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452
제451화
후우우욱…
치이이이…
꺼림칙한 열풍이 주변 암반을 부식시키는 와중에도, 카렌은 태연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라진과의 마지막 대화 이후부터 꾸준하게.
– 예전에는 확신이 있었는데, 라진을 만나니까 갑자기 모르겠어. 있잖아….
“역시, 라진을 만나길 잘했어. 이런 행운이 또… 음?”
카렌은 어느새,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피 냄새… 지독한데.”
빗살 문양이 새겨진 문은 굳건하게 그 자리에 존재했다.
입을 꽉 다물어,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처럼 생긴 문.
피식…
“싸구려잖아, 이런 짓.”
후우우우…
다시 한번, 카렌의 손에 엄청난 열기가 모여들었다.
치이이이이…
그녀의 손이 문에 닿자,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굳게 닫혔던 문은 온데간데없이, 이미 틈새가 꽤나 많이 벌어진 문이 그 자리에 있었다.
킥…
그녀의 뒤에서 비웃음이 들려왔다.
“앞서 온 얼간이보단 눈치가 있군.”
진의 목소리와 인간의 목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정확히는 진이 인간을 먹어 치운 것이겠지만.
“하아… 왜 매번 나는 일이 터지고 나타나는 걸까. 옛날부터 지각을 자주해서 벌 받는 거야? 나부터 보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꽤 자신하는구나. 네가 먼저였다면 이 몸도 불평 없이 만족했을 텐데 말이지.”
비신은 카렌이 부패의 열풍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상대의 실력이 앞서 찾아온 뤼지에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비신, 썩어가는 비신이다.”
“네 이름? 난 카렌이야. 네가 여기에 봉인되어 있던 진이지?”
“좀 전까지는 그랬었지.”
“음… 다시 저 문 안으로 들어가 주면 안 될까?”
“다른 선택지는 없나?”
“문 너머에 있으면 돌아오라고 했는데, 문이 열려 있으면 어떻게든 하라고도 했어.”
“라진의 말이군. 네 생각은?”
“어떻게든 할 생각이야. 이래 봬도 말을 잘 듣는 편이거든.”
큭큭…
비신이 뤼지에의 몸을 하고 웃었다.
“그런가… 라진이 또 하나의 멍청이를 보냈구나.”
“라진과 꽤 친해 보이는데? 나쁜 짓은 그만하면 안 될까?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잖아.”
“너, 라진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구나.”
“뭐, 뭐?”
카렌이 화들짝 놀라며 팔을 들어 올려 킁킁댔다.
“씻었는데, 뭐지?”
“…위선적이고 오만에 가득 찬 자.”
“…냄새만 맡아도 바로 아는 거야? 개코네?”
문 너머를 슬쩍 열어본 카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안에는 이곳을 찾은 의회의 시체가 가득했다. 짐승이 한 입 베어 물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안 되지,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동료인가?”
“아니, 적이야.”
“역시 위선자군.”
“…전부 죽인 거야?”
비신은 답하지 않았다.
철컥…
카렌이 검수(劍首)에 한쪽 손을 올렸다.
스으으으…
그것만으로 기세가 천지 차이로 변했다.
“어쩔 수 없네.”
“시건방을 떠는구나, 한낱 고깃덩이 주제에.”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비신이 한쪽 손을 활짝 펴 카렌에게 향했다.
“썩어라.”
[비신이 썩어라!를 사용합니다.]
[썩어라!는 기본 공격을 대체합니다. 대상의 모든 공격과 능력이 부패의 형질을 띱니다.]
[부패는 최대 100까지 중첩되며 최대 중첩 도달 시, 한차례 큰 피해를 줍니다.]
화아아아아악-!
전조도 없이 부패하는 성질을 띤 기운이 카렌에게 쇄도했다.
팟-!
카렌이 크게 원을 그리며 비신의 기운을 떨쳐내려 했다.
“소용없다. 늦춰질 뿐, 필연이다.”
“음….”
휘릭-!
끈질기게 따라오는 오염.
카렌은 속도를 높였다.
[카렌이 도깨비 걸음을 사용합니다.]
[이동 속도가 폭증하며 전방의 충돌로 인해 입는 피해가 대폭 감소합니다.]
[이동 경로에 불의 잔영이 남습니다.]
파아아아앗-!
치이이이이…
비신이 한쪽 팔을 더 뻗었다.
화아아아아-!
부패의 기운이 한 줄기 더 뻗어 나와 사위를 잠식했다.
카렌은 속도를 끌어올려 두 줄기의 오염으로부터 도주했다.
비신은 카렌이 자신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걸 깨닫고 여력을 남겨두었다.
파아앙-!
역시나, 카렌이 오염으로 비신의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불꽃의 검을 휘둘러 비집고 들어왔다.
[비신이 곰팡이를 사용합니다.]
[부딪힌 대상에게 곰팡이를 주입하며, 이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거된다 한들, 시전자의 공격에 노출되면 다시 증식합니다.]
[곰팡이는 부패의 중첩을 가속합니다.]
훅…
뻐어어어억-!
카렌이 앞차기로 비신을 날려버렸지만, 그는 양팔을 교차해 충격을 대부분 막았다.
푸스스스…
“…칫.”
카렌의 각반에 거무튀튀한 곰팡이가 생성되었다.
화르르륵-!
그녀는 몸에 화염을 둘러 곰팡이를 날려버렸다. 하지만, 곰팡이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흩어져 그녀의 갑옷 곳곳으로 퍼졌다.
후두둑…
벽에 처박혔던 비신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 겉으로는 아무런 피해가 없어 보였다.
“나는 진이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영생을 살아갈 수 있지.”
“또?”
“넌 하루살이다.”
“이렇게 큰 하루살이가 어딨어? 나 요정인데.”
“큰 의미는 없다. 어차피 부패하여 죽음을 맞이할 존재인 건 마찬가지니까.”
“요정도 장수한다고… 너무 무시하지는 마. 음… 그것보다, 특별한 일이라….”
카렌이 히죽 웃었다.
“만들고 싶어지는 걸, 우리만의 특별한 일.”
[카렌이 불완전 연소를 사용합니다.]
[활동량에 따라, 불꽃으로 이루어진 갑주가 무장에 더해집니다.]
그녀의 불완전 연소는 본디 밤까마귀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던 힘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고의 경지에 오르며 이러한 제한도 사라졌다.
화르르륵-!
화염으로 형성된 투구가 카렌의 무장에 더해졌다.
철컥…
머리만 비대해진 카렌이 깔깔 웃었다.
“이것 봐, 머리 크지? 웃기지 않아?”
“…제정신이 아니군. 진심으로 해 볼 생각인가?”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해?”
“필멸의 강함과 영원의 강함은 격을 달리한다. 어찌 같다고 생각하지?”
킥…
카렌의 모습이 아지랑이를 남기고 사라졌다.
비신이 그녀의 흔적을 놓쳤다는 걸 깨닫고 흠칫 놀라며 기척이 느껴진 방향으로 양손을 뻗었다.
파아아앙-!
치이이이이이…
타오르는 것인지, 부패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상황.
비신이 카렌의 검을 붙잡고 버텼다.
“무슨… 움직임이….”
전보다 더 빨라진 그녀의 검.
카렌의 얼굴은 투구 속에 감춰졌지만, 그녀의 눈빛은 똑똑히 전해졌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그녀의 눈에 불이 붙었다.
싸늘함을 느낀 비신이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카렌을 오염시켰다.
“부패하라! 생명이여!”
[비신이 노후화를 사용합니다.]
[노후화는 근접한 대상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접촉한 상태에서 부패 중첩을 극대화합니다.]
[접촉한 물체를 부식시킵니다.]
치이이이이…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하문과 강설의 노력을 통해 탄생한 검, 불씨의 검신(劍身)이 썩어 사라지고 있었다.
검신이 썩어 부러지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검을 잃은 기사가 비신을 상대로 이길 리 없을 테니까.
그것을 잘 아는 비신이 검신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웃었다.
“역시, 내가 이겼다. 하루살이여.”
* * *
이건, 카렌이 지고의 호수에 발목까지 잠긴 채로 헤맬 때의 이야기다.
그녀는 허무에 머물며 진정한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했다.
제멋대로 먼저 지고의 경지에 오른 쟈마드나, 지고의 경지마저도 별 감흥 없이 지나칠 우르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이건 그녀만의 싸움.
나아가 그녀의 형제인 카루나와 깨달음을 나누기 위해서도 직접 경험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명상에 빠졌다. 육체를 움직이는 건 이후의 일, 지금은 깨달음을 정리할 때였다.
카렌은 주술사도, 마법사도 아니니 그녀보다 강했던 기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레인.’
태양의 기사 레인.
그녀는 긴 시간 동안, 잠을 자는 시간만 빼고는 그의 가르침을 떠올리려 애썼다.
꽤 고단한 시간이 흘렀다.
진작에 이르렀어야 하는 지고의 경지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야차의 검에서 보였던 것, 레인의 가르침.
둘이 선명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과거를 떠올리려 몸부림쳤지만, 오래된 일이기에 레인의 가르침 전부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답답하고 괴로웠다.
레인은 이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그의 그늘을 벗어났다든가 하는 일이 벌어진 걸까.
‘아니, 택도 없지.’
레인은 말하자면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였다. 그 나무 밑의 그늘을 쉽게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 그의 가르침을 떠올리던 것도 익숙해지자, 마침내 잠을 자는 시간마저도 그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되었다.
레인, 그가 꿈에 나타났다.
“카렌.”
“스읍… 아?”
쿵-!
“으아악! 머리! 나 피 흘리고 있지?”
“그렇게 세게는 안 때렸다.”
카렌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벌떡 일어났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낮잠이냐, 빌어먹을 꼬맹이.”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정오 훈련을 빼먹었더구나.”
“너무 힘들어서… 좀 쉬었다 하려고 한 거야!”
스윽…
레인의 손이 카렌의 이마를 훑었다.
쩍…
눈을 벌려 동공까지 확인.
쯔어억…
입을 벌려 혓바닥과 울대의 상태 확인.
“멀쩡하군. 정오 훈련을 빼먹었으니 저녁까지 훈련이다. 나와.”
“이이… 하아… 알았어, 레인.”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연무장으로 향하는 카렌.
“하!”
“하!”
늦은 오후가 될 시간인데도 연무장은 활기를 띠었다. 다들 강해지는 데에 무척이나 진심이었다.
“네 자린 여기다. 직접 봐줄 테니, 1식부터 시작해라.”
“어제 5식까지 나갔는데….”
“1식부터.”
“흐우….”
레인이 직접 훈련에 참관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보통 정식 기사들에게 시간을 내기도 부족했다.
유독 카렌과 카루나에게만, 그것도 정식 기사도 아닌 그들에게 너무 과한 애정을 쏟는 건 아닌가 하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올 정도였으니.
그런 레인이 마치 카렌의 아버지라도 되는 듯이 오늘도 카렌의 훈련에 직접 관여했다.
“저리 가… 다들 쳐다보잖아.”
“멍청아, 내가 커서 쳐다보는 거다.”
“멍청이 아닌데, 카렌인데.”
“멍청한 카렌, 시작해라.”
“이씨….”
파아악-!
파아아악-!
이 남자는 분명 동방의 귀신이다.
동방의 귀신은 늘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인간을 괴롭힌다고 했다.
“훈련 빠진 건 또 어떻게 알고….”
“손목에 힘을 줘라! 그렇게 휘둘렀다간 관절이 망가진다!”
“예에….”
“대답은 간결히!”
“예.”
“힘 있게!”
“예!”
파아아악-!
파아아악-!
몬트라 검술의 1식은 이제 제법 능숙해졌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레인의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었다.
그래도 역시, 힘든 건 힘든 거다.
‘비가 올 것 같은데….’
우르르릉…
아까부터 하늘이 수상했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은 분위기. 실내 연무장은 공사가 한창이라 야외 연무장만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호우는 훈련 중단의 좋은 구실이었다.
툭…
툭…
‘왔다! 비 님!’
빗방울을 느낀 기사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말했다.
“소나기군. 들어가라, 훈련은 끝이다.”
“종자에게 기름칠을 시켜놔! 잘못하면 갑주에 녹이 슬 테니.”
카렌도 슬쩍 검을 내려놓고 들어가려는 그때, 레인이 물었다.
“뭐 하는 짓이냐?”
“응? 비 오잖아?”
“그게 카렌, 너와 무슨 상관이지?”
“…비 오면 훈련은 그만해야 하잖아?”
“누가 그런 말을 했지?”
“그야… 다들 그러니까….”
레인이 무릎을 굽혀 카렌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넌 정식 기사가 아니기에 개인 갑주도 없어 녹이 슬 일도 없다. 거기다 정오 훈련에 불참해 휴식까지 취했지.”
“비 맞으면서 훈련을 하라고?”
“비 오는 날은 싸우지 않을 생각이냐? 거참 까다롭구나!”
“비 오는 날에 싸울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으로 카렌을 바라보았다.
“많다. 아주 많아.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그 어떤 날도 싸워야 해. 상대는 네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스윽…
레인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검을 들고 자리에 서.”
반발감이 치솟았다.
“으… 싫어!”
“검 들어.”
“싫어어어! 몰라! 갈 거야!”
팍-!
검을 패대기 친 카렌이 등 돌려 떠나는데 레인이 그녀의 등 뒤에 말했다.
“카렌, 난 여기 있을 거다.”
“…….”
“여기서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카렌이 슬쩍 돌아보자, 레인은 무표정을 내비쳤다.
“남은 훈련을 마저 할 거다.”
“레인 따위… 정말 싫어.”
쏴아아아아…
연무장에 레인을 남겨두고 도망쳐오는 카렌.
비에 옷이 젖었기에 가장 먼저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레인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 잊었다. 어린아이의 강점이 빠른 망각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베개를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