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246)
〈 246화 〉 사령왕 토벌전 – 막간 (3)
* * *
─ ‘루체 엘타니아 학생이 많이 무리했습니다.’
메르헨 아카데미에 돌아오자마자 황실 기사로부터 무슨 상황이 있었는지 전달받았다.
앨리스 캐럴에겐 간략한 상황 보고를 맡겼다. 자세한 건 이따가 내가 직접 전달할 셈이었다.
우선순위는 어디까지나 내가 애정을 품은 사람이었으니. 곧바로 아카데미 병원으로 뛰어갔다.
루체는 도로시와 함께 마족 군대에 맞섰고, 악룡과의 격전에서 승리했다. 다만, 무리했다.
망망대해 같은 마력을 지닌 애가 마력 고갈 상태에 이르렀을 정도이니 오죽할까.
치료가 잘 끝나서 휴식만 취하면 된다고 한 건 천만다행이었다.
아카데미는 악룡을 쓰러뜨린 루체에게 개인 병실을 제공했다.
개인 병실 문을 덜컥 열고 들어가자, 침대 위에 앉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루체의 뒤통수가 보였다.
“루체.”
햇볕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루체의 로즈골드색 머리칼을 금빛으로 비추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의 포커페이스.
그러나 루체는 내 쪽으로 한쪽 팔을 쭉 뻗더니 검지와 중지를 펼쳐 V 표시를 했다. 승리의 사인이었다.
도로시가 주로 하는 그 손동작은, 내가 그녀한테서 영향을 받아 자주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루체에게도 전파하게 됐다.
그 손동작을 보자 안도감이 들며 웃음이 툭 새어 나왔다.
루체에게 다가갔다.
“몸은 좀 괜찮…?”
침대 옆 보호자석에 앉으려 하자, 돌연 루체는 입질을 기다린 낚시꾼처럼 내 팔을 덥석 낚아챘다.
“우왓!”
루체는 내 팔을 끌어당기며 누웠고, 경계심이 완전히 풀려 있던 나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어서 와, 아이작.”
곱상한 아가씨다운 나긋나긋한 목소리.
내밀한 음색이 귀청을 간질였다.
“…뭐 하냐?”
“한동안 못 봤잖아. 그동안 난 네 부탁대로 했어. 그럼 날 위해 보상을 주는 게 도의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보상이 나야?”
“당연하지.”
매일 온종일 내 곁에 붙어 있길 바라는 애가 한동안 날 못 봤으니 그럴 법도 했다.
자세가 불편해서 완전히 침대에 올라가 루체 옆에 누웠다. 그녀와 가까이서 눈을 마주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미미한 바람이 불어왔다. 은은한 향수 냄새와 매혹적인 살결 냄새. 루체는 내가 오기 전에 간단히 치장을 마친 모양이었다.
“몸은 어때?”
“지금은 괜찮아.”
루체는 내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아이작. 네 부탁 들어주느라 마력 고갈됐으니까 책임져줘. 이제 나 많이 챙겨줘야 해?”
“몸 괜찮다며.”
“힘이 잘 안 나.”
“…알았어. 어떻게 챙겨 주면 되는데?”
“먹여줘. 재워줘. 안아줘. 아껴줘.”
“그런 건 네 메이드한테 부탁해라….”
“아이작이 내 집사가 되자. 그럼 되겠다.”
“말이 되냐?”
“아니면 나랑 같이 수갑 차고 다닐래? 영영 떨어지지 못하게.”
고혹적인 목소리로 익살스럽게 속삭이는 루체.
반사적으로 잠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으나, 빠르게 심신을 가다듬었다.
“농담이야.”
루체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손으로 내 뒷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엄지로 내 귓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농담인 척이었다. 루체는 나와 함께 수갑을 채우고 붙어 다니는 걸 로망처럼 여기고 있었다. 단지 절제하고 있을 뿐.
“아이작, 나 말이야. 사실 여기서 좀 생각해 봤는데.”
루체는 자기에게서 벗어나지 말라는 듯 내 뒷목을 잡은 채로, 내 귀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기분 좋게 귀청을 간지럽히는 은밀한 속삭임에 몸이 절로 오싹거렸으나, 애써 신체 반응을 참아냈다.
루체는 자기 목소리가 내 약점인 줄 알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뭘?”
“나, 납치해 보지 않을래?”
이건 또 뭔 개소리야?
고개를 돌려 루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위험한 생각을 하면서 웃는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 묶어서 네 방에 가두는 거야. 그러면 매일 단둘이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으니까, 분명 즐거울 거야.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새롭고 기분 좋은 걸 찾아낼지도 몰라. 그런 예감이 들었어. 한번만, 해보지 않을래?”
마치 악마의 속삭임. 루체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사람을 현혹하는 힘이 있었다.
아무래도 루체가 바라는 불건전한 그림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작년에 나한테 구속당했을 때의 기분을 못 잊은 것 같았다.
“반대도 좋구.”
그건 더 안 되지….
도끼눈을 뜨고 루체를 노려보았다.
“재미없는 농담 그만하자. 친구끼리 할 짓이 아니잖아.”
“우리 친구 아니야.”
단호한 대답.
로즈골드색 머리카락이 한 가닥씩 뺨을 스치고 흘러내리며, 루체의 눈가에 그늘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뒷목을 스르르 어루만졌다.
생기를 잃은 아쿠아마린빛 눈동자가 내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았다. 루체는 잔잔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넌 아직도 내가 친구로 보여?”
깊은 한숨이 뒤섞인 속삭임.
너도 이제 알잖아. 그런 의미인 듯했다.
내가 이름 없는 영웅이었다고 명백히 밝혀졌으니, 루체는 마음이 까발려진 처지나 다름없었다. 사실관계 문제로 갈팡질팡할 것도, 숨길 감정도 없다는 것이었다.
싸늘한 눈빛엔 진한 애정과 날 향한 어긋난 욕망이 묻어 났다. 그 표정에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 달콤한지 살벌한지 알 수 없는 침묵이 병실에 맴돌 때.
별안간 묵직한 마력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라랑!
“……!”
시야에 담기는 별 무리.
온몸에 작용하던 중력의 흐름이 삽시간에 달라졌다.
곧바로 내 몸은 무형의 힘에 들어 올려져 침대에서 밀려나더니, 보호자 의자에 자연스레 앉혀졌다.
무슨 상황인지 대번에 짐작한 루체는 상체를 일으키곤 눈을 좁히고 창가 쪽을 노려보았다. 나도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헤이, 친구야. 그러면 안 되지!”
창가 쪽.
도로시가 두 무릎을 모으고 쪼그려 앉은 채 꼰대처럼 호통쳤다. 바깥에서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선배?”
도로시는 날 보더니 눈웃음으로 대신 인사했다.
“읏차.”
도로시는 마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병실에 들어와 루체에게 다가갔고, 검지를 위로 뻗으며 설명조로 말했다.
“네가 환자라는 사실 잊었어? 타인이랑 일정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어! 환자는 심신의 안정을 취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구?”
“…….”
“알았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없이 도로시를 노려보는 루체.
여느 때처럼 도로시가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루체의 반응 따윈 관심 없다는 듯, 도로시는 날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왔어, 회장?”
루체 앞이라 호칭은 예전과 똑같은 듯했다.
루체처럼 보고 싶었던 얼굴을 보니 기분이 들떴다.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 후로 우리는 아카데미에서 벌어졌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지만 즐거운 담화도 나누었다. 루체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지만, 내가 웃어 주니 얼마 안 가 표정이 풀어졌다.
……
메르헨 아카데미의 교장, 엘레나 우드라인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왜 마족들이 아카데미로 진군했는지,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시체를 다스리는 마족이 출현했다는 점, 그를 내가 해치웠다는 점, 마족 군대의 진군 경로가 아카데미뿐만이 아니었다는 점 등. 굳이 숨길 것도 없었기에 웬만한 건 다 설명했다.
황실 기사단 4번대 부단장, 마그리오 할펜트에게도 상황을 보고했다. 내 활약상을 밝혀 황실 기사단에 부채의식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증거는 차고 넘쳤다. 로펜하임 남작이 수도 브얀스로 압송됐으므로 조만간 재판도 열릴 것이었다.
마그리오는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한다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감금됐던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이브 로펜하임은 사건 조사가 완전히 끝나면 아카데미에 복귀할 예정이라고 했다.
로펜하임 남작가에 더는 남아 있을 수 없게 됐으니, 당장에 이브가 갈 곳이 아카데미 말곤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혈육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정이 얽혀 있었으니, 이브하고는 이야기를 나눌 게 많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하나 생겨났다.
“기습을?”
메르헨 아카데미에 위치한 교회 예배당에서 성녀 비앙카 앙투라제를 만났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교단의 호송 마차를 멈추고 인신매매 일당을 모조리 학살했다는 내용이었다.
“네. 혹시 구출했던 사람들 중 빨간 망토를 둘렀던 분을 아시는지요?”
빨간 망토. 기억난다. 미첼이라고 했지.
뜬금없이 나보고 동화 속 왕자님이라느니, 첫눈에 반했다느니. 망설임 없이 이것저것 이야기했던 소녀였다.
“예, 기억납니다.”
“그 분이 벌인 짓이라고 합니다.”
그 애가?
“그것도 손도끼로요.”
“손도끼…?”
그 체격에 손도끼로 덩치가 큰 성인 남자들을 모조리 살해할 힘이 있었을까.
아무리 상대 집단이 구속돼 있었다지만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상태창으로 보았을 땐 분명히 평범한 소녀였으니까.
부족한 힘으로 손도끼 같은 무기를 휘둘렀다간 손이 다칠 위험이 컸다. 칼을 다루는 데 서투른 범죄자들이 칼로 사람을 찔렀다가 손을 다치는 경우가 흔한 것처럼.
게다가 상대 수도 많았다. 체력도 멀쩡했을지 의문이었다.
“제 신자가 피해자이자 증인이니 거짓말은 아니에요. 직접 살해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하니까요.”
“다친 사람들은? 교단 분들이나 아이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무사해요. 전부 기술적으로 기절시켰다고 들었어요. 평범한 분은 아닌 것 같네요.”
“그럼 그 애는 지금 어디에?”
“면목 없게도, 행방은 잘….”
당연히 모르겠지.
문득 미첼이 내게 해주었던 기도가 떠올랐다.
─ ‘화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메르헨의 마법 기사>는 시대를 앞서갔다고 평가 받는 RPG 게임이었다.
내가 수 년간 그 게임을 질리지 않고 재밌게 플레이했던 이유 중 하나는 숨겨진 요소와 즐길 거리가 넘쳐 났다는 점이었다.
내가 빙의되기 전까지 그 게임의 모든 비밀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인터넷에서 추정될 정도였으니.
미첼도 그런 숨겨진 요소였던 걸까.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메인 스토리와 연관된 건 의문을 남기지 않을 필요가 있겠지만, 미첼은 스토리 밖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실적으로, 미첼의 정체를 밝히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건 현명한 판단이 아닐 듯했다.
다만, 경계는 해야 할 것이었다.
* * *
“마족이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걸 빙제가 먼저 나서서 막은 거고?”
“그렇습니다, 제랄드 님.”
아스트레앙 공작가.
훈련장에서 상의를 벗고 검을 단련하던 제랄드 아스트레앙은 아스트레앙 공작 가문의 기사에게서 빙제의 활약상을 보고 받았다.
시체 군대를 이끌었던 강력한 마족과, 그와 협력하며 흉계를 꾸몄던 로펜하임 남작. 그리고 황국을 가로질렀던 강력한 마족 병사들.
자칫하면 황국에 큰일이 벌어졌으리라. 그러나 빙제는 선견지명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했다. 역시, 대마법사 다운 능력자다. 제랄드는 감탄했다.
빙제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제랄드는 작년 아스트레앙 공작령에서 벌어졌던 마족 사건을 해결해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심했다.
그날 저녁, 제랄드는 식사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카야.”
“네, 아버지!”
제랄드, 히스토리아, 카야 아스트레앙. 셋이서 식사하는 자리.
제랄드의 부름에 카야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절도 있게 대답했다. 군기가 바짝 잡힌 모습이었다.
카야 앞에 놓인 접시에는 잘 익은 마수 고기가 놓여 있었다. 왜 저런 육질도 안 좋고 영양가도 없는 걸 조리해 달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수 고기가 먹어보고 싶다고 하였으니 일단 부탁을 들어 준 것이었다.
그런 건 차치하고.
제랄드는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빙제와 친분이 있느냐?”
“……!!”
카야가 메르헨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빙제를 지켜봤을 테니, 그에게 어떻게 빚을 갚으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였다.
물론 자기 딸이 빙제와 친분을 쌓았길 바라는 마음도 적잖이 있었다. 자식이 좋은 학연을 맺어서 싫어 할 부모는 없었으니. 제랄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카야의 얼굴에 스멀스멀 열이 올랐다.
“저, 그게, 친분이 있긴 합니다만….”
카야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고,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는 일에 무척 서툴렀다.
안 그래도 평소에 긴장하면서 대하고 마는 아버지이거늘.
그의 입에서 좋아하는 사람의 이명이 나오니 부끄러운 감정이 밀려오고 말았다. 한창 서투른 첫사랑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어머?”
분위기를 파악한 카야의 어머니, 히스토리아는 입을 가리고 감탄했다.
제랄드도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뜻밖의 반응이었기에, 오랜만에 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오호라….”
제랄드의 눈동자에 흥미가 담겼다.
카야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기 딸이 마음에 품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건, 은인에게 은혜를 갚는 것과는 별개의 중대사였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식사 테이블엔 불편한 침묵이 오갔고, 카야는 눈치를 보며 마수 고기 조각을 포크로 집어먹었다.
“메르헨 아카데미에 한번 들러야겠군.”
“케헥…!”
제랄드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카야는 고기를 잘못 삼켜 콜록콜록 헛기침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