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34)
“벨로, 돌아가 있어.”
나는 루체가 범고래 사역마, 벨로를 역소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원소 팔찌를 실험하던 중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몸이 많이 지쳐 있긴 했지만, 돌연 의식이 날아가는 건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기절한 나를, 길을 지나고 있던 루체가 우연히 발견하고 구해 준 모양이었다.
‘루체가?’
겉보기엔 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주체가 루체라는 게 문제지.
루체 정실 루트를 타지 않는 이상, 그녀는 1학기 내내 개썅마이웨이로 살면서 아웃사이더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나 같은 놈 하나 쓰러져 있는 거 보고 동요할 캐릭터가 아니란 얘기다.
그냥 ‘잠들었나 보다’하고 지나치는 게 훨씬 그녀다웠을 터다. 자기 마음에 없는 사람은 죽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는 성격이니까.
그 까닭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루체의 상태창을 열었다.
[ 루체 엘타니아 ]Lv : 115
종족 : 인간
속성 : 물, 번개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이 멀쩡해 보여서 안도하고 있습니다. ]
처음 봤을 때보다 레벨 5 오른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심리가 이상했다.
‘왜 날 걱정해?’
구해 준 건 오늘 기분에 따라서 그럴 수 있다 쳐도, 안도까지?
이럴 리 없었다. 내가 아이작으로서 루체와 엮인 일이라고 해봤자 반 배정 평가 때 올해의 남우주연상 수상할 법한 열연을 펼친 것 말고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론은….
‘설마, 들킨 건가?’
내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 ‘이름이 뭐야?’
─ ‘그릉. (그릉)’
반 배정 평가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루체는, 내가 자길 구해 준 그릉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건가?
만약 그렇다면 퍼즐조각 맞추듯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나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머리 아파?”
“어떻게 된 거야?”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네가 기절하는 모습을 봐서, 마법 써서 데려왔어.”
루체는 달빛처럼 온화한 말투에서 ‘우연히’에만 힘을 실었다.
아, 곤란해졌다. 어떻게 알았냐….
반 배정 평가 때 내가 마법 위장복을 챙겼던 이유는 루체의 눈썰미가 뛰어나서였다. 그녀는 내 정체를 알아챘다면 그 사실까지 학사 측에 낱낱이 보고했을 테니까.
다른 목적도 있었다. 바로 ‘아이작이 루체를 구했다’라는 사실 자체를 은폐하는 것이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루체의 호감을 사기 위한 조건은 반 배정 평가에서 그녀를 지켜 주거나 구해주는 것. 그리고 그리 된다면 플레이어가 신경 써야 할 게 하나 더 늘어난다.
‘루체의 호감도도 배드 엔딩 요소니까.’
루체는 마음을 한번 열면 확 열어 버리는 타입이다. 그래선지 호감도의 증가 속도가 폭주기관차 달리듯 무지막지하다. 플레이어가 별짓 안 해도 그렇다.
적당히 쌀쌀맞게 굴면서 그녀의 호감도를 조절해주지 않으면, 결국 호감도는 게이지를 뚫게 되는데.
그러면 플레이어는 ‘엑스트라 배드 엔딩 N.13’을 맞이하게 된다.
엑스트라 배드 엔딩이란, 스토리의 큰 줄기와는 상관없는 배드 엔딩을 말한다. 평범하게 길 지나가다가 뜬금없이 교통사고 당해서 죽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중 N.13 「새장」 엔딩.
주인공, 이안 페어리테일이 정신 이상 수준의 애정꾼이 되어 버린 루체에게 납치, 감금을 당하고.
그녀의 사랑이 담긴 보살핌 속에서 무력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엔딩이다.
따라서 루체의 호의는 내가 경계해야 할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여긴 네 방이야?”
“응.”
아무튼 이거 진짜 내 정체를 들켰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네….
내 몸에 있던 타박상도 다 나아 있었다. 내가 몸에 있던 상처를 신경 쓰자, 루체는 눈치껏 설명했다.
“웬만한 상처는 내가 치유했어. 나도 치유 마법은 쓸 줄 아니까. 아무래도 너무 무리해서 그런 것 같은데…. 좀 더 누워 있어. 수건 적실 테니까 나 주고.”
친절하지 마. 너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물 생성 (물 속성, ★1)」
루체가 내 다리에 떨어져 있는 수건을 주워들고 물 마법으로 적시는 동안 고민했다.
이런 변수가 생겼을 줄은 몰랐다. 대체 언제, 어떻게 들킨 거냐?
“됐다. 좀 더 누워 있어.”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배드 엔딩 변수는 젖은 수건을 옆에 놓인 바가지에 한 번 짜낸 뒤.
수건을 곱게 접고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깜짝 놀란 나는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
“자, 잠깐.”
“……?”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루체.
“날 구해 준 건 고마운데, 왜 네 방에 데려온 거야?”
“그럼 어디로 데려가?”
“아카데미 병원 있잖아. 아니면 양호실도 가깝고….”
“…생각 못 했어. 그런 데 가 본 적 없으니까.”
몸 튼튼 마력 튼튼 루체에게 병실이란 떠올리기 어려운 선택지였던 모양이다.
“어떻게 안 들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냥 여기 올 때까지 아무도 안 마주쳤어. 그건 왜?”
타이밍이 좋았을 뿐인가.
“아니다, 아무것도….”
뭐라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수건을 건네받았다. 차갑네.
내 이마에 손 대보고 느꼈는데 확실히 열이 있었다. 나는 차가운 수건을 손난로처럼 따뜻한 이마에 갖다 댔다.
“누워 있어. 따뜻한 스프 내올게.”
루체가 침대에서 내려가자, 타이밍을 재고 있던 나는 그녀를 떠보기로 했다.
“너 나 알아? 왜 이렇게 잘 챙겨줘?”
루체는 어깨를 흠칫 떨더니 그대로 멈춰 섰다.
[ 루체 엘타니아 ]심리 : [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
아, 그거 말고. 루체가 나한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궁금한데….
“…나도 잘 모르겠어.”
루체는 뺨을 붉히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미친.’
저 풋내 나는 반응. 청춘로맨스물에나 나올 법한 반응이었다.
“아이작.”
등을 돌려 나를 쳐다보기 시작한 루체. 이름까지 불러줄 줄이야…. 난 너한테 이름 가르쳐 준 적 없는데.
루체는 우물쭈물하며 무언가를 말하길 고민하고 있었다. 뺨에 홍조 띤 얼굴로.
“사실 예전부터 널 알고 있었어….”
‘큰일이다.’
그 도입부 안 돼, 멈춰…!
이 어색한 공기. 분홍빛처럼 느껴지는 기류. 맥락 없이 고백할 분위기였다.
루체는 자기 마음을 고백한 순간부터 급격하게 집착녀가 되기 시작한다. 고백했다는 사실이 당사자의 마음을 더욱 키워주는 케이스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이르잖아.
설마 이안보다 내 얼굴이 루체 취향인 건가? 그래서 호감도 쌓이는 속도가 본래 시나리오보다 빨랐던 건가?
“예전에 우연히 널 봤어. 그 후로 쭉 지켜봤어. 그리고 궁금해졌어. 왜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는지….”
내밀한 음색으로 조곤조곤 속삭이듯 이야기하는 루체.
궁금하겠지. 그릉일 때의 난 무지막지한 힘을 선보였다. 그런 놈이 루체가 보기에 별 볼일 없는 마법을 죽어라 연습하는 꼴은 모순적이니까.
“열심히 훈련하는 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잖아.”
“너처럼 맨날 코피 쏟으면서 무리하진 않아.”
‘맨날’ 봤냐.
“그래서, 널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오, 저거 뭐야?!”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운 화제 전환.
어쩔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을 준비가 안 됐으니까.
안 그래도 6막 3장 최종 보스가 벌써 등장했던 일 때문에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신경 써야 할 배드 엔딩 요소가 하나 더 늘어나는 건 지극히 사양이었다.
“아, 그건.”
루체는 내가 가리킨 사물의 명칭과 용도 등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별거 아닌 물품을 가리키면서 ‘오오, 신기해! 저건 또 뭐야?’하고 감탄사와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이건 뭐야? 고급스럽다.”
“체스판. 예전에 선물 받았어.”
“이건 뭐야? 문양 멋있다.”
“우리 가문 예식용 칼. 아카데미 올 때 짐에 들어 있길래 일단 여기 놔뒀어.”
“이건 뭐야? 예쁘다.”
“소중한 사람한테 받은 마도서야. 사람 가죽으로 만들었대.”
“이건 뭐야? 귀엽다.”
“흑마술에 쓰이는 저주 인형. 여기다 사람 머리카락을 끼워 넣고 바늘로 찌르면 그 사람에게 통증이 온다고 들었어. 아마 미신이겠지만. 시험해볼래?”
언제부턴가 루체는 나를 데리고 방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평범한 물건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오오, 여기 책 많네.”
“그건 안 돼.”
책장을 보면서 말하자, 대뜸 달빛처럼 은은했던 루체의 목소리에 날이 서렸다.
순간 살기가 느껴졌다. 나는 얼른 책장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응, 당연히 쫄아서 그랬다.
그녀가 드러내기에 부끄러운 것들이 책장 쪽에 꽂혀 있는 모양이었다. 별 특별한 건 아니고 ‘친구 사귀는 법’, ‘우정이란 무엇인가’, ‘타인의 마음을 여는 법’ 따위의 제목을 가진 책들이었다.
…진짜로 마음 열려고 작정했구나.
“근데 걸어 다녀도 괜찮아?”
“괜찮아, 덕분에.”
나는 아까부터 수건을 이마에 갖다 댄 채 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긴 하지만 티가 날 만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건…?”
또 ‘이건 뭐야’라고 반사적으로 물을 뻔했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원통형의 작은 함이었다. 책상에 놓여 있는 그것은 발광 램프의 그윽한 빛을 받아 흑진주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루체는 내 옆에 나란히 선 채 눈을 좁혔다. 그게 뭔지는 묻지 말라는 듯.
잠시 고요가 흐르고, 내가 일부러 함을 못 본 척 넘어가려던 때.
“아이작.”
빠져들 것 같은 은은한 목소리로 루체가 말을 걸어왔다.
“너는 ‘재앙의 마녀’가 다 나쁘다고 생각해?”
…왜 분위기 잡고 그런 걸 물어. 뜬금없이.
“그건 왜?”
“그냥…. 갑자기 묻고 싶어져서.”
루체는 작고 검은 원통형 함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재앙의 마녀.
천부적인 마법적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인류에게 비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최악의 마녀들을 역사에선 그리 일컫는다.
입에 담기 힘든 잔인한 행각들을 일삼았기에, 당연히 누구라도 ‘나쁘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
하지만 루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나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검은 함 안에 들어 있는 건 루체의 안구다. 어느 재앙의 마녀가 루체의 눈을 뽑아내 고이 보존한 채로 당사자에게 건네준 것이다. 그리고 루체는 매 순간 그 마녀를 떠올리고 싶어서 그 함을 책상에 놔둔 것이고.
지금의 루체 눈은 그 재앙의 마녀가 꽂아준 것. 그 잔인해 보이는 행각은 루체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그녀의 시력이 인간 수준이 아닌 연유가 그래서다.
“…아니.”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서 무심한 듯 대답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모든 스토리를 봤던 나였기에.
루체가 그리워하고 있을 재앙의 마녀, ‘천앙의 대마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과자집으로 많은 어린아이를 꼬드겨 잔인하게 살해한 재앙의 마녀라는 불의의 악명과는 다르게.
그녀는 실제로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걸 희생했던 사람이었다.
루체의 호감을 사는 건 지양해야겠지만, 그녀가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을 부정하는 일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꼭 그렇다곤 생각 안 해.”
루체는 흠칫 고개를 떨었다.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잖아. 내가 실제로 재앙의 마녀를 본 것도 아니고. 어떻게 확신하냐.”
루체는 내 대답에 크게 놀란 건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일부러 못 본 척, 다른 물건들을 구경하는 척했다.
“응, 그렇지.”
조금 울먹임이 담겨 있는 루체의 목소리에는 진한 상실감이 묻어 있었다.
천앙의 대마녀는 루체에게 친오빠와 더불어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마녀는 많은 어린아이를 신화급 마수에게 제물로 바쳤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루체 앞에서 희생 당해야만 했다.
사람이, 나라가, 천앙의 대마녀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워버렸다.
루체는 그날 무너졌다. 사람을 향한 마음을 닫아버렸다. 친부모에게 버려져도 아름답게 바라보려 노력했던 세상은, 10살의 어린 소녀에게 그리도 잔혹하게 내비쳤다.
“…….”
“…….”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너무 분위기 잡았나….
아니, 얘 코 훌쩍이는데 뭐라 반응해야 하냐? 억지로 울음 참고 있는 거 어떡해?
“앗, 갑자기 두통이….”
어쩔 수 없다. 이럴 땐 아픈 척이지. 실제로 아프긴 하지만 더 아픈 척해야겠다.
나는 휘청거리는 척하면서 무용하듯 유려하고도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넘어갔다.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몸짓이었다.
침대에 앉은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마에 대고 있던 수건을 꾹 눌렀다.
“괜찮아?”
“머리가 어지러워…. 무리했나보다.”
“좀 누워 있어. 아, 따뜻한 스프 가져올게.”
배는 안 고프지만 생각할 시간을 벌고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루체는 걱정 어린 얼굴로 나를 잠깐 동안 쳐다 보다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대뜸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밀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
“아이작.”
“응.”
“나 너랑 친구하고 싶어.”
“…응?”
뭐요?
살짝 웃음기가 담겨 있는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정면을 쳐다보았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루체의 만면에는 순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이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는 내 눈을 피하면서 뺨을 긁적이긴 했지만.
‘친구…?’
당황스러웠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루체와 친구가 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녀의 호감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성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뿐.
“나, 네가 열심히 훈련하는 모습 본 뒤로 너랑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었어.”
“어?”
생각해 보니 나 훈련하는 걸 쭉 지켜봐 왔다고 했었지? 그거 그냥 단편적으로 따지고 보면 내가 그릉이라는 걸 알아차렸다는 얘기가 아니잖아? 그릉 언급도 일절 없었고.
그렇다. 따로따로 놓고 봐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루체는 그냥 나를 우연히 발견했고, 내가 코피 펑펑 쏟아가며 단련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고, 호의를 느끼게 되었다….
어쩌다 그런 심리 변화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말뜻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되는 문제였다.
애초에 루체 책장에 ‘친구’ 관련 책들이 많이 꽂혀있는 걸 봤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따라서 그녀는.
‘내가 그릉인 줄 모르고, 그냥 나랑 친해지고 싶은 거였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배신감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 혼자 속으로 별의별 생 쇼를 다 했구나…. 부끄러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아직 방심할 수는 없겠지만, 친구 정도야 뭐.
‘괜찮겠지.’
초반에는 카야 아스트레앙 같은 애와 친하게 지내는 걸 꺼려했지만.
에이미 할로웨이나 마테오 패거리 같은 친구가 생기고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친구 관계에는 어느 정도 유한 태도를 취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야와 만나면 눈에 띈다? 눈에 안 띄는 곳에서 만나면 될 일이다. 요새는 걔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관계라면 나야 환영이었다.
나는 이마에 대고 있던 수건을 옆에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루체에게 다가갔다.
내가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두 번째로 가장 애정했던 캐릭터, 루체 엘타니아.
나는 환한 미소를 건네며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얼마든지.”
루체의 두 눈에 반짝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정전기라도 이는 것처럼 그녀의 로즈골드색 머리카락이 살짝 떠오르고.
높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붙잡으며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녀는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친구가 된다는 것. 나에게는 별거 아닌 일, 그저 친구 되자는 말에 수락하면 될 뿐인 간단한 일이지만.
루체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겠지.
하도 타인과 담을 쌓고 지내온 탓에 친구라는 개념에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 테고.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친구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친구라는 개념 자체가 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테고.
방금 그녀가 한 말에도 수많은 고민과 걱정이 담겨 있었을 터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돌아다니는 NPC들 중 루체에게 말을 걸면 항상 대화문이 ‘…….’뿐이었다. 언제나 혼자서만 다니고, 혼자서만 밥을 먹고, 혼자서만 공부했다. 그녀는 1학년 1학기를 그렇게 홀로 고독히 보낼 뿐이었다.
그녀에게도 타인과 부대끼며 웃어왔던 순간들이 있었다. 아무리 인간이란 족속에게 회의감을 느끼고 마음의 상처를 입었더라도, 그녀의 본심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는 달랐으리라.
벽난로의 타닥대는 소리가 여운처럼 길게 이어졌다. 한동안 그리 멋쩍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침묵을 깨뜨릴 수 있었다.
“근데 넌 너무 눈에 띄잖아. 그건 내가 조금 부담스럽거든. 그래서 친구라고 맨날 같이 놀아주거나 하진 못한다?”
“으, 읏….”
루체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나와 눈도 못 마주치고 있다. 이거 대답 맞나? 방금 내가 한 말 제대로 듣긴 한 건가?
뭐, 잘 들었겠지.
“아무튼 난 이제 가 봐야겠다.”
‘내가 그릉이라는 걸 루체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았으니 여기에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프면 아픈 대로 뭔가 더 단련해야지. 아예 쉴 거라고 해도 여자 기숙사에 계속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 스프 먹고 가면 좋겠는데….”
“괜찮아. 마음은 고맙다. 아, 혹시 망토 같은 거 있어?”
“망토? 있긴 있는데, 그건 왜?”
나는 루체에게서 검은 망토를 건네받고 히잡처럼 내 머리와 몸에 씌웠다.
“이든.”
쿠우우우우─.
[꾸웅!]내 옆에 연갈색 마나가 모이더니, 작은 골렘 사역마 ‘이든’의 형태가 되었다.
녀석은 귀여운 척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만세하면서 바닥에 착지했다.
“루체, 이만 가 볼게.”
“아, 응….”
나와 이든은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창가에 이르자 4층 높이의 풍경이 내 눈에 비쳤다. 무섭긴 하지만 이쪽으로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어.
“이든, 착지할 바위 좀 만들어 줘. 계단식으로.”
[알았따!]「얼음 생성 (얼음 속성, ★1)」
「바위 생성 (바위 속성, ★1)」
샤라라락─.
드드드드드─.
나는 창가에서부터 지면 쪽으로 이어지는 조잡한 얼음 사다리를 만들었고.
그 아래로 이든의 바위가 솟구쳐 주먹구구식 계단이 만들어졌다.
“루체, 내일 보자!”
나는 창가를 넘어가기 전에 루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갑자기 눈을 크게 뜨는 루체. 내가 인사하는 꼴이 조금 이상했나? 하긴, 망토를 히잡처럼 입은 모습은 이상하게 보이긴 하겠다.
이든은 곧바로 창가에서 뛰어내리고, 나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꺄악! 남자다!”
“변태! 변태가 나타났다!”
제길,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나는 이든을 역소환하고 다급히 샤를관에서 도망쳤다.
* * *
루체는 아이작이 떠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열려 있는 창문. 밤바람이 커튼을 부드럽게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내일….”
아이작이 했던 인사말이 여운처럼 남아 루체의 머릿속을 표류했다.
내일의 만남을 기약하는,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끼리 하는, 바로 그 인사말.
“꺄악─! 변태 잡아!”
“거기 서라, 스토커!!”
화르르륵─!
콰과광─!
루체는 입술을 부르르 떨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창밖 난동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을 만큼, 몸이 하늘 위를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은 짜릿한 기분을 느끼면서.
“응, 내일 보자.”
내밀한 목소리가 밤바람에 흩어졌다.
창가 너머, 아스라이 빛나는 달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밝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