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25)
나의 악당들 225화
47. 악몽(7)
고즈넉한 산책로를 오르는 내내 저 멀리 보이는 궁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칸토’는 여느 왕궁들과 비교해 도 모자람이 없는 궁전이다.
아일란트 전체를 통치하는 공작은 물론이고, 자하카르와 발루인의 직
계혈족 수십 명이 머무르는 공간이 니 그 규모부터 웅장하기 짝이 없었
게다가 500년 이상의 역사를 품은 만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풍스러 운 위압감을 풍겼다.
건축 양식도 특이해서 스페인 남부 어딘가에서 본 궁전이 떠오르면서도 한편으론 고슴도치 내지는 도마뱀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스물한 살 청년인 포이닉스에겐 꼴 도 보기 싫을 만큼 지긋지긋한 풍경 이겠지만, 서른 먹은 아저씨인 김승 수에겐 새로우면서도 매혹적인 풍경 이었다…….
w……으 ”
M三
생각해 보면 묘한 일이군.
내 머릿속엔 포이닉스의 기억 역시 들어차 있었고, 저기 보이는 다칸토 궁전의 이미지도 또렷하게 남아있 다.
그런데 지금 김승수와 포이닉스가 합쳐진 무언가, 일명 김포이닉스로 서 저 궁전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억 과는 전혀 다른 감상이 퐁퐁 솟아나 는 것이었다.
헤일라를 따라서 걷고 있는 길 역 시 마찬가지였다.
높고 뾰족한 성벽의 그림자 속에서 구불거리는 뱀처럼 뻗어난 한적한 산책로.
소년 시절, 아일라를 따라 너덧 차 례쯤 거닐었던 기억이 있기에 그나 마 기억을 하는 것일 뿐 포이닉스에 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공간 이었다.
김승수, 아니, 김포이닉스에겐 달랐 다.
높은 성벽 탓에 햇빛이 하루에 두 어 시간만 비치는 곳이라 주변에 자 라난 것이라곤 낮은 풀이나 이끼 따 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음습한 응달 속에서도
꽃이 몇 송이쯤 피어있었다.
그렇게 피어난 자주색 붓꽃들을 보 고 있노라면 경외감 내지는 애틋함 따위가 느껴졌다.
뒤이어 떠오른 건, 놀랍게도 아일 라였다.
그녀는 날이 쌀쌀해질 무렵이면 슬 픈 눈으로 붓꽃들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곤 했다. 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경을 가족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던 거 겠지.
“••••••후우.” 문득 나는 포이닉스의 마음을 온전 히 이해하게 되었다.
소년은 아일라를 사랑했다.
꽃다발을 건네며 활짝, 순수한 미 소를 짓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겠지.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고, 따뜻하면 서도 아릿한 무언가를 음미할 즈음.
헤일라는 짧은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왜 그래?”
“잠시 쉬었다가 갈 거야.”
“쉬었다 간다고?”
타우즈 덴의 성벽과 다칸토 궁전으 로 이어지는 계단이 맞닿은 구석. 거기엔 검은 목재로 짠 기다란 벤치 가 하나 놓여있었다.
……여기 이런 벤치가 있었나? 포 이닉스의 기억엔 없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헤일 라는 조용히 벤치에 앉았다.
“너도 조금 쉬어.”
“음,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다고?”
“응. 난 계단에 약하거든.”
뭐라는 거야, 얘는.
경험 많은 아저씨인 김승수도, 사 촌지간인 포이닉스도 헤일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도저히 짐작 할 수가 없었다…….
슬쩍 돌아보니 궁수 콜 역시 영문 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뭐, 잠깐 쉬자. 안 그래도 좀 피 곤하던 참이었잖아.”
“알겠습니다.”
난 헤일라 옆에 엉덩이를 붙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짐작은 가?”
“ 대충은.”
“ 대충?”
“응. 네가 구축한 꿈의 영지로 들 어온 거잖아.”
설명을 요구하는 빤한 시선을 느꼈 는지, 그녀는 눈을 두어 차례 깜빡 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원래라면 이 세상은 네 꿈으로만 구성되어야 해. 하지만 꿈의 영지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 들이 휘말린 탓에 이런 엉뚱한 꿈이 구현된 거겠지.”
“……그래? 그럼 콜은 어떻게 된 거지?”
“ 콜?”
“응. 콜은 곧장 내 꿈으로 들어왔 거든.”
나와 헤일라의 시선을 받은 콜은 특유의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검은 원반에 삼켜진 직후 이상 한 방에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제 기 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이상한 방?”
“예. 처음 보는 물건들로 가득한 신비로운 방이었는데…… 콜이 나를 돌아보기에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맞아. 내 꿈이었지.”
헤일라는 고민에 빠진 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콜에게는 별로 쓸 만한 꿈이 없었 던 걸까.”
“……꿈에 쓸 만하고 쓸 만하지 않 고가 따로 있냐?”
“몰라. 그냥 추측이야.”
꿈의 영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더 나눠보았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 다. 애당초 정보가 너무 부족했던 탓이다.
“뭐, 그래도 다행이네.”
그리 말하며 푹 한숨을 쉬자 헤일 라의 까만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아무런 의미 도 없는 시선 같겠지. 그녀에게 썩 익숙해진 내가 볼 때 그 시선엔 관 심 내지는 호기심이 스며 있었다.
……참나. 궁금하면 입을 열어서 질문을 할 것이지, 그렇게 눈만 반 짝거리고 있으면 되냐?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헤일 라의 시선에 답을 해주었다.
“여기 말이야. 나쁜 꿈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나쁜 꿈?” “응, 전에 지나온 곳은…… 완전 악몽이었거든.”
어째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애써 태 연한 척 말을 이었다.
“웬 괴물들이 나오고 땅이 갈라지 고, 아주 난리였어.”
헤일라는 대답 대신 조용히 눈만 깜빡였다.
뭐야, 이 반응은.
“……왜? 뭐 걸리는 거 있어?”
«으 » 흐*
여느 때와 같은 평온한 대답에 난 잠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걸리는 게, 있다고?”
“좋은 꿈은 아니거든.”
“이 세상이?”
“응.”
“아니, 그게 무슨……. 이렇게 평화 로운데?”
어이가 없어서 새된 소리를 내자, 잠자코 앉아있던 콜이 조심스레 입 을 열었다.
“포이닉스 님의 꿈도 비슷했습니 다. 소름이 끼칠 만큼 주변이 조용 한 것 말입니다.”
“분위기가 다르잖아.”
“분위기, 말입니까? 음,”
콜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칸토 궁전은 분명 웅장하고 멋진 건축물이었지만, 주변을 둘러싼 성 곽과 병영 등은 귀신이라도 튀어나 올 것처럼 음산했다.
그래, 분위기로 따지면 여기가 더 위험해 보이긴 하는구나. 하지만 어 째 여기서는 알 수 없는 평화로움이 느껴진단 말이지.
난 눈썹을 긁적이다가 헤일라를 돌 아보았다.
“어떤 꿈인데 그래?”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 술을 떼었다.
“설명하기 어려워.”
“음, 그럼 대충이라도-”
“움직이자. 올라가 보면 알게 될 거야.”
어쩐지 내 눈을 피하는 기색이다.
벤치에서 일어난 헤일라는 앞장서 서 계단을 올랐고, 나는 흐룬팅을 뽑아 든 채 그녀를 뒤따랐다. 활에 시위를 건 콜은 가장 뒤에서 따르며 연신 뒤쪽을 살폈다.
계단이 성벽과 맞닿아 꺾이는 부분 을 지날 즈음, 조용히 걸음을 옮기 던 헤일라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도 아일라를 좋아했어.”
“……어?”
“언니고, 발루인답지 않은 사람이 었으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어렸을 땐 아일라가 하는 행동을 무작정 따라 하기도 했어.”
“어떤 거?”
“요리를 해본 적도 있고, 가구를 만들어 본 적도 있어.”
“요리는 그렇다 치고, 가구를 만들 었다고?”
“응. 저 아래에 있던 벤치도 내가 만든 거야.”
“뭐?”
얼른 포이닉스의 기억을 훑어보았 지만,
“……전혀 몰랐는데.”
“어른들이 싫어해서 몰래 만들었으 니까.”
잠시 뜸을 들인 헤일라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본 적 없을 거야. 만든 지 나 흘 만에 부서졌거든.”
“나흘 만에? 설마, 어른들이 그런 거야?”
“아니.”
“그럼?”
“병사들이 순찰 중에 잠시 앉았는 데 부서졌대.”
“어?”
“……그런 쪽으론 재주가 없어서.” 하긴. 어린애가 만든 벤치가 뭐 얼 마나 튼튼하겠어…….
잠시 침묵하고 있자니 헤일라가 말 을 덧붙였다.
“다친 사람은 없었어.”
“……다쳤어도 입 다물어야지, 뭐. 너한테 책임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아무도 안 다쳤어.”
“어, 알겠어.”
헤일라가 입을 꾹 다물자 나는 피 식 웃으며 질문했다.
“근데, 갑자기 아일라 얘긴 왜 꺼 낸 거야?”
“……요리나 가구처럼, 산책도 따 라 했어.”
“산책?”
“응.”
헤일라는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슬쩍 보니 그녀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게 내 마지막 산책이었어.”
“마지막 산책?”
계단을 올라 도착한 곳은 자그만 공터였다. 왼편 성벽 아래엔 가파른 배수로가, 정면에는 커다란 궁탑이, 오른쪽엔 다칸토 궁전으로 향하는 넓은 도로가 보였다.
“……여기서 기다려.”
헤일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배수 로 쪽으로 다가갔다.
배수로 근처엔 시든 꽃이 몇 송이 떨어져 있었다. 대부분 가장자리에 걸쳐있는 것으로 보아 배수로로 떨 어지다 턱에 걸린 모양이다.
헤일라의 느려진 걸음이 시든 붓꽃 을 짓밟았다. 메마른 꽃잎과 이파리 가 파스스,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궁탑 뒤쪽에서 웬 인 영이 튀어나왔다.
“ 엇.”
놀란 콜이 그쪽으로 화살을 겨누기 에 얼른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궁탑에서 튀어나온 인영의 얼굴이 썩 익숙했던 탓이다.
뒤늦게 인영을 다시 살핀 콜이 입 을 반쯤 벌렸다.
“……저건 설마,”
궁탑 뒤에서 튀어나온 것은 아름다 운 외모의 소년이었다. 가슴팍에 시 든 꽃과 낡은 종이 따위를 한가득 안고 있는 소년.
“……포이닉스, 님입니까?”
“맞아. 열세 살쯤인 것 같은데.”
“맙소사.”
콜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린 포이닉스는 키가 170쯤 되어 보였다. 덩치도 어지간한 청년만큼 이나 컸지만 갈색으로 그을린 얼굴 엔 솜털이 가득하여 귀엽고 앳된 인 상이었다.
이목구비 역시 여자아이로 착각할 만큼 이쁘장했는데, 마치 인형이나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린 포이닉스와 나를 번갈아 살피 는 콜의 눈빛엔 믿을 수 없다는 기 색이 가득했다.
“으음, 어떻게 이런.”
“……무슨 뜻이냐, 그거?”
“아니,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새끼야. 얼굴에 ‘왜 이렇게 역변했지?’ 하고 쓰여있구만.”
내 으르렁거림에 콜이 진땀을 빼는 동안 궁탑 뒤에서 나타난 어린 포이 닉스는 헤일라를 발견하고 우뚝 멈 춰 섰다.
헤일라, 아니, 그녀가 밟고 있던 시든 꽃을 발견한 소년의 눈이 차갑
게 가라앉았다.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헤일라 앞에 서더니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 다.
헤일라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 안쪽을 깨문 채 조심 스럽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어린 포이닉스는 한쪽 무릎을 꿇더 니 헤일라가 밟고 있던 꽃과 주변에 널브러진 꽃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 으기 시작했다. 헤일라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소년은 그가 나타났던 궁탑 방향으로 휙 돌아섰 다.
“잠, 깐만.”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에 소년이 헤일라를 돌아보았다.
“……아이고.”
헤일라의 뒤편에 서 있던 난 소년 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탄식 을 흘리고 말았다.
무표정한 얼굴 덕에 소년의 까만 눈빛은 더욱 선연히 반짝였다. 그 반짝임에 담긴 건 원망, 혐오, 분노, 경멸, 역겨움 등 온갖 부정적인 감 정들이었다…….
저 싸가지 없는 새끼.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사촌이자 약혼녀한테 할 눈빛이냐, 그게?
내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건, 소 년의 눈빛을, 감정을 마주한 헤일라 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 다. 그녀를 노려보던 소년은 이내 궁탑 뒤쪽으로 사라졌다.
어린 포이닉스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헤일라는 천천히 몸을 돌 렸다. 미세하게 비틀거린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침묵하고 있는 나와 콜에게 돌아와서 입을 열었다.
“가자.”
“……어디로?”
“궁전으로. 도로를 따라서 걸어가 다 보면 끝날 거야.”
“그게 끝이라고?”
“ O ” 흐.
어쩐지 헤일라는 전보다 조금 더 메마른 얼굴이었다. 눈빛 역시 평소 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헤일라에게 잊지 못할 악몽을 심어 준 건, 다름 아닌 포이닉스였다.
파랑손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