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13
당문전생 (13)
기름 한 방울까지 쥐어짜라
“아, 여 할머니가 아니시오이까?”
추 대인이 늙은 여인을 맞이하자 그녀가 비틀비틀 다가와서 풀썩 주저앉았다.
“대인, 추 대인…… 이 늙은이 소원 좀 들어주시구랴.”
“아니, 이러지 마시고, 일단 진정하시지요.”
이곳은 추원이자 추 대인이 이른바 중리 대출을 시작한 장소다.
마을 사람들은 추 대인이 발표한 터무니없이 낮은 이자에 혹해서 하나둘 모여들었고, 추원은 금방 입추의 여지도 없을 정도로 꽉 차 버렸다.
“그게, 추 대인…… 도, 돈을 좀 변통할 수 있을까 해서.”
자신에게 물을 한 잔 건네는 추 대인의 손을 잡으며 여씨 할머니가 울먹였다.
“아시다시피 이 늙은이가 홀몸으로 손주 두 놈을 키우지 않았수? 부족하지만 나름 열심히 건사해서 이놈들이 바르게 자랐는데.”
그러다 맏손자가 큰 뜻을 품고 경사로 가려는데 노잣돈이 없단다.
“마땅한 담보로 없고, 가진 거라야 다 쓰러져 가는 움막이랑 이 몸뚱어리 하나가 전부…….”
“얼마나 필요하시오?”
“예?”
구구절절 하소연하는 여 할머니의 말을 자르며 추 대인이 목함을 열었다.
“얼마 필요하시냐고 묻지 않소이까?”
“저, 정말로 빌려주시려고요?”
“돈 빌려주겠다고 연 장소에서 돈을 융통해 주지 않으면 어쩌겠소이까?”
추 대인이 환하게 웃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왕 할머니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럼 두, 두 냥이면…….”
“경사까지 갈 노잣돈이라면서 고작 두 냥 가지고 되겠습니까?”
목함에서 은자 석 냥을 꺼낸 추 대인이 여 할머니의 손에 그것을 쥐여 주었다.
“들으신 바대로 이자는 삼 할이외다. 뒤편에 가서 증문(證文)을 작성하시면 됩니다.”
왕방울보다 몇십 배 커진 눈으로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하는 여씨 할머니를 웃으며 배웅한 추 대인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불안하지 않은가?”
“뭐가 말입니까?”
“담보도 없고, 신용도 바닥인 빈민들에게 이리 지출해도 괜찮겠냐는 걸세.”
추 대인이 묻자 주렴 뒤에서 대출 서류를 정리하던 장삼이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소?”
“어째서긴.”
처음보다 확연히 줄어든 목함 안의 동전을 보며 추 대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야 대리인 격으로 돈을 뭉텅뭉텅 빌려주면 그만이지만 실질적인 전주는 장삼이 자네인데 이러다 돌려받지 못하면 어쩔까 해서 묻는다네.”
이때 장삼이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돈 빌려주겠다고 연 장소에서 돈을 융통해 주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뭐?”
주렴으로 고개를 돌린 추 대인이 곧 폭소를 터트렸다.
“와하핫! 맞아! 맞는 말이야!”
기분 좋게 웃음 짓던 추 대인이 뒤이어 들어온 사람을 보고 다시 정색했다.
“어서 오시구려.”
“으음.”
모습을 드러낸 이는 두건을 푹 눌러써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자였다.
이로 미루어 뭔가 구린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추 대인은 개의치 않았다.
원래 이 바닥은 이런저런 놈들이 다 모여드는 법이니까.
주변을 꼼꼼히 살핀 두건 사내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얼굴을 드러냈다.
“귀하는?”
“나 남종석이요.”
“남종석?”
추 대인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남종석이란 자가 그에게 귀띔했다.
“남경만 대인의 둘째 아들이지.”
얼굴에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이십 대 초반의 사내가 거드름을 부리자 추 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종식은 그리 유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부친인 남경만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까.
남경만은 만석갑부로서 이 마을에서 그의 논밭에 붙어사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이를 빌미로 남경만은 소작농들의 고혈을 쥐어짜 냈고, 그의 부는 나날이 쌓여 갔다.
“지체 높으신 남경만 대인의 둘째 자제께서 이런 미천한 곳엔 어인 일로?”
추 대인이 몸을 낮추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남종석이 다리를 꼬았다.
“내가 얼마 전에 큰 뜻을 품고 사업을 좀 하다 일이 틀어졌지 뭐요.”
일이 틀어지긴 개뿔.
‘주색잡기에 노름판이나 전전하다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졌겠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추 대인이 친절하게 응대했다.
“어쩌다 그런 일이!”
“본래 세상사가 뜻대로만 풀리겠소? 그래서 말인데…….”
은근히 목소리를 낮춘 남종석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내 돈을 좀 변통하려는데…….”
“얼마나 필요하시오?”
습관적으로 목함을 여는 추 대인을 못마땅한 얼굴로 응시하던 남종석이 탁자를 두드렸다.
“이 몸이 지금 푼돈이나 꾸자고 이곳을 찾았겠소이까?”
아따, 어린 자식이 시건방지기는.
“물론 그렇겠지요. 그래, 얼마나 필요하신지?”
가히 보살급의 응대로 추 대인이 비위를 맞추자 남종석이 거대한 콧방귀를 날렸다.
“칠백 냥.”
“칠백 냥씩이나요?”
은자 백 냥만 있어도 네 식구가 몇 년 동안 일 안 하고 지낼 액수다.
그런데 칠백 냥이라면?
“왜, 어렵소?”
남종석이 도발적으로 묻자 추 대인이 턱을 오연하게 들었다.
“설마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전표 집을 꺼낸 추 대인이 그것 가운데 하나를 건넸다.
“칠백 냥이외다.”
추 대인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칠백 냥짜리 전표를 건넸다.
떠억!
입이 하마처럼 벌어진 남종석이 전표와 추 대인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당문에서 인정하는 황금산장에서 발행한 전표니까 확실하다오.”
쐐기를 박는 추 대인의 말 따윈 들은 척도 하지 않던 남종석이 곧 못 미더운 표정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저, 정말로 칠백 냥을 고작 삼 할 이자로 빌려준다는 소리요?”
“여부가 있겠소이까? 대신…….”
추 대인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다소 고액이 나가다 보니 작성할 서류가 좀 많다는 점은 이해하시구려.”
“그까짓 종이쪼가리! 내 얼마든지 써 주지!”
낄낄거리며 나서는 남종석을 눈동자만 돌려서 배웅하던 추 대인이 바람결에 속삭였다.
“저자가 작성할 서류는 서민들과는 다르겠지?”
“물론입니다. 저놈은 중리를 가장한 살인적인 고리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돈을 제때 갚으면 고리에 시달릴 일이 없지 않은가?”
“당연하지요.”
주렴 뒤에서 장삼이 턱을 문질렀다.
“추 형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소싯적부터 뒷골목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저런 부잣집 망나니들을 수도 없이 겪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겠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저런 놈들은 근성부터 썩어서 절대 저 습관 못 고쳐요. 모르긴 몰라도 빌려 간 돈도 유흥비로 탕진할 겁니다.”
“고리 이자를 갚지 않고 또 주색잡기에 매진할 것이다?”
“십 중 구…… 아니, 십 중 십입니다. 피땀 흘려 돈을 벌어 보지 않고 고액을 마구 써 댄 놈들은 동전 한 푼의 소중함을 알 수가 없거든요.”
추원의 대출은 기본적으로 중리다.
다만 생활 자금으로 대출이 나가지 않는 경우, 이자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변동된다.
“그래서 이중 서류를 요구하는 거지요.”
일반적으로는 한 통이지만 다른 용도로 빌리면 십수 장의 서류를 작성하게 만든다.
물론 이는 그들이 제때 돈을 갚지 않으면 엄청난 일을 겪도록 유도하는 장치다.
“다만 제가 숫자에 아직은 밝지 않아서 효과적으로 놈들을 쥐어짜 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장삼이 서류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형님도 당찬일 대형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장삼 입장에서 당찬일도 형님이고, 추엽도 형님이다.
이러다 보니 그는 추엽을 형님, 당찬일을 그보다 높여서 대형(大兄)으로 부르게 되었다.
“물론 기억하네. 어찌 대주의 말씀을 잊겠나.”
중리 사채를 시작하면서 당찬일은 장삼과 추 대인에게 엄명을 내렸다.
“서민들에겐 중리 이상의 이자를 받지 마라. 다만…….”
―배때기 부른 놈들이라면 기름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라!
당찬일의 명령을 회고하며 장삼이 입맛을 다셨다.
“이런 거 잘하는 사람 하나 영입하면 죽여주겠는데 말입니다.”
* *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당찬일은 어김없이 대식당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당문 내에서 당찬일은 연양대왕(年糕大王), 즉 떡보로 불렸다.
물론 당찬일의 본 목적은 떡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속내를 알 리 없었다.
단지 떡에 목을 매는 소년 정도로 치부되어 얼굴은 팔리지만 뭐 어떤가?
이 정도의 오명(汚名)은 감수하고도 남을 자신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 가끔은 도움이 된다.
대식당에 거의 보름을 들락거리다 보니 현재 당문이 어찌 돌아가는지 대충 파악했다.
대체 당문은 어떤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자재의 반입 규모로 미루어 중대형 시설을 건축하는 모양인데, 그것을 짓는 목적이 무엇일까?’
현재 당문의 가주인 당과로는 모종의 문제로 제갈세가를 방문 중이다.
지도자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일정한 기간까지는 당문의 체계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그만큼 당문이란 조직이 탄탄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단적인 예라서 당찬일이 묘한 호승심을 느꼈다.
‘이렇게 컸단 말이지?’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난다.
전생이었더라면 손가락 마디를 꺾어서 소리를 내 주는 것으로 자신의 투지를 선보였겠지만 지금은 열세 살 소년이라 당찬일은 그저 웃었다.
누구도 짐작 못 할 섬뜩한 속내를 가려 줄 가식의 미소 말이다.
‘뭐, 좋아. 당문에서 어떤 일을 벌이는지는 차차 알아내기로 하고, 일단 내가 할 일에 충실하자.’
당찬일이 자꾸만 확장하는 상념의 파장을 일단 끊어 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또 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고.
지금은 당면 과제에 충실해야만 한다.
이전 방문하려다 찾지 못했던 독약처로 발길을 돌리던 당찬일이 익숙한 소리에 귓구멍을 활짝 열었다.
슥― 슥― 슥―.
귀에 익은 빗자루 소리.
‘벌써 정오인가?’
이건 비단 몇 달 동안 들었던 음향이 아니다.
놀랍게도 당찬일은 해결사로 일하던 전생에도 이 빗자루 소리를 들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사실은 그가 당문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 소리가 정확히 정오가 되면 시작되었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빗자루 소리가 들리면 정오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풍경이다, 풍경. 당문엔 없어서는 안 될 풍경.’
비질하는 노인을 곁눈질하며 당찬일이 독약처가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당찬일이 문을 열자 거대한 몸집의 여인이 그를 맞이했다.
‘여전하군, 왕 숙모.’
당문에는 수많은 인재가 존재하지만 그중 여걸삼대장(女傑 三大將)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당찬일에게 매일 떡을 주는 주방 대장 윤 파파, 당문의 후기지수들을 가르치는 교육 대장 왕 숙모와 또 한 사람의 여인이 바로 그들이다.
‘독약처에 학습실이 있으니 왕 숙모가 나를 맞이하는 건 당연하지.’
고소 지으며 당찬일이 왕 숙모에게 어디부터 견학해야 하는지 물었다.
“견학도 좋지만 마침 수업 시간이니 자리에 앉으시지요.”
“난 수업받으러 오지 않았소…… 아니, 어…….”
너무 어른스러운 말투를 사용하면 의심을 받을지 몰라서 당찬일이 말꼬리를 바꾸었다.
“일단.”
텁!
당찬일의 목덜미를 가볍게 움켜잡은 왕 숙모가 그를 살짝 끌었다.
“앉으세요.”
쿵!
학습실 의자에 강제로 앉혀진 당찬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돌적인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오죽하면 교육 대장으로 불릴까.
‘수업 시간에 내빼면 당과로의 직계라도 벌을 세운다는 교육 대장이니,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