼 입을 벌렸다. 마치 내가 이런 말을 해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건지 깜짝 놀란 듯 보이기도 했다.
“태오야, 네가 내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처음이로구나. 나는 네가 아무런 욕심도 없는 나무 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아이라 여왕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흐으응….”
긴 콧소리를 낸 아이라.
슥.
아이라는 마침내 대답하는 것 대신 내게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 섬섬옥수라는 말이 무척 잘 어울리는 그 손이 내밀어지는 것은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나는 그 손끝에 입을 맞췄다.
이것으로 계약은 끝.
당장으로서는 아이라의 추궁을 멈추게 만들고,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시킨 것으로 만족할 수가 있을 거다. 휴가도 얻었고.
나쁠 것 없는 무대였어.
디링-.
그때 눈앞으로 글자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자신마저 속이는 연기
직업 : 연기자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연기자 Lv. 9 → Lv. 10
진실과 거짓의 구분에 의미가 없어집니다.」
「직업 레벨이 한계에 달해 특전을 획득합니다.」
「재능 《카리스마》 : 상대를 압도하는 위압을 행사합니다. 상대와의 격이 차이날수록 그 효과가 증대됩니다.」
연기자의 레벨이 올랐나.
좋은 일이었다.
새로운 재능도 하나 생겼고.
“태오야.”
“네, 아이라 님. 하실 말씀이 더 남으셨습니까?”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싶어서 그녀의 기분을 살필 때였다.
“내게는 물어보지 않는 거니? 이를테면, 내 안에 있는 괴물 같은 것에 대해서 말이야.”
과연.
나는 가볍게 답했다.
“그게, 여쭤보면 사실대로 말씀해주시는 겁니까? 그리고, 꿈속의 일들은 이제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흐응. 망각. 인간이 가진 축복 중에 하나지. 가능하면 잊는 것이 좋아.”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때 봤던 그것은 제법 강렬한 것이라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다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툭툭.
아이라가 내 등을 두드린다.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가도록 하자꾸나.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서 계속 있고 싶지만. 나를 찾는 이들이 있을 테지.”
우리는 돌아가는 길에 올라섰다.
“태오야, 오늘 했던 이야기는 우리들 사이의 비밀로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 * *
━멋진 무대였어. 아이라 여왕이, 갑자기 나비 떼로 변해서 날아가는 거 봤어? 그런 마법은 또 처음 봤다니까.
━님프 합창단 신곡도 좋더라. 올해 축제는 왕족들이 껴 있어서 그런가, 한층 더 예산을 쏟은 티가 나더구만-!
━벨호크 상회에서 어마어마하게 자금을 들이 부었다는 것 같은데.
스타디움으로 돌아오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관객석을 빠져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이제 밤부터 열리기 시작하는 가게들에 들려서 술과 웃음을 잔뜩 들이마시고 얼큰하게 취하겠지.
“야, 아이라.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잖아.”
그때 빠져나가는 관객들 사이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금빛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걸 보니 누군지 단박에 이해가 된다.
“뭐야, 태오도 있네.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거냐?”
“오랜만입니다, 엘가 아가씨.”
“흥, 오랜만은 무슨, 됐어. 그보다 아이라 너. 갑자기 무대 위에 서 있다가 무슨 나비 떼를 남기고 사라져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냐?”
엘가는 나와 아이라가 스타디움을 빠져난 이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행사의 막바지 즈음, 아이라가 허공을 향해 꽃잎과 나비들을 흩날리며 사라졌다나.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라가 흠-작게 침음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분신의 지속은 한 시간 정도가 최대인 모양이구나. 조금 더 개량을 해둘 필요가 있겠어.”
역시 무대 위에 있었던 아이라는 분신마법이었군.
“아무튼, 우리도 이제 축제나 즐기자구. 미르나가 언덕 위에 자리를 통째로 빌려놨으니까. 거기서 술이나 한 잔하면 기분이 아주 좋을 걸-.”
우리도 사람들과 함께 객석을 빠져나왔다.
플래티넘 기숙사 근처에 위치한 언덕, 그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솨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곳 아래에 횃불과 커다란 캠프파이어가 모락모락 타오르는 게 보인다.
“다들 늦었군요?”
미르나가 늦은 우리들을 탓했다.
하지만 축제라는 것이 그렇듯, 우리는 한 데 어우러져서 고기나 술, 과일과 안주 따위를 먹으며 나름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밤은 이제부터 깊어지기 시작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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