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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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른한 흙냄새가 났다. 습기를 머금은 냄새였다.
칙칙한 비구름이 아카데미에 두터운 장막을 드리웠다. 천둥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퍼부어졌다.
때마침 나는 병원 포치 밑으로 들어갔고.
고개를 거두고 습기 찬 안경을 닦은 뒤 출입문으로 향했다.
“어? 아이작 선배님!”
그때, 아카데미 병원을 나서고 있던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더니 말을 걸어왔다.
능글맞은 인상을 가진 청회색 머리 1학년 남학생. 아벨 카르네다스였다.
녀석은 다짜고짜 활짝 웃으면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야! 여기서 유명인을 다 뵐 줄이야! 저 기억나시죠?!”
“합동 평가 때 걔지?”
“크으, 역시 마법학부 우등생다운 기억력! 저 같은 것도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얘 뭔데 오글거리게 아부냐.
“무녀를 쓰러뜨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사학부에도 소문이 쫙 퍼졌다고요! 정말 듣고 놀랐다 이 말입니다! 마법학부 아이작, 구미호의 힘을 지닌 무녀를 전투 센스만으로 압도하다. 크으으. 다시 생각해도 지리겠습니다. 전 대체 얼마나 굉장한 사람과 붙었던 건가요?!”
“어, 그래. 고맙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심하게 호들갑스럽긴 한데, 아벨 성격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이내, 아벨은 ‘아차’하고 뭔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번뜩이더니 상체를 깍듯이 숙였다.
“이런, 깜박했네요! 존경하는 아이작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기사학부 1학년, 아벨 카르네다스라고 합니다. 누나가 아이작 선배님이랑 동기예요.”
“시엘 카르네다스?”
“맞아요! 역시 아시는구만!”
아벨은 고개를 들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쾌활한 목소리와 말투는 시엘 카르네다스와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걔는 허구한 날 베개를 안고 다니면서, 일단 살아 있으니까 산다는 듯이 살아가는 애니까.
“어디 가는 길이셨어요?”
“멘티가 입원 중이라, 병문안 왔어.”
“아아, 스노우화이트 황녀님 말씀이시군요. 저는 친구 보러 왔거든요. 하핫.”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대련 평가가 끝난 뒤 아카데미 병원을 방문하면, 대련 탓에 병원에 입원한 로앤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벨의 친구이고, 차후 그의 연인이 될 기사학부 여학생이었다.
그래서 아벨이 아카데미 병원에 왜 들렀는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사실을 몰랐어도 궁금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곧 아벨은 깜박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차, 제가 너무 붙잡아 뒀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정말 반가웠습니다 아이작 선배님!”
“괜찮아. 나도 반가웠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쁘네요! 하핫. 다음에 또 인사 드려도 됩니까?”
“얼마든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벨은 “오오!”하고 감탄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이거…. 트리스탄 같은 애들이 왜 그렇게 부하들을 끌고 다녔는지 내심 이해가 갔다.
아벨이 꽤 호들갑스럽긴 한데, 아부해주는 게 확실히 기분 좋네. 어깨가 저절로 올라간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쇼!”
“그래, 잘 들어가.”
아벨은 활짝 웃으며 나를 제치고 떠나가려 했다.
혹시 모르니, 한 마디 정도는 해주자.
“아벨.”
“옙!”
아벨이 아직 건물 포치 밑을 떠나기 전.
나는 녀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몸 조심해.”
“……?”
아벨은 내 말뜻을 잘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네에? …아, 네! 알겠습니다!”
내 말을 ‘조심히 가라’라고 이해했나 보다.
“그럼!”
아벨은 [화염 장막]을 몸 주위로 펼쳐 빗줄기를 뚫고 나아갔다.
“…….”
미소를 풀었다. 저 능글맞은 놈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한눈에 훤히 보였으니.
아벨은 내심 나와 싸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나와 싸워서 이겨보고 싶다고 안달이 났으니까. 그 호승심을 내가 어떻게 못 알아챌까.
합동 전술 평가 때 나와 겨뤘던 일이 가슴에 또렷이 새겨져 한이 되었나 보다.
‘당분간 치근대겠네.’
나야, 당연히 저렇게 속내를 숨기고 다니는 애한테 마음을 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학년 초반부터 카야에게 마족 한정으로 강해지는 능력을 속였던 건, 내 약점을 내 통제 영역 밖에 있는 타인의 손에 쥐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신중해야 했으니까.
애정을 가진 애한테도 이러고 있는데, 아벨 같은 애들에겐 오죽할까. 그냥 다가오면 적당히 선을 긋고 사회생활용 미소로 화답하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아카데미 병원으로 들어갔다.
화이트 개인 병실에 들어가자 메를린이 우선 나를 반겨주었다. 나와 그녀는 상체를 숙여 인사를 주고 받았다.
“화이트!”
“아이작 선배애!”
웃으면서 손을 흔들자 화이트는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귀여워.
침대 옆에 앉았다. 손가락으로 [서리불꽃]을 일으키며 가벼운 단련을 반복하면서, 화이트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옆에는 메를린이 서툰 칼솜씨로 깎은 과일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화이트는 과일을 한 입도 먹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그래서 과일 조각 하나를 포크로 찍어 건네자, 화이트는 책 내용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입만 내밀어 과일을 와구 베어먹었다.
다행히 무녀 미야와의 대련으로 화이트의 정신은 무너지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 패배를 딛고 나아갈 셈이었다. 내가 미야를 박살 냈다는 사실도 한몫 했지.
오히려 멘탈이 털리고 있는 쪽은 미야일 터.
자신이 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천재라고 여겨 왔을 텐데, 루체나 도로시, 앨리스 같은 애들이 아닌 나 같은 놈한테 일방적으로 당하다 패배해 버렸잖아. 마력량 차이도 큰데.
심지어 날 상대로는 구미호의 힘조차 쓰지 않으려 했으면서, 도중에 구미호 소환 술식을 잠깐이라도 계산하려고 했으니…. 자존심도 무척 상했으리라.
‘그런데 조용해.’
어째선지 미야는 묵묵부답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조용하다.
지금은 >메르헨의 마법 기사>와는 상황이 달랐다. 게임 속 이안 페어리테일은 미야를 이기긴 했지만, 며칠간 치유 마법을 받아야 했을 만큼 전신에 큰 화상을 입어야만 했다.
그 탓인지 미야는 짜증만 느꼈을 뿐 이안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그도 충분히 다쳤으니까.
하지만 나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게 미야를 쓰러뜨렸다. 그 애 성격이라면 내게 복수할 법도 한데, 반대로 지나치게 조용해서 의문이었다.
물론, 아무리 의문스럽더라도 이런 이유로 [천리안]을 써서 미야를 살피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겠지.
괴묘-체셔 만큼은 아니더라도 구미호-마에도 시선을 알아채는 데에는 도가 텄으니까.
화봉국에서 폭군처럼 군림하는 미야가 온갖 암살 공작에도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었던 연유에는 구미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러니 그녀 상대로 [천리안]을 쓰는 건 꼭 필요할 때 말고는 자제하자.
다음 시나리오 파트는 >메르헨의 마법 기사> 「8막, 홍련의 무녀」.
미야의 그림자 속에는 그림자 마족이 숨어 있다.
이미 마력의 형태로 그림자와 일체화되어 있기에 [마족 감지]는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놈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에야 비로소 [마족 감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겠지.
‘그땐 늦겠지만.’
그림자 마족에겐 ‘완전 탈취’라는 고유 스킬이 있다.
미야가 구미호의 힘까지 머금어 최고 전력의 상태가 되었을 때.
그림자 마족은 미야를 잠식해 그녀의 힘을 빼앗을 터. 거기다 어둠 마력까지 지녀서 미야보다 한층 우월한 존재가 된다.
결국, 구미호의 힘을 지닌 ‘그림자 무녀’가 8막의 최종 보스가 되는 것이었다.
“맞다. 시계는 괜찮아? 항상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잖아.”
“아, 이거요? 네, 괜찮아요. 마법 주머니에 넣어 놨었거든요.”
화이트는 품 안에 든 마법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백금색 회중시계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더는 움직이지 않는 시곗바늘이 눈에 띄었다.
“전에 떨어뜨린 후로 수납 마법을 이용하고 있어요. 기억해주고 계셨….”
화이트는 웃으면서 말을 하다, 시계를 보더니 표정이 굳었다.
“…어?”
회중시계의 문자판은 원래 우주를 담은 듯한 디자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형형한 아름다움은 사람을 절로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째서인지 은하수와 별빛이 점차 사라져 가고, 새까만 어둠이 문자판 일부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이거, 왜…?”
“왜 그래, 화이트?”
“시, 시계가…. 얼마 전만 해도 안 이랬는데…. 마법 주머니에 넣어서 그런가?”
화이트는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역시.’
이미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다.
화이트의 회중시계는 원래 2학년 2학기 파트 도중에 돌연 멈추게 된다.
그래서 왜 이 시계가 조기에 멈춰 버렸던 건지, 그 까닭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문자판에 어둠이 들이닥치고 있는 현상을 보니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3학년 1학기 파트의 최종 보스이자 악신의 대리인, ‘계약의 메피스토’가 벌써 움직이고 있다는 것.
회중시계 문자판에 어둠이 들이닥치는 건, 부유섬보다 강한 어느 마족을 묶고 있는 고삐를 서서히 풀어나가는 과정이었다.
그 마족은 세계멸망급인 9성급을 뛰어넘는 불가사의. 섭리조차 초월한 마족. ‘무저갱’.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보았던 정보를 반추해보자. 이 속도대로라면 기존 시나리오보다 훨씬 빠르게 무저갱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작 선배? 무슨 생각하세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화이트와 메를린이 의구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시계가 왜 그러나 해서. 상가에 잘 아는 명장이 있어. 시계 수리를 잘하시거든. 나중에 한 번 가 보자.”
“아, 그건…. 말씀은 고마운데, 괜찮아요. 수리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왜?”
화이트는 아련한 얼굴로 회중시계를 응시했다.
“어머니께서 주신 거라. 부서진 게 아니라면 누구 손도 거치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냐.”
화이트는 어머니로부터 암살당할 위기를 수차례 넘겨 왔다.
어머니의 살해 동기는 하나뿐. 자신보다 자기 딸이 더 예쁘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 화이트도 그 어이 없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금색 회중시계 만큼은 화이트에게 무척이나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유일한 선물이니까.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티끌 만큼이라도 남아 있다고 겨우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것이었다.
그 시계가 죽음보다 끔찍한 최후를 안겨 줄 수 있으리라곤 조금도 생각 못하고 있겠지.
배드 엔딩 「영원」. 수틀리면 회중시계가 안겨줄 최악의 엔딩이었다.
화이트의 어머니는 조금도 자기 딸을 사랑하지 않았다. 오로지 질투심만으로 자기 딸의 불행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나와 계약의 메피스토뿐일 터.
“뭐…, 쭉 멀쩡할 거라곤 생각 안 했으니까요. 뭐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빛을 잃기 마련인 거죠. 괜찮아요.”
화이트는 멋쩍은 웃음소리를 내뱉고는 회중시계를 다시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
나와 메를린은 그런 화이트를 반개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이트는 우리를 휙휙 돌아보곤 의문을 품었다.
“두 사람 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뇨, 그냥…. 화이트 황녀님 치곤 꽤 분위기 있는 말을 한 것 같아서요.”
평소의 울보 이미지와 되게 안 어울렸지.
“아, 에헤헤. 저도 아카데미에 와서 조금 성장한 걸까요.”
흐뭇하게 웃는 화이트.
메를린이 대신 대답해주었으니 나는 말을 말았다. 호응해주기 애매하네.
“화이트, 자.”
“아. 와압.”
일부러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과일 조각을 포크로 하나 찍어 그녀에게 건넸다.
화이트는 내가 준 과일을 망설임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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