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67)
나의 악당들 267화
51. 진실, 이별(9)
우우웅.
꿈의 관문은 나와 엘렌을 우리가 원래 있던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리 고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우중충 한 오후. 사위는 아무런 일도 없었 다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포이.”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훔치며, 엘렌은 내 쪽으로 손을 뻗 었다. 떨리는 손이 튜닉 자락을 그 러쥐었다.
“일부러,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 엘렌.”
“정말이야. 난 겁을, 겁만 주려고 했어. 죽일 생각은 없었어.”
“그만. 그만해.”
녀석의 손을 마주 잡으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죽였든, 아니면 너 때문에 죽었든.”
파란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결국 다리아는 죽었어. 넌 그 책 임을 져야 해.”
엘렌은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가를 훔치며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몰라.”
난 작게 중얼거리며 녀석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주변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 면……. 그럼 너를, 그 끔찍한 일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야, 넌. 아니, 내가-”
내 손바닥이 볼에 닿자, 엘렌은 조 심스레 내 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애절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내가 잠깐…… 잘못 판단했어. 너 무 화가 나서, 그리고, 질투에 눈이 멀어서,”
“난 항상 그랬어.”
“……어?”
“난 언제나……
잠시 말을 고르다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 불행을 몰고 다녔어.”
“불, 행?”
“응. 아무 일 없이 행복하게 살던 사람도 나와 엮이기만 하면 나쁜 일 을 당했거든. 조카, 선임, 두 아버 지, 여자친구……. 모두 다.”
“포이, 그게 대체 무슨 말,”
“처음엔 그저 운이 없다고 생각했 어. 근데 그런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니까 어렴풋이 알겠더라. 내 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그건, 그런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야. 포이,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무어라 더듬거리는 엘렌에게, 난 한숨을 쉬며 말을 이 었다.
“우린 함께 있으면 안 돼.”
“아냐. 포이, 아니야.”
“궁전으로 가.”
“제발, 난, 용서해 줘.”
“••••••용서?”
손목을 붙잡고 매달려오는 엘렌을, 부드럽게 밀어내었다.
“아니야, 엘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뭐?”
“다리아가 죽었다는 사실이 슬프 고, 그 앨 죽인 게 너라는 사실이 못 견딜 만큼 고통스럽고, 또 화가 나지만……
목이 메어 잠시 목을 가다듬고 말 을 이었다.
“내겐 널 비난할 자격이 없어.”
언제부터였을까? 난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지 세는 걸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헤아린 게 대충 두 달 전, 200명 즈음일 때였지. 대개 살 인자나 깡패, 도적 같은 놈들이었으 나 무고한 이들도 많았다.
그래, 난 온몸에 똥칠을 한 개다. 그런 주제에 누굴 욕하겠는가.
“또, 네가 용서를 빌어야 할 대상 은 내가 아니야. 죽은 다리아지.”
엘렌은 무어라 대답도 못 하고 흐 느끼기만 했다.
알알한 듯 달콤한 향기가 흐르는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머리칼 사이에 코끝을 묻으니 은은한 라임 향기가 가슴을 채웠다.
“궁전으로 가.”
“포이.”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해. 넌 너 자신을 되찾아야 하고, 난 널 지
킬 방법을 알아내야 해.”
“난 언제나 나였고, 넌 지금도 날 충분히 잘 지켜주고 있어.”
“아니. 그렇지 않아.”
“맞아. 맞다고……
또다시 눈물이 터진 엘렌은 튜닉을 붙잡고 날 짤짤 털어대었다.
“맞으니까, *흐으* 제발. 제발 이 러지 마.”
“ 엘렌.”
“궁전도, 그까짓 궁전도, 너 없인 아무 의미도 없는데, 이렇게, 이렇게 날 버리면-”
“ 엘렌.”
녀석의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이번 엔 맨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내가, 내가 널 어떻게 버리겠어.”
“포이.”
“네게 대가를 묻는 것도, 형벌을 내리는 것도 아니야. 널 심판할 권 리 따윈 내게 없으니까. 이건 그저 필요한 조치일 뿐이야.”
“하지만, 하지만.”
“그만.”
엘렌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 는 건 힘겨운 일이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난 녀석의 이마에 재차 입술을 맞 추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이?”
“떠날 준비해.”
엘렌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시선을 애써 냉정으로 가장했다.
“우테콰이가 돌아오기 전……. 닷 새 안에 여길 떠나.”
“뭐? 어째서,”
“놈•이 이해해줄 것 같지 않거든.”
입술을 적시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질투에 눈이 멀어 다리아를 죽였다는 걸.”
엘렌은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기를 잠시, 텅 빈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포, 이.”
녀석을 껴안은 채 달래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난 끝내 방을 나 섰다.
혼자 있고 싶다. 술에 취하고 싶다.
이러한 생각들이 동시에 든 것은 평생에 몇 번 없는 일이라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론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언젠가 깊은 정을 나누었던 여인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아 이에게 죽음을 맞았단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홀로 길드홀을 나섰다.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나선 걸음이 었으나, 어차피 모도스는 어디를 가 든 거기가 거기인 조그만 성하마을 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맴돌다가 웬 술집이 눈에 띄어 그리로 들어갔 다. 기름 먹인 털망토를 두르고 후 드까지 뒤집어쓴 채였지만 날 알아 본 듯한 시선이 몇 개쯤 눈에 띈다.
뭐, 어쩔 수 없지. 얼굴이야 대충 그림자로 가린다 해도 체격까지 숨 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신경 끄고 술집 한쪽 구석에 자리 를 잡았다. 계단참 아래 벽이 꺾이 는 부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 지 않아서 썩 마음에 들었다.
“어엄, 뭐가 필요하십니까, 나리?”
젊은 중노미가 공손한 태도로 물어 오자 난 쓴웃음을 머금었다.
“……간단한 안주랑 술.”
“아, 예.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얼른 돌아서려는 그를 불러세우며 은화 한 닢을 건네었다.
“혼자 조용히 술 마시다 갈 테니 신경 쓸 일 만들지 마.”
“어우. 예, 나리. 신경 쓸 일 없으 시도록,”
“그놈의 나리 타령도 그만두고.”
“아앗, 옙.”
상회 거리 변두리 즈음에 자리 잡 은 술집은 봇짐장수나 노역꾼, 수비 대 병사 등이 오가는 허름한 장소였 다. 그래도 최근 상행이 재개된 덕 을 봤는지 음식과 술은 썩 나쁘지 않았다.
중노미에게 말한 대로, 난 닥치고 술만 마셨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간도 더럽게 튼튼해서 마음대로 취하지도 못한 다. 술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평소 엔 큰 이점이라 여겼으나 오늘은 원 망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작정하고 부어댄 덕일까? 슬슬 술기운이 오른다.
제멋대로 날뛰는 혈기가 알코올을 태워 취기를 쫓아내려 했지만, 이것 도 조금만 신경을 쓰니 나름 억눌러 진다.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왜 이런 파국을 맞이하게 된 거지?
자책이 답이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홀로 자문자답하다 보면 결 국 모든 일의 시작은 나였다. 그리 생각하니 입맛이 써서 술을 들이켰 다.
엘렌을 홀로 떠나보내는 건 맞는 판단일까? 이게 또 다른 파국의 시 작이 되는 건 아닐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답이 나오 지 않아서 술을 들이켰다.
엘렌과 난 함께였다. 내가 이 세상 에 떨어진 직후부터 쭉. 모르는 사 람이 본다면 녀석이 내게 일방적으 로 기대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나 역시 심적으로 엘렌에게 많이 의존 해온 것 같다.
그런데 엘렌 없이 여행이라니, 상 상하기 어려워 술을 들이켰다.
슬슬, 세상이 돌기 시작했다.
뭉치가 찾아왔다. 녀석은 죄송하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앞으론, 말 잘 들을게오-’ 어쩌고 하며 눈물을 그렁대었다.
또 우는구나. 내 주변에서 흘리는 눈물이 다 내게서 비롯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그런 생각에 미간을 좁히고 한숨을 내쉬니, 입술을 흐물거리며 내 눈치 를 살피던 녀석은 ‘으엥’ 하고 울음 을 터뜨리고 말았다.
난 그런 뭉치가 귀여워서 실실거리 며 달래주었다. 그러다 훌쩍거리는 녀석의 어깨에 기댄 채 계단을 지나 객실에 몸을 뉘었다.
오랜만에 뭉치를 품에 안고 잠들었 다. 전처럼 복슬복슬한 느낌은 없었 지만, 녀석은 여전히 따뜻하고 보드 라웠다. 배꼽 위 하얀 살결에 입을 대고 바람을 부니 좋다고 자지러지 는 것도 똑같았다.
스티드먼과 미라, 콜이 찾아왔다.
슬슬 걱정이 되어 왔다나. 참나, 내가 애도 아니고, 고작 이틀 술 마 신 걸로 뭘 그리 난리인지.
녀석들의 시선, 그러니까, ‘어휴, 이 형님을 어쩌나’ 하는 눈빛이 어 째 열 받아서 술을 먹였다. 그들의 고향인 서던셔와 리드번, 롱빌에서 시작되어 트로셔와 기스톨 을 지나 모도스까지 이어진 여정, 허접한 촌구석 용병들을 거둬준 것 에 대한 감사, 불만 없이 명령에 따 라준 것에 대한 고마움, 재회의 기 원 등이 안주가 되어 테이블에 올랐 다.
술 좋아하는 스티드먼은 민머리에 핏줄을 세운 채 무어라 떠들었고, 음치인 미라는 눈이 반쯤 풀려 의미 불명의 곡조를 흥얼대었다. 새침데 기인 콜마저 얼굴이 불콰해져 ‘단련 해야 하는데, 저녁 단련,’ 어쩌고 헛 소리를 지껄였다.
녀석들은 어깨동무를 한 채 무어라 꽥꽥대며 길드홀로 돌아갔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말라붙은 눈을 껌뻑였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다시 잠들기 위해 애쓰는데, 누군가 재차 문을 두드렸다.
내 게으름에 화가 난 걸까? 누군 지 모를 방문자는 노크에 힘을 더했 다. 똑똑거리던 소리가 쾅쾅에 가까 워질 즈음, 난 신음을 흘리며 침대 에서 일어났다.
벌컥 문을 여니 로브를 뒤집어쓴 조그만 인영이 앞에 서 있었다. 얼 굴을 볼 것도 없이, 은은히 풍기는 라임 향기만으로도 방문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로 문을 닫으려 했으나, 엘렌은 한발 빠르게 문설주에 어깨를 붙였 다. 밀어내자면 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물기 어린 커다란 눈망울 이 손아귀에서 힘을 앗아갔다.
녀석은 눈물을 가득 매단 채 논리 정연한 척 무어라 떠들어대었다.
준비가 되었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 다는 요상한 소리, 정 자신이 죽는 걸 바라거든 눈앞에서 죽어주겠다는 알량한 협박, 이대로 떠날 수 없다 는 악 받힌 중얼거림, 흘러내리는 로브.
물기를 머금은 파란 눈동자와 잘게 떨리는 분홍빛 입술이 이지러진 시 야를 가득 채웠다. 걸음마다 물씬 풍기는 꽃향기에 숨과 침을 함께 삼 켰다. 한 줌 허리를 당겨 안으며 문 을 걸어 잠갔다.
사흘 뒤 이른 아침. 길드홀 뒤뜰에 황금판이 설치되었다. 황금판은 온 갖 재료를 덧입어 신비한 빛을 내었 다.
스티드먼, 미라, 콜, 시모스, 사이 츠, 하그니가 긴장된 표정으로 그 앞에 섰다. 뒤늦게 나타난 엘렌은 일행을 한 차례 훑어보곤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엘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겠노라는 선언도, 보고 싶을 거라는 속삭임도, 미안하다는 속죄 도 없었다. 눈에는 여러 감정이 담 겨 있었으나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진 것은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녀석을 마주했다.
이윽고 차원문이 열렸다.
엘렌은 잠시간 날 바라보다가 희미 하게 빛나는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다른 여섯도 곧장 녀석을 따랐다.
차원문이 사라진 곳엔 빛을 잃은 황금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래. 엘렌이 떠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