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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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빛 머리칼은 양옆을 땋아서 꼬아둔 채였다.
머리에 하얀 베일을 씌운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호위 신자와 함께 구 교정을 거닐었다.
헬리제 교단의 성녀, 비앙카 앙투라제와 그녀의 호위인 사일론이었다.
이곳은 마르크스 약조를 통해 아카데미를 거닐 수 있는 인물로 등록되지 않은 이상 돌아다닐 수 없는 장소, 구 메르헨 아카데미.
작년 학기말 평가 때 전설의 마수인 뇌신조가 마족에게 지배당하며 대형 사고가 벌어졌던 곳이었다.
마치 폐허와도 같은 풍경. 사일론은 종말한 세계에 성녀님과 함께 남겨진 듯한 요상한 기분을 느꼈다.
유지보수에 예산이 투입되지 않은 걸까. 군데군데 무너진 건물들이 보였다. 비앙카는 무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일론, 여기에 이름 없는 영웅의 흔적이 있을 거라 보는가?”
눈을 감은 채 사일론을 바라보며 묻는 비앙카. 실눈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고운 목소리는 엄숙한 말투와 절묘하게 잘 어우러졌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알 것이라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니네. 의견을 말해 보란 거지.”
“예. 그런 거라면…. 일단 이름 없는 영웅이 뇌신조와 싸웠던 장소에 뭔가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건물이… 바로 그 장소인 듯한데. 저쪽에 가보는 게 어떠신지요?”
사일론은 높은 언덕 위쪽을 가리켰다.
반쪽이 심각하게 반파된 성 형태의 건물이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때 메르헨 아카데미를 상징했던 아름다운 붉은 성, 카를리관.
아이작이 사역의 베라와 그녀의 하수인들, 그리고 뇌신조-갈리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장소였다.
“좋아. 저기로 가보지.”
비앙카와 사일론은 카를리관으로 향했다.
그녀는 이름 없는 영웅을 추적하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목적은 단 하나뿐. 이름 없는 영웅과 동료 사이가 되고 싶어서였다.
자신은 빛 속성을 타고난 인간. 주신 만할라를 섬기는 헬리제 교단의 성녀. 그러니 마족을 제 손으로 직접 처단하고자 메르헨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이거늘.
이름 없는 영웅의 압도적인 무력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후론 무엇도 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짐작했다.
그러니, 이름 없는 영웅의 편이 된다면 자신도 마족을 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올 터.
그렇다, 마족 죽이기. 그것이 빛 속성을 타고난 성녀의 의무이지 않겠는가. 주신 만할라께서 주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앙카는 그런 마음으로 이름 없는 영웅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언덕 앞에 이르렀다.
“성녀님, 띄워드리겠….”
“됐어. 그냥 걷지.”
그대로 두 사람은 언덕을 올라 카를리관에 이르렀다. 사일론은 숨을 헉헉 댔으나, 비앙카는 체력에 조금도 지장이 없다는 듯 호흡이 안정적이었다.
카를리관. 가까이서 보니 더욱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있었다. 생명력 넘치는 넝쿨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고 있는 광경.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져 건물을 부수고 땅에 처박힌 적이 있다는 걸 추론할 수 있는, 완전히 박살 난 외관. 그리고 크레이터.
비앙카와 사일론은 자신들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치열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적어도 한때 구 메르헨 아카데미의 상징이었던 카를리관 정도는 재건축해야 하지 않겠나, 라는 생각을 비앙카는 잠시 떠올렸지만.
이내, 그녀는 아카데미의 처지를 납득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년, 온갖 마족이 출현했던 탓에 수많은 투자자가 떠나버렸을 텐데.
메르헨 아카데미 처지에선 카를리관을 수복할 금전적 여유가 없었겠지.
투자자 수가 다시 늘고 안정기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구 교정을 보수할 여유가 생길 것이었다.
…그런 건 조금도 재미있지 않은 이야기였다. 비앙카는 쓸데없는 생각은 관두기로 했다.
고개를 들어 건물의 반파된 반쪽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 층. 제단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멀쩡한 구간에 걸쳐져 있었다.
“여기서 이름 없는 영웅이 뇌신조를 쓰러뜨렸단 건가? …음?”
비앙카는 제단 근처, 벽면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다.
빛 속성의 힘, [광명의 눈].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비앙카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
아무리 감지하기 어려운 마력이라고 해도, 인간이 어떻게든 알아채는 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마력의 형상을 구분 지을 수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마법이 벽면에 걸려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법한 수준 높은 마법이었다.
마력의 형상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 마법의 정체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비앙카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날 저 위로 띄워주겠는가?”
“알겠습니다.”
비앙카와 사일론은 바람 마법을 타고 반파된 건물 위쪽으로 올라갔다.
제단 앞에 착지하는 두 사람.
비앙카는 벽면을 스으으, 쓸어 만지다가 이상한 감촉이 느껴지는 구간에서 뚝 멈춰 섰다.
똑똑, 벽면을 두들기는 비앙카. 그러다 툭툭, 하고 공허한 소리가 들렸다.
“사일론. 이 안, 텅 비었다만.”
“예…? 성녀님?!”
비앙카는 신성력을 살짝 불어 넣었고, 서서히 벽면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자그마한 물결이 벽면을 타고 퍼져 나갔다.
비앙카가 단숨에 벽을 통과하자, 사일론은 화들짝 놀라 다급히 그녀를 뒤쫓았고.
“……!”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사일론의 몸은 가볍게 벽을 통과했다.
“여긴…?”
돌연 후각을 자극하는 퀴퀴한 냄새. 협소하고 낡아빠진 비밀 서재가 사일론의 시야에 비쳤다.
벽면에는 발광 램프가 매달린 채 은은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기에, 비앙카와 사일론은 주변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일론은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먼지 무리가 발광 램프의 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조심스레 책장에 놓인 책을 만지자, 먼지가 가득한 책의 감촉이 느껴졌다.
“…….”
“성녀님? …어?”
비앙카도 책장에 놓인 책들을 짚었다.
신성력을 머금은 손이 자연스레 책을 통과했다. 이 책들이 마법의 잔재라는 사실을 신성력이 들춰낸 것이었다. 그 탓에 사일론은 깜짝 놀랐다.
신성력이 없다면 사람의 감각을 속여 책이 만져질 테고, 책을 펼쳐 내용을 살필 수 있을 것이었다. 머릿속 활자들을 조합해 만들어진 엉뚱한 내용이 가짜 책 속에 담겨 있을 테지.
비앙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환상 마법으로 쳐야 할까. 아니다, 결이 다르다.
이미 상식 따윈 아득히 뛰어넘은 마법. 과연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만큼 뛰어난 마법이었다.
비앙카는 서재 안쪽으로 들어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낡은 책상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내려다보았다. 그것 만큼은 분명한 물질이었다.
“이 책…. 이 세상 것이 아닌 힘이 개입돼 있네. 시간이 어그러져 있어.”
비앙카의 눈이 조금 뜨여, 이미 빛을 잃어 버린 하얀 눈동자가 슬며시 드러났다.
그녀는 시각 장애인이었다. 이미 육신의 눈은 기능을 상실해 앞을 볼 수 없었다.
신성력이 그녀에게 신비로운 시력을 안겨 준 것이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사일론이 의문스럽게 되묻자, 비앙카는 대답없이 낡은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2성급 빛의 힘, [정화]를 사용하자 그녀의 손바닥에서 성스러운 빛이 흘러나왔고.
빛을 내리쬔 책에서 먼지가 순식간에 소멸해 버렸다.
“시공간마저 이 책 앞에선 무의미해. 적어도 우리와 같은 시간대에서 적힌 책이 아니야. 아주 멀리서 온 것이네.”
비앙카의 시야에선, 이 책을 쓰고자 얼마 안 남은 여생을 바쳤던 한 여인의 최후가 어렴풋이 엿보였다.
비앙카는 그 여인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그 여인이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비앙카는 책을 들고 펼쳐 내용을 살펴보았다.
굳은 피로 얼룩진 페이지.
알 수 없는 그림과 함께 휘갈기듯 새겨진 글씨들.
“사일론.”
“예.”
“이 글씨, 읽을 수 있겠는가?”
비앙카는 양손으로 책 끄트머리를 잡고 사일론에게 보여 주었다.
“죄송하지만, 모르겠군요…. 고대어일까요?”
비앙카와 사일론은 책에 새겨진 글자들을 읽지 못했다.
“…이 책은 회수해야겠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이 책은 평범한 게 아니야. 헬리제 교단…, 아니, 내 쪽에서 보관하는 편이 맞겠네. 주신 만할라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데엔 거룩한 뜻이 있을 테니.”
비앙카는 담담한 얼굴로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그러니, 오늘 일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일론은 고개를 숙였다. 성녀만을 모시기로 다짐했으니, 그는 비앙카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뿐이었다.
한글로 적힌 책은 그리 성녀 비앙카 앙투라제의 품으로 넘어갔다.
[ 소중한 찬인에게. ] [ 당신이 이 책을 찾아 냈길 바랍니다. ] [ 사정이 있어 당신을 마음껏 도와드리지 못 하는 점은 양해를 구합니다. ] [ 제가 알게 된 모든 진실을 당신만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이 책에 담았습니다. ] [ 제가 얼마 못 가 이성조차 잃어 버리기 전에 당신이 모든 진실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 이 책을 읽은 뒤엔 즉시 헤겔 마탑의 마탑주를 찾아가십시오. ][ 그녀는 분명 당신 편이 되어줄 겁니다. ] [ ──────── 올림. ]* * *
“아이작 선배, 뭐 보세요?”
창밖 비구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마력 푸딩바를 우물거리던 화이트가 물었다.
“그냥, 비가 그쳤길래.”
“아, 소나기였나 보네요.”
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였다.
점점 구름이 걷혀갔다. 나는 화이트와 메를린에게 인사하고 병실을 떠나기로 했다.
“난 가 볼게. 오늘 배운 거 꼭 복습해. 내일 퇴원하자마자 검사할 거니까.”
“그, 그걸 다…?”
“못하겠어?”
“아, 아뇨! 할 수 있어요!”
화이트가 억지로 웃으며 자신 있게 소리치자, 나는 피식 웃고 병실을 나섰다.
병실 출입구를 닫기 직전, 눈가에 눈물이 핑 맺혀 버린 화이트의 얼굴이 내 눈에 비쳤다. 내가 내준 과제를 언제 다 계산하고 외울지 막막한 모양이었다.
무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카데미 병원을 나서자, 하늘에 수놓인 별무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8막을 대비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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