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94)
나의 악당들 294화
54. 성기사(2)
헤일라와 성기사들의 대치는, 신성 한 빛을 쬔 헤일라가 나른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 다.
웃지 못할 촌극 끝에 ‘구마(驅魔) 의 빛’과 ‘진실을 밝히는 눈’, ‘믿음 의 갑옷’을 흩어낸 테오도라는 떨떠 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혈조술이라니. 혈조술은 사 혈(蕩血)이나 일삼는 잡기라 여겼는 데……
헤일라의 침묵에 테오도라가 말을 덧붙였다.
“그와 같은 경지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그대의 이름이 궁금하구나.”
헤일라가 ‘너, 왜 반말?’ 따위의 말 을 뱉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내게서 상대의 정체를 전해 들은 그 녀는 적당히 예의를 차렸다.
“헤일라라고 합니다.”
“……그게 끝인가?”
«……2M
헤일라는 눈을 깜빡이다 ‘아,’ 하고 말을 덧붙였다.
“포이닉스 경의 약혼녀입니다.”
“약혼녀?”
테오도라가 내 쪽을 흘긋 돌아보기 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공녀는 곧장 의문을 표했다.
“포이닉스 경도, 여기 여인도 장성 한 남녀가 아니오. 헌데 부부가 아 니라 약혼만 한 사이라고?”
“그게- 조금, 사소한 문제가 있어 서 말입니다.”
“문제?”
“예. 음, 집안일이라 말씀드리기가 좀.”
“아, 그렇군. 내가 괜한 걸 캐물었 소.”
그러던 테오도라는 무언가가 떠올 랐는지 작게 손뼉을 쳤다.
“그래, 그러고 보니 포이닉스 경이 거느린 무리 중에 신비한 재주를 가 진 자가 여럿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
“……신비한 재주 말입니까?”
“개중 하나는 실전된 혈마법을 다 루는 미녀라고 들었는데, 실은 경지 에 오른 혈조술사임을 이제 알겠 소.”
그녀는 ‘하긴, 원래 소문이란 쉽게 도 와전되는 법이지’ 하며 고개를 주억 거렸다.
“경과 짝패라는 ‘우레의 거인’은 저기에 있고.”
공녀의 시선이 닿은 건 막내들을 데리고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는 우 테콰이였다.
‘우레의 거인’이라.
일전에 듣기로 놈의 별명은 ‘붉은 곰’, ‘강타자’, ‘우레 삼킨 거인’ 따 위였는데, 서쪽으로는 약간 다르게 알려진 모양이다.
“‘불의 마녀’는 어디에 있소? 용모 는 요정과 같고 성미는, 음, 조금 괴팍하지만 무시무시한 실력의 전투 마법사라 들었는데.”
“아……. 녀석은 고향으로 돌아갔 습니다.”
“아, 그렇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테오도라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미테르게란트엔 원소 마법을 다루 는 자가 드물어서 식견을 넓힐 기회 라 여겼건만, 아쉽게도 이리 어긋나 고 마는군.”
잠시 아쉬워하던 공녀는 퍼뜩 고개 를 들었다. 그리고 내게 안내를 부 탁하여 성당으로 향했다.
막벽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성 당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병사 열다섯과 수도승 아홉이 죽었 으며, 세테니오라 수도원의 총책임 자인 헤카벤코 주교 역시 목숨을 잃 었다.
“그분다운 최후였습니다.”
성당기사 카바르 경은 울적한 목소 리로 말을 이었다.
“신성결계를 유지하느라 탈진하셨 음에도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셨습 니다. 마지막까지 기도를 부르짖으 셨지요……
“주교 각하께선 제 한 몸 희생하시 어 성당을 지켜냈습니다.”
늙은 주교의 시신을 지키던 중년의 수도사제, ‘오칸’이 말을 보태었다.
“저 신도들도 말입니다.”
그가 가리킨 성당 한쪽에선, 숨겨 진 계단을 통해 수도원의 주민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상에서 들려오는 온갖 끔찍한 소 리에 공포에 떨었을 주민들은 살아 남았음에 감사하며 기도를 올렸다. 거기엔 힉스와 로웬 부부도 끼어 있 었다.
“오! 나리, 아가씨-”
하인 부부는 나와 헤일라를 발견하 고 얼른 다가오려 했으나, 근처에 내려앉은 무거운 분위기를 읽곤 우 뚝 멈춰 섰다. 난 몰래 그들에게 손 짓했고, 눈치를 보던 부부는 올토니 제와 점박이를 이끌고 성당 밖으로 사라졌다.
“오칸 형제님의 말씀이 백번 옳습 니다. 주교 각하를 포함하여, 많은 분들이 희생하셨지요.” 헤카벤코 주교와 함께 신성결계를 펼쳤다는 ‘마셀’이라는 이름의 사제 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주교가 죽음을 맞이한 현재 수도원의 성직자 중 가장 직위가 높 은 자였다. 가뜩이나 고집스러운 인 상이었는데, 눈 아래가 시꺼멓게 죽 은 탓에 성직자답지 않게 표독스러 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부디 공녀님께선 오해하시 지 않길 바랍니다.”
뜬금없는 말을 들은 테오도라는 눈 썹을 까딱거렸다.
“……오해라니, 그게 무슨 말이
오‘?” “공녀님과 공녀님의 무리가 성지를 구원했다는, 그런 오해는 않으시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공녀가 슬쩍 미간을 좁히자 사제 마셀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 다.
“역시 그리 생각하고 계셨군요.”
“내 생각이 어쨌든, 그런 말을 들 으니 조금 불쾌한 건 사실이오.”
“불쾌하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 지를 지켜낸 건 전투 막바지에 나타 나 멋들어진 기마술을 뽐낸 기수들 이 아니라, 은총을 내리신 주님과 처절한 분투를 벌인 여러 성도들입 니다.”
“••••••뭐요?”
이 아저씨, 왜 급발진이야?
테오도라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확 인한 나는, 그녀가 무어라 노기를 쏟아내기 전에 선수를 쳤다.
“어, 사제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 만, 여기 공녀님과 성기사들이 아니 었다면-”
“어허, 경. 외방 분파의 일원을 성 기사라 칭하다니요. 여긴 정교(正 敎)의 전당입니다. 말씀을 삼가십시 오.”
엘 가노어 교단은 칼란다리를 자신 들의 분파로 본다. 물론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입장이 그렇단 거고, 실질 적으로 사제 대다수는 칼란다리 교 단을 이단 취급한다.
지금 사제 마셀이 테오도라에게 반 쯤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그 러한 이유 때문이다.
“명칭이야 어쨌든, 공녀님의 도움 이 없었더라면 성지는 무너졌을 겁 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경은 스스로 전 공을 낮추지 마십시오.”
“……예? 무슨 전공 말입니까?”
“저들의 수괴, 스스로 죽음의 왕이 라 칭하는 그 광오한 작자를 손수 징벌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 뭉치라 고, 제 동료가-”
“역사는 단검보다 그걸 내지른 무 사를, 병사보다 그를 지휘한 장수를 기억합니다. 경은 기사이자 지휘관 으로서 적의 수괴를 쫓아냈고, 끝없 는 망자의 군세를 막아냈습니다. 뒤 늦은 지원이 없었더라도 경은 능히 수도원을 지켜냈겠지요.”
“아뇨, 아까 상황을 못 보셔서 그 렇게 말씀하시는 모양인데,”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밝아지고, 망치질이 거셀수록 강철은 단단해지 는 법. 그처럼 경은 모진 시련 속에 서 인내와 헌신을 굳건히 하여 신앙 을 지켜냈습니다. 주의 돌보심 덕분 입니다.”
그리고 사제 마셀은 성호를 그으며 대화를 마무리해버렸다.
……미친놈인가?
멋대로 결론을 내리는 모습에 조금 멍해졌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의도 를 알 것 같았다.
광명교의 성지인 세테니오라 수도 원이 이단의 무리에게 구원받았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울카르 왕자의 기사인 나도 썩 탐 탁지는 않겠으나, 이단자들의 공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날 띄워주겠다는 심산인 모양이다. 나와 일행의 활약 이 뛰어났다는 건 사실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건 내 추측이지만, 지금 사제 마셀이 보이는 태도는 엘 가노 어 교단 전체로 번져갈 가능성이 높 았다.
내겐 좋은 일이다. 교회를 상대로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이 나쁜 일일 리가 없다.
하지만 난 모른 척 닥치는 대신 똥 씹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참, 어지간히도 옹졸하구만.”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옹졸하다고 했습니다.”
“누가 말입니까?”
“누구겠습니까?”
사제 마셀의 얼굴이 확 구겨지고, 주변에 모여있던 수도사제와 수도 승, 병사들 역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성당기사 카바르 경이 굳은 표정으 로 나섰다.
“포이닉스 경, 사제님께 그 무슨 무례한 언사란 말이오? 예의를 지키 시오.”
그가 작게 호통을 쳐왔다. 속이 뻔 히 보이는 가식적인 금칠에 빈정이 상한 나는 냉소로 답했다.
“경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 뭐요?”
“막벽의 수비 상태가 얼마나 엉망 이었는지 뻔히 아시잖습니까. 가만 히 모르는 척하고 있기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저 같으면 좀 부끄러울 것 같은데요.”
‘이 새끼 왜 이래?’ 하는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니 어째 유쾌한 기분 이 든다.
“전 막벽에 시신이나 수습하러 가 야겠습니다. 아까 보니 제 이교도 친구가 고생하고 있더라고요.”
입을 꾹 다문 카바르 경을 대신하 여, 성난 기색의 마셀이 나를 붙잡 았다.
“기다리십시오, 포이닉스 경. 아직 이야기 안 끝났습니다.”
“난 끝났습니다. 그리고, 제 자존심 챙기겠답시고 말 꼬아대는 걸 듣고 있으려니 토할 것 같아서 얼른 바람 좀 쐬어야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 분노와 수치심 에 얼굴을 붉힌 성직자들을 뒤로하 고 깔끔하게 돌아섰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테오도라 를 향해 씩 웃어준 다음, 날 기다리 고 있던 헤일라와 용병들을 데리고 성당을 빠져나갔다.
성직자들에게 꼬장을 좀 부리긴 했 지만, 딱히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내가 성지를 지키겠답시고 개고생 한 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 든. 말 몇 마디를 핑계로 불경죄 같 은 걸 덮어씌우진 못하겠지.
또한 그 자리에서 테오도라가 불만 을 표했다면 분명 종교적인 언쟁이 벌어졌을 거다. 내가 대신 지랄을 했으니 그녀는 화가 조금 식었을 테 고, 아마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 을 거다.
교회의 평판을 조금 손해 보긴 했 지만 영웅 캐릭터인 테오도라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으니 남는 장사라 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광명교의 성직자들이 성당 에 모여있는 틈을 타 다른 일도 확 인할 수 있었다.
컨휘어가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싹 다 주워왔습니 다.”
“본 사람은 없고? 성기사들은?”
“성곽 밖으로 떨어진 시신을 수습 하는 척 수레에 싣고 왔습니다. 별 로 눈여겨보진 않더군요.”
“그래, 잘했어.”
우리가 숙소로 쓰는 공동 가옥의 창고엔 온갖 진귀한 장비들이 한가 득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유니크 내지는 레어 급인 장비들로, 대충 헤아려 봐도 족히 스물은 되었다.
무기로는 철퇴인 ‘낙성’, 도끼인 ‘청뢰’, 한손검인 ‘거궐’, 한손반검인 ‘성자의 파멸’, 메이스인 ‘맘몬의 손’, 글레이브인 ‘핏빛 선봉장’, 삼지 창인 ‘황홀한 죽음’, 대낫인 ‘이른 수확’, 장궁인 ‘보레앗쿰’, 쇠뇌인 ‘망자의 십자궁’, 석궁인 ‘힘의 투석 궁’이 있었다.
방어구는 갑옷인 ‘순백’, 세트인 ‘황제의 하사품’, 방패인 ‘코린토스 의 바위’에 더해 온전한 판금갑옷도 두 벌이나 있었다.
개중 반으로 부러진 ‘거궐’이나 신 성력에 정화되어 힘을 잃은 ‘이른 수확’처럼 온전하지 않은 것도 있었 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멀쩡하거나 쓸만한 상태였다.
장신구가 하나도 없는 게 아쉽군.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해골병사 에게 착용시킬 수 있는 건 무기와 방어구 뿐이니.
“……이걸 다 어떻게 한다.”
그렇게 난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