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ing to Fight Bulk RAW novel - chapter 31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는 2학기가 되면 사법연수원은 주차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북적인다.
1년차 연수생들은 2학기의 가장 큰 행사인 모의재판을 준비하기 때문에, 그리고 2년차 연수생들은 실무 수습을 마치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휴식이라고 하기엔 몸에게 너무 미안할 정도로 짧은 시간을 쉰 상태.
나 역시 모의재판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공판 검사 한치우]법관 임용 순위가 어떻든 이미 검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나한테는 꽤나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물론 나 말고도 교수와 동기생들 모두가 내 임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내 뜻을 짐작하여 배치해 준 역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첫 재판이네.”
모의재판 시나리오 표를 보며 말했다.
[변호사 김동기]시나리오 표에 익숙한 이름이 하나 보였다.
김동기.
앞담화 같은 뒷담화를 까대던 녀석.
“잘됐네. 한 번 싸워보고 싶었는데.”
주먹다짐이 아니다.
법정에서 변호사와 검사는 주먹다짐보다 더욱 험하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상대였다.
[재판장 노형인]“이 사람이 사시 차석이라 그랬지.”
나한테 별로 좋은 감정은 아닐 것이다.
나만 없었다면 자신이 수석이 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뭐…….”
악감정은 아닐 것이다.
악감정을 갖기엔 수석과 차석의 차이가 어마어마했으니까.
악감정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나와 같은 시기에 사법시험을 본 것을 후회하고 있겠지.
“날씨가 선선하네.”
이제 9월의 시작이었지만, 날씨가 꽤나 선선한 탓에 불과 며칠 전과 달리 덥지 않았다.
“무겁다 무거워.”
내 복장은 평소와 달랐다.
정장 위에 걸친 옷.
그 옷이 꽤 무거웠고 걸음은 가벼웠다.
지익―
법정 문이 열리고 걸친 옷이 가벼워졌다.
이 안에서 만큼은 이 옷에 따라온 책임감을 마음껏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지금부터 형사 모의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처음이었다.
다시 살아난 이후 꿈에 그리던 법복을 입은 것은.
“검사 역은 1반 A조 한치우 연수생입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딱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동기들이 법복을 입고 모의재판을 할 때, 나는 죄수복을 입고 법정에 서 있었다.
물론 이번 삶에서는 그런 상황이 다시 반복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사법연수가 다 끝날 때쯤 열릴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지도 않을 생각일뿐더러, 내가 간다는 소문이 들리면 명선호는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녀석은 잘 살고 있으려나?’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생각까지 떠올릴 정도로 나도 나름대로 긴장을 한 상태였다.
그러고 있는 사이 본격적인 모의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에 앞서 휴대전화를 꺼 주시고 재판 중에는 정숙해 주시길 바랍니다.”
비록 연기를 위해 입었지만, 지금 내가 입은 법복은 단순한 섬유조직으로 짠 옷이 아니었다.
검사 법복의 규칙은 법무부령으로 정해 놓을 만큼 책임감과 무게가 뒤따랐다.
“2007 고합 1 특수 절도 사건 피고인들 앞으로 나오세요.”
책임감과 무게가 뒤따르는 것은 법복뿐만이 아니었다.
모의재판은 사법연수원에서 실시하는 꽤나 큰 행사였고, 실제 법원에서 열리기도 했다.
대학교에서 하는 모의재판과는 규모와 배우들부터가 다르다.
실제로 법조인이 될 사람들이 출연하고, 의상과 장소는 법무부에서 지원한 정도니까.
“변호인들 출석했습니까?”
연기가 얼마나 실감나면 실제 재판인 줄 알고 방청객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피고인 오정탁의 변호인, 김동기 출석했습니다.”
변호인 역을 맡은 김동기.
그와의 인연이 재판을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검사는 무슨 이유로 오정탁 피고인에 대한 형사재판을 청구하셨죠?”
재판장의 말로 내 인생의 첫 재판이 시작되었다.
“피고 오정탁은 2006년 5월 14일 고양시 장항2동의 한 아파트에 불법 침입해 잠들어 있던 피해자를 칼로 수십 차례 찔러 사망케 했습니다. 이에 오정탁 피고인을 형법 제250조 살인죄로 기소하였습니다.”
보통 재판은 피고인들에게 진술거부권을 고지하며 검사의 최초 진술로 시작된다.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아니요. 인정하지 않습니다.”
재판장의 질문에 변호사역을 맡은 김동기가 나를 보고 슬쩍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네?”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재판장이 다시 한번 되묻는 이유?
짜여진 시나리오를 김동기가 틀었기 때문이다.
나를 보고 슬쩍 웃은 이유는 한 번 해보자는 뜻이고.
원래의 시나리오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형량을 낮추는 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아… 그럼…….”
재판장역 역시 동기생일 뿐이었기에 당황하며 참관하고 있던 교수들의 눈치를 살폈다.
씨익.
당황한 재판장과 달리 교수들의 눈과 입은 재미있는 영화의 예고편을 보는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증거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인은 검사의 공소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였고, 검사는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수들의 뜻을 읽은 재판장이 틀어진 시나리오를 그대로 진행했다.
‘한 번 해보자고.’
‘그래. 재미있겠네.’
나는 김동기와 눈빛으로 대화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고인 오정탁이 수사기관에서 조사받던 서류와 피해자 아파트 경비원의 진술 기록, 그리고 CCTV 화면을 증거자료로 제출합니다.”
“피고인 측도 제출할 증거가 있습니까?”
“피고인 측 역시 똑같은 자료를 증거로 제출합니다.”
미리 짜인 시나리오인 만큼 증거 역시 정해져 있었다.
김동기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같은 증거를 놓고 오직 법정 안에서의 싸움으로 승부를 보자는 뜻이다.
“좋습니다. 제출하신 증거를 모두 채택하겠습니다.”
배석판사와 귓속말을 하던 재판장이 증거를 채택하자, 경위가 증거들을 모아 서기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재판장의 뜻이 아닐 것이다.
재판장은 동기생이자 연기자이지만, 양옆에 앉아 있는 배석판사들은 현직 판사이자 교수였으니까.
귓속말을 통해 둘의 뜻이 재판장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일 뿐이다.
웃고 있는 걸 보니 나와 김동기가 만든 장단을 맞춰 주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럼. 검사는 피고인 신문을 시작하십시오.”
틀어진 시나리오에 당황한 것은 오정탁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고는 홍길동 씨를 살해한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인정…….”
그렇기에 오정탁 역시 교수들의 눈치를 살폈다.
휙.
하지만 교수들 역시 나와 김동기가 만든 시나리오에 빠져 버렸고, 이 모의재판의 끝을 보고 싶어 했다.
“…하지 않습니다.”
교수들이 뜻을 확인한 오영탁이 흔들리던 눈빛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피해자가 살던 아파트는 입구가 하나밖에 없었고, 사망 추정 시각 당시 CCTV에 찍힌 사람은 피고인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그건…….”
그렇게 판이 만들어졌다.
나와 김동기가 싸울 수 있는 판이.
이곳에서 오정탁은 조연일 뿐이다.
주연은 나와 김동기이고, 교수들 역시 주연들의 싸움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이의 있습니다! CCTV 화면에 찍혔다고 살인의 집적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피해자는 독신 남성이었습니다. 사망 추정 시간에 아파트를 출입한 것은 피고인뿐이었고요.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평소 피해자와 피고인은 친분이 있었고, 집도 스스럼없이 오가는 사이였습니다. 그날 역시 평범한 방문이었고요.”
“평범한 방문이라…….”
판사들의 시선이 검사석으로 향하자 같은 검사 역을 맡은 서윤호가 서류 하나를 건넸다.
“피고인은 지속적인 빛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차용증]차용증을 높이 올려 보이며 말했다.
“피해자인 홍길동 씨에게 말입니다. 이 차용증을 증거자료로 제출합니다.”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님. 두 사람은 어떠한 금융거래 기록도 없고 단지 소액의 현찰을 빌려준 대가로 작성한 차용증입니다.”
“이 증거의 요지는 금전 거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고인의 평범한 방문이 살인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는 증거이죠.”
재판은 치열한 싸움이다.
만약 나와 김동기가 서로 감정이 없다던가, 모의재판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같은 증거를 놓고도 검사와 변호사의 진술에 따라 효력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증거로 채택하겠습니다.”
“휴…….”
긴 한숨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는 김동기.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재판의 끝은 공정하지만, 자신은 불공평해질 것이라는 걸.
“또한 비슷한 사건의 대법원 판례를 보면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도 설득력이 충분한 간접증거만으로도 살인죄를 성립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피해자를 찌른 흉기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모르시는 것은 아니겠죠?”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싸움은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재판장 가운데로 나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기로 마음먹었다.
“형사재판에서 범죄 사실의 인정은 법관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검사의 증명이 확실시돼야 합니다. 다만, 지금껏 밝혀진 것 모두가 간접증거이자 간접사실이므로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피고인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단!”
내 연기에 모두가 집중했다.
몇몇은 입을 벌리고 보기까지 했고.
“나타난 간접사실이 상호 모순되지 않았고, 접촉 또한 없었습니다. 또한 살인은 법정형이 무거운 범죄이며,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간접증거만으로도 유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비록 흉기가 나오지 않았다 해도 다른 증거들이 합리적 의심을 허용하지 않다고 볼 수 있으며, 죄를 묻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클라이맥스 연기를 마치고 검사석으로 돌아가자 나를 바라보는 서윤호의 눈빛이 이상했다.
“와… 방금 진짜 검사 같았어요.”
짝짝짝.
교수들은 작은 소리로 박수를 보내기도 했으며, 김동기는 이미 자신감을 잃어 더 이상 연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자! 그럼 검사는 구형해 주시고 변호인은 최종 변론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가장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내 손으로 직접 악(惡)을 벌할 수 있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이 말이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은 한 사람을 칼로 수십 차례나 찔러 살해했으며, 범죄 사실을 부인하고 어떠한 반성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본 검사는 형법 제250조 살인의 죄를 물어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할 것을 요구합니다.”
재판에서 검사의 역할은 이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변호인의 최종 변론은…….
“존경하는 재판장님… 본 사건은 집적적인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사건으로…….”
아마 소용이 없을 것이다.
“자 5분 뒤에 선고하겠습니다.”
애초에 만들어 놓은 판결문이 아니라 재판부 또한 새로운 판결문을 만들 시간이 필요했다.
“피고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길 바랍니다.”
내 첫 재판의 선고.
모의재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마 대본을 따르지 않아 더욱 현실감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부터 2007 고합 1 사건명 살인죄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내 시작은 꽤 좋았다.
“본 재판부는 검사가 제기한 공소사실을 인정하며, 피고인 오정탁에게 형법 제250조 살인의 죄를 물어 징역 15년을 선고합니다.”
* * *
모의재판이라는 큰 행사가 끝나고 1년차 연수생들은 수학여행을 떠났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보통은 제주도로 간다.
사실 어디를 가든 큰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결국 시선은 두꺼운 책 속에 파묻혀 있을 테니 말이다.
“말이 수학여행이지 결국 쫓겨난 거 아니에요?”
“뭐…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저희도 받아야 될 혜택이잖아요.”
짧은 수학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옆자리에 앉은 서윤호와 나는 분명 전생에 로미오와 줄리엣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