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93)
나의 악당들 293화
54. 성기사(1)
테오도라 공녀는 스물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중간계에서 가장 유 명한 사람 중 하나다.
어느 정도냐면, 그녀의 풀네임이 ‘주위치 테오도라 구엘람흐트 폰 스 트롬’이라는 사실을 내가 기억할 정 도다.
미테르게란트의 귀족이라 그런지 이름이 꽤 긴 편인데, 대충 풀어보 자면 ‘스트롬 가문에 속한 구엘람버 스의 딸, 기름 부음을 받은 테오도 라’라는 뜻이다.
성기사 위를 받기 전까진 제오레 왕가의 피가 이어졌음을 뜻하는 수 식어가 몇 개 붙어서 이름이 더 길 었단다. 외조부인 라이오넬 3세가 이단의 성기사가 된 그녀를 호적에 서 파버린 탓에 이름이 짧아진 거라 나.
어쨌든, 미테르게란트에서 가장 강 력한 선제후의 조카이자 밀라놀 왕 의 외손녀답게, 그녀에게선 숨길 수 없는 고귀한 기품이 느껴졌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나 를 내려다보았다.
“경은 어찌 날 알아보았는가?”
테오도라의 말투는 겔란어답지 않 게 썩 부드럽고 다정했다. 난 입술 을 적시며 대답했다.
“……이처럼 밤을 낮처럼 밝힐 수 있는 분이 또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 습니다.”
테오도라와 그녀가 이끌고 온 성기 사들은 하나같이 갑주 위에 하얀 서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거기 새겨진 고리십자가와 주변 문양을 온통 붉 은 실로 수놓았는데, 붉은 색은 칼 란다리 교단을 상징하는 색깔 중 하 나였다.
“그런가?”
테오도라는 연녹색 눈동자를 반짝 이며 더 진하게 미소를 그렸다.
“하나 홍의 주교 세 분을 포함하 여, 교단엔 그 경지가 성위(聖位)에 이르는 분들이 열 분도 넘네. 그런 데 내 보잘것없는 권능만을 보고 날 알아보았다는 말인가?”
언데드 수백을 단번에 태워버리는 게 보잘것없는 권능인지는 모르겠지 만…….
“예, 물론입니다.”
난 슬쩍 미소를 지었다.
테오도라가 외삼촌인 울카르를 돕 기 위해 ‘붉은 민병대’와 성기사들 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었다는 건 세 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걸 이유로 대면 재미가 없겠지.
“그 고명한 성직자들 중 공녀님만 큼 젊고 아름다운 분은 없지 않습니 까.”
“……무어, 라? 그게-” 잠시 당황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리 던 공녀는 이내 ‘쿡쿡’ 자그맣게 웃 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흠, 변설에 능한 자로다. 외숙의 말씀 중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구 나.”
그렇게 말을 잇던 테오도라는 ‘아 니, 아니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말 을 이었다.
“내가 실수를 범했군. 외숙께 후대 를 받는 기사라 했으니 나 역시 예 를 차려야겠지.”
그녀는 창을 쥔 오른손으로 왼손에 낀 장갑을 벗겼다. 그리고 기사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곱고 가녀린 손을 앞으로 내미는 것이었 다.
“다시 인사하겠소.”
‘신성태양’의 눈부신 광휘가 사그 라들었다. ‘구원자의 펜던트’가 힘을 다한 거겠지.
어쨌든, 덕분에 막벽 위에서 비쳐 오는 아련한 불빛에 테오도라의 얼 굴이 똑똑히 보인다. 그녀는 할리우 드의 고전 흑백 영화에 등장할 법한 인상의, 말하자면, 전형적인 미녀였 다.
또 한편으론 화장기 없는 투명한 얼굴에 맑고 산뜻한 목소리를 지녀 서 순수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주의 검인 테오도라요. 명성 높은 기사인 포이닉스 경을 만나게 되어 기쁘기가 한량없소.”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순수한 분위 기를 모두 지닌 여인이 성기사에 어 울리는 위풍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데, 위화감은 전혀 들지 않는다.
상반된 외모와 분위기, 태도를 조 화롭게 만들어 주는 건 아마도 귀족 적인 기품일 터였다.
난 샛별을 칼집에 집어넣은 뒤 괜 스레 장갑을 흉갑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가가 테오도라가 내민 손을 받쳐 들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울카 르 왕자님의 일곱 번째 기사, 포이 닉스입니다.”
황금빛 인장 반지만 하나 낀 섬섬 옥수. 잡티 하나 없이 하얗다.
……그냥 손등에 입을 맞추면 되는 건가? 전에 보니 반지에 입을 맞추 는 것 같기도 하던데.
에라, 모르겠다.
잠시 망설이던 난 결국 하얀 손등 에 입술을 맞췄다. 살결의 감촉이 비단결처럼 부드럽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게 잘못 된 선택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 다.
테오도라는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홱 손을 당겼다. 눈을 크고 동그랗 게 뜬 채 어깨는 움츠렸는데, 자세 히 보니 연한 금발의 머리칼도 쭈뼛 서 있다.
“테오도라 님! 가, 감히-”
“무엄하다!”
그와 동시에, 테오도라의 뒤에 서 있던 성기사들 중 몇이 성난 고함을 지르더니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어……
내 당황한 얼굴을 본 테오도라는 놀란 백마를 달래며 손을 들어 성기 사들을 만류했다.
“그, 만! 다들 물러서게.”
“테오도라 님!”
“포이닉스 경은 일부러- *흐흠* 무례를 범한 게 아닐세. 그렇지 않 소?”
“……어,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 까?”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자, 그 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미소 를 지어 보였다.
“권위에 존경을 표할 땐 인장 반지 에 입을 맞추지. 살갗이 아니라.”
“어—”
“포이닉스 경이 기사 서임을 받은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실 수를 저지르는 것도 당연하지.”
테오도라가 날 변호하자 성기사들 은 씨근덕거리면서도 고삐를 당겼 다.
하얀 갈기를 쓰다듬어 전투마와 스 스로를 진정시킨 그녀는 가볍게 숨 을 고른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흠, 흐흠. 예법에 대해 떠들 때가 아니었군. 구호가 필요한 모양인데.”
“아, 이런. 맞습니다.”
언데드 군세는 대부분 불타 흩어지 거나 도망쳤지만, 놈들이 남긴 상흔 은 그대로였다. 난 테오도라와 성기 사들을 수도원으로 안내했다.
“뭉치야!”
“포이-! 윽,”
막 수도승들에게 치료를 받으려던 뭉치는 날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가 어깨를 감싸 쥐었다. 가죽옷과 단망토에 피가 시뻘겋게 배어났다. ‘망자의 십자궁’에 당한 부상이었다.
“앉아 있어, 왜 일어나! 아이고-”
난 얼른 다가가서 녀석의 상처를 지혈해주었다. ‘많이 아파?’ 하고 물 으니 뭉치는 물방울이 차오른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으으……
그렇게 찡찡대며 품에 얼굴을 묻어 오는 녀석의 등을 토닥거리는 한편 혈기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치료를 시작하려는데,
“한번 봐도 되겠소, 경?”
테오도라 공녀였다.
엘 가노어 교단의 성당기사는 그 명칭대로 성당 수호와 사제의 호위, 보조를 주 임무로 삼는 무관들이다. 그래서 전투기술은 일반 기사에 버 금가거나 더욱 뛰어나지만 신성력이 나 권능은 조금 모자란 경우가 많 다.
반면 칼란다리 교단의 성기사는 그 역할이 조금 다를 뿐 사실상 사제와 다를 것이 없다. 예배를 포함한 각 종 성무를 주관할 수 있는 건 물론 이고, 사제와 비슷한 수준의 신성력 과 권능을 부린다.
다만 그만큼 수가 적고, 기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대개는 전투기술 이 부족한 편이다.
테오도라와 그녀의 부하들 역시 칼 란다리 교단의 성기사답게 다들 치 유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은 막벽 여기저기로 흩어져 부 상자들을 앞에 두고 치유의 기도를 외는 중이다.
“에……
뭉치는 낯선 얼굴을 보고 경계하는 기색이다. 난 녀석을 안심시키려 머 리를 쓰다듬은 뒤 테오도라에게 고 개를 끄덕여 보였다.
“부탁드립니다, 공녀님.”
“그럼.”
다른 성기사들은 주절주절 기도문 을 읊은 뒤에야 치유의 권능이 발동 되었으나, 테오도라는 손을 내밀며 눈을 반개하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빛’을 불러내었다.
우웅.
온화한 빛이 주변을 비추었다.
그 빛은 뭉치의 관통상을 깨끗이 지워버렸을 뿐만 아니라 근처에서 끙끙대던 다른 병사들까지 치료해 주었다.
“어으••••••
“이제 아프지 않니?”
떨떠름한 표정의 뭉치에게 테오도 라가 상냥하게 물었다. 뭉치가 어리 둥절한 표정을 보이자 그녀는 곧 제 실수를 알아차리곤 겔란어 대신 밀 라놀어로 재차 질문했다.
“이제 괜찮냐고 물었어.”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빙그레 눈웃음을 지은 테오도라가 뭉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그 러니까, 쓰다듬으려고 했다.
뭉치는 슬쩍 목을 움츠려 그녀의 손길을 피하곤 ‘뭐야, 넌?’ 하는 눈 빛을 보였다. 이 녀석이.
“야, 뭐 하는 거야.”
“왜요?”
“공녀님께서 직접 치료해 주셨잖 아. 감사하다고 해야지.”
은근히 엄하게 말했음에도 뭉치는 입술을 비죽 내민 채 테오도라를 올 려다볼 뿐이었다.
“뭉치, 너-”
“하하, 되었소. 감사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그럴 것 없소.” 그녀는 그리 말하더니 다른 부상자 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뭉치를 혼내야 할까 고민했지 만, 녀석의 행색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루크를 암습하기 위해 눈밭에 한참 숨어있었던데다 전투 중에도 이리저 리 날뛰느라 고생을 한 태가 역력하 다. 차마 쓴소리를 할 수가 없는 것 이다.
내 굳은 얼굴이 저도 모르게 풀어 지자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뭉치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곤 다시금 품에 안겨 오는 것이었다.
“에휴, 그래. 고생했으니까.”
난 녀석을 마주 안아주는 한편 컨 휘어를 손짓으로 불렀다.
“예, 나리.”
“할 일이 있어.”
“할 일이라면‘?”
슬쩍 막벽을 둘러보았다.
불행히도 모도스에서부터 함께한 용병 둘이 목숨을 잃었다.
또 쇠뇌수 기돈을 포함하여 중상자 가 몇 있었지만, 테오도라와 성기사 들의 치료로 목숨은 건질 것 같았 다.
“멀쩡한 놈이 몇 없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챙길 물건이 있어.”
“챙길 물건이라면.”
저들끼리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막 내들, 골만과 카바스, 셰아가 눈에 들어온다.
난 눈썹을 긁적이다가 컨휘어에게 명령했다.
“믿을 만한 녀석 몇 명 데리고 가 서, 해골기사들이 쓰던 장비 싹 주 워와.”
“해골기사들이 쓰던 장비, 말입니 까?” “성직자들에게 눈에 띄어 봤자 좋 을 것 하나 없으니 은밀하게 움직 여. 해는 아직이니 큰 무리는 없을 꺼야.”
“알겠습니다.”
“막내들은 빼고. 셰아는 수도원 출 신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지.”
당부를 받은 컨휘어가 불탄 도넬을 포함한 몇몇을 데리고 사라지자, 난 테오도라에게 다가갔다.
“공녀님, 여긴 대충 마무리가 됐으 니 성당으로 가야겠습니다.”
“성당으로?”
“예. 거기서도 전투가 있었습니다. 믿을만한 동료를 보내두었으니 별일 은 없을 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 니-”
그때, 성기사 중 하나가 입을 쩍 벌리더니 수도원을 오르는 돌계단을 가리켰다.
“저기!”
경계심으로 가득한 고함에 성기사 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 들었다.
테오도라 역시 그쪽을 올려다보곤 놀란 얼굴로 전투마의 안장에서 철 퇴를 꺼내 들었다.
“주여, 힘을!”
영롱한 외침에 성스러운 빛이 그녀 를 감싸 안았다.
방금까지의 온화한 분위기가 거짓 말이었다는 듯 거친 기세가 느껴졌 다. 또한 그녀를 중심으로 황금 아 우라가 번지고 연녹색 눈동자가 하 얗게 물들었으며, 갑옷에 은빛 광채 가 스며들었다.
칼란다리 교단의 ‘전투태세’에 이 어 ‘구마(驅魔)의 빛’과 ‘진실을 밝 히는 눈’, ‘믿음의 갑옷’이 펼쳐진 것이다.
다른 성기사들 역시 저마다 기도를 올리며 전투준비를 갖추는 가운데, 돌계단 위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걸 어 내려왔다.
“어,”
그 인영을 본 나는 당황하여 테오 도라를 막아섰다.
“잠깐, 적이 아닙니다!”
“……저게 말이오?”
그녀가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돌계단을 저벅저벅 내려오는 인영은, 전신에 검붉은 비늘을 뒤덮 고 있었다.
거친 비늘은 손끝에 이르러 단검처 럼 날카로운 손톱을 이루었고, 머리 에 이르러선 가시관처럼 삐죽한 뿔 을 이루었다.
등 뒤로는 망토를 길게 늘어뜨렸는 데, 바닥에 닿을 때마다 땅이 검게 젖어 들어서 그 끈적한 감촉을 짐작 게 했다.
그리고, 어두운 안광에 담긴 강력 한 마력에 공기가 작게 울어댔다.
한마디로, 사악한 괴물 내지는 악 마로 오해하기에 딱 좋은 비주얼이 었다.
« O ”
테오도라는 하얗게 빛나는 눈으로 붉은 갑주의 인영을 빤히 올려다보 았다. 그녀가 말을 아끼자 성기사들 역시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망토가 내려앉고, 갑주가 허물어졌 다.
형태를 잃은 망토와 비늘은 방울지 며 저들끼리 뭉쳤고, 그대로 검붉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돌계단 위로부터 문루에 이르기까 지 붉은 융단이 펼쳐졌다.
그 위에서 밤하늘보다 까만 머리칼 과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 촉촉하 고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
흉측한 철혈갑주 대신 고급스러운 조끼와 세련된 셔츠, 윤이 나는 가 죽바지를 드러낸 헤일라를 바라보 며, 테오도라는 천천히 철퇴를 내렸 다.
“……그대는, 뭐지?”
질문을 받은 헤일라는 눈을 깜빡이 며 대답했다.
“당신은 뭔데?”
혼란스러운 눈빛의 테오도라와 여 상스러운 얼굴의 헤일라를 바라보 며, 난 머리가 지끈거려서 푹 한숨 을 내쉬었다.