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328)
〈 328화 〉 천의 날개 토벌전 – 막간 (2)
* * *
긴 꿈을 꾸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용사 파티를 꾸려 여행을 떠났다.
많은 마족들을 해치웠고, 끝내 마왕까지 쓰러뜨려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되었다.
오랜 시간의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오자 사람들은 나를 추앙했다. 어깨가 올라가며 썩 감동적인 기분을 만끽했다.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어서 엄마가 해준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이 먹고 싶었고, 내 영웅담을 마음껏 떠들고 싶었다.
“엄마!”하고 웃으며 방에 들어오니, 내 방은 좁다란 원룸이었다.
책상 옆엔 수 회독하여 종잇장이 닳아버린 두꺼운 책들이 태산처럼 가득 쌓여 있었고, 방 구석엔 게임기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혼자였다.
달력을 보니 사법 연수원에 입소하는 날이었다. 꿈이라는 무의식의 향연에 따라 연수원에 입소해 지독한 공부를 끝마쳤고, 로펌에서 근무하다 조촐한 변호사 사무소를 차렸다.
사무소를 찾는 많은 사람의 법적 분쟁을 해결해주다 보니, 꽃이 피고, 비가 오고, 가로수들이 칙칙한 빌딩의 숲에 녹음을 가져오고, 단풍이 지고, 다시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다시 꽃이 피었다.
용사였던 시절마저 까맣게 잊었을 무렵, 한 고객이 사무소를 찾아왔다.
검은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기괴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어서 오라는 인사말조차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그저 멀뚱히 그 여성을 바라보았다.
스텔라라며 자신을 소개한 그녀가 내게 말했다.
아직 당신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고.
이제 현실로 되돌아갈 시간이라고.
“…….”
깊이 호흡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작? 아이작!”
눈앞의 여성은 눈물을 쏟으며 한껏 울먹였다.
“괜찮아아…? 누나야…! 이브…! 드디어 깨어났어….”
이브 로펜하임이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긴 꿈을 헤맸던 여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여전히 정신이 몽롱했다.
이윽고, 점차 현실의 기억이 선명해져 갔다.
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과도한 힘마저 운용했던 탓에 그 반작용이 극심했다.
여전히 내 안을 떠도는 오즈마의 힘이 느껴진다. 아니, 이젠 내 힘이라고 해야겠지.
상태창이라는 거짓으로 점철되었던 계약서도 이젠 무의미해졌다. [심리 간파]란 기술도 굳이 명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상대방의 감정과 심리가 구체적으로 읽혔다.
아마 나는 초월자의 경지에 가장 가까이 이른 인간이 된 듯했다.
뭐랄까, 내 자신을 대 악신용 전투 병기라고 칭하는 편이 좋을까.
…낭만적이지 못한 표현이네.
“회장…!”
“애기야….”
“아이작 님!”
“아이작!”
“아이작 선배애애…, 으애앵…!”
연이어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위에 눌린 것 같은 몸을 힘껏 움직여보려 했다. 점차 전신의 세포가 기지개를 켰다.
벌떡.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좋은 아침.”
뒤늦게 지금이 밤임을 알아차렸지만, 상관없었다.
그리 나는 기절한지 한 달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
내 몸 상태는 모두 정상이었기에 곧바로 퇴원했다.
재활 운동은 필요 없었다. 고작 한 달 기절해 있었던 정도로 이 몸은 끄떡없었다.
‘풍요의 축복이라….’
>메르헨의 마법 기사> 「제12막, 천의 날개 토벌전」이 끝나고 어떻게 됐는지도 모두 전해 들었다.
게임 내용대로였다.
풍요의 축복. 악신에 의해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인류에게 어마어마한 선물을 내려준 셈이었다. 앞으로 수 년간 풍작일 테니.
‘멸망하면 다 소용없는 얘기지만.’
그리고 뷔엘이 저지르려던 만행에 비하면 수지타산이 안 맞긴 하다. 따질 수단도 없지만.
또한, 내가 못 치른 학기말 평가는 조만간 단독으로 치를 예정이라고 데이지 교수가 이야기해주었다.
내 활약을 고려하면 내 편의를 봐주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필립 교수도 무사하고.’
뷔엘의 정체가 드러났던 까닭에, 아카데미 인력은 필립 멜트런 교수의 행방을 좇아 그를 찾아냈다. 그는 집에 감금되어 있었고, 무사히 구조되었다고 한다.
게임 지식으로 다 알고 있었던 내용이 그대로 현실이 되니 안도감이 들었다.
‘지루하네.’
오랜만에 훈련장에서 마물 환영 무리와 맞붙으니 적들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둔해 보여 절로 하품이 나왔다.
겨울방학이라 사람도 없는데 훈련장을 독식했다는 만족감도 딱히 들지 않았다.
‘어쩔까….’
나비 정원 구석으로 가서 가부좌 자세로 앉아 마력 회로를 나도는 마력을 가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의 단련법으론 간에 기별도 안 가네.’
오즈마의 힘을 흡수한 까닭이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단련이 없었다면 오즈마를 이기지도 못했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는 너무 큰 성장을 이뤄버렸다.
즉, 단련법을 새로이 고칠 필요가 있었다.
‘아직 힘을 제대로 사용하긴 어렵고.’
오즈마의 힘을 완전하게 사용할 수 없었다.
일단 별빛 마력이 나와 적합하지 않았고, 그 외의 다른 힘도 내 육신과 완벽하게 호응된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당연한 건가.’
오즈마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면 난 이미 명계에 있을 때처럼 초월자의 격을 거머쥐었겠지.
그러면 신살의 권능을 지닌 악신에게 1초 컷으로 발렸겠고.
어쩔 수 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상의 위치에 도달해야만 했다.
‘상태창은….’
감각적으로 상태창의 형상을 만들어내 시야에 비치려 했다.
마치 저장된 데이터를 불러오듯 상태창을 구축하는 감각이 본능에 새겨졌다.
[ 상 태 ]이름 : 아이작
Lv :200
성별 : 남
학년 : 2
칭호 : 빙제
마력량 : 1564000 / 1564300
– 마력 회복 속도(S)
– 체력(S)
– 근력(S)
– 지력(S)
– 정신력(S)
잠재력 >>상세>>
[ 전투 능력 ]원소 계열 1 : 얼음
– 원소 화력(S)
– 원소 효율(S)
– 원소 시너지(S)
원소 계열 2 : 바위
– 원소 화력(S)
– 원소 효율(S)
– 원소 시너지(S)
“오, 된다.”
오즈마가 이미 일구어 놓은 기준에 따라 만들 수 있었다.
마력량은 허구지옥에서 내가 상상했던 최고의 경지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았다. 이게 구체적인 수치였구나.
‘게임에선 999,999가 최고 수치였으니까.’
당시 내 지식으론 그 수치가 한계였다.
어쨌든, 상태창이라는 허황된 거짓말이었던 계약서는 이제야 완벽한 상태창이 되었다.
[대 종족 전투력]도 굳이 특정한 종족을 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내가 원하는 대로 써먹을 수 있을 듯했다.그 능력은 어디까지나 오즈마가 내 적의를 알아차리고 적용하는 힘이었으니까.
‘그나저나 EX급 허들이 생각보다 훨씬 높네.’
그걸 사용하면 모든 능력치를 EX급으로 찍을 수 있을까.
‘아마 될 것 같은데…. 한번 쓰면 끝날 것 같지만.’
[신격]이 가진 효과를 비슷하게나마 운용할 수 있을 듯했다.다만, 한번 사용하면 영영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써야만 할 것 같았다.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내 심지 깊숙한 곳에 있는, 오즈마의 핵 중심에 있는 무언가였다.
그것을 언제 쓸지는 이미 확고하게 정해져 있었다.
‘악신….’
악신 상대로 그 힘을 사용할 것이다.
웃기는 표현이지만, 사멸의 타나토스에게 말했듯 나는 진정한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될 심산이었다.
먼치킨이란 각종 매체에서 세계관 최강자를 뜻하는 용어로 자리매김했다.
아직 나는 먼치킨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감이 있지만, 악신과 싸울 때는 오롯이 마족 상대로 이 세계의 진정한 최강자가 될 작정이었다.
그러니 마족 한정 먼치킨.
아카데미 최약체에서 시작해, 내가 이 여정을 마칠 때 이르게 될 종착점이었다.
‘이제 남은 건….’
계약의 메피스토와 파멸의 악신 네피드뿐.
사멸의 타나토스, 메피스토의 마족 군단, 무저갱은 이미 다 끝장났고 계약의 메피스토도 털렸다가 자취를 감춘 상황이니, >메르헨의 마법 기사> 시나리오 「제13막」부터 「제16막」까지는 모두 패스나 다름없었다.
‘메피스토는 따로 토벌해야겠지.’
따라서 시나리오로서 남은 건 오로지 >메르헨의 마법 기사> 제17막, 즉 「최종막, 악신 토벌전」뿐.
다만, 그건 3학년 2학기 파트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이 남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관건이리라.
“여기 있었네.”
“응?”
풀숲 헤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발의 남학생이 한참을 뛰어다녔는지 숨을 고르며 내게 다가왔다.
이안 페어리테일이었다.
‘이안?’
잠깐 당황해서 눈을 의심해 안경을 들치고 다시 제대로 살폈다.
이안이 맞았다.
“나 찾았어?”
내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도 돼?”
“어, 그래라….”
이안은 내 옆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심리가 읽혔다. 이안은 수심에 깊이 빠져 있었다.
‘아, 맞다.’
얘 이제 자퇴할 타이밍이었지.
>메르헨의 마법 기사> 후반부에 가면 이안은, 마족들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던 원인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퇴 수속을 밟고 아카데미를 떠나 버린다.
그야말로 아카데미물의 비극적인 주인공다운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
한창 방황하는 이안에게 마테오 조르다나와 페르난도 프로스트 교수가 찾아가고, 그들은 남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명대사를 날리며 이안을 설득한다.
그리고 이안이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게 이번 겨울방학 파트의 게임 시나리오였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 있어. 황실 기사단에게 의심받고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애써 외면해 왔던 거. 저번에 천족이 날 찾아와서 알려준 덕분에 이젠 확신이 된 거….”
“그게 뭔데?”
모르는 척 물었다.
이안은 애달픈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마족은 날 노리고 활개쳤던 것 같다. 내가 빛 속성을 타고난 인간이니까. 내가, 유일하게 천족과 인간의 혼혈이니까…. 그래서 여태 마족들이 날 죽이려고 나타났던 것 같더라.”
그건 당연한 거고.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세계에서 이안의 탄생도 예정되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확실한 건, 이 녀석은 정의감이 투철하고 타인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던질 줄 아는 영웅 기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
여태 자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위험에 처했었다는 사실은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죄책감이 되어 그를 옥죄었으리라.
“아이작, 넌 내 힘이 세상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잖아.”
아, 그랬지.
이안을 훈련시키겠다고 뒤펜도르프의 하수인을 불러 서로 대련시킬 때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자퇴 안 하고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래서 조언을 구하러 왔어.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넌 대마법사잖아.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으면 좋겠다….”
슬프게 웃는 이안.
그는 언제든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충 농담 때리고 웃으면서 잘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이안의 진지한 태도를 보니 인간적으로 그래선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세워졌다.
지면을 짚고 편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현실적’이라는 표현부터 잘못됐다. 얼마나 큰 리스크를 짊어지든, 뭐가 어찌 되든, 결국엔 다 현실이잖아.”
“그것보다, 넌 어느 정도 미래를 내다볼 수 있으니까…. 분명 합리적인 조언을 해줄 거라고 생각….”
“메르헨 아카데미 제2캠퍼스 완공된 거 알지? 내년에 시범 운영한다고 교직원이랑 학생들이 그곳으로 옮겨진다는 것도.”
“응? 어…. 그건 알지. 캠퍼스 활성화 위해서라며.”
“황국은 이 섬의 거주민들도 다 짐 정리시키고 수 개월 이내로 전부 떠나게 할 계획이야.”
“어?”
이안은 처음 듣는 소식인지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들었지? 나 포함해서 어느 정도 높은 놈들한테만 알려진 정보니까.”
정확하게는 저번에 내가 뒤펜도르프의 하수인을 통해 황제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결정된 사항이었다.
학생들에겐 특히 알려져선 안 될 정보였다. 혼란을 불러일으키거나 공포를 확산시킬 우려가 컸으니까.
이안이야 뭐, 입막음시킬 방법은 충분히 많으니 여기서 이런 비밀을 까발려도 딱히 상관없었다.
“왜, 왜 그렇게 되는데…?”
“때가 되면 알려줄게. 일단 네가 알아야 할 건, 그 계획의 목적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 그리고 너 때문에 마족들한테 습격 받았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재앙이 찾아온다는 것도. 그때가 되면 네 힘이 필요해질 거야.”
나는 이안에게 선한 미소를 건넸다.
“오히려 너 덕분에 적들이 미리 찾아와서 이득이었지. 적 세력만 약화됐으니까. 어쨌든, 그러니까 뭐…, 졸업할 때까지 잘해보자.”
주먹을 내밀자, 이안은 복잡한 감정이 깃든 눈으로 내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가 품은 감정이 하나로 뭉쳐 끝내 결의로 바뀌었다. 그는 결심이 선 얼굴로 제 주먹을 내밀어 내 주먹과 맞대었다.
“응. 고맙다, 아이작.”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이 세상에 해만 끼치는 존재가 아닌, 이 세상을 구원할 존재로서 그는 버젓이 일어서기로 했다.
……
“잘까….”
깊은 밤. 최상위권 기숙사 샤를관.
책을 보다가 졸음이 몰려왔다.
램프에 빛 가리개를 씌우자 방에 어둠이 찾아왔다. 벽난로에서 모닥불이 타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닥불의 어스름한 빛이 내 감성을, 온기가 방을 데웠다.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편히 누워 잠들려는 때였다.
쿠구구!
돌연 강력한 구속구가 발동되며 나를 침대째로 포박했다.
“…아.”
당황스럽지 않았다. 그저 예상했던 게 이제 찾아왔다는 기분.
나름 성능 좋은 구속구를 쓴 것 같았다. 가문의 수완으로 구한 건가. 웬만한 사람이라면 옴짝달싹도 못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런 건 내겐 장난감에 불과했다. 언제든 과자처럼 가뿐히 부술 수 있으리라.
스으으. 어디선가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 내게 다가오는 한 명의 여성.
달빛과 모닥불의 은은한 빛을 받는 푸른 안광이 내 쪽을 향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서서 귀신처럼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 이런 거 싫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언제 나오나, 하고 어린애 숨바꼭질해주듯 어울려줬더니만.
어이가 없어서 눈을 좁히고 말하자 그녀는 내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곱상한 머리카락이 내 뺨을 간질였다.
그녀의 단아한 미모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아이작이 잘못한 거야. 날 그렇게 걱정시킨, 네가 나빠.”
루체 엘타니아가 눈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전신의 힘을 쭉 빼 버리는 황홀한 음색이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하긴 하지만 나라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내가 명계로 떠났던 건 필요한 걸 갖추기 위해서였으니.
근데 뭐? 루체에겐 날 억압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이게 나한테 통할 거라 생각했냐?”
“아니, 전혀. 널 통제할 수단은 아무것도 없잖아.”
“그럼 어쩌게?”
별안간 루체는 옷을 벗었다.
순간 속옷이 보이나 싶어서 본능적으로 눈을 크게 뜨려 했으나, 드러난 건 얇은 잠옷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올라오더니 내 옆에 눕고선 나를 곰 인형처럼 꼭 껴안았다.
“…….”
“…….”
뭐지, 이 상황?
루체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올라가는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째 야릇한 공기가 흐르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삼켜졌다.
“…뭐 해?”
“애정 발산 중.”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많이 걱정했어.”
“그건 미안하다.”
“…….”
“…….”
“…아이작, 그거 알아?”
“뭐가?”
“우리 오늘 성인 된 거.”
“아, 그러네.”
아카데미 3학년부터는 19살, 즉 성인 나이다.
정확하게는 3학년으로 넘어가는 해로, 오늘이 바로 우리가 그 해를 맞이하는 첫날이었다.
루체는 내 뺨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문득 그녀가 내게 고백을 퍼부었던 일이 떠올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루체는 단호한 얼굴로 내 귓가에 제 입술을 갖다댔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자기 목소리가 내 약점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 고막을 유린하기 위해서인지, 루체는 제 입가에 손차양까지 가져가고는 유혹하듯 감미롭게 속삭였다.
“내 처음, 가져갈래?”
루체가 고개를 뒤로 빼자 눈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타닥대는 모닥불이 홍조를 띤 루체의 어여쁜 얼굴에 아련한 빛을 더했다. 그녀는 은은하게 웃으며, 사랑을 나누자고 아른거리는 눈빛으로 내게 종용했다.
자신은 결심이 섰으니 내게 선택권을 떠넘긴 것이었다.
“…….”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