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68
68화
여인을 따라가니 꽤 넓은 방이 나왔다.
그곳에는 푹신한 침대와 마실 것, 먹을 것, 여러 종류의 옷과 밧줄, 채찍 등등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가브 앞에 마주 섰다.
“저, 주인님. 원하시는 옷이 있을까요?”
“됐다.”
“아, 네. 그러면…….”
그녀는 바로 두 어깨끈을 내리고 새하얀 어깨와 쇄골을 드러냈다.
가브는 한 손을 올려 손바닥을 보이며 그녀를 멈춰 세웠다.
“아니, 앉아.”
“네? 아, 아까는 죄, 죄송했습니다! 저를 지목해 주신 것이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더 잘한다는 생각에,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
가브는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하여 금방이라도 뚝뚝 흘릴 것 같은 여인을 강제로 앉히고, 과일 바구니에서 포도 한 알을 건네주며 물었다.
“지목된 것이 기쁘더냐?”
여인은 간신히 그 포도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가, 가브의 질문에 빠르게 볼 한쪽에 밀어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제가 여기에 와서 지목된 것은 처음이거든요. 지목을 못 받으면…… 그렇게 되잖아요.”
“그렇게?”
가브가 되묻자 그녀는 말실수라도 한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틀어막았다.
가브가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이번이…… 네 번째였어요…….”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매주 열리는 경매에서 다섯 번 연속으로 선택되지 않으면 투기장에 강제 출전하게 된다.
투기장은 노예에게 무구를 주고 마물과 싸우게 하는 곳이다.
평생 검 한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노예들이 마물을 이길 리 만무하다.
이들은 투기장에 간다는 것 자체를 사형선고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끔 마물을 이기는 자가 나타나면 더욱 강한 마물과 경기를 치르게 하고, 마지막 3회전은 살아남은 자들이 연합으로 강력한 마물들과 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투기장이 마무리된다.
3회전까지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챔피언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그리고 세 번 챔피언이 되면 상금과 함께 자유를 준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래서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 중에는 아예 자신을 꾸미기를 포기하고 몸을 단련시키는 자도 있었고, 처음부터 경매장 대신 투기장을 선택하는 자도 있었다.
“자유…….”
그 자유라는 말이 몹시 의심스럽다.
가브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 여인이 극히 조심스럽게 가브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주인님, 곧 해가 뜰 텐데 괜찮으신가요?”
“되었다. 나가자.”
“예, 주인님.”
여인은 여러 개의 철문이 있는 복도까지 가브를 안내했다.
철문 안에 들어서자 밤에 문을 열어 줬던 밀짚모자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가브에게 열쇠를 건넸다.
“앞으로 이 길로 다니시면 됩니다.”
“알았다.”
가브는 그길로 바로 마차를 타고 아이드 성으로 향했다.
* * *
가브는 아이드 성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집무실로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발튼은 부르자마자 훈련 도중에 땀을 씻지도 않고 바로 달려왔고, 뒤이어 세실리아도 문을 열고 들어왔다.
끼익.
“어, 왔어?”
발튼이 어색하게 손을 올리며 인사했다.
세실리아는 도도하게 고개를 돌리며 의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친한 척하지 마, 오크.”
“우리 정도면 친한 거 아닌가…….”
발튼의 소심한 대꾸에 세실리아의 눈빛에 날이 섰다.
“한 번 더 우리라고 칭하면 죽여 버린…….”
똑똑.
그때 들려오는 노크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홱 돌려 가브를 보았다.
둘 이외에 더 들어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발튼 역시 마찬가지였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회색의 짧은 머리에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한 사내, 위케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먼저 와 있는 둘을 보고 살짝 놀란 눈을 했다.
문이 닫히자 가브가 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협회와 밤까마귀를 이용하지 않으니 우리로는 한계가 명확하여 불렀다.”
위케리스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과 오가는 분위기에 바짝 긴장했다.
가브는 그에게 가까이 가 얼굴을 마주했다.
“위케리스.”
“예, 각하.”
“옳고 그름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나를 위해 검을 들겠나?”
위케리스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각하.”
가브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머지 둘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브의 시선을 받은 세실리아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발튼은 눈만 깜빡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 반응에 세실리아가 두 손가락으로 발튼의 옆구리를 찔렀다.
“욱!”
“멍청아, 위케리스가 이 일 같이해도 괜찮냐고.”
발튼은 마치 단검에 찔린 것 같은 고통에 옆구리를 비벼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지요. 전 언제나 대장, 아니 주군의 뜻을 따릅니다.”
발튼은 홀로 정해도 되는 결정의 순간에 자신의 뜻을 묻는 가브에게 감동했다.
위케리스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더욱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둘의 동의를 받은 가브는 다시 위케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위케리스는 기사로 임명하고, 십인대는 특무대로 호칭을 바꾼다. 이제부터 그레이 별장에 관련된 모든 일은 지금 이 인원이 모두 공유한다.”
“예, 주군.”
“예! 주군!”
“예! 각하!”
가브는 그들에게 그레이 남작의 별장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공유했다.
위케리스는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얼굴이었고, 발튼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세실리아만이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하차프 자작…… 말입니까?”
“그래, 그 뱀 문양과 동일하다.”
“이제 헛다리가 아니라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지네요. 붙을까요?”
가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너밖에 맡길 사람이 없군.”
“알겠습니다. 로열 등급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보를 더 모으고, 등급을 올려야 그들의 실체를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예.”
가브는 몇 가지를 더 얘기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위케리스에게는 발튼이 자세히 전후 사정을 얘기해 주기로 했다.
위케리스와 발튼이 나가고, 세실리아가 가장 뒤늦게 나가려다가 문고리를 잡고 멈춰 섰다.
그러곤 고개만 빼꼼 내밀고 물었다.
“즐거우셨습니까?”
가브는 확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보았다.
농담은커녕 첩자를 추궁하듯이 날카로운 눈빛이다.
“내갑을 적에게 보이겠느냐?”
그 대답에 세실리아의 눈에 힘이 풀린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쉬십시오.”
또각또각또각또각.
민망했는지 발소리가 빨랐다.
* * *
발튼은 요즘 기분이 묘했다.
인질로 있는 제이니 크레스가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훈련으로 땀을 많이 흘릴 때에 맞춰서 비싼 커피에 귀한 얼음을 동동 띄워서 갖다준다.
오늘도 비슷한 시간에 제이니 크레스가 얼굴을 보이자, 멜론이 턱짓했다.
“지극정성이구나.”
“뭐가 말이오?”
“저 처자, 너한테 호감을 표하고 있지 않느냐.”
“에이, 설마요.”
이성적인 감정에 서툰 발튼은 고개를 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훈련을 받는 사병들은 그를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그사이 제이니 크레스가 허틀과 함께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발튼 경, 이거…….”
“예? 이건 뭐요?”
“저 이제 아빠한테 돌아가려는데, 가기 전에 주고 싶어서요.”
발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잘 포장된 테라의 이빨 단검이 담겨 있었다.
“응? 이걸 나한테 왜……?”
“그건, 그건…… 당연히…….”
그때였다.
한 사병이 달려와 발튼을 보며 외쳤다.
“칼슨 님의 호출입니다!”
그 말에 발튼은 코 평수를 확장시키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오, 그래? 알겠어! 그럼, 이건 고맙게 받겠소! 잘 가시오!”
발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칼슨의 작업실로 달려갔다.
제이니는 쌩 가 버린 발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나…… 까인 거지?”
그 모습에 허틀은 속이 상하여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저런 근육 돼지가 뭐가 좋다고 그러십니까? 얼른 집에나 가시죠.”
“아, 몰라! 시끄러!”
제이니는 신경질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허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아가씨는 저게 어울려.”
장인 드워프 칼슨의 호출에 기사들은 영주의 호출보다 더 빠르게 모였다.
가장 늦게 온 가브는 건조한 눈으로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큼, 크흠. 주군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가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칼슨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뭘 멀뚱히 서 있어? 각자 무기 알아서 가져가.”
칼슨은 그 말과 함께 무기를 덮어 두었던 천을 걷어 냈다.
그 아래에는 아디움을 입힌 은색 무기들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 오오…….”
“바카르…… 잘 있었어?”
“언제 이름까지 지었냐?”
바카르는 고대어로 쪼갠다는 뜻이다.
발튼은 생전 처음 갖게 된 제대로 된 무기에, 고대어 사전을 찾아 가며 이름까지 미리 지었던 것이다.
그들은 홀린 듯이 다가가 자신의 무기를 집어 들고 구경했다.
‘이름이라…….’
가브 역시 한껏 세련된 자신의 중검을 살펴보며 이름을 지어 줘야 하나 고민할 때, 칼슨이 손짓했다.
“영주, 이리 와 보쇼. 아직 남았잖소.”
가브가 다가오자 칼슨은 눈을 빛내며 벌떡 일어나 자신의 뒤에 숨겨 두었던 갑옷을 보여 주었다.
“짠! 어떻소?”
“아…….”
“와.”
“헐…….”
가브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테라의 뼈로 만드는 갑옷, 솔직히 가죽갑옷이 워낙 실용성이 좋아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도가 좋아 봤자 금속을 넘어설 수 없을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것은 그가 상상했던 뼈갑옷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은광이 돋보이는, 마치 예술품 같은 풀플레이트갑옷이었다.
“내가 여기에 혼을 갈아 넣었지. 영주 몸에 맞춰서 갈고 또 갈고…… 뼈가 상하지 않게 바른다고 아디움이 완전히 굳기 직전에 바르기를 수차례나 하고……. 이 고생을 누가 알아주나.”
가브는 말없이 다가가 갑옷을 집어 들었다.
마치 시간제한이 있는 경량 마법이 걸려 있는 것처럼 가볍게 들렸다.
아무리 봐도 금속갑옷인데 무게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칼슨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착용하자, 말없이 바라보던 세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위케리스도 고개를 저으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워우, 주군. 왕 같으시네요, 왕.”
“쉿!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오.”
“뭐 어떻습니까, 우리밖에 없는데?”
투둥, 투둥, 투둥.
가브는 조용히 주변을 걷기도 하고 팔다리를 들어 올리기도 했다.
세실리아는 그의 입꼬리가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씰룩이는 것을 보고 기분이 상당히 좋다는 것을 알아챘다.
“튼튼하겠습니까?”
가브의 물음에 칼슨이 한쪽 면에만 아디움을 바른 뼈를 던졌다.
“마음껏 실험해 보시오.”
가브가 자신의 검을 들려고 할 때, 발튼이 먼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주군! 제가 해 봐도 되겠습니까?”
발튼의 목소리가 음량 조절이 되지 않아 작업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세실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두 손가락을 폈다가 그의 기뻐하는 눈을 보고 조용히 내렸다.
“해 봐라.”
“예! 바카르야, 가자!”
발튼은 제대로 휘두르려고 도끼 하나는 등에 메고 나머지 하나를 두 손으로 잡고 높이 추켜들었다.
“하압!”
근육이 팽창하고 힘줄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인다.
발튼은 포효와도 같은 기합과 함께 강하게 내리쳤다.
쾅!
도끼에 찍힌 뼈는 저 멀리 날아갔다.
발튼이 재빨리 달려가 그것을 주워 들고 사람들에게 보였다.
도끼에 파인 자국은 선명하다.
그러나 한 치밖에 되지 않는 두께의 뼈가, 아디움을 입혔다고 부러지지 않았다.
가브는 알고 있다.
발튼이 저 정도로 내려찍으면 미스틸로 된 갑옷도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질 것이라고.
“와…… 단단하네요. 다시!”
발튼은 자신의 도끼날도 멀쩡한 것을 보고는 감탄하며 다시 휘둘렀다.
쾅! 쾅! 꽈직!
뼛조각은 이윽고 부러지고 말았다.
발튼이 최대한의 괴력으로 네 번을 내리친 성과다.
가브는 그 가공할 강도에 상당히 만족했다.
이 테라 갑옷을 뚫고 들어오는 공격은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칼슨은 뒤에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뼛조각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로 같은 갑옷은 또 못 만드니까, 뭐 만들지 정하쇼.”
가브는 자신의 갑옷부터 기사들의 무기를 천천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직 가공값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도 가공할 수 없으면 장식품에 불과하다.
가브는 이 모든 것들을 가공하는 가치를 알고 있다.
최소 전 재산의 절반 이상은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값이라……. 이건 어떻게 할 건데?”
“팔 생각입니다.”
짝.
칼슨은 손뼉을 치고는 둘로 쪼개진 뼛조각을 주워 들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이거랑, 저 뒤의 뼈들을 내 품삯으로 퉁칩세.”
“아…….”
이미 밀도가 높은 부분은 모두 빼먹은 뼈들은 그렇게 가치가 높지 않다.
많이 쳐줘도 2천 골드다. 뼛조각에 붙어 있는 아디움까지 합쳐도 본래 생각한 가격의 3할도 받지 않는 것이다.
가브는 칼슨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영광이었습니다.”
큰 이득을 본 거래는 끝이 났다.
칼슨은 뼈들로 만들고 싶은 것이 있다며 바로 성을 떠났다.
가브는 그에게 500골드를 더 지불하고 보냈다.
* * *
가브는 그레이의 별장에서 주마다 열리는 경매를 빠짐없이 참여했다.
그리고 드디어 투기장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검은 가면의 중개인은 관중석을 천천히 둘러보고 한 손을 올리며 외쳤다.
“오늘도 아레아를 찾아 주신 여러분께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아레아의 꽃! 투기장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