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19)
나의 악당들 219화
47. 악몽(1)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죽겠다며 앓는 소리를 내는 주문도 둑 사이츠에게서 피를 한 컵 받았 고, 그걸 건네받은 켈센느는 알아들 을 수 없는 주문을 외며 옥좌에 피 를 부었다.
하얀 표면이 붉은 피에 물들기도 잠시. 피는 스며들듯 혹은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끝났어요.”
“……벌써? 뭘 한 건데?”
“간단한 의식이에요. 전 주인인 사 이츠가 죽었노라고 옥좌에 속임수를 걸었죠.”
“속임수라.”
그러고 보니 사이츠도 비슷한 소리 를 했다. 암흑기사 아킬렘누르가 ‘이치를 속이는 주문’을 옥좌에 걸 었다고 했지. 비슷한 맥락인가?
팔짱을 낀 채 의식을 지켜보던 엘 렌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방금 그거, 혈마법이야?”
“……혈마법을 아는군요?”
“ 대충은.”
짧게 대답한 엘렌은 대답해 보라는 듯 넝마를 걸친 미부를 빤히 바라보 았다. 파란 눈동자에 가득 담긴 불 신에 켈센느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 을 열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요.”
“뭐가 다른데?”
“음, 혈마법과 혈조술 사이의 무언 가, 라고 할까요.”
“……그게 끝이야?” 그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녀석은 미간을 좁히며 켈센느를 노 려보았다.
난 둘을 번갈아 살피다가 눈썹을 긁적거리며 엘렌에게 물었다.
“근데, 혈마법이 뭐야?”
“……혈마법을 몰라?”
“어. 처음 들어봐. 혈조술이랑 다른 거냐?”
“아니, 넌-”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어 라 말하려던 엘렌은 슬쩍 주변을 살 펴보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흐흠. 혈조술은 피를 다루는 초능 력이고, 혈마법은 말 그대로 마법이 야. 주문을 완성하기 위한 매개로 피를 사용하는 마법.”
“피를 매개로 쓴다고?”
“전에 말한 적 있잖아. 일반마법은 세계에 변화를 구걸하는 행위라고. 기억 안 나?”
“……기억났다. 에단이랑 시렌한테 시비 걸 때 그런 말을 했었지.”
“시비 건 거 아니거든?”
엘렌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설명 을 이어갔다.
“일반마법사들은 마법을 발현하기 위해 주문과 마나로는 부족해서 뇌 물까지 준비하는데, 그 뇌물이 바로 매개야.”
에단이랑 시렌이 주문을 부릴 때마 다 룬조각이나 점토 인형 따위를 쓰 던 게 기억난다.
“그럼 혈마법은 룬조각이나 점토 인형 대신에 피를 써서 마법을 부리 는 거란 말이지?”
“맞아. 일반마법의 경우엔 주문마 다 다른 매개를 준비해야 하지만, 혈마법은 혈액만으로 모든 주문을 부릴 수 있어.”
아하.” 난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 입을 반 쯤 벌렸다.
“와, 그럼 완전 개사기네. 사실상 소서러 상위호환 아니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렌이 발끈하여 인상을 찌푸렸다.
“상위호환이라니, 그게 무슨 무식 한 소리야?”
“일반마법사처럼 온갖 주문을 다루 는데, 소서러처럼 편리하게 발동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그럼 상위호환이 지.”
“상위호환이 아니라, 다른 거지.”
녀석은 어쩐지 발끈한 표정으로 반 박했다.
“우리는 매개를 아예 안 쓴다니까? 그리고 일반마법사라도 어지간한 괴 짜가 아니고서야 외우고 다니는 주 문은 끽해야 열 개도 안 돼.”
“소서러도 재능이 부족한 경우엔 주문 두세 개 다루는 게 다라며?”
“……그런 건 누구한테 들었어?”
“네가 맨날 자랑했잖아. 궁전의 마 스터 중에서도 너처럼 주문을 열 개 이상 다루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엘렌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꾹 다 물었다.
으이구, 이 재능충. 부끄러운 건 아는구나.
입을 다물고 있던 것도 잠시, 녀석 은 헛기침을 하며 나를 흘겨보는 것 이었다.
“어쨌든, 혈마법은 베일에 싸인 비 전이라서 아일란트의 두 공작가에만 전해진다고 배웠어.”
“……아일란트의 두 공작가?”
“응. 자하카르와 발루인 가문.” 나를 향한 녀석의 시선엔 ‘넌 자하 카르면서 왜 몰라?’ 하는 물음이 스 며 있었다.
“……어.”
근데, 난 진짜 처음 듣는데. 포이 닉스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혈 마법이라는 단어는 없단 말이야.
“모르는 게 이상한 건 아니야. 혈 마법은 사실상 실전됐으니까.”
그 나지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헤 일라였다.
“실전됐다고? 왜?”
“혈마법의 종주였던 마도장로 일곱 이 한꺼번에 몰살당했거든. 그 이후 로 백오십 년간 쭉 쇠락하다가 마지 막 계승자가 몇 년 전에 죽었어.”
“몰살당해? 누구한테?”
“제오트.”
제오트?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 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엘렌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 었다.
“제오트 오브 제오레 말이야.”
“……아, 정복왕?”
제오트 오브 제오레.
제오레 왕가를 연 초대 국왕이며, ‘정복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특 급 깡패랬지.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안 헤일 라는 켈센느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 었다.
“라-팔라이스 궁전의 마법사야 그 렇다고 쳐도, 한낱 흡혈귀 따위가 혈마법에 대해 알 줄은 몰랐는걸. 게다가, 혈조술과 혈마법을 동시에 응용한 기술이라니.”
“••••••그건.”
켈센느는 파리한 얼굴로 서글픈 미 소를 지어 보•였다.
“제, 남편이 가르쳐줬어요.”
“텐비에르마가 혈마법을 익히고 있 었다는 뜻이야?”
“맞아요.”
헤일라가 눈꺼풀을 두어 차례 빠르 게 깜빡였다. 그동안의 데이터에 따 르면, 그녀는 지금 엄청나게 놀란 게 틀림없다.
“어떻게?”
“그건, 저도 잘 몰라요.”
헤일라의 눈동자가 검게 빛나자 켈 센느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텐비에르마는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온갖 비급과 마법서들을 모았 어요. 그 수집품 중에 혈마법에 관 련된 마법서가 몇 개쯤 있었다고 해 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헤일라는 마네킹처럼 서서 켈센느 를 바라보다가 툭 말을 뱉었다.
“거짓말.”
“뭐라고, 요?”
“거짓말이라고. 혈마법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건 비급이나 마법서 따 위가 아니야. 타고난 재능과 길을 열어줄 스승이 필요하지.”
“……흡혈귀의 경우엔 다른가 보 죠.”
“흡혈귀는 고유한 혈원(血原) 없이 인간에 빌붙어 피를 빠는 존재들이 야. 혈조술이라면 몰라도, 혈마법은 익힐 수 없어.”
“그래서 말했잖아요, 제가 쓴 건 혈마법과 혈조술 사이의 그 무언가 라고-”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던 켈센느는 나를 돌아보더니 벌컥 언성을 높였 다.
“지금 뭐 하는 거죠? 포이닉스 님 은 절 인간으로 만들어주기로 하셨 고, 저는 포이닉스 님을 돕기로 했 잖아요. 그런데 이런 밑도 끝도 없 는 취조라니!”
“……뭐,”
나는 가만히 눈썹을 긁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지. 너는 모르겠지만, 흡혈귀를 믿는다는 게 그리 호락호 락한 일은 아니거든.”
“하, 그러시군요? 그럼-”
“그리고.”
난 흥분한 켈센느에게 다가가 어깨 를 툭툭 두드렸다.
“소리 지르지 마. 한 번만 더 그러
면 혀를 자를 테니까.”
“뭐……, 네‘?”
“눈도 조심해. 그런 눈빛을 보면 뽑고 싶어진단 말이야.”
싱긋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눈꺼풀을 툭툭 두드렸다.
“흡혈귀들은 눈알이 터져도 재생하 지?”
“응? 아니야?”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요.”
“그럼 마음만 먹으면 이 이쁜 눈알 을 백 개고 이백 개고 모을 수 있 겠네?”
켈센느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다 못 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알 수 없는 냉기가 느껴지는 그녀 의 머리칼을 쓸어 만지며 뒤를 돌아 보았다.
“프리츠, 쇠사슬 남는 거 있냐?”
“……쇠사슬은 왜 찾으십니까?”
“쓸 데가 있어서.”
평소라면 투덜거림을 덧붙였을 프 리츠였지만, 놈은 조용히 욕을 몇 마디 지껄이는 정도로 잔말 없이 쇠 사슬을 내놓았다.
프리츠의 쇠사슬은 쇠도리깨에 달 기 위한 예비품이라서 그리 두꺼운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쇠사슬에 밧줄까지 몇 겹 보태어 켈센느를 돌 기둥에 꽁꽁 묶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마. 최소한의 보험이니까.”
“보험이요?”
“응. 너한테 뭔가 다른 속내가 있 을 수도 있으니까.”
난 매듭을 마무리하며 일행을 가리 켰다.
“만약 네가 사기를 친 거면, 내 친 구들이 그 보답을 해줄 거야.”
“절 못 믿으시는군요.”
“푸흐, 뭐라는 거야.”
난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못 믿지. 저 옥좌에 앉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넌 진즉에 죽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켈센느는 처연한 표정으로 애원하 듯 말했다.
“전, 당신과 약속을 했잖아요.”
“물론 했지. 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너도 그런지는 모르 잖아.”
“어째서죠?”
“넌 흡혈귀니까.”
켈센느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 다가 애써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풀어주세요.”
“싫어.”
“이건 신뢰의 문제에요.”
“난 네 남편을 먼지로 만든 사람이 야. 우리 사이에 무슨 신뢰가 있겠 냐?” 일그러진 얼굴을 뒤로하고 천천히 옥좌로 향했다. 슬쩍 심호흡을 하는 데 엘렌이 앞을 막아섰다.
“정말 하려고?”
“별수 있냐? 여기 계속 죽치고 앉 아 있을 수는 없잖아.”
“못 할 건 뭐야.”
녀석은 뭐가 그리 불안한지 연신 로브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 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어.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연구를 해봐 도 되잖아.”
“틀리다. 충분한 여유 없다.” 근처의 돌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우테콰이가 엘렌의 말에 반박 했다.
“우리 보급 없이 안개를 헤맸다. 식량 다 떨어져 간다.”
“그럼, 사냥을 하면 되잖아.”
“근처에 짐승 없다. 사냥 하려면 안개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건 자살행위다.”
우테콰이의 단호한 말에 피를 뽑고 골골거리던 사이츠도 한마디 보태었 다.
“그, 혹시나 해서 미리 말씀드리는 데. 옥좌가 비었으니 안개는 더 짙 어질 겁니다. 꿈의 영지도 제멋대로 날뛸 테고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주근깨 미라의 물음에 놈은 목소리 를 낮추었다.
“그건 아무도 모르지.”
“……할배는 할 줄 아는 말이 그것 밖에 없어요? 대체 아는 게 뭐야?”
미라의 타박에 사이츠가 어깨를 으 쓱였다.
“그게 사실인 걸 어쩌겠소? 오늘 밤 자기가 어떤 꿈을 꾸게 될지 아 는 사람이 있나? 당연히 없겠지? 이곳도 똑같아. 그래서 환계가 무시 무시하다는 거고. 언데드나 다름없 는 저 흡혈귀 년을 제외하곤 다들 무사하기 힘들걸?”
“그런••••••
놈이 속삭이듯 뱉은 말에 알현실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아오, 답답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짝, 손뼉을 쳤다.
“자, 그만. 망설이는 건 이만하면 됐어. 어차피 길은 하나뿐이니까.”
“포이.”
“엘렌, 너도 그만.”
“하지만, 이번엔 정말 불안해서,”
황금 양털 같은 머리칼을 헝클어뜨 린 뒤 보드라운 볼을 살짝 꼬집어주 었다.
“언제 안 그런 적 있었냐? 우리가 위험한 거 뻔히 알면서 덤벼든 게 한두 번이야?”
“……그래도.”
“걱정 마. 잘 풀릴 테니.”
녀석이 여전히 울상을 짓고 있기에 조그만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귓속말 을 해주었다.
“알레나가 그랬는데, 켈센느가 나 를 순리로 이끌 거라고 했어.”
“……아, 알레나가?”
“정확히 말하면 알레나에게 깃든 정령이 한 말인데……. 어쨌든, 그러 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알겠, 어.”
떨리는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허리를 펴는데, 어느새 앞에 선 뭉 치가 척하니 팔을 벌리고 있다.
“ 나도요.”
“……뭘‘?”
“나도 해줘요-”
보기 드물게도, 뭉치는 얼굴 가득 단호함 내지는 뻔뻔함을 담고 있었 다.
“이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피식 웃으며 팔을 벌리니 녀석은 폴짝 뛰어올라 품에 안겨왔다.
“헤헤-”
내 목젖 근처에 이마를 묻은 채 부비적대는 뭉치를 보고 엘렌이 인 상을 와락 찌푸렸다.
“……잠깐만. 너, 그건 좀-”
엘렌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우테콰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이 닉스.”
“ 응?”
“꼭 네가 앉아야 하나?”
“그럼? 스티드먼한테 앉으라고 할 까?”
별안간 지목당한 스티드먼이 ‘엑’ 소리를 내며 눈을 끔뻑거렸다.
우테콰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앉아도 된다.”
“너‘?”
“옳다. 난 경험 많은 전사이고-”
“참나. 야, 됐어.”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를 뒤로 물 렸다.
“대장 노릇 하던 새끼가 이런 상황 에서 몸 사리면 욕먹어.”
“……음, 옳은 말이다.”
“그치?”
역시 문병장님이 말한 것 중에 틀 린 게 하나도 없다니까.
“후우.”
이런저런 방해를 뿌리치고 옥좌 앞 에 섰다.
횃불과 유등의 불빛 아래로 열여섯 명의 얼굴이 보였다. 하나같이 긴장 한 기색이라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 왔다.
그리고 마침내, 옥좌에 앉은 순간.
온몸이 울리는 기이한 감각과 함께 눈앞이 흐려졌다.
♦ 氷 5k
포이닉스가 하얀 옥좌에 앉은 그 순간, 하늘과 땅이 동시에 우는 듯 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구우우웅-
“크윽-”
“젠장, 뭐야!”
용병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틀 어막은 그때, 기둥에 묶여 있던 켈 센느가 이를 악물고 양팔을 떨쳤다.
“끄으으으-”
호리호리한 여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력에 단단히 묶인 쇠사슬이 ‘까드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저, 저, 흡혈귀 년이!”
그녀의 돌발행동을 가장 먼저 발견 한 쇠뇌수 기돈이 냅다 쇠뇌를 쏘았 다. 그러나 순식간에 자유를 되찾은 켈센느는 마치 검은 고양이처럼 재 빠른 동작으로 쇠뇌살을 피해냈다.
은을 바른 쇠뇌살이 돌기둥과 부딪 치며 ‘까앙’ 소리를 내었다. 마침 옥 좌로부터 시작된 울림이 잦아들고 있었기에 그 날카로운 금속성은 알 현실에 모인 모두의 감각을 일깨웠 다.
용병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켈센느 는 증오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땅을 박찼다.
“너, 이 더러운 도둑놈!”
그녀의 시선은 주문도둑 사이츠에 게 고정되어 있었다. 켈센느는 손톱 을 손가락만 한 길이로 늘인 채 쏜 살같이 쇄도했다.
“어, 어억—”
그렇게 칼날 같은 손톱들이 사이츠 에게 박히기 직전, 또다른 검은 인 영이 맹금처럼 날아와 켈센느를 잡 아채었다.
“커흑!”
땅을 뒹구는 켈센느의 몸에는 어느 새 단검이 세 개나 박혀있었다. 무 검회의 암살자, 뭉치의 솜씨였다.
“JiAn hud—”
차가운 얼굴로 욕설을 지껄인 뭉치 가 운검을 뽑아 켈센느의 목을 저며 갔다.
“너, 포이, 속였어!”
켈센느의 양어깨엔 은도금 단검이 박혀있었고, 양팔과 가슴은 무릎과 발이 짓밟고 있었다. 그녀를 완벽히 제압한 뭉치는 왼손으로 머리칼을 틀어 쥐어 거칠게 끌어올렸다.
“끄으윽,”
“뭘 했어, 말해!”
뭉치는 갈라진 목소리와 조여든 동 공 탓에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흐, 뭘 했냐고?”
그러나 그녀를 마주한 켈센느는 턱 을 떨면서도 냉소를 지어 보였다.
“복수를 했지! 내 사랑의 복수!”
“으으으-!”
뭉치는 운검을 쥔 손을 부들거리며 옥좌를 휙 돌아보았다.
“포이, 포이}”
옥좌에 앉은 포이닉스는 몸을 떨며 흰자위를 내보이고 있었고, 엘렌은 경악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포이, 정신 차려!”
“끄으으-”
하얗던 옥좌는 어느새 검게 물들어 기이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엘 렌은 그 마력이 이차원의 것임을 단 박에 눈치채고 새파란 시선을 뒤로 돌렸다.
“켈, 센느-r
“흐으, 흐흐하하하!”
켈센느는 소름 돋는 웃음을 터뜨리 며 원독에 찬 시선으로 인간들을 돌 아보았다.
“흐, 이 멍청한 놈들! 악몽의 세계 에 갇혀, 죽는 그 순간까지 고통을 받아라!”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그녀가 저주 를 쏟아내자 대다수는 혼란스러움에 몸을 굳혔다.
헤일라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구나.”
포이닉스가 준 반지 중 하나를 녹 여내어 마력을 끌어올린 그녀는 손 위에 붉은 꽃 한 송이를 피워올린 채였다.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도 거짓말 이었어.”
“하, 나는 밤의 귀족이다! 어떻게 저급한 인간이 되길 원하겠느냐!
목이 저며져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켈센느는 비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들어라, 이 소리를!”
마치 그녀의 외침을 기다린 듯, 저 멀리서 ‘두두두두-’ 하는 소리가 들 려왔다. 그 소리가 어쩐지 익숙했기 에 용병들은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토펠린, 그 사랑스러운 아이가 온 다!”
“……토펠 린?”
빡빡이 스티드먼이 그 이름을 되뇌 더니 경악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젠장, 며칠 전에 놓쳤던 흡혈귀 년의 이름이야!”
“뭐? 그럼 설마-”
미라의 중얼거림은 중간에 끊어졌 지만, 용병들은 곧장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마주했던 그 흡혈귀 무리가 성으로 몰려들고 있 는 것이다.
“입구 막아!”
우테콰이가 혼란한 용병을 돌아보 며 고함을 질렀다.
“흡혈귀 따위, 위협 아니다! 겁먹 지 마라!”
그 외침에 정신을 차린 용병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깨진 철문을 세우 고, 알현실의 잡동사니들을 그러모 아 문을 틀어막았다.
그러는 동안 헤일라는 제압당해 바 닥에 납작 엎드린 켈센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침착하게 질문을 이 어갔다.
“그럼 포이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 고 있는 거지?”
“흐흐, 놈이 아무리 대단한 전사라 고 해봐야 한낱 인간일 뿐이다!”
은도금 단검에 찔린 탓인지 켈센느 는 울컥 피를 뿜었다. 필시 고통스 러울 텐데도 켈센느는 검게 물든 옥 좌를 올려다보며 시뻘건 미소를 지 었다.
“멍청한 놈! 제물 없이 홀로 옥좌 에 앉았으니, 그 가련한 영혼은 차 원의 흐름에 이끌려 갈가리 찢길 것 이다! 그리고 그 조각은 환계로 쓸 려가 버리겠지!”
그렇게 악을 써댄 그녀는 속이 후 련하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죽음을 코앞에 둔 광소가 섬뜩할 법 도 했건만, 헤일라는 여전히 무표정 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차원의 마력은 밀려나 고 있어.”
“하흐……. 뭐라고?”
“느껴져. 네 말대로라면 이차원의 마력이 포이를 덮쳐야 하는데, 지금 포이를 잠식하고 있는 건 안개를 구 성하고 있는 마력과 똑같아.”
그 말에 켈센느는 눈을 홉뜨며 옥 좌를 올려다보았다.
“어, 어떻게-”
옥좌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 같은 무언가가 포이닉스의 머리 위에서 원반을 그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한낱 인간의 영혼 따 위가, 꿈의 영지를, 혼자서 구축한다 고?”
그녀가 허탈하게 중얼대는 모습을 보며 헤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아는 게 없구나. 쓸모가 다 했어.”
“……뭐라고?”
“잘됐어. 더는 못 참을 것 같았거 드 ”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일라의 하얀 손 위에 핀 붉은 꽃이 회전했다. 그 회전은 조금씩 빠르고 살벌해지더 니, 켈센느의 머리를 갈아버렸다.
“끄, 끄아아아악-/”
높이 솟구치는 피분수 속에서, 헤 일라는 능숙하게 피를 분류해 냈다.
더러운 흡혈귀의 체액과 늙은 좀도 둑의 냄새나는 피를 바닥으로 흩뿌 리며 그 속에서 가장 향기롭고 진한 구슬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헤일라 는 루비처럼 붉고 투명한 구슬을 소 중하게 손에 쥐었다.
그때, 또다시 굉음이 울렸다.
구우우웅-
옥좌에서 뿜어진 검은 원반이 강력 한 흡입력을 발휘해 포이닉스를 끌 어당겼다.
“포이닉스!”
안절부절못하는 엘렌을 대신하여, 우테콰이가 몸을 날렸다.
그는 엘렌과 포이닉스의 허리를 단 단히 감싸 쥐었지만, 검은 원반에서 비롯된 흡입력은 거인이라고 한들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탄카 님!”
“포이!”
궁수 콜과 뭉치도 포이닉스에게 매 달렸다.
구구구궁!
그러자 검은 원반은 포이닉스, 엘 렌, 우테콰이, 콜, 뭉치를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이, 이런 미친-!” 용병들이 경악하는 사이, 헤일라가 재빨리 몸을 던졌다.
“으읏—”
그렇게 하얀 손가락의 끝이 검은 원반의 끝에 닿았고, 그녀 역시 이 전의 이들과 함께 씻은 듯이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알현실은 정적에 휩싸였고, 그 정 적을 깬 것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흡혈귀의 울음소리였다.
“……이런 니미.”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말총머리 프 리츠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빽 고함 을 질렀다.
“정신 차려, 이 등신들아! 우리끼 리 막아야 한다고!”
그 고함을 신호로, 남겨진 이들은 전투준비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