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490)
EP.491)– 세상의 어설픈 이야기들을 위해 # 8
외전 – 세상의 어설픈 이야기들을 위해 # 8
알레이스터 폰 드레이코.
그는 시체 후작이라 불릴 만큼 엄격한 사람이었다.
라인하르트가 날카로운 강철 같은 차가움을 지녔다면, 알레이스터는 문자 그대로 죽은 주검처럼 메마른 남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레이코 가문의 가주였던 그의 이야기고, 사실 그는 꽤 따뜻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할로윈 때 그와 만났던 우리가 그걸 잘 안다.
슬금슬금.
복도를 조심스레 빠져나가며 나르미가 말했다.
“원래 드레이코 가문 사람들은 혼인상대가 가문 본당의 원로들에 의해 정해지거든. 그 산에 있는 할아버지들 말이야.”
나르미의 말에 나는 예전 드레이코 본당을 찾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드레이코 가문의 본당에는 많은 수행자들과 수도승들 그리고 나이 먹은 고승들이 가득했었지.
그들은 드레이코 가문의 원로로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나.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가문의 뜻에 따르지 않고 연애결혼을 했다고 해.”
“그 알레이스터 경이요? 신기하네요.”
“덕분에 본당 가문과는 연이 끊어지다시피 했지만 말이야.”
그렇구나.
나는 어째서 알레이스터의 드레이코 가문이 본당인 동부가 아니라 타국인 그라시아의 별장에 적을 두고 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라의 타란테라 가문과 마찰도 있었지만, 드레이코 가문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구나. 또 한 편으로는 신기했다.
“그 엄격한 남자가 가문의 뜻을 따르지 않고 여성을 택한다니. 신기하네요.”
“뭘. 태오 너도 우리도 다를 바 없잖아.”
나르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앙그마르 가문의 복수를 택하기보다 나의 사랑을 택했다. 비록 가문의 많은 것들을 이어받지 못했지만 그 사실에 후회는 전혀 없었다.
엘가도 아이라도 스텔라도 나르미와 미르나 쌍둥이 자매도 그랬다. 그들은 가문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택했다.
그녀들 또한 후회하고 있지 않으리라고 나는 나름대로 확신했다.
나르미와 미르나의 아버지였던 알레이스터도 그랬던 것이구나. 그 뒤로 나르미는 아버지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나르미의 아버지인 알레이스터가 아직 젊었을 적 동부 산맥을 여행하다 길을 잃어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난생 처음 보는 마을에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곳이 여기 도원이군요.”
“그래, 그곳에서 엄마 나루를 만났고. 나루와 함께 바깥세상으로 나갔다나 봐. 그런데, 이 마을을 빠져나가는 건 금기였기 때문에….”
“아하.”
그래서 나루는 마을에서 제명된 것이구나. 알레이스터도 아내를 만나고자 본가와 인연을 끊었고, 나루도 알레이스터를 위해 마을을 떠났다.
낭만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결실을 맺어 태어난 쌍둥이가 나를 만났다고 생각하니 무척 극적이었다. 그때 나르미가 말했다.
“그런 엄마가 우리를 포기하고 수행에 들어간다니. 이상해. 엄마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이 마을을 찾았는데. 붙잡혀서 나가게 되지 못한 게 틀림없어.”
“흐음….”
“그리고, 우리 아빠는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아마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이렇게 일기를 남겨서 상세히 기록해두었지. 여기서 다섯 걸음가면 모퉁이가 나온데.”
팔락, 팔락.
나르미는 알레이스터의 일기장을 넘겼다. 다섯 걸음인가. 하나, 둘, 셋…. 그렇게 다섯 걸음 걷자 정말 모퉁이가 나왔고 우리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쭉 전진하다가 다음 모퉁이에서 왼쪽….”
“왼쪽….”
“왼쪽으로 돌면 막다른 벽이 보이는데. 벽을 타고 올라가 지붕을 타 두 채를 넘고….”
무슨 첩보영화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내게 ‘님프비기 살금살금’이 없었다면 이미 진즉에 이 기묘한 잠행을 들키고 말았겠지.
* * *
“다 왔다…! 일기에 따르면, 여기 이 집이 엄마가 갇혀있을 확률이 높은 집이야.”
나르미는 우리가 지붕에 납작 엎드린 집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 기왓장 아래에 나르미의 어머니인 나루가 있다 생각하니 나도 제법 긴장이 된다.
첫 만남인데 뭐라고 말하지? 장모님을 만나는 경험은 처음이다.
왜, 내 아내들은 다 엄마가 없었으니까. 엄마가 없다고 하니까 무슨 게임 채팅창의 저질스러운 욕설 같은데 그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장모님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괜히 긴장되어 손바닥 땀을 바지에 슥슥 문질렀다.
“태오야, 저기 경비들이 있어!”
그때 나르미가 바닥에 풀썩 뛰어내렸다.
언니 몰래 집밖을 빠져나가던 때의 실력이 녹슬지 않은 건지 무게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었다.
나르미의 손등이 경비들의 목을 후려치고.
“이제 없어!”
풀썩.
경비들은 줄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바닥에 풀석 쓰러졌다.
나 역시 살금살금 바닥으로 내려왔다. 잠든 경비들을 구석으로 잘 숨겨둔 후에 우리는 나루가 있다고 전해지는 큰 저택 안으로 숨어들었다.
몹시도 넓은 저택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저택 안에서 인기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기 때문이겠지.
조용하다.
늦은 시간이라고는 하나 이 정도로 넓은 저택이면 사용인이나 저택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있을 법 했는데. 없다.
“나르미 아가씨, 정말 여기가 맞는 건가요?”
“기록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어. 아마 이곳 어딘가에 우리 엄마가 있을 거야.”
나르미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나 역시 나르미의 믿음이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저택 안을 천천히 살피기로 했다.
하지만 너무 넓었기에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는 불안함이 들었다.
바깥에 재운 경비병들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또 그들이 없어진 걸 알아차린 다른 경비들이 몰려오면 문제가 왕왕 발생해 우리가 이 도원에서 추방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바엘, 네 차례야.”
━히오옹…!
나는 종이거미 바엘을 손바닥에서 불러 일으켰다. 주변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뭉쳐 자그마한 거미 형상을 만든다. 나는 바엘에게 말했다.
“이 저택에 나루가 있을 거야. 찾아보자.”
파스슥.
바엘은 내 부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딘가로 휙 나아갔다. 거미의 날카로운 감각이 바엘의 많은 다리를 이끄는 것이겠지.
우리도 그런 바엘을 따라 저택을 살금살금 걸어서, 마침내 작은 방문 앞에 도착했다. 장지문의 너머에서 유일하게 촛불이 흔들리고 있는 방이었다.
누군가 이 장지문 너머에 있다.
혹시 나르미의 엄마?
“누가 있어.”
나르미도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누군가 있다고 알렸다. 그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다. 긴장되는 것이겠지. 먼 길을 떠나 엄마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바로 그때였다.
후.
작은 숨소리와 함께 장지문 너머에 빛나고 있던 촛불이 꺼졌다. 곧 우리들이 웅크리고 있던 복도는 어둠에 잠겼는데 그 상황에 이런저런 반응을 하기 직전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니?”
“히애액…!”
나는 밥을 먹는 도중 누군가 등 뒤에 오이를 가져다 놓은 고양이처럼 깜짝 놀랐다. 온몸의 머리털은 곤두서고, 몸은 한 1미터 쯤 공중으로 뛰어오른 것 같다.
“다, 당신은….”
“너희들은 누구니?”
어둠에 도사린 누군가가 다시금 우리를 향해 물어왔다. 곧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까만 면사포였다. 온통 까만 드레스에 촛대를 쥔 손에는 까만 장갑이 끼워져 있다. 이 도원의 우두머리였던 미르와 같은 복장.
하지만 존칭과 경어를 사용했던 미르와 다르게 눈앞의 여자는 그 태도가 제법 밝다고 해야할지, 자유분방하다고 해야할지….
그때 나는 답을 내렸다. 이 사람은…. 하지만, 그 답을 입밖으로 꺼내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해 입을 가볍게 다물었을 때였다.
“당신이 나루야?”
나르미가 물었다.
그에 촛불을 나르미의 얼굴에 가져다 댄 까만 상복의 여성이 촛불을 이리저리 가져다 대며 그 모습을 확인하는 듯하더니 파르르 떨었다.
“너는,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너는 나르미. 나르미구나. 동생인 나르미.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거지? 내가 꿈을 꾸는 건가?”
나루와 나르미가 서로를 확인했다.
그 순간.
━저기 안쪽으로 가 봐.
━나는 이쪽으로 간다.
누군가 바깥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내 예민한 반요정 귀에 따르면 이건 분명 바깥에 잠들어 있던 경비들이 깨어났거나 혹은 다른 경비들에게 발각당한 소리다.
이대로 있다면 들키고 말 텐데.
내가 초조하게 있으려니 까만 상복을 입은 여성 나루가 말했다.
“일단 내 방으로 숨자.”
그리하여 우리는 장지문을 열고 나루의 방으로 숨었다. 침대와 촛불 그리고 의자와 탁자 하나가 끝인 조촐한 방이다.
그 침대 아래에 나와 나르미는 몸을 웅크려 숨었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다. 모르모르였으면 이 상황을 엄청 좋아했겠네.
모르모르나 마르마르 같은 임프 친구들이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저, 나루 님. 혹시 수상한 자들이나 낌새를 느끼지 못했습니까?
“글쎄. 나는 모르겠는데.”
━안쪽을 혹시 수색해 봐도 좋은지….
“어허, 나는 대종사의 동생이야. 감히 내 방을 함부로 수색한다니. 그리고 지금 내가 어떤 수행중인지 모를 리 없을 텐데? 너희들이 나를 본다면 큰일 날 걸.”
나루의 으름장에 장지문 너머로 난처한 목소리가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이내 으흠-기침하고는 물러났다.
━주변 경비를 강화하겠습니다. 나루 님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근처에 위치한 경비들을 호출해주시기를.
그것으로 저벅저벅 발걸음이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마침내 저택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나는 안도하는 느낌으로 침대 밑에서 빠져나왔다.
나르미가 말했다.
“당신이 정말 나루 맞지?”
“그래. 나는 나루야. 나루 폰 드레이코. 그리고 너는 나르미구나. 미르나의 동생 나르미.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
“어떻게 나를 알아봐? 나는….”
“나르미, 너는 언니랑 우는 소리도 달랐어. 다른 사람들은 구분하지 못해도. 나는 구분할 수 있었지. 내가 열 달이나 품고 있던 딸들이니까.”
열 달이나 품고 있던 딸인가. 그 말에 나르미도 어깨에 감돌고 있던 경계심을 푼 것 같았다. “그럼 진짜 엄마야?”라고 묻는다. 그에 나루는 “그래.”라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것을 가장 먼저 깨트린 것은 나르미 쪽이었다.
“만나면, 엄청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니까 한 마디도 생각 안나…! 그리고, 뭣보다 만났다는 실감이 안 들어. 온통 검은 옷으로 칭칭 가려서…!”
나르미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나도 당장 내 어머니랑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는…뭐라고 해야하나. 말문이 팍-막혔었지. 어색하기도 했고.
나르미가 물었다.
“그 검은 옷은 뭐야? 얼굴을 보여줘! 나는, 엄마 얼굴을 보고 싶어!”
“그건…. 그건 불가능해. 나는 누구에게도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이건 그런 수행이니까. 누군가가 나를 보게 된다면…. 모든 수행이 물거품이 되고 말아.”
“흐응….”
아쉬운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는 나르미였다. 살짝 분위기가 어색해지려고 하던 찰나에 검은 면사포 아래로 나루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작은 반요정은 누구니? 반요정을 보는 건 엄청 오랜만이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얘는 태오야! 나랑 언니의 남편!”
“나르미, 너와 미르나가 결혼을 했어…!? 이 작은 반요정이 너희들의 남편이라고? 같은 남자랑 결혼을 한 거야…!?”
나루는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혀를 내둘렀다.
반대 입장이었으면 나도 그랬을 것 같다.
이걸 뭐 어떻게 설명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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