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226
제225화
이건 설홍, 그러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가 변방의 마을에서 강설을 만나기까지 한 달 전의 일이다.
제국의 수도 홍연.
환상적인 등불이 거리를 수놓는 이곳에서도 가장 빛나는 장소가 어디인지 묻는다면 홍연의 모두가 용궁이라 답할 것이다.
용궁은 용제, 그러니까 칸 제국을 세운 시조인 홍천이 거하는 곳이었다.
저벅…
저벅…
설홍은 용궁의 주요 행사가 치러지는 잠룡전(潛龍殿)의 입구에 도착했다.
가슴팍이 두꺼운 경계병이 삼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경계병보다 훨씬 아담한 체구의 설홍이 그에게 물었다.
“후우… 어디로 가면 되느냐?”
“설홍 님의 자리는 저쪽입니다.”
“…너무 단상과 먼 자리 아니냐? 이래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텐데….”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안타깝지만 배정된 좌석은 용제께서 정한 규율에 따른 것입니다.”
설홍이 방긋 웃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 최대한 눈을 크게 떠보겠다!”
“…….”
경계병은 굳이 말을 보태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설홍의 상황을 경계병 또한 모를 리 없었다.
스윽…
설홍이 자리에 가 앉았다.
구석 중에서도 구석, 그러니까 아예 주류와는 같은 우주에 있기는 한 건가 싶은 자리에 앉게 된 설홍.
그녀가 이 자리에 앉게 된 이유는 별다른 게 없었다.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홍이냐?”
“아,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무슨… 이름으로 부르거라.”
“자효, 우리 자리가 너무 외지지 않나요?”
“어쩔 수 없지. 우리 같이 용제께서 내놓은 자식들은 저 앞에 갈 수가 없는 것을.”
“자기 비하는 좋지 않아요!”
“주제 파악이라는 거다, 설홍. 너도 현실을 알지 않느냐?”
자효라는 사람은 설홍의 오빠였다.
그런데, 용궁은 그를 오빠라고 부르기에는 꽤나 민망한 환경이었다.
용제 홍천은 무려 300년이나 살아온 괴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처첩이 없었을 리 만무했다.
그중에서도 용제의 첩은 현재만 해도 그 수가 물경 500명이 넘었다. 당연히 용제의 아이들 또한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아버지가 300년을 넘게 살고 있으니 자식들의 나이 또한 다양했다. 아니, 아버지보다 먼저 저승으로 간 자식들이 과반이 넘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첩과 자식들이 모두 노인들만 남은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첩을 들였기에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났다.
지금, 용궁의 가장 중요한 대사를 위해 모인 용의 아이들은 그 수가 수백에 달했지만, 노인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설홍의 앞에 있는 자효라는 남자도 10대인 설홍과는 달리 이미 30대에 들어선 남자였다.
“음? 하하! 이게 누구야? 설홍 아니야?”
“어머? 정말이네?”
설홍을 알아보고 접근해오는 남녀.
뻐드렁니를 드러낸 남자는 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주근깨가 보이는 여자는 소은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어쩜… 자리도 이렇게 외진 곳에….”
“크흐흐흐… 그래도 좌석 배정은 공정한 모양이구나. 네가 이런 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말이야.”
설홍은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오냐, 그런데 네가 오늘 굳이 이곳에 올 필요 있느냐?”
“그러게. 괜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거 아닐까?”
저벅…
저벅…
누군가 다가왔다.
“비켜라.”
“누가… 허업….”
첩의 자식들이 있다면, 처의 자식들 또한 있었다. 그중에서도 영향력이 특히 강한 처의 자식들은 날 때부터 차별 대우를 받았다.
지금, 현을 내려다보고 있는 강철 같은 인상의 남자 또한 그러했다.
남자는 오만한 시선으로 현을 내려다보고는 지나치며 말했다.
“너희 같은 녀석들도 잠룡전을 어지럽히는데 설홍이라 하여 이곳에 오지 못할 이유가 어딨겠느냐? 입 다물고 자리로 돌아가라. 곧 시작할 테니.”
으드득…
“아, 알겠습니다.”
현과 소은에게서 설홍을 구한 남자는 태율이라는 이름의 적자였다.
무려 정실이 낳은, 용의 아이 중 후계자 서열 1위라고 평가받는 인재 중의 인재였다.
설홍은 그런 태율에게서 구원받았음에도 표정이 밝아지지 않았다.
선의에서 비롯된 구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의 위세를 뽐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이곳은 그런 곳이고, 이들은 그런 이들이었다.
아무튼, 용제는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조용! 침묵하라!”
그런데 잠시 후, 용제의 측근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재상 방휴가 단상으로 올라와 말했다.
“오늘, 용제께서는 잠룡전에 방문하시지 않습니다.”
“예?”
“맙소사….”
“대체…?”
팟-!
방휴는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읽었다.
“칸 제국의 꽃들이여. 무릇, 꽃이라 하여 그 색과 형태로만 존재를 뽐내어서는 안 된다. 향기 또한 꽃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곳, 용의 땅엔 언제나 나 홍천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존재한다.”
꿀꺽…
방휴의 말을 제외하면 목울대로 넘어가는 침 소리만 들려왔다.
모두 긴장된 눈으로 방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꽃의 향은 널리 퍼질수록 가치가 있는 법, 나 홍천은 너희로 하여금 세상의 어지러움을 바로잡고자 한다. 용화(龍華)들이여, 세상으로 나가 너희의 가치를 증명하라.”
용화(龍華).
용의 자식들은 모두 용의 꽃이라 불리었다.
저마다 특징을 따 꽃의 이름을 붙였는데 실존하는 꽃도 있는 반면, 상상 속의 꽃도 있었다.
“하나, 너희의 역량과 성장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 모두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수준의 임무만을 맡길 것이고 맡은 일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평가.
갑자기 평가라니?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그리고 그 물음표는 이내 느낌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계속된 시험에서 내려진 평가를 종합하여, 나 홍천을 대신해 칸 제국의 새로운 시대를 이끌 용을 결정할 것이다. 모두, 피 흘리고 아파하며… 승리하라!”
순간, 모두 아찔한 표정을 짓고 입을 벌렸다.
용제가 후계자를 결정하고자 한다.
무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홀로 다스려온 나라를, 후계자에게 넘기려 한다.
그 충격에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는데, 홀로 고개 숙이는 자가 있었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적자인 태율이었다.
곧, 잠룡전의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목놓아 외쳤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사망화(死亡華) 설홍도 그중 하나였다.
* * *
그 사건이 무려 한 달 전이었다.
설홍에게 내려진 임무는, 변방에서 끊임없이 번성하는 도적단 중 하나인 들개를 와해시키고 그곳의 두목인 호서를 처치하라는 내용.
“하아….”
변방까지 어떻게 내려온 것은 좋았다.
다른 형제들의 방해도 없었고 여행길도 문제는 없었다.
다만, 도착하고 난 후의 이야기는 달랐다.
도적단 들개의 규모가 생각보다 거대했던 것.
설홍이 아무리 황족 출신이라 무술을 연마했다 하지만 그것이 도적단 전부를 쓸어버릴 정도는 절대로 아니었다.
더군다나 설홍의 나이는 기껏해야 10대 중반에 근접했을 뿐 아직 장성하지도 못했기에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설홍 님… 쿨럭… 오셨습니까?”
설홍의 숙소엔 노파 한 명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시중을 드는 시녀이자 날 때부터 길러준 보모였다.
설홍의 어머니는 그녀를 출산하고 곧 사망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를 여의고 태어난 그녀에게 붙여진 꽃의 이름은 ‘사망화’였다.
칸의 전설 속에 나오는 꽃으로 죽음을 부르며 쉽사리 만개하지 않는다고 설명된 꽃.
그 저주와도 같은 이름이 그녀에게 붙은 것이다.
“응. 일어날 필요 없어. 누워 있어, 천주!”
천주라는 이름의 주름이 쭈글쭈글한 노파는 울상을 지으며 다시 침상에 몸을 뉘었다.
“하필 원정 중에 병을 얻게 되어 죄송합니다…. 제가 설홍 님께 방해가 되어….”
“그런 말 하지 마. 천주가 없었으면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어.”
세상 경험이 부족한 설홍 대신 마차를 수배하고 위험하지 않으면서도 빠른 길을 찾아낸 천주의 노고를 설홍은 잘 알았다.
하필 그녀가 이 지역의 풍토병에만 걸리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일은 더 쉽게 풀렸을지도 몰랐다.
끼이익…
침상에 걸터앉은 설홍이 입을 열었다.
“천주.”
“예….”
“용쟁… 그만둘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내가 무슨 자격으로 칸을 다스리겠어. 첩의 아이일뿐더러 능력도 부족한….”
“설홍! 쿨럭… 지금 누구 죽는 꼴 보려고 이러십니까?”
“으, 응?”
“당신의 어머니는 실로 대단한 여인이었습니다. 고작 용제의 첩이라는 신분 따위로 그녀를 폄훼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제가 본 그 어떤 여인보다 당당하고 지조 있었습니다. 그녀를 가까이서 본 제가 보증하지요!”
설홍이 물기를 머금은 눈망울로 천주를 바라보았다.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천주의 얼굴은 설홍에게도 아프게 다가왔다.
“그렇지만… 시간이 부족한걸. 천주를 치료할 의원도 찾아야 하고… 또….”
“두려우신 겁니까?”
“…….”
“고작해야 도적단이 두려우신 것인지요?”
“…맞아.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낮에 나가 이 일을 도울 사람을 찾으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맞아. 아무도,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더라.”
설홍이 이야기했다.
“그거 알아? 밖에서 들은 건데, 용쟁에 참가한 용화들에게 엄청난 관심이 쏟아진대. 이 기회에 황족의 눈에 들어 한 자리 차지하려는 무인도 있고 줄을 대어 이문을 보려는 상인도 있어.”
“…….”
“무인들은 운이 좋으면 용석(龍石)까지도 넘볼 수 있는 일이니까, 이번 용쟁은.”
용석(龍石).
용화의 최측근을 의미하는 말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용화의 검이었다.
무력이 약한 용화들은 이러한 용석의 힘으로 입지를 잡곤 했다.
“나처럼 아직 용석도 없는 용화가 있을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겁니다. 설홍 님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자가 언젠가 나타날 겁니다.”
“그게 이번 용쟁이 아니라면… 아니, 지금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일까?”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제가 내일까지 털고 일어나야 설홍 님의 앓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천주….”
노파가 씨익 웃으며 설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씩씩하게… 이겨냅시다.”
설홍은 노파에게 안겼다.
그들의 대화를, 문밖에서 누군가 듣고 있다가 자리를 떴다.
* * *
‘어떻게 이럴 수가….’
설홍과 노파의 대화를 잠시 엿듣던 사람은 바로 강설이었다.
그는 지금 설홍의 정체를 깨닫고 혼란스러운 와중이었다.
그 혼란의 근원은 설홍의 신분이 아닌, 설홍이라는 여인의 존재 그 자체였다.
– 긍까 후계자 싸움 나온 왕녀라는 거지?
– 저 꼬맹이가?
– 할머니랑 손녀 불쌍해 ㅠㅠ
– 조손 관계 맞음? ㅋㅋㅋ 걍 시녀인 거 같은데.
– 용쟁? 뭔지 모르겠는데 재밌을 거 같은데?
– 근데 눈사람 표정 왜 저러냐 ㅋㅋ?
– 식은땀 흘리는데;;
– 그러게, 뭔 일 있나?
강설은 설홍과 천주가 묶고 있는 방의 바로 옆방에 자리했다.
워낙 외진 곳에 있는 마을이고 그리 좋지도 않은 숙소라 방을 잡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설홍이라는 이름과 소명의 화살표가 계속 걸려 쫓아온 이곳에서, 강설은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했다.
“설홍이라면… 내… 내….”
강설은 설홍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았다.
용제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칼의 무희 유화.
유화는 강설의 말 중 하나였다.
강설은 말을 30개나 육성한 플레이어였고, 그 안에 일정한 틀은 없었다.
어떨 때는 여성으로, 어떨 때는 이종족으로도 플레이했었다.
그렇다.
그야말로 신처럼, 모든 존재의 몸에 깃들었었다.
칼의 무희 유화 또한 아주 오래전, 강설이라는 신이 깃들었던 존재였다.
그렇다는 얘기는, 유화가 남긴 딸은 곧 강설의 딸이라는 얘기와 마찬가지.
‘아니지, 그렇게까지 이어지는 건 비약인가?’
인생 게임을 즐겼다고 해서 말의 인생까지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설홍은 유화의 딸일 뿐이지 강설의 딸은 아닐 것이다.
강설의 딸이 맞든 아니든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사실, 오르고의 후예 하문과 만났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판데아에 강설의 말이 남긴 흔적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설홍 또한 그런 존재였다.
발자국 앞으로 새로운 발자국들이 제멋대로 생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졸지에 존재를 잊고 있던 설홍을 만나자 강설의 가슴이 심각하게 뛰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였다.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서지 않는 게 옳은가? 하면 그것도 애매했다.
‘확실해. 그녀에게 유화의 유지가 남아있는 거야. 그걸 확인해야 해.’
결국, 접촉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시기는 언제인가?
‘미룰수록 더 힘들어질 거다.’
강설은 결국, 옷차림을 다르게 하고 객잔의 주인에게 찾아갔다.
잠시 후.
똑- 똑-
“…….”
똑똑똑…
“무슨 일이냐?”
설홍과 천주가 묵고 있는 방의 문을 누군가 두들겼다.
“저… 다름이 아니라….”
“그대로구나, 어서 말하거라.”
객잔의 주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의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뭐? 그게 정말이냐?”
며칠 전, 숙소의 주인에게 별 기대하지 않고 던진 말이었는데 상대는 정말로 의원을 찾아봐 준 것이다.
끼이이익…
문을 열어젖히는 설홍.
그 앞에는 평소와는 다른 옷차림의 강설이 서 있었다.
“이곳에 병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돌팔이의 특수 능력이 발동합니다.]
[상대가 당신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천주! 일어나 봐, 의원님이 오셨어!”
강설은 설홍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이 세계에 남긴 외로운 흔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